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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수업의 구렁

요즘 독어 회화 학원을 다니고 있다. 이미 다닌 지는 꽤나 오래되었지만 회화 수업은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수업 적응에 엄청난 애를 먹고 있다. 일단 나이가 나이인지라 젊은 녀석들의 발랄한 재기를 따라갈 수가 없다.

 

일반 독해 수업이나 듣기 수업 같은 경우 그냥 앉아서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혼자 공부하고 적고 쓰고 하면 되지만 회화 수업의 경우 함께 대화하고 듣고 질문하고 발표하는 것이 주가 되는 만큼 수업의 분위기가 정말로 중요하다.

 

구체적으로는 외국어로 자기 소개를 하고, 자신의 가족을 소개하고 나의 취미가 무엇인지 등등을 발표하는 식의 수업이 이어지는데 선생님은 이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이 질문을 하도록 유도하여 자연스러운 외국어 대화 실력을 늘리려고 노력한다.

 

다 좋긴 한데, 나 자신에 대해서 설명하고 나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 생각 외로 엄청나게 힘든 일이었다. 예를 들어 언젠가 독어로 여러가지 색깔들의 이름을 배운 이후, 선생님이 서로 좋아하는 색깔에 대해 이야기해보자고 하였다. 그 순간 내가 좋아하는 색깔이 무엇인지 나는 당최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30대의 아저씨가 19살 먹은 소녀도 아니고 '내가 좋아하는 색은 무슨 색', '그 이유는 이러저러 하니깐 ㅋㅋㅋ' 라는 메뉴얼을 머리 속에 두고 다닐리가 없지 않은가? 대충 맘에 들면 되는 게 색깔이라고 생각해온 30년이었기에 대화할 때 매우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이런 식의 곤란한 경우는 매우 많이 부딪치게 된다. 지난 주 토요일에 무엇을 하였는지 물어본다. 당연히 집에서 뒹굴대며 인터넷하고 찌질하게 집에 처박혀 있었다. 근데 다른 젊은 것들은 영화를 보았다, 친구를 만났다, 여행을 갔다왔다, 연극을 보았네, 어쩌네 이벤트도 참 많았다. 그렇게 얘기하는 가운데 내가 그냥 집에 있었다라고 말한다면 이 숙연한 수업 분위기 누가 책임질 것인가?

 

그리고 그동안 해외여행을 간 곳이 어디인지를 물어본다. 당연히 나는 빌어먹을 남조선을 벗어난 적이 없다. 근데 다른 젊은 것들은 일본 교토에 갔네, 토쿄에 가봤네, 베이징, 파리, 뉴욕, 워싱턴, LA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그렇게 얘기하는 가운데 내가 나는 한번도 해외에 가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 암울한 수업 분위기 어쩔 것인가?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물어본다. 아,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딱히 마음 속에 생각해 둔 적이 없었다. 라면이 땡기면 라면을 먹고, 밥이 땡기면 밥 먹고, 피자가 땡기면 피자를 먹으며 30년 넘게 살아왔기 때문에 갑자기 불쑥 너 무슨 음식을 가장 좋아하니? 라고 물으면 심각하게 지금까지의 식도락 인생을 돌아봐야 한다.

 

결론적으로 회화 수업에서 이루어지는 여러가지 대화와 질문은 내가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에 속한다. 나 자신에 대해 꼭 이렇게까지 메뉴얼을 생각해놔야 할까? 내가 좋아하는 색, 음식, 나의 취미, 가고 싶은 여행지, 주말에 하고 싶은 일, 내가 했던 특별한 체험들, 등등에 대해 일정한 목록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이런 식의 대화는 왠지 여성들이 잘 하는 것 같다.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이런 말도 잘 하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꼭 이런 식으로 회화를 배워야 할까? 사실 상 다른 모든 외국어 회화 수업도 일단 자신을 소개하고 자신의 가족부터 해서 취미, 음식, 일상적인 체험 등등을 말하고 연습하는 것으로 채워지곤 한다. 하지만 실제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는 이런 식의 대화가 진행되는 일이 거의 없다. 나의 나이, 결혼 여부, 가족, 취미, 좋아하는 음식과 색깔 등등은 정말로 개인적인 영역에 해당되는 프라이버시로서 잘 물어보지 않는 영역에 해당하지 않은가?

 

나이를 밝히기 싫어하는 경우도 있고, 가족이 아예 존재해본적이 없는 결손가정 출신일 수도 있고, 해외여행을 가본적이 없을 수도 있고, 좋아하는 음식이 없을 수도 있고, 취미가 없을 수도 있고, 좋아하는 색이 딱히 없을 수도 있고, 결혼했다 이혼했을 수도 있는데 왜 이런 것들을 굳이 물어보면서 회화 수업이 진행되는 것일까?

 

외국어는 젊을 때 배우라는 말이 절실하게 다가온다. 근데 어쩌랴. 10년이 넘게 영어를 배웠는데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인생인 것을..다른 외국어라고 사정은 다르지 않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애를 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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