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아내전에 카다피와 연대를 촉구하는 사회주의자들에게

 

이 글은 사노위 게시판에 올린 후에 본인의 글에 대한 비판을 제시한 한 동지의 뜻에 거스른다고 판단하지만 과학의 힘으로 사회주의를 외치는 동지들의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위한 지침으로 쓰게 되었다. 제국주의국가들의 리비아에 대한 공습, 그리고 카다피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민중들의 현실에 대한 고심에서 나온 것이지만 제국주의국가에 대한 막연한 적개심으로 사회주의정신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상항으로 전개되었기에 비난의 형식을 뛴 동지의 글이지만 그에 대한 답변을 제대로 해야만 한다고 판단되었던 까닭이다.

 

리비아에 대한 또한 국제주의적 연대에 대한 개념을 우리는 다신 한번 생각을 해야 하겠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세계화가 필수가 되었듯이 노동자연대도 세계화에 발을 맞추어 한다. 국제적인 연대는 노동계급이 현지에 가서 자신의 물리력을 행사할 수 는 없는 것이며, 자신들의 군대를 동원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유는 자신들의 국가를 만들어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의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현실에 동원할 수 있는 물리력은 전쟁물자 운송과 생산을 거부 및 방해하며, 그러한 사실을 자신들의 물리적인 힘인 파업과 대중에 대한 선전선동으로 전쟁지역의 민중들의 힘에 보템을 줄 수 있다.

 

“혐오스럽고 부패한 카다피 독재를 뿌리 뽑을 진정한 투쟁은, 세계 인민을 가혹하게 착취하는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 맞서는 광범한 투쟁과 결합되어야 한다. 이것은 리비아 같은 신식민지 나라에 대한 제국주의의 어떤 그리고 모든 개입을 무조건적으로 반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리비아 방어는 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만이 아니라, 제국주의 나라 노동계급과 피억압인민에게도 결정적인 문제이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노동인민의 역사적 이해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나토의 침략에 맞서 리비아를 방어하자! 중에서. IBT)

 

IBT는 국제적인 연대의 의미와 리비아의 방어를 위한 행동으로써 노동계급이 해야 할 일에 대해 서술을 했지만 우리 사노위 동지들처럼 카다피와의 연대를 외치지는 않았다. 사노위는 구체적으로 서술을 했지만 적과의 동침에 따른 특혜 및 피해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다. 우리가 쓰고 있는 이 글은 리비아 민중들이 보지는 않지만 남한의 사회주의를 자처하는 동지들이 보는 관계로 다시 한번 쓴다. 한 동지의 반발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동지만의 반발이 아니라고 판단되어 사회주의의 과학이 가지는 광기를 음미할 찬스를 준다.

 

사회주의자들은 사건 및 상항에 대해선 첫 번째로는 계급적인 관점으로 바라본다. 가장 기본적이지만 언제나 특수한 문제가 부닥칠 땐 기회주의적 관점으로 치우치는 경향도 있지만 계급적인 관점은 경계의 선을 명확하게 해준다. 한 사회의 모순을 파악하고 진보적 세력·계급을 파악하고 대안에 대하여 고민하고 시대적인 흐름에 대한 지배계급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방법을 만들어 나가는 지름길이다.

 

리비아내전에서처럼 제국주의와의 문제가 생겼을 땐 민족자결권을 제시하고, 그 지역의 자치를 인정하며, 그 민족의 문제는 다른 지역의 또는 나라의 지배계급(부르주아)들이 원하는 간섭을 배제한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눈앞만 바라보고만 있는 부르주아들은 지구의 생태계를 망치는 주범이며, 인류의 자유와 행복의 추구를 자신들만의 도구로 만들어 버린다. 민족들의 자결권은 민족 또는 지역 내에서 자유로운 계급투쟁을 옹호하기 위한 사회주의자들의 계급적 관점의 특수한 변형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지배계급과의 연대를 모색하여 외세(제국주의)를 몰아내는 전쟁을 수행 하기 위해선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이러한 부분은 어느 전술적 맥과 함께한다.

 

1. 자신의 힘이 상대편보다 월등히 강해 상대의 힘을 자신들의 의지로 강제할 수 있을때 적과의 연대를 모색한다. 이를 통하여 나의 적을 또 다른 적과의 대면을 통하여 물리력을 약화시켜 손을 안대고 코를 푸는 격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이이제이적인 방식의 변형이다. 제국주의(나토, 미국)의 국가들이 지상군의 투입보단 공중폭격에 주안점을 두고 있으면, 주로 시설물 파괴에 혈안이 되며 가끔 리비아군에 대한 공격과 반정부군에 대한 오폭이 있을 뿐이다.

 

2.제3의 적이 강해 둘이 연대를 해야만 물리칠 수 있을 경우에 연대를하지만,

 

1) 적과의 동등한 관계로 작전권 및 지휘체계를 가질 때 가능하며

 

2) 우리가 지배계급보단 세력이 약하나 그를 반전 시킬 수 있는 대중적인 사건이 존재할 때. 주로 그러한 경우는 대중들이 국내의 적보단 제국주의에 대한 혐오 및 반감이 강하게 나타날 때, 대중에 대한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협력의 체계를 구축 할 때가 있다. 만주사변에 대한 2차 국공합작은 그 예가 된다. 당시 국민당은 일본의 침략에 대한 대항이 아닌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좌익세력 척결을 해왔던 상황이었다.

 

3) 지배계급의 물리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경우. 지배계급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제국주의세력의 침탈은 지배계급의 물리력을 약화시키기도 하지만, 제3의 적에 대한 연대로 노동자군대는 대중들에게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의 도덕적인 상황, 및 대중의 호감도가 상승하여 대중과의 접촉이 원할이 이루어진다. 어떠한 상항에서도 선전과 선동은 필수이며, 넓어진 공간에서 대중과 긴밀히 접촉하는 것은 사회주의자들의 의무다.

 

3. 우리가 약할 땐.

 

1)철저하게 지하에서 반제국주의전선을 결집시켜 나간다. 지배계급과의 연대를 통해서 제국주의세력과의 대결은 우리의 물리력을 오히려 약화시켜 지배계급의 역습에 당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지배계급은 우리의 물리력을 제국주의 국가와의 전쟁에서 소진시키기 위하여 노력하고, 약해진 틈은 언제나 붕괴되기 마련이다.

 

2)대중의 강제로 참여를 하고자 할 땐, 자신의 전력을 노출을 최소화하고 지배계급의 경계심을 약화시킨다. 최대한으로 전력의 노출을 자제할 때만이 결정적인 순간에 역전이 가능하다.

 

카다피가 왜, 민중들의 저항을 알카에다의 지원을 받은 폭동이라고 주장을 하고 자신의 추종 및 지지 세력으로 내전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가하는 것, 제국주의 국가들이 침략을 위한 발판으로 공습을 하기 보단 리비아정부군에게 폭격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무엇이 이러한 내용을 강제했는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리비아의 카다피는 자신들의 적인 피지배계급의 반항은 제국주의의 침략과 동일선상으로 대중에게 현혹시키면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위한 기초공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제국주의국가들이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공습이 아닌 전면전으로 확전이 될 경우 대중에게 언제든지 제국주의국가와의 전쟁을 위한, 지배되어 있는 자들은 언제나 제국주의전쟁의 전면에 나설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리비아의 카다피가 원하는 것이며, 자신의 적을 이이제이로 무력화시키고자 하는 단순한 전술적인 술책이다. 이것을 이해 못하는 것은 유토피아적인 판단이다.

 

사회주의를 위해 헌신하고, 사회주의를 쟁취하고 억압과 통제가 사라지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으로 동분서주하는 동지들을 보면 언제나 가슴이 뛴다. 자본주의사회의 강제된 노동현실은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도 하지 못하게 오로지 주는 밥만 얻어먹는 자로서 낙인을 찍어 자본가들은 노동자의 시혜자로 등극하게 되었다. 자본가의 존재는 노동자에게 신이요 자랑으로써 떠받들어야 하는 존재이기에 반항과 저항은 금기시 된다. 자본주의의 또 다른 시혜 자는 국가이며 부르주아들과 함께 자신들도 신의 자격을 부여할 것을 법과 이데올로기적으로 강요를 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통제를 필요로 하며 통제의 기본은 억압을 받아야하는 계급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국가가 하는 일은 지배계급의 원할 한 통치를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기능을 수행하며 그에 합당한 물리력을 갖고 강제를 한다.

 

사노위 동지들과 신문의 내용을 옹호하는 동지들은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이젠 이해가 되었기를 바란다. 사회주의는 동지들의 헌신에 의해서 빠르게 대중들에게 다가설 수 있겠지만 잘못된 철학과 전술의 개념은 동지들의 헌신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관념으로 만든다. 동지들의 헌신이 대중에게 사회주의 내용을 전달하기위한 방법이 무엇인지 다시한번 숙고하기 바란다.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일반적인 근본원칙을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하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유토피아적인 생각을 지녀서는 안된다. 유토피아적인 생각은 그때마다 순식간에 구체적인 현실로 나아가는 모든 길을 가로막을 뿐이다.”(성혁명. 빌헬름 라이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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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5 20:09 2011/04/15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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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아들  | 2011/04/17 08:45
어떤 경로를 통해 신문을 접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카다피와의 연대를 이야기한 것은 사노위 내부의 특정한 경향중 하나일 뿐입니다. 신문기사의 취지도 사노위 내부의 세가지 경향을 보여준다는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님이 비판하신 기사말고도 서로 다른 두가지 경향의 기사가 같이 배포되었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않고 말씀하시니 마치 사노위가 전부 카다피와의 연대를 주장하는 것 같이 보여서 마음이 좀 거시기 합니다.
색안경  | 2011/04/18 16:59
동지의 마음은 이해 합니다. 그러나 정치신문은 정파자신의 얼굴입니다. 물론 사노위신문중 하나의 기사일뿐 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의 내용이라도 자신의 정파의 이름을 걸고 글이 나왔다면 글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함은 타당합니다. 사노위가 연합체라고 한다면 그 안의 여러 정파의 전혀 다른 정치색깔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신문 내용에 대한 비판은 신문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노위의 신문의 9호에서 조차 그 내용에 대한 비판은 존재하지 않고, 두리뭉실 하게 민중의 투쟁에 대해서만 제시된것은 엄연하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용인해서는 안되는 것은 사회주의를 외치는 여러 동지들의 의무인것 입니다. 과학적 비판과 논리는 발전을 위한것이지, 퇴보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노위의 신문의 편집부는 그것이 부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 실수 하나 조차도 신문 전체에 대한 평가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