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면서

 

얼마전 해방연대(준)의 이사를 하고난 후 회식자리에서 본인은 사노위의 강령초초안중 제4인터내셔녈 남한사회주의노동자당(가칭) 강령(이후 4인터)중에서 "교육노동자, 학부모, 학생이 주체가 되는 학교위원회에 참가“하여 거부권 및 의결권을 행사 할 권리가 있음을 제시 했다. 또한 사노위의 3인안을 보면 ”2-4-1.······· 학교의 경우 학생 - 교사 - 학부모의 자주적 조직을 건설하고 이들이 학교운영의 주체가 되도록 투쟁한다.”고 되어있다. 해방연대(준)의 강령 - 17) 공교육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방자치기관에 의해 관리되어야 한다. 바람직하지 않은 교사를 해임할 권리를 갖는 주민들이 직접 교사를 선출한다.- 과 비슷한 내용으로 나타나지만, 사노위의 5인안 강령초초안에는 없는 내용인 관계로 동지들에게 교육위원회에 학부모의 참여가 타당한 것인가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 이러한 내용의 전재는 자본주의가족들이 존속한다는 것을 가정으로 하고는 있지만 본인을 제외하곤 모두가 다 참여가 타당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유는 무엇일까? 한 동지의 말이 기억에 남는데 그 내용은 성인이 되지 않은 미성년자들은 판단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라고 반박을 했다. 이는 청소년 및 아동들은 자유와 자율의 의미도 모르고 책임감의 주체로서 자질이 떨어짐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책임은 없고 배우는 과정이기에 학교의 책임의 주체로써 면제가 된다는 내용이 아닐까? 결국은 학생은 주체가 아니고 줄에 매달려 움직이는 꼭두각시 같은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 교육의 주체로 학생이 부적합 것이 아닐까? 판단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사리에 맞는(?) 판단을 못하는 존재는 금치산자, 한정치산자의 의미를 가지고 바라만 보게 되는 것은 어른이 되지 못한 피터팬은 늘 판단력의 결핍과 부족으로 존재하고 어린왕자는 꽃의 시들어 죽어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능력을 지녀 늘 그 상태로 존재하는가? 여러 가지의 의문이 든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일까?

 

그러면 미성년자의 기준은 무엇일까? 판단력이 높아진 상태의 기준은? 사회의 발전은 그런 기준을 수도 없이 변화를 주었으며 나이와 경험, 지식과 관련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통속적인 기준은 사회의 일반적인 이데올로기에 편입되어 지배적인 사상에 따르게 되어있다. 지금은 자본주의 사회의 도덕적인 기준으로 미성년의 기준을 나눈다. 먼저 이러한 의미를 자세히 알고자 한다면 교육의 의미와 확장되어진 모습들과 내용을 찾아보자

 

1. 교육이란?

 

교욱이 가지고 있는 목적은 최소한의 생존력을 길러주고 사회에 적응 하는 인간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인간이 변화하고 활동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지만 하나의 객체가 아닌 전체의 인간과의 조화를 위한 것으로 개개인간의 부분적인 특성의 변화가 아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땐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한 지짓을 습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먹고살아가는 모습, 사냥 채집 농사를 짓는 법,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품을 생산 관리 판매, 자본을 유지 확장 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교육의 체계는 공교육 또는 사교육의 형태를띄며 한국에선 사학이라는 민간학교재벌이 존재한다. 교육은 사회체제를 유지발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으며, 사회경제적발전의 모습은 생산력의 발전에 다음세상이 맛을 보여주는 까닭에 일부의 불순세력들은 교육의 진보적인 기능을 중시하여 불순세력을 규합하는 만행까지도 저지른다. 이는 일부에 지나지 않고 특수한 경우이기에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다. 교육의 핵심은 사회의 통제이데올로기를 양산하며, 사회공동체의 의미를 강화하고자 도덕과 윤리 철학을 중심으로 하여 기능공을 양성하고 있는 것이다. 기능공들은 일반적인 사람들보단 부를 취득하는 수단이 쉽은 까닭에 대중들에게 높은 교육열을 사회적인 부를 개인적으로 더 많이 취득하는 수단으로서 나타난다. 법을 판단하는 변호사 판사 검사, 00박사, 통·번역 등등의 모습은 한 분야의 전문가로서 자리를 갖는다는 것은 편하게 일을 할 수 있다고 느껴지고, 더 많은 물질적인 풍요를 누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적 지상주의, 시험에 올인하는 형태, 그러한 것을 최고의 선이라고 시험을 잘 보기위한 것이 청소년들이 살아가는 지상목표로 만들어 났다 서울대, 연대 고대 등 SKY계열의 의미는 교육이 낳은 사생아의 모습이다.

 

교육은 사회통제를 목적으로 강요하기 때문에 비록 시험에 나오지않거나, 축소되어진 모습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도덕교육은 계급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수 요소로서 등장한다. 대표적인 것은 미국의 고등학생들의 순결교육, 우리나라의 체육시간에 행해졌던 제식교육, 일주일 마다 교장선생님의 훈시 및 종례와 조례 등이 존재한다. 이러한 교육의 모습은 계급사회의 국가가 추구하고 지향하고자 하는 목표를 달성하고자 자신들의 얼굴을 바꾸어 왔다. 중세시대엔 교육이 부유한 상인의 일부와 귀족 자녀들을 위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의무교육이 되어 누구나 받아야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자본주의 사회는 알아야만이 상품을 유지 관리 생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교육이라면 학교교육을 생각한다. 많은 시간을 시험성적에 자신을 맞추어 왔던 관습이 남아 있기 때문이고, 또래들과 함께 어울려 왔던 공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교육은 현장감이 떨어지지 않는다. 자신이 존재하는 그곳, 어느 곳에 있던 간에 정보와 소식의 홍수 속에서 수시로 이루어진다. 사회적인 재교육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교육은 학교교육과 학교교육의 외적인 부분 즉 가정에서의 교육과 사회적인 교육의 모습이 존재한다. 실제적으로 자본주의사회에 살아가는 대부분의 삶이 가정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가정교육의 의미는 어머니에 대한 자식 사랑에 대한 표현으로 나타나면 엄숙한 아버지의 잣대는 집안의 기둥으로 자라를 잡아 실생활에 습관적으로 굳어진 상태이기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 조차 하지 않는다.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에서 “······ 배고픈 사람들이 도둑질을 했다거나 착취당한 노동자가 파업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아니라, 배고픈 사람들 중 대다수는 왜 도둑질을 하지 않는가, 도 착취당하고 있는 사람들중 대다수는 왜 파업을 하지 않는가라는 사실”(파시즘의 대중심리 P55 빌헬름라이히)에 주목하여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뿌리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사회의 억압적인 통제를 깨뜨리고 나가기 위한 첫걸음은 아니지만 예방적인 차원에서라도 우리는 교육이 제일먼저 이루어지는 가정에서의 교육부터 시작 해 도록 한다. 예로부터 자식농사를 잘 지어야만이 집안이 평안하다고 했다.

 

2. 가정교육

 

이 내용은 동지들은 누구나 알고 있다라고 판단되어 본인의 허접한 글 솜씨보단 빌헬름라이히의 글을 일부 발췌한다. 책은 성혁명이며 새길출판사본을 하며 PP144~153에 해당되는 내용이다.

 

“5. 교육장치로서의 강제적 가족

 

보수주의 이데올로기의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가장 중요한 장소는 강제적 가족이다. 그 가족의 기본유형은 아버지 어머니 자녀라는 삼각형이다. 보수적인 관점은 가족에서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이 인간사회의 ‘세포’ 근거를 보는 반면에, 우리는 역사발전과정에서 가족의 변화나 각 시대의 가족의 사회적 기능을 연구하면서 가족이 특정한 경제구조의 산물임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족을 머리돌이나 기반으로 생각하지 않고, 특정한 사회의 경제구조의 결과(모계가족, 부계가족, 자드루가[세르비아 인들이나 불가리아인들 사이에 있는 가부장적 세대 공동체], 일부다처제적 가부장과 일부일처제적 가부장등),라고 생각한다.········ 가족의 사회적인 의미는 전적으로·····

 

첫째, 경제적으로 - 가족은 자본주의초기에는 경제적인 소기업이었으며, 또한 지금도 농업이나 소규모 자영업에서는 그러하다.

둘째, 사회적으로 - 가족은 권위주의 사회에서는 경제적으로나 성적으로 권리를 빼앗긴 여성과 어린이를 보호하는 중요한 기능을 지닌다.

셋째, 정치적으로 -······가적은 직접적인 경제적인 토대는 의미를 잃었고,·····정치적으로 대체되었다. 보수적인 과학과 보수적인 법들이 가장 많이 지키려고 한 가족의 핵심과제는 권위주의적 이데올로기와 보수적[성적]구조의 공장으로서의 자신의 특징이다. 가족은 예외없이 거의 모든 사회성원이 처음 숨을 위면서부터 통과해야만 하는 교육장치이다.······· 가족은 보수적인 세계관의 의미에서 어린이이게 영향을 끼친다.····· 가족은 자신의 형태나 직접적인 영향을 통해 현존 사회질서와 보수적인 사고방식에 대한 일반적인 태도를 전달.

 

그러므로 가족의 교육적 중요성을 관찰할 때, 청년에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가족교육에 기여하는 구체적인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영향과 ‘삼각형구조’ 자체의 직접적인 영향이라는 두 가지 사실을 나누어서 연구해야만 한다.

 

결혼 상황과 가족 배치가 아무리 비참하고 암담하고 고통스럽고 참기 어려워도 가족은 이데올로기적으로 가족성원에 의해서 내외적으로 보호되어야 한다.

 

결혼 및 가족에 대한 교육은 처음부터 아이를 양육하기 위한 목적이다.

가족 결혼은 실천적으로 개인주의적이며 그 어린이가 하루에 몇 시간을 유치원에서 보낸다 할지라도 어린이 집합체의 좋은 영향을 배제한다는 사실을 과소 평가해서는 안된다. 가족이데올로기는 유치원이 가족 교육에 미치는 것보다 훨씬 더 실제적으로 유치원에 영향을 끼친다.

그러므로 어린이는 가족 속에 강제 편입되며, 그래서 성적이고 권위적인 측면에서 부모에 고정된다. 어린이는 부모의 권위가 엄격하건, 그렇지 않건 관계없이 신체가 작기 때문에 부모의 권위에 압박당한다.

 

가족교육의 더 나아간 특징은, 부모가 특히 어머니가 집밖에서 생계를 꾸려나가는 소득을 올리지 않는 한 자신의 삶의 내용을 점점 더 자신의 어린이에게서 찾고, 어린이는 사람들이 사랑하고 마음대로 괴롭힐 수 있는 강아지 역할을 하고, 부모의 정서적 태도는 교육에 완전히 부적합하게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강제적 가족이 권위주의 사회와 경제적으로 얽혀져 있기 때문에, 강제적 가족의 작동을 이 사회 안에서 없애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사태에 완전히 무지한 것이다. 이러한 작동은 가족 상황 자체에 놓여 있으며 충동구조의 무의식적 메커니즘을 통해서 특이한 개인 안에 제거할 수 없게 뿌리박고 있다.

 

그러므로 가족은 두 가지 정치적 역할을 지닌다.

첫째, 가족은 사람들을 성불구자로 만듦으로서 스스로를 재생산한다. 가부장적인 가족이 유지됨으로써, 성 억압 자신이 가져온 성 장애, 신경증, 정신병, 성범죄 등의 결과와 함께 보존된다.

둘째, 가족은 권위를 두려워하고 삶을 불안해하는 복종자를 만들고, 그로 인해 한줌의 권력자에 의한 대중이 지배될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새롭게 만들어 낸다.

이렇게 가족은 보수주의자에게는 그가 긍정하는 사회질서의 보루라는 특별한 중요성을 지닌다.······ 가족은 (반동적인 의미에서) ‘국가와 사회를 유지하기’ 때문이다.“(성혁명중에서)

 

가정교육, 가정이 가지는 의미 즉, 계급사회에서의 가족의 의미와 계급이 해체되었을 때 가족의 의미와 형태는 틀리다. 강령에서 무상급식, 무상보육은 자본주의적 가족관계의 해체를 촉진하며 여성의 사적노동을 사회적노동으로 변화시켜는 직접적인 계기가 될 것이다. 사회의 경제적관계가 변화가 이루어지면 사회문화적인 변동이 온다. 경제적인 변화가 멈추면 정와 문화는 반동의 길로 접어든다. 그예는 소련의 모습에서 이미 구현되었다. 정치적으로 프롤레타리아의 집권으로 계급사회의 가정이 무너져 갔지만 스탈린체제는 무너져가는 계급사회의 가정을 복구하여 문화에서도 반 프롤레타리아의 길로 간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사회의 가정은 당연히 해체가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진다. 억압과 통제가 없는 새로운 유형의 가정이 경제적 토대에 맞추어 나타나게 될 것이다. 무너지는 것은 계급사회의 문화이며 기지개를 펴는 것은 무계급사회의 문호다. 그러나 계급사회에서 습관적으로 행해져 왔던 가족의 모습은 운동의 전위에게 조차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소련에서의 일시적인 계급사회의 가족의 해체는 선진노동자계급에서조차 힘들어하여 스탈린이 옛 모습으로 가족의 복귀를 주장하고 강제 했을 때, 반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도움을 주었다. 전통적인 가족의 모습으로 복귀하는 모습은 권위주의적 가족의 해체와 계급사회와의 연결고리를 자세히 보여준다.

 

3.학교교육

 

인간의 성장기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교육의 현장은 학교다. 교육이 가지는 의미를 여과 없이 그대로 전달을 하고 주입시키며, 생활 속에 강제를 한다. 학교교육은 유아기와 어린이 청소년의 모습을 가지며 현재 의무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강제화 시켰다. 유아(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의 교육은 지식을 심어주는 곳이라는 모습을 가지지만 질서 지키기, 예의 차리기, 나라에 충성하기 등을 중점으로 하여 당근과 채찍이 공존하는 사회의 현실의 단면을 보여준다. 자본주의 사회의 전통적인 교육에서 아동이나 청소년들은 대부분의 생활을 시험과 숙제에 매달리고 학생은 공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부모와 교사의 권위에 복종하라고 강제한다. 이러한 교육은 아동 및 청소년들을 복종에 강제함으로써, 능동적인 발전형태보다는 타율적으로 만든다.

 

교육은 학교가 중심이 되어 청소년과 아동들에게 문자해독능력과 정보 및 지식의 축적을 시키는 교습으로만 인식하고 있지만 국가에서 촉진하고 지향하고자 하는 목표로 실천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교육부의 지침에 의해서, 정부의 시책에 의해서 교육의 내용과 형식은 늘 변해 왔으며, 그 내용의 핵심은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을 전망으로 하여 이데올로기, 관습 및 전통을 유지시켜 습득하게 함으로써 사회의 보수적인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일부 몰지각한 사상을 가진 자들에 의해서 전통적인 교육의 장은 일시적으로 약화되어 있으나 주류와 힘으로, 비주류는 그 안에 통합되어 질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대안학교의 운영은 학교운영의 진보적인 모습으로써 생태와 인간과 관계를 중심으로 하여 아동들의 개인의 의식화 및 개인적 지성의 완성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협력을 하나의 기본과제로 하여 기본규범인 상호성의 의미를 찾아 가고 있다. 그러나 이런 대안학교는 아동에 극한되어 지거나 지체장애인을 위한 한정된 공간으로 자리를 잡고 있어, 결국에 시험과 성적에 매달리는 현실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그 안에 정착을 시킨다. 계급사회는, 특히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는 개인적인 자유라는 명칭으로 부르주아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다수가 희생을 강요하는 기계적인 모습을 강제시키고 있는 것이다.

 

교육의 주체로서, 대행자가 아닌 주체는 당연히 자신들의 행동의 동기와 더불어서 과정과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가져야 함을 배운다. 그러한 것이 사회를 유지하는 교육의 의미 일 것이지만, 학교교육은 개인이 선택한 규율과 전 인격적으로 협력하여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닌 이상 계급사회의 비주체성으로 전락되어 수동적인 사회적인 성격을 가지고 이미 익숙해진 권위와 사회의 맹목적적인 안정을 추구하는 핵심주체로 자리를 잡아가게 된다. 모난 돌은 정을 맞는 법이며, 군대의 줄은 가운데에 서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인 통념의 강하는 SKY라는 학벌을 조장하였고, 이는 사회의 줄서기 편한 상층부로의 이동을 위한 징검다리로 만들게 된 것이다.

 

교육은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지만, 인류의 중심사상으로 관통하고 있는 것은 인간과 자연이 병행하여 질서에 편입되는 과정을 느끼고 배우는 것이며 - 진정한 가르침의 원리를 구성하는 것은 사물의 질서이다. - 수동적인 모습의 질서가 아니고 능동적인 질서의 모습을 깨우쳐가는 것이다. 여기에선 외국어, 수학, 도덕의 형식적인 모습의 교육의 현장이 담겨 질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교육의 참다운 모습으로 변해가기 위해선 교육의 주체와 객체는 엄격하게 분리 시켜야 하는 것이다. 권위와 선입견을 아동과 청소년으로부터 격리시켜 사회의 참다운 일군으로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사회주의교육의 목적은 자기들끼리 협력할 수 있는 자율적인 인격을 형성해주고 자신의 자기중심주의와 집단적 구속의 전제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학교 자체에서 학생들의 자발적인 사회생활이 필요하다. 자발적인 사회생활은 학부모, 선생의 권위와 복종에 대한, 억압과 통제·차별에 대한 저항을 가지게 되고 스스로의 자유를 위한 선택을 강제한다. 학교교육이 무계급적인 색상을 가지기 위해선 정치적인 혁명이 완수되어야 한다. 정치적인 혁명이 곧바로 교육환경에 반영되지는 않는다. 학교교육의 핵심은 학부모의 권위로부터 학생을 분리하는 것으로 시작되어야하며. 배우고 가르치는 사회의 원모습을 획득하기 위해선 학생의 자유로운 선택권을 보장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1) 모든 사학을 철폐하고 공(국)유화 시켜야한다.

2) 학교의 시험 및 사회에서 성적과 순위를 무기로 하는 시험은 폐지해야 한다.

3) 학생의 관념적인 교육의 방식을 허물고 사회생활과 함께할 수 있는 실생활 위주의 교육 방식으로 변해야 한다. 이는 현장중심의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4) 학생들의 성(性)적 해방을 위한 피임법 및 피임기구를 무상으로 지원하고, 장소를 무상으로 제공한다. 학생들의 성의 억제는 계급사회의 발전 속에서 강제적으로 억압되어 왔으며, 억제는 변형적인 성의 모습으로 나타나 성매매, 윤간, 마조히즘, 사디스트 등등의 모습을 나타나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또 하나의 토대로 자릴 잡고 있다. 자유는 자율이다. 억압과 통제는 계급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청소년의 성문제를 다루는 내용은 빌헬름 라이히의 책을 참조바람)

5) 무상교육. 무상배급. 무상보육이 제공되어야 한다.

6) 학생자치위원회 건설이 되어야한다.

7) 학생자치위원회는 사회의 하나의 축이며 그 안에는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을 부여한다.

8) 학생자치위원회와 교사위원회가 학교운영위원회를 구성한다.

 

4. 사회교육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에선 가장 주요한 교육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하여, 생산력의 발전을 따라가기 위한 도태되지 말아야하는 생존욕구로 인한 학교교육의 연장으로 재교육의 이름을 행해지고 있다. 인간 사회는 교육의 사회이다. 재생산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서 무한경쟁으로 내몰리면서 자신 스스로의 발전이라고 하지만 실제적으론 자본의 이익을 위한 준비과정이다. 자본을 공경하고 반항해선 안 되는 집안가족의 어른으로써의 자본가의 위치를 인정하며, 상명하복이 사회의 건실한 발전을 일구는 토대라고 강조를 한다. 사회에 한발을 내딛기 전 군대의 의무화는 계급적인 현실을 부담없게 받아들이는 하나의 과정으로 존립한다. 사회에서의 재교육은 자본가계급이 자신의 비용으로 부담하지 않고 개인적인 상항으로 취급하여 개인과 개인 간의 경쟁으로 만들어 사회의 기본구조인 협력체계를 깨뜨리고, 다른 이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면 그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구조로 만들어 갔다. 요즘 유행하는 무한경쟁 프로그램의 몇 가지가 대중들의 높은 호응과, 대리만족의 형태로 또한 실력만 있다면 대접받는 평등한 사회라는 것을 인식 심어주는 방송언론매체인 ‘위대한 탄생’ ‘슈퍼스타K' '도전자’ ‘기적의 오디션’ 등등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은 자본주의 사회의 방송에 예능 오락물의 주요 트렌드로 자리를 잡아 힘든 취업의 문을 열기위한 젊은이들의 활약상을 보여주어 대중의 염원을 반영도하지만 자본주의사회의 이데올로기를 여과 없이 반영을 하여 어려워도 참고 실력을 쌓아간다면, 쥐구멍에도 볕 뜰날이 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회교육은 방송언론이 주축이 되고, 사설학원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작은 흐름이지만 정부나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기술학원들도 존재하지만, 주축은 아니다. 요즘엔 기술학원에서 취급했던 내용을 고등학교의 교과과정에 편입시켜 취업준비를 돕고 있기도 하다. 사회교육은 방송·언론, 영화, 문화 등을 제외하면, 기술적인 과정을 답보로 한다. 대중의 이데올로기와 사회적인 규범의 창출은 방송과 언론이며, 항상 반복적인 권선징악의 의미, 변화하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보여주면서 사회의 현존질서의 유지를 위해서라면 악당을 제거해야하는 것을 사명으로 존재하는 영웅들의 모습이 주축을 이르고 있는 방송·언론, 영화, 문학 등의 내용들은 계급사회의 전통성을 보여준다. 또한 방송·언론, 영화, 문학 등은 사회의 기존제도와 체제가 원활히 유지 될 수 있도록 하며, 자본주의의 정치, 경제, 문화적 제요소를 발전시켜 나가는데 대중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사회교육은 사회적인 약자인 피지배계급의 존속을 강요함을 기본으로 한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설정은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선 안되며, 모르는 것은 손을 대선 안되며, 오로지 보이는 현상, 자신의 주위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것으로 인식의 틀을 협소하게 만들어 사회적인 연관관계보단 자신의 전문적인 부분만을 강조하는 신세로 전문화 시킨다. 전문가의 모습은 사회적인 정치·문화·경제 등등의 분야를 하나의 연관관계로 바라보는 총체성을 상실하고 속물화시킨다. 또한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전문영역이라는 형태로 대중과 의사소통을 원활히 하기보다는 계몽하고 시혜를 주는 어른의 자격으로 접촉을 하여 대중을 주인 의식으로 무장하지 못하게 하며, 주는 떡이나 받아먹는 존재로 전락시킨다. 전문가는 자본가의 분신의 역할을 하며, 자본가의 이윤의 일부를 나눠먹으며 관료화 되어,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선 능동적인 자세를 요구하지만, 그 외적인 부분에선 복종하며 규율을 잘 지키는 모범시민이 되기를 대중에게 강요한다. 사회교육의 주요형태가 전문가를 만들어 내고, 전문가를 동원하여 대중의 시각을 한쪽 방향으로 잡는데 이바지한다.

 

5.사회교육의 대안은 무엇인가!

 

사회주의 교육의 대안은 무엇일까? 학교교육의 대안으로써 강령적인 의미를 내세웠지만 가정교육과 사회교육에 대한 대안은 무엇으로 나타날까? 여기선 학교교육에 대한 내용을 배제하고 사회교육 및 가정교육에 대한 대안을 중점으로 한다.

 

먼저 해방연대의 강령을 보자

 

“8) 임시직, 계약직, 파견직 등 모든 형태의 비정규직 고용을 금지하고 완전 고용을 실시한다. 이를 위해 국가는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노동을 할 수 있도록 교육과 일자리를 제공한다.”((가칭)한국 사회주의 노동자당 강령초안 중에서) 즉 노동자들의 재교육을 위한, 재취업을 할 수 있는 교육에 의미를 부여한다. 사회교육에 대한 다른 내용은 없다. 아마 추후 강령의 토론의 활성화에서 첨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다른 정파의 강령도 당연히 그렇게 될 것이라고 판단한다. 다만 현재까지의 강령들의 내용이 이러한 부분을 경미한 사항으로 취급하거나,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은 상항으로 만들어 놓지 않았을까하는 노파심에 한번 더 적어 본다.

 

노동계급의 재교육의 문제는 중요하다. 그 개개인의 인격적인 세상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것이 교육이며, 하나의 사회의 구성원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련의 혁명이 실패한 원인중의 하나가 대중들이 계급사회에서 배워왔던 습관과, 높은 문맹율과 문화적 소외감에서 나타난, 즉 능동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한 관계로 위에서 시키면 움직이는 수동적인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도 하나의 원인이다. 노동계급이 가장 활발하게 움직여야하는 소비에트에서, 회사를 운영해야 하는 자주관리면에서 운영의 묘를 살리기 보단 스탈린의 강제와 관습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노동계급의 교육은 그들이 능동적인 삶을 살아가게 만들어야하며 능동적인 삶은 사회에 억압과 통제를 제어하고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 갈수 있는 모습을 만들어 낸다. 능동적인 삶을 재창조 하기위해선 투쟁의 과정에서 나오겠지만 계급사회의 잔재인 재취업을 위한 기술교육을 위주로 하기엔 많은 아픔이 있다. 혁명이후 사회문화혁명의 길이 멀고 험한 이유도 기존에 가져왔던 계급사회의 관습에서 해방될 때만이 비로서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듯이, 사회교육은 그 틀을 마련하는 억압과 차별을 철폐할 수 있게 하기위한 것이다. 교육은 정확한 과학적 인식에 기초 하고 있는 기술이다. 사물의 질서를 가르치는 것으로서 인간의 능동성을 개발해 나가야하며 협력과 상호성의 의미에서 완성을 유도 해나가는 것이다.

 

사회주의 교육은 계급사회의 관습에서의 단절을 의미하며, 사회문화의 사회주의혁명의 완수와 공산주의사회의 진입을 위한 기초를 닦는데 이용한다. 그러나 혁명이전의 상항에선 교육의 한계는 대중이 지배계급에 대한 열정적인 투쟁의 모습에서, 배움의 현장이 존재한다. 지배계급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 대중자신의 생존을 위한 정치·경제투쟁, 그 투쟁의 핵심인 생산시설 점거파업 등은 대중 스스로 지배계급에 저항하는 학습을 만들어 낸다. 파업은 노동자대중이 실제로 현장을 통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학교이자, 학습장소이다. 계급사회에서의 교육은 생생한 파업의 물결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승리의 힘은 혁명의 파고를 높이는 원동력이 된다.

 

대안으로는

 

1) 실업수당의 최저생활비보상.

2) 모든 구성원에게 노동할 수 있도록 교육과 일자리를 제공한다.

3) 사회문화보급을 위한 공간을 확대한다.

4) 문화산업에 대한 국가보조금을 지급한다.

 

6. 가정교육은 어떠한 변화를 가져야 하는가?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가족은 해체되어야한다. 계급사회의 전반적으로 자리를 잡아 대중에게 관습처럼 내려오는 전통가족은 사회주의사회의 가치와 부합되지 않는다. 억압과 통제가 아닌 인간다운 삶의 자유를 누리고자 한다면 하나의 틀에 얽매어 있는 것이 아니며 자신들의 의사가 존중되는 그러한 삶을 살아야한다. 전업주부가 아이들 때문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못하게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가정에서의 일을 사회화시켜야한다. 여성해방은 여성의 일이 사회적일이 아닌 개인적인 또는 가정적인 일로 취급되면서 사회적노동의 의미가 퇴색되었다. 가정의 노동이 아닌 사회적 노동으로 변화 시키는 것,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게 하여 사회의 울타리인 더 넓은 곳으로 나오게 만들 의무가 있는 것이다. 여성해방과 권위적인 가족의 해체는 하나의 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로 분리 된 것이 아니다.

 

우리의 강령은 사회주의로 나가는 것이다. 강령의 의미로서의 다리는 목표와 과정을 선명히 보여주는 것을 축으로 한다. 사회주의모습과 과정을 함께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다리가 하나의 과정만 서술하고 있다면 결국 최소강령적인 요구로 자신을 국한하게 된다면 개량주의로 빠지게 되고, 최대강령적인 요구에 집착을 한다면 기회주의로 빠지게 된다. 가정에서의 교육은 자본주의적 가족관계의 해체를 원하며, 이는 최대강령의 요구이며 필연이다. 이미 맹아적인 모습에서 찾아 볼 수 있지만 아직도 부모의 의미에서 자신의 자식을 챙기고자하는 관습은 쉽게 떨쳐 질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원하며, 발전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자.

 

1)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아동 및 유아들의 교육이 필수적으로 변해 가고 있다. 유아원, 유치원의 보급은 자녀교육의 의미가 이미 사회화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특히 맞벌이 부부들의 증가는 24시간 보육원 운영 및 유치원 초등학교의 방과 후 학습 또는 학습시간의 연장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계속적으로 늘어나는 잔업과 야근, 즉 노동시간의 증가로 인한 측면도 있지만 아동들은 자신의 또래하고 어울려 사회적인 관계가 이루어질때만이 협력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어울리지 않은 애들은 자신들만의 세계로 빠져들어 이기심을 키워 자신만을 아는 것으로 나타난다. 부모의 보호가 자식을 망치는 이유다. 아이들의 협력 관계는 수동적인 모습을 지양하고 능동적인 모습으로 매순간 스스로 경험과 추론적 방법의 모든 자료들을 자유롭게 펼쳐, 사회적인 이상과 현실에 비판 및 수용을 검증하며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 한다. 사회에서, 집단적인 협력관계의 발전인 또래와의 공동체 생활을 강조하다보면, 하나의 작은 틀이 있는 가정의 교육은 깨질 수밖에 없고, 계급사회의 가정의 구조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24시간 보육원 및 유아원 운영. 부모가 원하는 시간에 유아를 데리고 갈 수 있고, 데리고 올 수 있는 공간 제공.

 

2) 아동들 및 청소년들의 무상급식. 하루 3끼를 무상으로 제공 한다. 단 가정에서 해결을 원할 경우엔 제공하지 않는다. 무상급식은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사회에서 아동 청소년 노이들을 보육하고 부양하기 위한 기본은 무상급식과 마음 편히 쉴 공간의 실현이다. 자신이 원하면 더 낳은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겠지만, 기본적인 인류의 생존을 위한 식사는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교육감들이 의욕적으로 시행하고자 하는 무상급식을 학교가 아닌 사회적으로 실행되어야 하는 것은 타당하다. 식당은 가정에서의 식사문화를 대중화시키는 데 공헌을 했고, 가정적인 식사문화를 사회화시키는 필수 조건이며, 대중음식점의 확대는 사회주의 사회의 필연이다. 자본주의사회의 상품으로써 식사와는 다른 노동의 잉여생산물의 일부분으로써 사회에 제공되어야 하는 것이다.

 

3) 결혼의 의미가 퇴색한다. 현재의 결혼은 신고하고 이혼을 하기 위해선 법원에 선고를 받아야 하는 허가제가 계급사회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살아가는데 신고와 허가가 왜 필요한가? 이는 통제를 위해서 필요할 뿐이다. 가정을 유지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유일한 남성들의 안식처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식으며 헤어져 자신의 안식처를 새롭게 만들어 가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사랑이 식어도 자식의 앞날을 위해서, 자신의 정치적 입장 때문에, 사돈과의 돈돈한 경제·문화적인 유대 관계를 유지하고자 결혼은 유지가 되어야 하는 것이 계급사회의 결혼의 의미다. 결혼·이혼의 허가 및 신고는 계급사회의 가정을 유지하고자하는 발악 일뿐이다. 그럼에도 이혼은 증가 한다. 황혼이혼의 증가는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며 현실이다. 이혼의 가족은 경제적 자립도가 부족한 여성들에겐 치명적이다. 그러나 미워하면서 하나의 지붕에서 살아가지는 못한다, 별거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러한 가정은 해체가 되어야하며, 사랑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자녀들은 사회가 보살피고 키워주며 교육을 시키는 제도가 확립되어야 한다. 결혼과 이혼은 신고만 하면 가능한 사회가 되어야한다. 2)번항의 24시간의 영유아를 위한 보육 시설과 무상급식이 기본적인 삶의 도구인 것이 이런 상항에서 존재하는 까닭이다. 결혼의 의미가 하나의 가정을 만들어 가는 것은 계급사회의 잔존이다. 결혼의 의미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며, 권태기라는 것은 존재해서도 안된다. 하나의 틀을 강요 할 때, 그 사회는 보수화 되고 차별이 생기며 억압적인 구조로 변화하게 된다. 스탈린시대의 독재적 상황은 하나의 틀만을 인정하여 자신의 집권을 위한 토대를 구축했으며, 관료들이 집권하는 시대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부분을 통하여 가부장적제도는 사멸하고 여성해방을 위한 문화적인 토양이 쌓여 간다. (여성의 경제적인 부분은 노동강령의 내용과 여성해방의 내용으로 이미 알고 있다고 판단하기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이미 자본주의적 가족의 의미는 사회주의의 맹아적인 부분으로 인하여 퇴색되어가고 있으나, 계급사회의 틀이 온존하게 살아 있는 한 그 틀은 깨지지는 않는다. 계급사회의 도덕과 경제 문화적이고 이데올로기에서 가정의 존속을 강력하게 염원하며 장려하고 강조를 한다. 가정이 튼튼해야 나라가 잘살아가는 법이라고 강조를 하면서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가족이 유지되고 발전해야 함을 당연하다고 과학적인 근거가 필요 없이 목소리를 높이 외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족이 해체 되지 않으면 사회발전은 정체될 수밖에 없다. 가족의 해체는 권위적인 교육이 자녀들에게 이루어지지 않아 세습화가 되지 않아서, 아동과 청소년의 자유로운 공동체지향에 하나의 혁신이 이루어진다.

 

7. 다시한번 더

 

글을 마치면서 자본주의사회의 교육은 일부진보적인 인식을 가지고 대중에게 전파하여 사회에 비판적 세력을 만드는 일부 형태를 제외하곤 일반적으로 계급사회의 유지와 발전을 토대로 해서 이루어져 있다. 진보적인 사고방식도 계급 의식화되지 않으면 쁘띠부르주아방식으로 함몰되어 보수와 반대의 개념으로 남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진보적인 내용에서 풍부한 사례를 가지고 계급적인 접근을 한다면 사회주의 강령에 더 많은 보답이 이루어질 것이다. 다음은 피아제의 글을 인용한다

 

“우리의 연구결과들이 권위의 방법만큼이나 순수하게 개별화된 방법에도 호의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매우 분명한 사실이다. 뒤르켐과 관련된 논의에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아동의 사회적 삶이 성인권위의 표시라 할 수 있는 내적 복종에 아주 가까운 하나의 규율을 불러일으키도록 충분히 발달 되었을 때 아동에게 완성된 규율체계를 주입하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심지어 도덕적이지 못한 것이다. 다시말해 아동고유의 적극적 연구에 대한 성향과 협동에 대한 열망이 정상적인 지적 발달을 충분히 보증해 줄 수 있을때 외부로부터 아동의 정신을 변형시키고자 시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도덕적 그리고 합리적인 두 측면 모두에서 지배자가 아니라 협조자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역으로 우리가 모든 논리적 규범들처럼 모든 도덕적 규범들도 협동의 산물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깨달았을 때, 양심과 지성이라는 두 가지를 모두 발달 시키기 위하여 전적으로 생물학적 본능에만 의존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학교 안에 공동으로 실행된 개별적인 실험과 숙고들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균형을 잡아 줄 수 있는 하나의 장소를 창조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윤리학과 도덕교육1. 박병기 추병완 지음 인간사랑에서 재인용 P303)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사회제도를 제거 하고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다면 교육의 혁신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그 혁신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답은 사회주의노동자당의 강령이다. 강령은 구체적으로 그러나 너무 개별화 시켜서는 강령의 의미는 퇴색될 것이다. 교육에 대한 각 정파들의 개념들은 정치·경제적 논리에 밀려 보여주고 있지는 않다. 언젠가는 해야 할일이다. 세계의 역사를 들어다 보면 혁명적이 열기에 가장 선두에 서왔던 사람들은 젊은이들이다. 젊음사람들이 선두에 서왔던 경우는 아직 계급사회의 물이 덜 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의 활동 에너지가 넘쳐흘러가는 세상을 건설하기위해서는 교육강령의 내용도 시급하다. 생산의 국유화나 사회화 그자체로는 인간의 노예상태에서 작은 변화를 일으키는 필수 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사회의 정치·경제적 과정을 인간 사회의 본질로 중요시하는 것은 아동과 청소년의 보육을 밥만 주면 된다고 취급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인간은 밥만 먹고 살진 않는다. 스탈린의 시대가 계급사회의 원문화적인 요소인 권위적인 사회로 퇴행한 것은 생산성의 향상을 위한 순수한 경제적 생활상 때문이었다.

 

정치·경제와 더불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충분한 문화적환경과 그를 받쳐주는 교육이다. 교육은 삶의 지식을 알려주고, 우리가 나가야하는 모습을 밝혀주는 본래의 참뜻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럴때만이 자유로운 노동민주주의사회가 만들어져 나갈 것이다.

 

8. 글을 마치면서.

 

아랍에선 민주화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으나, 세계적으로 노동계급들은 자본주의의 모순의 정점에서 분을 삯이고 있으며, 참고 참고 아직도 참고 있다. 노동운동의 수동적인 태도는 계급사회의 관습과 학습에 의한 효과이며, 주체적인 능력은 결여되어 있다. 자유는 삶의 모든 기능 속에 자발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노력하여 성취해야 하는 것이기에 자유의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참아 왔던 자신의 자유와 생존을 위한 폭발은 하나의 계기를 통하여 나타날 수 있지만,도화선은 어디서 찾아 낼 수 있을까? 억압과 착취를 하나의 계기를 통하여 폭발하기 위해선 그 동안의 그러한 불만이 얼마나 많이 누적되어야만 했던가? 계급사회의 미덕은 지배계급이 사회를 유지하는데 불만이 있다면 지배계급의 발전을 위한 비판적 지적이야 함을 늘 강조해 왔다. 지배계급을 위한 비판적 내용은 권위적인 독재자에 대항해 자신을 보호하기위해선 스스로를 타락시켜왔던 것이 사실이다. 합법적으로 활동한다는 노동운동단체들의 쁘띠부르주아적 계급주의 사상과 더불어서 기회주의적 조류로 변모하는 대부분의 모습은 자신의 생존만을 위한 조직이기주의로 바뀌어 갔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자유를 부르짖는다는 것은 억압된 상태가 있다는 반증이며, 생존을 위한 발악은 착취를 당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생존을 위하여 억압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계급사회의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자유로워질 능력이 없는 인민대중들이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선 자신들이 권력을 가져야만 한다.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권력이 없으면 진실은 아무소용이 없다. 그 진실은 학문적인 것에 불과하다.····· 진실의 추진자가 사회적 권력을 획득하면, 그 진실이 항상 소멸한다는 것은 여가적 사실이다. ‘권력’은 항상 다른 사람들의 복종을 의미한다. 그러나 진실한 사실들은 언제나 복종이 아니라, 확신에 의해서만 관철된다.”(파시즘의 대중심리. P449)

 

인민이 자주적인 활동을 시작하고 있는 아랍에서의 혁명의 열기가 한국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대중을 투쟁으로 이끌어 나가야 하는 것은 사회주의자들의 의무다. 무엇이 한국의 노동계급의 운동을 폭발시킬지는 아직은 모른다. 어떠한 흐름을 가지고 시작되어 질지도 모르는 것은 사실이다. 민주주의의 열망이 87년 노동자투쟁의 기폭제가 되었듯이, 지나가는 촛불시위와 강렬했던 쌍용자동차점거파업도 기폭제가 되지 못했다. 대중은 열망은 있으나 빙산속의 불길이며, 한발 한발 전진하고 있지만 영원히 거북의 뒤꽁무니를 쫒아가는 형색이다. 시작은 했지만 아직도 안개 속에서 헤매고 있는 형국이다. 현재의 투쟁의 중심은 어디이며, 누가 선두에서 그 힘을 발휘 할 것인가? 누가 혁명의 수레를 이끌어 갈 것인가? 마지막까지 갈 수밖에 없는 자는 노동자들이지만 그 힘의 도화선을 잡아당길 수 있는 계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은 동지들이다. 강령으로 사회주의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대중의 현실을 그렇게 만들어 보자.

 

9. 사족

 

문제가 되었던 학교위원회에 학부모의 참여가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답은 충분히 설명이 됐다고 생각이 된다. 학부모의 참여를 원하는 사회주의 그룹들은 하나의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가족의 해체가 급속하게 이루어지는 과정에 있다. 계급사회의 가족의 해체는 학부모의 학교위운회의 참여는 없어지게 되고, 학부모의 학교운영위의 참여는 계급사회의 가족관계가 해체되지 않은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과도강령의 이름으로, 이행기강령의 이름으로 다리를 놓는 의미로 봐야 한다고 주장할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사회주의로 가는 이행적 과정에서의 일시적 상태에 존속하며, 권위주의적 가족의 의미는 혁명의 진행 중에 이미 계급사회의 이데올로기는 와해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너무 협소한 생각은 현재를 바탕으로만 두고 판단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혁명의 진전은 계급사회의 폐기물을 없애기는 하지만, 완전히 없애지는 못한다. 그러나 가족관계는 변화한다. 어떠한 변화이든지 기존에 존재해 오고 있는 계급사회, 자본주의사회의 가족관계와는 다른 모습으로 출현하게 될 것이다. 추정은 하지만 구체적인 모습은 아직 모른다. 여성해방의 모습, 모계사회의 전통을 갖추게 될 것인지, 어떠한 사회의 모습이 그려지게 될 것인지 모른다. 가보지 못한 미래에 대해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미래는 현실로 오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과도강령은 사회주의와 현재의 자본주의사회를 연결시켜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 최대강령의 의미와 최소강령의 의미를 함께 어울리고, 사회주의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대중을 사회주의 사회를 위한 전선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다. 강령은 명확해야 하며 추상화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거짓으로 유포하거나, 대중을 기만행위하거나 유토피아의 모습을 보여주어선 안 된다. 강령은 미래의 현실을 보여주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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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학교는 계급사상을 유포하거나, 학생 자유와 협동을 전제한 교육의 방식이 아니라 남한 사회의 성적위주의 학교방식에 반발해서 나온 하나의 모습일 뿐이다. 학교교육에 생태 교육적 방식중 하나의 부분으로써 농사를 체험하고 자연이 인간에 얼마나 소중한 것이며 함께하고자 할 때 자연이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삶을 윤택하게 해줄 수 있다는 보여주는 것을 통하여 시험과 성적이 아닌 다른 모습에서의 교육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 아닌 교육은 자본주의 사회에도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면 이러한 방식으로 살아가야하는 것을 가르쳐주고, 자본주의사회가 이러한 모습으로 바꾸기를 원하면서 만들어 낸 쁘띠부르주아적 사고방식의 걸작품이다. 이 학교의 진보적인 측면은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강화하고, 발전 시켜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 한계는 자본주의의 내적비판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교육은 양질의 문제가 아니며, 형식의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핵심적인 사항은 능동적인 인간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안학교가 비록 일시적으로 학생들을 능동형으로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전체 학사일정에 따르는 일반적인 교육체계에 혼합이 되어선 그러한 모습은 사라지게 된다. 자본주의발전이 아무리 인간적인 모습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이윤을 위한 생산과 통제가 사라지지 않는 한, 교육은 대다수의 청소년의 반항적인 모습은 사라지고 수동적인 모습으로 전락하게 만든다. 그런 교육이 계급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켜왔던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대안학교가 무수히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아니 초등학교 중등학교의 핵심이 대안학교의 모습을 가지고, 서구유럽의 일부나라에서처럼 시험제도가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계급구조가 무너지지 않은 교육의 모습은 하나의 맹아적인 형태를 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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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2 15:04 2011/04/22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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