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력이란!

 

1. 이 글을 쓰게 된 동기

 

이 글은 해방연대의 정치학교 교과서 중에서 생산력의 요소 중 노동력과 노동수단을 포함하며, 노동대상은 제외한다고 설명을 했다. 교과서에 그렇게 제시되었고 강사들 또한 대상은 생산력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설명을 해주었다. 본인은 그 내용에 반발을 하고 생산력에 노동대상이 포함된다고 주장하였으나, 계속적인 주장은 수업에 주장을 준다고 판단을 하여 지속적이지 못하고 한 두 차례의 제기만 하는 것으로 넘어 갔다. 물론 본인이 적극적인 문제제기를 적극적으로 하지 못했다는 점과 강사들의 설명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겉돌고 있어 다시금 본인의 주장을 강조하고자 이글을 쓴 것이다.

 

실제로 철학책을 보거나 사전을 뒤져보면 가끔은 노동대상을 생산력에서 제외시키는 경우가 있다. 80년대 말에 나온 중원문화사의 철학사전을 보면 “물질적 생산에 있어, 인간이 자연에 대하여 이것을 이용할 수 있는 정도를 가리키는 표준이 된다. 이것에는, 한편에 노동하는 인간, 그들의 생산에 대한 경험이나 숙련 그리고 지식이 있고, 다른 한편에 인간이 생산에 사용하는 노동수단이 있다. 생산력이란 다시 말하자면 이들 양자의 통일이다.”라고 생산력의 정의를 표현했다. 그러나 이런 내용은 스탈린의 견해를 단순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스탈린은 자신의 저서인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에서 “···· 사람들은 음식, 의복, 신발, 주거지, 연료 등을 생산하는 생산도구를 가져야한다; 그들은 이러한 도구들을 생산할 수 있어야하며 그것들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물질적 가치들을 생산하는 생산도구, 일정한 생산경험과 노동숙련으로 생산도구를 작동시키고 물질적 가치의 생산을 수행하는 사람들 - 이모든 요소들은 공동으로 사회의 생산력을 구성한다.”(스탈린 선집2 P141 전진출판사)라고 주장을 하였으며 이 책자는 세계 공산주의자들에게 모범적인 교과서였으며, 중국공산당의 모든 당원들에게 읽혀졌다. 현재 교과서와 강사들의 견해도 이와 비슷한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한층 더 나아가 섬세하게 노동대상은 자연물의 형태를 지니고 있고, 그것은 자연적인 대상이므로 포함되지 않는다고 제시했다. 물론 스탈린의 철학적 사상이 무조건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런데 오류가 있으면 고치면 되는데, 고치지 않고 그대로 답습을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본인은 승복할 수없는 내용이며. 이에 생산력에 노동대상이 왜 들어갈 수밖에 없는지 설명을 하겠다. 이글은 본인이 잘못 이해한 내용일수 있지만 그러나 역사적 유물론의 사상적 발전을 위한 한걸음이 될 것이다.

 

2. 생산

 

생산은 자세히 하자면 물질적 재화를 만들어 내는 것 이라고 한다. 인간만의 고유한 것이 아니며, 동식물들도 생산에 한축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생산일반이란 생산의 특유한 사회적 형태와는 관계없는, 생산의 기본적인 일반적 특징들의 총화로서의 과학적 추상이다. 이 특징들이 생활상의 재화라고 하는 모든 생산에 고유한, 그리고 인간사회의 진보를 위해 필수 불가결한 경제적 조건에 대한 개념을 제공한다. 이러한 생산은 결국 인간이 자연력과 자연대상들에 작용하여 그것을 인간의 임의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변화시키는 과정이기 때문에 개인이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또는 사회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개인으로서는 자연에 대해 무력한 존재이며, 자연을 계속적으로 헤쳐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개인이 아닌 공동체가 존재할 때, 사회적인 힘으로 자연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사회적 생산은 공동체내외의 분업을 필요하게 하며, 인격적, 육체적 지역적인 모습을 통하여 분화되어 나갔다. 첫 번째 분업은 남녀 간의 분업이며, 두 번째 분업은 공동체간의 분업이다. 이러한 분업은 인류의 생산능력을 향상시켰으며, 인류문명의 진보적인 발전의 물질적인 기초로 된다. 생산에는 3가지 요소가 존재한다. 노동력, 노동대상 노동도구이다.

 

인간이 생산을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생산을 하는 목적은 기본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것이며, 생산방식은 늘 변했다.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해서,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누리고자. 이전 시기와는 다르게 자본주의 시기는 생산의 목적은 이윤을 위해서 이고 잉여가치의 실현을 위해서이다. 이윤의 동기 없이 생산은 이루어 질 수 없으며, 그 동기로 인해 자본주의사회가 유지된다. 생산을 하게 되면 생산물이 나오게 되고, 이러한 결과는 사회적 생산양식에 의해서 생산물의 모습은 사회에서 원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물은 상품으로 가치를 가진다. 계급사회의 마지막 후손은 노동과 생산을 분리시켜 이원화를 완성한다. 생산적인 것이 노동이지만 노동이 곧 생산은 아니다. 그러나 생산적이지 않는 노동도 사회의 발전엔 필요한 법이기에 이용은 계속적으로 이루어지고, 특히 지배계급에게 봉사하는 노동이 주를 이루고 있다. 가사도우미, 정원사, 개인경호 및 경비 등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법인의 형태가 아니고, 개인적인 고용으로 그 형태를 유지한다. 잉여를 창출하지 못하는 노동은 생산적 노동의 모습을 가질 수 없다.

 

생산의 구체적인 모습은 무엇일까? 생산은 대상을 재화를 만드는 총체성을 가진다. 하나가 다수에게 공통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모두에게 공통이 되는 그러한 가장 풍부한 구체적인 발전으로 등장하므로, 구체적인 모습은 사상하고, 특수한 형태로만 사유가 되지 못함으로써 생산은 추상성을 가진다. 생산은 생산의 일반적인 추상들이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생산으로서 공통적으로 되는 그러한 풍부한 구체적인 모습을 가지고 등장한다.구체에서 추상의 발전은 역사적 과정이다. 그러한 인식의 발전에서 추상은 더 이상 특수한 형태로만으로 사유될 수 없다. 그러므로 생산은 추상적인 모습을 가진다. 맑스가 이러한 추상을 변증법적인 dsltrl을 통하여 구체성을 밝혀 낸 것이며, 이것이 역사적 유물론의 핵심이다. 생산의 추상성을 구체적인 모습으로 표현된 것이 생산력이다. 생산이 생산으로 나타나고자 한다면 생산력이 존재할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생산과 생산력의 관계에 대해선 추후에 설명하도록 한다.

 

3.노동력

 

이 글에선 노동과 노동력의 차이를 아직도 이해를 하지 못하는 동지들을 위하여 복습과 함께 개념을 정리하면서 시작하도록 하자.

 

생산 활동은 노동이다. 생산과 노동은 차이가 존재하지만 인간의 활동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고, 생산적 노동으로써 통일적인 뜻을 가지는 것은 하나의 생산양식에서이며, 각 생산양식에서의 생산의 의미는 특수성을 가진다. 그러나 하나의 일관적인 내용을 견지하는 것은 인간에게 유익한 활동을 전제로 하며 이는 부를 존재하게 만든다는데 있다 이 부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인간생활에서의 부란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나타나며, 욕구의 다양성을 충족시켜주는데 있으므로 상대적인 개념으로 나타난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부란 한편으로 물적 생산물, 즉 상품으로써 인간이 주체로서 마주서는 사물들로써 나타나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적 향유 등을 목적을 위한 타인 노동에 대한 단순한 통제이다. 원시공동체사회에서의 부란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같은 뜻으로 쓰이지만, 계급사회에선 부란 사치를 포함하여 자연 생태계에 혼란을 야기한다. 사치는 사회경제적인 모습에서 일시적으로 부의 과시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생산력의 발전에서 보편적으로 인간이 누려야하는 생활양식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부르주아들에게 사치는 어느 정도 필요한 것이지만, 노동자에겐 실제적인 충족을 희생함을 강조하고자 절제, 저축, 소비절약을 요구며 특히 근면과 성실이라는 단어들을 노동자에게 제기되며, 특히 자본가에 의해 제기된다. 이것이 노동자에게 주어진 유일한 치부 형태이다.

 

생산 활동이 노동이지만 노동이 곧 생산이 아닌 사회가 계급사회이다. 생산적이지 않는 노동이 필요한 사회가 계급사회인 것이다. 대표적으로 가족들이 생활하는 곳에서 여성들이 하는 일이다. 가정이라는 틀에서 개인적인 활동은 사회적으론 생산적인 모습을 보일지라도 계급사회의 동력으로 나타나는 사회생산력의 형태가 아니다. 이것이 해방이 되고자 한다면 가족 내의 노동은 사회노동으로 변화가 되어야 한다. 이 노동이 생산적인 노동이냐 비생산적인 노동이냐는 생산양식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사회적 노동이냐, 개인적인 노동이냐 하는 구분도 포함이 된다.

 

노동은 인간의 합목적이고 의식적인 활동이다. 동물들은 가지지 못한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자질이다. 노동은 노동으로써의 구현이 되고자 한다면 노동(능)력으로 나타나며, 노동과정(생산과정)의 모습에서 노동은 노동력의 소비를 통하여 자연대상들을 변화시킨다. 노동의 구체화된 모습은 노동력인 것이다. 노동력이 추상화되어 노동력에 대한 개념들의 발전은 노동의 형태를 취하며, 노동력을 노동의 주체적인 모습으로 변화를 시켰다. 노동을 소비하는 것, 구체적인 모습을 가지며, 사회 생산력의 하나의 자리를 잡는 것이 생산이 실현되는 곳에 있는 것은 생산물이 이다. 노동과 노동력의 차이는 추상적이냐, 구체적이냐에 의해 나타나며, 노동력의 추상적인 모습이 노동으로써 보편성을 가진다. “노동력은 반드시 표준적인 조건하에서 기능해야 한다.”(자본론1 P239 백의출판사)

 

“ 노동력 또는 노동능력이라는 것은 인간의 유기체 속에 즉 산 사람 속에 존재하는, 또 그가 그 어떤 사용가치를 생산할 때에는 언제나 발동시키는 육체적 및 정신적 능력의 총체를 의미한다.”(자본론1 P203 백의)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은 노동이 임금노동으로 변화함으로써 노동의 가치는 사라지고 노동력의 가치만이 남는 것이 그 이유다. 노동력의 사용은 일정한 사회적 결합 속에서만 가능하며, 구체적인 노동력의 사용은 분업이 최고로 이루어진, 그래서 생산의 사회화가 고도화되어 생산과정의 사회화로 이루어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용가치를 임금으로 받는 것으로 표출되며, 그 노동을 노동력으로 구체적으로 대상화 시켰다. 생산과정의 사회화는 다양한 활동형태들의 독자성 증대에 따라 한사람의 인간의 노동력은 자신의 개별적인 특수성을 유지, 발전시키면서 사회적 성격을 보다 많이 띠게 된다. 임금노동자는 원하는 직종에 자신을 맞춰 가면 되고, 적성에 맞는 일을 찾으라는 것 - 이것은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드리기 위한 하나의 술책이다. - 으로써 직업의 다양함을 선전한다. 직업의 다양함은 노동이 구체적인 적용을 표현하며, 생산의 사회화가 고도화되어 생산과정의 사회화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자본주의사회의 모습에선 노동력의 의미가 하나의 직종과 직업별로 특성화하여, 노동이 직접 구현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기계공, 용접공, 제어, 디자인 등등 세분화된 부분은 노동력의 모습을 일정정도 왜곡시켜, 노동력의 의미를 노동의 구체화된 모습이 아니라 전문적인 일을 하는 분업적인 모습으로 보여진다. 노동이 실현되는 모습은 노동력이고, 노동력의 사용은 노동 그 자체이다(자본론1 p217 백의출판사). 생산과 생산력의 모습에서도 이렇게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노동력은 생산의 인적 요소이다. 사회 생산력의 주요한 부분으로써 생산에 창조력, 기획, 생산량의 조절 등등, 생산에 전반적인 흐름을 제어하고 증대시키는 역할을 담당하는 요소로써 능동성을 가진다. 생산에 과학기술을 접목 시키면서 보다 높은 생산력을 담당하였고, 이는 생산과정의 사회화를 더욱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생산수단의 발전은 인간을 직접생산의 현장에서 몰아낸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만, 인간의 역할을 더욱 확대되어져, 총괄적인 모습으로 등장하여 생산의 현장과 더욱 밀접하게 연관이 된다. 자동화는 재화의 필요노동시간을 단축시킴으로써 인류의 여가시간의 활용을 확대 시킨다. 여가시간의 확대는 과학, 문화의 발전에 또 하나의 계기가 된다. 이는 사회의 재생산에 도움을 주고 역으로 생산력의 발전을 위한 밑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4. 노동수단

 

노동수단은 인간과 노동대상사이에 놓여 그 대상에 대한 인간의 작용을 안내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물건 혹은 그 대상들의 결합체이다. 초기에 노동도구는 자연에서 상징적인 부분을 축약하여 발전 시켰다. 칼 망치 창 활(활은 나중에 생산되었다) 등등은 인간의 신체를 연장하거나 자연에 있는 그대로의 무기로써 사용하였다. 발전은 석기에서 철기로 단순화되었던 모양을 사용하기 편하게 만들었으며, 더욱 강한 재료로 변화 시켰다. 근대에 들어서 노동도구의 모습은 변화가 되어 비로소 노동도구의 모습이라고 하는 기계의 형태를 띤다. “기계적(노동)수단 즉, 그 총체는 생산에서 근육골격계통이라 말할 수 있는 생산용구이다라고 맑스는 지적하였다”(세계철학사Ⅲ p73 녹두출판사)

 

노동수단은 생산에 직접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기획과 통제를 인간이 하지만 노동시간당 생산물의 양은 노동도구의 개량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무엇을 생산하였는가 보다는 어떠한 도구를 가지고 어떻게 작업을 하느냐에 따라서 단위 생산량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특히 기계제 산업의 발전은 그 차이를 극명하게 들어냈다. 노동도구(수단)의 발전은 생산성의 향상에 거대한 흐름을 주었으며, 생산력의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노동수단은 인간의 노동력의 발전 수준을 알수있는 측정기이자 기준점인 이유가 살아 있는 노동을 대상에게 끊임없이 주입하여 생산물에 대한 필요노동시간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노동수단의 발전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극대화 되고 있다. 노동수단은 직접적인 형태와 간접적인 형태로 생산력에 영향을 미친다. 직접적인 모습으로는 대표적으로 기계, 자동차, 자동화설비 등등의 것이 존재하며 간접적인 부문으로써는 항만, 도로, 생산용 건물, 통신 등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자본의 빠른 회전도 생산력의 발전의 한 요소이다. 노동수단은 자본 중 고정자본의 역할을 하며, 상품에 가치를 한 번에 전가하지 않고 일정한 비율로 가치를 전가한다.

 

5.노동대상

 

이 내용은 생산력에 왜 들어가는 가에 대한 설명이다. 특히 녹두출판사의 세계철학사에서 “생산력의 개념에 노동력과 노동용구와 나란히 노동대상을 포함시키는 것이 있다. ······· 인간은 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자연력과 자연물을 이용 할 뿐이다. 그러나 자연에 의해 주어지는 노동대상, 예컨대 땅속의 광석 · 석탄 · 석유 그리고 저수지의 고기, 숲과 나무, 태양 · 바람· 폭포의 에너지 따위는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수준을 정하는 척도가 될수없다. 그것은 필연적이고 향상적이며 비교적 변화하지 않는 생산 제조건이지만, 그것을 통하여 사회발전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회진보의 기준이 될 수 없다.”(P74~75) 라고 했다. 대상의미를 이해하진 못한다고 하더라도 생산력의 발전기준으로서 노동대상은 포함될 수 없다라고 나온다. 대상은 발전의 기준은 아니다. 어떠한 생산물이 나왔다는 것으로 기준을 삼지 않는것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재료, 원료를 가지고 생산되었는가를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결과만을 가지고 한사회의 발전정도를 파악할 수는 없다. 우연적인 형태로 생산의 결과물이 나올 수 있고, 우연이 필연이 되기 위한 제 과정을 무시하고 우연적인 부분만이 강조되는 사회적인 모습을 투영한다면 그것은 영웅주의를 양산하는 기초가 된다. 우연이 필연이 되고자 한다면 사회의 생산력의 발전을 위한 우연적인 모습이 중복되어 하나의 과정으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 과정은 생산의 모습을 보여주고, 생산은 생산력의 발전으로 표출된다. 여기선 두 가지의 의문이 생긴다. 자연적 모든 대상을 노동대상이라는 것으로 써 나타나는가? 두 번째는 노동대상의 정의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맑스는 고타강령비판에서 부의 원천은 자연과 노동이라고 강조를 했다. 자연에 있는 제 요소들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는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자연의 풍부한 혜택을 중심으로 인류의 문명이 발전 되었듯이 자연은 존재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의 문화의 발전의 모습을 보여준다. 초원지대에선 목축을 중심으로, 하천을 중심으로 농경과 어로 활동의 모습으로, 자연적인 혜택은 그 지역적인 문화를 낳는다. 그러나 자연적인 대상은 대상 그 자체일 뿐이다. 감나무 밑에 누워서 감이 떨어지기를 바란다면, 어느 세월에,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맞춰질 것인가? 자연은 인간을 풍요롭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존재는 되지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부의 요소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 재능이 있어도 사용하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선각자(맑스)의 말을 잠시 인용하도록 하자.

 

“ 대상이란 일단 대상일체가 아니라 생산자체에 의해 다시 매개되는 일정한 방식으로 소비되어야 하는 일정한 대상이다.”(정치경제학 요강1 P61 그린비)

 

첫 번째로의 의미, 즉 자연적인 대상이 바로 노동대상은 아니다라는 의미다. 지하자원인 있다고 애서 가만히 두고 있다면 그 자체는 대상일반이라는 것 일 뿐이다. 주머니의 구슬도 꿰메야 보배가 되듯이 자연적인 대상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대하여 노동대상으로 변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자연적인 대상은 인간의 생존에 알맞게 재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물고기는 잡아야하는 것이고, 과일은 채취하고, 동물은 사냥해야한다. 이 모든 것은 생산의 시작이다. 자연적 대상을 대상화하여 인간의 생활에 윤택하게 만들어가기 위한 노력이다. 이런 생산적 요소는 당장 노동이라고 하기에는 좀 미흡하다. 생산의 발전은 우연적인 요소로 인해 인간을 노동하는 존재로 만들어 동물과 분리시킨다. 채취 상태에서 농경사회로의 전환, 도구의 발전으로 대상을 대상화 할 수 있는 능력으로 만들어 갔다. 타제석기가 마제석기로 그리고 금속용구로의 변천은 잔연적인 모습의 도구를 점차 변화시켜 깨뜨려서, 그리고 갈아서 돌을 제작함으로써 생산활동은 노동으로 변했다. 돌을 있는 그대로 사용한다는 것은 자연적 대상이지만 돌을 갈아서 하나의 도구로 제작한다는 것은 노동대상으로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 가는 것을 노동대상이라고 한다. 노동대상이란 자연적 모든 대상으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닌 인간의 노동에 의해 생산물이나 생산물의 변형에 도움을 주며, 자신의 가치를 일순간 전도시키는 대상을 의미한다. 생산력의 발전에서 자연적 대상을 노동도구를 매개로 하여 생산된다. 예를 드어 광산업, 수산업 등등의 재취업이 그러하다. 대상이 존재할 때 결과물이 나오며, 결과 없는 원인은 없는 것이다. 대상은 인간의 생활에서 생산적 소비를 위해서 사용이 된다. 자본주의사회에선 노동대상은 자본의 한축을 이루며, 자본주의생산의 상품으로써 자신의 얼굴을 바꾼다. 자신의 가치를 일시적으로 투입을 하여 자신의 모습을 바꾸는 유동자본의 하나로써 주로 재료 - 원료도 대상으로 취급한다. - 를 의미한다.

 

또 하나 노동대상으로서의 토지가 존재한다. 부의 원천이며, 자본론에서 토지는 가치를 생산한다. 토지는 높은 생산력의 자연적 기초이기 때문에 초과이윤의 자연적 기초이다. 지대가 잉여가치에 포함이 되지만 이윤에 포함되지 않는 이유가 그러한 것이다. 자연력에 의한 초과가치의 창출은 대지를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권력을 부여했고, 자본주의근대사회에서 지대로 나타났다.

 

“지대의 독특한 특성은 농산물의 가치(상품)로서 발전하는 조건들과 함께 그리고 농산물의 가치의 실현조건들과 함께 토지소유의 권력도 발전하여 토지소유와 참여하지 않고 창조되는 이 가치 중에서 더욱 더 많은 몫을 차지하며 잉여가치 중에서 더욱 더 많은 몫이 지대로 전화된다는 데에 있다.”(자본론3-2 P795 백의출판사)

 

토지는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으로서의 두가지 모순적인 모습을 가진다. 자연적인 모습으로 원시림, 지하 석탄, 건물을 지을 때 등등 대상으로써 자리를 잡아 부의 어머니의 모습을 가지고, 농업적인 부문에선 토지는 수단으로서 자리를 잡아 비옥도를 높이는 일을 할 때, 목초지를 조성한다든지 등등의 모습에선 노동수단으로써 자리를 잡는다. 이런 관계로 생산수단에서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을 굳이 분리시키지 않고 하나의 모습을 가진 것으로 표현한다. 자본론에서 주로 생산수단의 내용을 사용했지 노동대상을 제외한 노동수단의 의미만을 장조하진 않았다.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의 구별에서 조차도 노동대상은 늘 함께 해왔다.

 

6.생산수단

 

생산수단은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을 합쳐 부른다. 자본으론 불변자본으로 표현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와 소유하지 못한 자들 간의 투쟁이다. 생산수단을 소유한다는 것은 사회의 부를 점유 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며, 생산에서의 생산물의 분배에 대한 관계를 규정한다. 생산수단의 사적 점유는 분배에서 경제적인 불평등으로 존재한다. 생산수단의 소유에 대한 관계로 인간과 인간관계가 만들어지는데 이를 생산관계라고 한다. 생산관계는 분배의 형식을 둘러싼 인간관계로 나타난다.

 

7.생산력이란 무엇인가?

 

생산과 생산력의 차이는 추상과 구체와의 차이만이 존재한다. 생산은 인간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존재하는 동물과 식물들은 자신들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생산을 하는 종류가 무수히 많다. 열매를 만들어 낸 과실수, 중남미의 어느 개미들은 나뭇잎을 발효시켜 거기서 나오는 영양분을 주식으로 삼는 것, 벌들의 꿀을 채집하는 일 등등 무수히 많은 생산은 일어난다. 인간과 동식물들의 생산과는 다른 것은 인간의 노동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생산은 노동이 지배하는 한, 생산은 자연적인 모습에서 멈추고 노동과 생산은 이원화 되어 하나로 통일한다. 생산은 노동 없이 이루어지고, 노동은 생산 없이 이루어진다. 자연적인 생산이 아닌 인간사회에서의 생산은 인간의 노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노동이 구체화될수록 생산은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진다. 추상은 구체를 통해서 자신을 발현하고, 구체는 추상을 통하여 영역을 확장 한다. 생산의 영역이 확장 될수록 노동의 영역도 넓어지고, 노동이 노동능력으로 표출될 때 생산은 자신을 구체적인 모습으로 보여준다.

 

대부분의 책에서 생산과 생산력의 차이를 그다지 구분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추상과 구체의차이이기 때문이다. 생산이 발현되는 현장은 생산력이 나타나는 모습이고 그것의 결과물로써 자본주의사회에선 상품이 존재한다. 추상과 구체는 단편적인 표현에서 추상은 사유고 구체는 현실인 까닭에 생산에 필요한 것과 생산력에 필요한 것의 차이는 없다. 생산은 생산력을 통하여 개별화되고, 보편적인 의미가 구체적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생산력은 물론 항상 구체적인 유용노동의 생산력이며, 실제에 있어서 소여의 기간 내의 합목적적 생산 활동의 효과의 정도만을 규정하는 것이다.”(자본론1 P52 백의 출판사)

 

생산력은 생산에서 노동의 효과를 표현하며,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생산물에 대한 표준필요노동시간을 의미한다. 즉 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생산력의 발전은 인간의 생산물에 대한 필요노동시간의 단축이며, 그것을 규정할 수 있는 것은 노동수단의 발전이며 - 특히 기계제 산업의 발전에서 더욱 두드러지며, 외화 된 모습에선 생산성의 향상으로서 단위 생산물의 양의 증대를 나타낸다. 이러한 내용을 가지고 자연물, 자연력과 인간의 관계를,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표현한다. - 인간의 협업은 생산력의 또 다른 모습이다. - 생산력의 성장은 살아 있는 노동으로 구성된 생산수단의 지출된 부분의 끊임없이 감소하는 것으로도 표현할 수 있다. 생산이 생산력이기 위해선 구체적인 제 현존들이 있어야 하며, 그 중 하나가 빠지면 인간 생활에 윤택함은 사라지고 빈곤함이 남을 뿐이다.

 

생산력의 발전은 끊임없는 생산성의 증대로 표현되며, 이는 노동수단과 노동대상인 생산수단의 계속적으로 질과 양의 증대를 필연적으로 만들었다. 생산력의 발전은 노동능력의 양과 노동생산력을 확대시켰다. 자본구성이 높아지므로 더 많은 양의 생산수단을 더 적은 양의 노동으로 가동시킴으로서 총생산물의 각 부분, 및 상품들의 각각의 단위들은 산 노동을 적게 빨아 먹는 것으로 나온다. 필요노동시간의 단축은 자본주의사회에선 잉여시간의 증대로 나온다. 이윤은 자본이 존재하기 만드는 필수적인 이유다. 자본주의가 생산력의 비약을 이룬 것은 자본이 이윤을 확대하고자 하는 본능 때문이지만, 이는 자신의 무덤을 파는 덫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생산에 의해 자본이 자본의 모습으로서 자리를 잡기 때문에 자본은 생산력의 형태와 일치한다. 즉 생산은 자본주의 사회에선 생산력이 자본으로 자신의 추상성을 구체화시킨다. 자본의 발전이 생산력의 발전과 같은 형태로 보인다는 것이다. 자본의 발전 및 집중은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 무계급사회의 물질적인 토대를 만들었다.

 

8. 글을 마치면서.

 

부, 즉 사용가치의 원천은 자연과 인간의 노동이다. 노동도구와 노동대상은 생산수단의 모습을 이루고 생산수단은 자연에서 유래되어 온다. 자연으로써 노동의 대상이 노동수단으로 된 것은 망치 창 칼 그릇(토기) 등등만이 존재하며 토지는 형태적으로 변함이 없지만 노동대상과 노동수단과의 경계를 노동의 역할에 따라서 변화가 이루어진다. 인간의 생활을 윤택하고자 했던 수많은 노동과 생산은 계급사회의 벽에 부딪혀 왜곡되어 부는 생산수단을 가진 자들에게 편중이 되어 간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한자, 더 많은 것을 가져 갈수 있는 권리가 있는 사회. 계급사회는 인간의 존재를 동물보다 더 비참한 존재로 만들어 왔다. 부란 소재적인 측면에서 욕구의 다양성을 해소시켜주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부를, 물질적인 윤택함을 얻고자, 많은 것을 희생 해 왔다. 이윤의 이름으로.

 

글이 이렇게 길어질지는 몰랐다. 간단하게 2~4페이지 정도로 끝내고자 했는데 ······. 두서없이 기획하고 써내려간 글이다 보니 다소 글의 문맥이 안 맞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노동대상이 왜 생산력에 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으론 충분하리라 믿는다. 대상을 자연의 모든 대상으로 바라보고, 자연력을 이용하지 않는 것, 그 자체에서 노동대상으로 바라봤던 내용들, 특히 소련의 철학교과서들에서 나오는 오류를 그대로 답습하는 모습은 다시 한 번 더 고민하게 만든다. 소련교과서 중에서 재미있는 것은 정치경제학교과서는 노동대상을 생산력에 포함한다는 것이다. 철학은 포함이 안 된다고 주장을 하는데 정치경제학교과서는 포함된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위에서 설명이 되었지만, 다시 한 번 더 강조한다. 노동대상에 대한 개념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봤다는 것이다. 왜 그런 일이 생긴 것일까? 철학에선 스탈린의 영향력이 더 강하게 작용되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젠 그런 실수는 없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또한 노동과 생산의 서로 다른 개념이고, 생산의 형식은 인간의 간여될 수도 있지만, 그 내용은 노동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오늘도 비가 오는 관계로 마음은 우울하지만, 밝은 내일을 생각하면서 이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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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4 12:33 2011/08/04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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