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콧 전술에 대하여

 

총선에서 대중은 부르주아정치 세력에게 자신의 신뢰를 보냈다. 끝까지 대중의 힘을 역이용하고, 선택과 포기를 강요하는 것은 선거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이다. 선택을 강요할 땐 이미 익숙하거나, 많이 알려져 있는 인물, 또는 자신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판단되는 정치집단에 대해서 선택권을 행사하며, 그것으로써 민주주의의 요식행위이자, 대중이 마치 주인으로써 보여주는 단 하루의 의미 있는 날로 이루어진다. 한국의 정치는 부르주아정치를 제외하면, 다른 색상을 인정하지 못하고, 그 싹을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공세 속에서 대중들은 스스로 다시 땅으로 묻어버린다. 언제나 선거는 부르주아들의 선택을 강요하는 형식적인 의미만을 가질 뿐이다. 선택은 마치 신뢰를 보내는 것으로 해석을 하고, 선택을 하지 않은 대중에겐 거부의 의사로 표현하지 않고 포기라는 단어로 정치일정의 마감 지워버린다. 그래서 50%의 대중은 부르주아에게 신뢰를 그리고 나머지는 정치에 무관심하고, 무책임하며 그래서 포기를 하는 것으로 하여 선거의 참여율이 한국에선 40%가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당선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대중의 과반수가 반대를 하여 다른 후보를 찍었다고 해도 결국엔 많은 표를 받은 후보가 당선되는 것은 선거의 한계성 중의 하나일 뿐이다.

 

대중은 자신이 선택 할 기회가 많다면, 그러한 기회를 살리기 위하여 적극적인 의사를 표현할 것이다. 스스로의 책임감을 가질 필요도 없고, 위험 부담도 없으며, 마치 자신의 견해를 밝혀 참여되는 환상에 사로 잡혀, 자신의 의지를 대리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의 환멸은 자신이 투표를 했지만 자신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자신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지 않을 땐, 마치 그자가 변했다고 판다 하던가, 아니면 내가 잘 못해서 찍어 주었다는 죄책감보단 그 놈이 원래 나쁜 놈인데 그것을 몰랐기 때문이다라는 변명을 자주 섞어 놓는다.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투표의 핵심은 자본주의 사회에선 계급투표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인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라는 명언에서 경제의 집중된 표현인 정치에서 대중은 자신의 이해와 요구라는 그 자체가 이미 계급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냥 남이 하는 대로 지배계급이 하는 정치일정에 자신의 힘을 일부 쏟아내는 것으로 끝내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보이콧이던 참여전술이던 이 부분을 가지고 전략의 승리를 위해 작은 국면인 선거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서 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정치일정은 부르주아들이 합법적인 공간에서 사용하라고 날짜를 박아 놓았다. 4년에 한번 5년에 한번 정도는 투표권을 가진 합법적인 대중은 누구나 투표를 할 수 있다. 투표를 통한 대중의 참여라는 것은 이미 형식화되어 있고, 대중의 투표참여와 대중의 견제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에 자신들의 이익이 실현되지 않는 것에 회의감은 참여율 저조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자본주의국가들의 전반적인 문제이며, 특히 한국의 경우엔 더욱 심각하여 50%가까이 투표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본인이 보이콧을 주장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투표참여율이 높아진다는 것은 정치에 대한 대중의 참여 의식이 고양되는 것이며, 이것은 대중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적에 대한 방어의식으로 나타나는 표출일 뿐이다. 일상적인 시기에는 그러한 부분은 나타나지 않지만, 대중들은 자신들의 투쟁이 강력해지고, 지배계급에 대한 환멸이 모아지는 상황에선 당연하게 그러한 모습을 드러내겠지만, 자신의 입장을 대변하는 계급적인 활동이 선거라는 공간에 없다면, 그 투표의 의미는 또 다시 희석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대중에게 투표로써 피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우리에게 자리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설득해야 한다.

 

사회주의를 외치고, 현실로 다가서고자 하는 동지들은 자본주의의 핵심을 파괴시키고자 한다면, 첫 번째로 의회주의의 사고방식을 탈피시키고자 대중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두 번째로 사법부의 권력을 약화시켜야하며, 세 번째로는 국가권력을 대중이 찬탈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대중들은 무의식적으로 의회가 지저분하고, 아귀 싸움의 장이라고 판단을 하지만, 대안을 가지지 못하여 막연한 기대를 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 대안은 혁명이다.

 

현재의 정세를 보자. 총선에서 과반수를 획득한 부르주아들은 대권이라는 희망의 노래를 부르고 있으며, 반MB전선으로 뭉친 부르주아들은 이전보다 선전한 덕에 이전보다 의석수거 늘어 과반에 근접했다. 물론 그에 호응한 자칭 진보세력이라고 하는 통합진보당을 부르주아세력

이라고 칭할 수는 없다. 소부르주아 세력인 통진당은 좌우익의 날개 곁에서 단물만을 빨아 먹

는 존재일 뿐이다. 그러다가 대중의 정치적인 각성이 이루어지기 시작할 때, 대중이 흘린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로 바뀔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소부르주아들의 패배로 결론지어질만한 사건으로 나타난 4.11총선의 후유증은 피지배계급에겐 부르주아들의 이데올로기의 영향 속에서 잔존하기는 하지만, 이미 선거를 통한 방식으론 해답을 찾지 못한 탓에 기대를 가지지 못하여 그들에겐 후유증은 없다고 본다. 부르주아들과 피지배계급은 누적되어온 선거의 모습에선 패배의 모습은 없으며, 좌우의 기회주의세력으로 단물을 빨아먹는 소부르주아들에게의 패배의 흔적인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도 잠시일 뿐이다. 언론노조들의 파업의 물고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으며 여타의 대중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스스로 떨쳐 일어나고, ㅁ물가 앙등과 MB정권에 대한 실망 및 저항의 불꽃은 계속해서 터져 나오고 있다. 이젠 침체기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현 시점에선 선거를 임하는 태도는 아직은 미동 적이다. 굳이 정할 수는 없다. 7~8개월 이후의 모습은 본인은 아직도 모른다. 하지만 대선에 대한 태도를 가지고 임하는 것과 정하지 못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며, 정세가 바뀐다면, 그러한 전술은 당연히 변화를 주어야 한다.

 

사회주의의 불꽃을 피어나게 하는 동지들의 충고는 따뜻하다. 미래의 일은 모르지만 과거와 현재의 상황에서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모습을 보았을 땐 대선에 대한 투표를 비판적으로 받아 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의회주의 환상과 국가의 환상에서 대중을 어떠한 계기로 그러한 부분을 깨뜨려 나갈 수 있는가? 주관적인 요인은 무엇인가? 사분오열된 사회주의세력 은 – 물론 당 건설을 위해 노력하는 동지들은 있으며, 그와 반대로 행동하는 동지들이 있기에 견해의 차이는 크다. 좌우익의 정치적 핵심은 자신의 적을 패퇴시키기 위해선 어떠한 조직체를 건설해야 하는지 그러한 조직체를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다시금 고민하는 것이 올바른 모습일 것이다. 대동단결을 외쳤던 80년대의 NL의 모습과는 다른 하나의 중지를 모아갈 수 있는 그러한 조직체를 만들고 그 안에서 진정 혁명의 길의 모습을 가져가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 적에게 도움을 주고, 역량을 분산시켜서 더욱더 위축되어있다. 총선에서 조차도 자신들의 후보를 내세우지 못하고, 대중들에겐 부르주아이데올로기의 유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선거의 입장을 포기하는 모습은 무엇을 보여 주었는가? 선거의 참여인가, 참여를 할 땐, 전제조건이 무엇인가? 노동자후보가 나왔는가? 나온다면 당선은 당연한 결과인가? 그 이유는 무엇일까?

 

선거라는 공간에서 의회주의환상을 가지는 것, 막연한 기대를 가지는 것을 부셔야하는 것은 사회주의자들의 의무다. 선거라는 공간에서 그런 환상을 제거하는 것은 대중이 권력을 직접적으로 탐내는 혁명적 상황에서 조차도 어려운 일이다. 습관적으로 이어져오던 계급사회의 지배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대중의 대리주의를 부셔야만 하는 상황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선거의 핵심은 대리주의를 양산하는 것이 골자이며, 누가 당선이 되었는지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개인적인 노력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그러한 노력의 결과만을 유추시키는 것은 영웅을 만들어 내는 것이면 또 다른 개인주의를 양산하는 결과이다. 문제는 대중이 어떻게 권력을 통제하고 유지 발전 시켜나가야 하는 것이다. 선거에서는 그러한 결과가 도출되지 않는다. 명망가, 대중에게 얼굴이 많이 알려져 있는 인물 – 그러한 관계로 아나운서, 연예인들이 선거에서 무지 많이 유리하다. - 들, 아니면 기존에 자리를 잡고 계속해서 나왔던 인물들 등등이 선거를 위한 핵심적인 요인이다. 그들이 당선이 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대중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기 때문은 아닌 것이다. 그들이 대중의 요구를 대변하게 하는 것은 선거의 당락의 의미가 아니고 그들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대중의 힘이다. 이러한 힘을 가질 수 있게 만드는 것, 그것이 선거에 임하는 사회주의자들의 의무인 것이다.

 

현재의 선거에서 사회주의를 외치고 실행하고자 하는 동지들은 무엇을 가지고 대중에게 선전선동을 하는가? 그것은 사회주의 강령이고, 대중의 기득권을 최대화 할 수 있는 생존권투쟁을 강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바로 위에서 제시한 것이며, 이것이 직접민주주의를 의미다. 누구를 뽑고, 누구를 지지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일부 형식이고 그 요체가 될 수 없다. 사람을 뽑는 것은 투표방식도 있고, 제비뽑기도 있으며, 사다리 타기도 있다. 투표를 제외한 다른 방식이 민주주의를 무시하는 것인가? 아니다. 동지들은 제도권의 교육에 의해서 투표의 힘에 습관적으로 굴복해 왔던 것이다. 그것이 지배이데올로기의 무서운 점이다. 습관은 그것이 과학의 형식으로 탈바꿈시켜 그 자리를 유지해야만 하는 중심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렇지 않다면 중독 증세에 따르는 후유증으로 고생을 하게 만든다. 일부 동지들이 제기한 선거라는 공간에서 대중에게 그들의 삶의 현장을 지켜나가기 위한 투쟁이 선거보다 더 우위에 있으며 그러한 투쟁으로 나가는 것을 설파한 것은 옳다. 그러나 선거에서의 입장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대중에겐 무엇을 이야기 한 것인가? 반MB전선을 이어가기 위해, 또는 새누리당이 과반수획득을 방해하기 위해서 투표하라고 이야기 할 것인가? 노동자대표가 만약에 존재한다면 똥 묻은 개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겨 묻은 개를 위해서 노동자대표를 중도에 포기를 시켜야 한다는 것인가? 아니면 투표라는 것은 부르주아들의 잔치이기 때문에 노동자대표도 없는 대중들에게 투표를 하지 말자고 할 것인가? 노동자대표가 하는 일은 반자본주의 전선을 확대하고, 피지배계급의 운동을 확대하며, 의회주의환상을 제거하며 국가권력을 대중이 잡아야함을 설파한다. 노동자대표는 존재하던 안하던 대중운동을 확대 재생산하기 위한 하나의 계기일 뿐이다. 목적은 아니다. 선거라는 공간에서 대중의 계급의식적인 선전선동의 공간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은 그 일환이다. 노동자의 대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만큼의 대중에 대한 담보 능력이 부족하며, 주체적 역량의 부족은 대중에게 지배계급과의 전선을 선거라는 공간에서 차별화 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차별적인 모습이 없다면, 대중에게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대중과 함께할 때 대중추수주의로 빠지지 않고, 또한 나를 따르라고 주장하는 독불장군의 모습을 보여주기 싫다면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가! 그러한 차별성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선거라는 국면에서 보이콧이라는 전술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전술의 모습은 굳이 전면화를 할 필요성은 없다. 다만 선거라는 공간에서 아직도 헤매고 있는 선진세력들을 위한 내용의 지침일 뿐이다.

 

오늘 아침에 혁명 8호에 나온 총선 평가를 읽어봤다. 여기서도 선거의 이후의 재편에 무게중심을 두었다. 이는 투표의 결과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본인이 늘 주장하듯이 이번 선거에서의 투표율 54.3%로 중요하지만 45.7%의 기권표도 중요한 것이다. 잠깐의 예를 들자면 노조의 행사결정에 투표율이 그렇게 나왔지만 그 투표율에서 5~60%가 넘는 선택으로 투쟁을 이어갈 때, 그 힘은 유지가 되는가? 왜 나머지 조합원들은 투표를 안 하는 것일까? 안한다는 것은 그 조직에 대한 거부를 행사한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그 활동을 거부한다는 것은 반수 가까운 사람들이 그 조직과는 별개로 움직이는 결과로 나와 결국 그 힘은 와해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도 국가권력을 장악한 부르주아들에겐 희소식일 뿐인 것이다. 피지배계급의 조직적인 확대를 무시할 수 있기 때문이며, 흩어지면 그들의 승리는 따는 당상이기 때문이다.

 

보이콧전술을 사용하기 위해선 몇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첫 번째는 객관적 상황이 더 이상 선거라는 국면에 매여 있지 않을 때다. 대중이 선거라는 공간보다는 더 이상을 원하고 쟁취하고자 할 때, 권력에 대한 문제를 즉각적으로 제기하고 그에 준하는 행동을 할 때다. 이러한 내용은 이미 수차례 반복되어 왔던 내용이며, 역사적으로 반복되어 왔으니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두 번째로서는 주관적 상황으로서 주체적인 역량의 미비로 선전선동의 효과가 제대로 나타나지 못하여 차별적인 내용을 보여주지 못하여 대중과의 접촉이 힘들거나, 사상적으로 대중적으로 고립이 되어 정치적인 입장이 비교하지 못할 때다. 이러한 상황에선 특정후보옹호론, 가장 큰 적을 약화시키기 위한 구국의 결단이라는 이름으로 만든 사퇴, 그 사퇴를 통한 비판적지지 등등의 말은 많지만 결국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의회주의에 매몰되어 버리는 자신의 사상을 대중에게 선보이고 다시는 오지 못할 강을 건너가는 것이다. - 이미 대중은 그런 모습엔 안중이 없고, 어차피 당선되지 못하니 모종의 밀약을 펼친 것으로 판단하고 잊어버린다. 이런 경우 아무리 말을 많이 한다고 해도 죽 써 개 준 꼴이다. - 주체적 역량의 미비의 핵심은 후보도 내지 못하는 현 상황을 의미한다. 후보도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선전선동을 어느 공간에서 하고, 어느 공간에서 의회주의 환상을 제거하기 위한 투쟁의 장을 만들어 가겠는가?

 

세 번째는 대중이 의회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투표에 대한 거부 및 기권을 선호 할 때다. 대안을 가지지 못하고, 대안의 세력이 존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대중은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환멸의 기치를 높이 들고 계급사회의 반감을 합법적인 모습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물론 투표를 하지 못하는 상황도 존재한다. 참여율이 100%라는 것은 자본주의사회에선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투표의 참여율이 떨어진다는 것, 그리고 그 투표율이 50% 안팎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이미 절반이상은 투표의 거부 의사를 공공연하게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대선에서의 투표율이 이번에 얼마나 나올까? 대선이 과연 민심의 모습을 담아내는 것인가? 자본주의사회가 존재하는 한 그 민심을 이용하는 지배계급은 더욱더 철옹성을 유지 할 것이며, 투표를 장려하거나, 표심을 자극하는 것은 피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바람 앞의 등불신세로 만드는 것이다. 의회주의 환상을 제거하기 위해서 자본주의 국가권력을 부수기 위해서 의회의 연단을 선거라는 열려진 공간을 사용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최선이 안 되면 차선을 택한다는 것은 경제적인 논리이며, 더 많은 이익을 얻어내고자 하는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이다. 최선의 선택은 하나의 방법만은 아니다. 사회주의적 원칙을 사수하고 이어가기 위해서 활동할 여유를 가지지 못하는 경우는 사회주의를 포기하는 또 다른 모습의 변형일 뿐이다. 실천에 매몰되어 지금 무엇을 해야만 한다고 강박감 속에 자신을 채찍질한다고 해도 자신을 해칠 뿐이다.

 

이론 속에서 실천의 모습을 잊어버리고, 실천 속에서 이론의 향을 버리는 것은 기회주의의 전형이다. 이론을 현실에 기계적으로 갖다 부치는 것은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일을 망치는 주범인 것이다. 보이콧은 레닌에 의해 정립이 되었을 땐 대중의 관심이 선거라는 공간을 무시하고 직접적으로 권력의 문제로 투쟁이 모여진 상황에서만 적용된다고 판단했다. 작금의 상황은 어떠한가? 대중은 일말의 양심적인 가책,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투표를 하고, 역시나 하며 돌아선다. 다음엔 투표를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 민주주의가 형식화된 것은 언제부터인가? 대중의 참여가 떨어지고, 피지배계급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그것이 누적되고, 투표가 형식화되는 것은 주기성을 가짐으로 더 확연해 진 것이다. 선거가 대중에게 언제나 멀어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중이 권력에 대한 요구를 내비치거나, 자신들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되는 환경이 조성될 때 대중은 정치에 관심을 가지며, 선거에 대해 열정적인 참여를 한다. 그러한 환경은 대부분 혁명적인 열정이 남아 있거나 생기는 그런 상황에서 나타난다. 한국의 투표율이 높게 나타난 해는 언제인가 확인을 해보면 그것이 확연히 들어난다.

 

레닌이 선거참여를 이야기한 좌익 소아병 때의 상황과는 지금은 많은 차이가 난다. 자본주의 사회의 거리가 한참 지나갔으며, 대중은 이미 자본주의사회의 모습에 환멸을 느껴 자신의 길을 찾고자 하는 모습을 선명하게 보이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가 현실 사회주의를 부셔버린지 벌써 20년이 지나가고 있다. 아직도 몇 몇 나라에서 자신은 사회주의국가임을 자처하고 있지만, 노동자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은 아주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다 아는 상식이다. 한국사회에서 대중은 이미 지배계급에 대한 직접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고 그 울분만을 쌓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이 반MB전선을 구축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부르주아의 또 다른 얼굴로 나타나는 것으로 그 밥에 그 나물임을 무의식적인 깨달고 있는 대중들에게 선거에서 무엇을 가지고 임할 것인가는 그려지고 있다.

 

“배고픈 사람들이 도둑질 했다거나 착취당한 노동자가 파업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아니라, 배고픈 사람들 중 대다수는 왜 도둑질을 하지 않는가, 또 착취당하고 있는 사람들 중 대다수는 왜 파업을 하지 않는가라는”(빌헬름 라이히 파시즘의 대중심리 중에서) 사실에서 우리는 대중투쟁을 어떻게 조직 해 나가야 하는 방법을 새롭게 강구해야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 사회에 염증을 느끼고 이 사회의 모순으로 사회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극단적으로 자살을 선택하는 수많은 사람들, 개인적으로 저항을 하고자 할수록 더욱더 심한 구덩이에 빠져 들고 헤어나지 못하여 심한 죄책감에 빠져드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개인적인 한계에서 이 현실을 벗어나고자 노력했고 그래서 더욱 극단의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수많은 열사의 탄생, 청소년들의 자살, 명문대생의 자살 등등의 모습은 자본주의가 양태 시킨 개인주의 희생양이다. 이들을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 경쟁이 아닌 협력으로, 고립이 아닌 해방으로 만들어 나가는 길을 함께 다지게 하는 것은 사회주의자들의 몫이다.

 

민주주의의 형태는 투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견해를 소수가 따르는 것이다. 지배와 복종이 아니라 토론과 타협으로 결정이 나는 것은 다수의 견해이다. 계급사회는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모습이다. 여기서의 민주주의는 지배계급간의 경쟁의 모습이 구현되는 것이며, 다만 형식으로 그 경쟁을 지지 지원하는 피지배계급의 존재가 필요할 뿐이다. 계급사회의 철폐는 새로운 민주주의적 사고방식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생산의 주인이 주인의 면목을 제대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특별한 형식에 구애를 강조하거나, 그러한 방식이 옳다라는 것은 무리가 많다. 민주주의 몫은 누가 대통령이 되었나, 의원 배지를 가지고 있는 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제 하고 이끌어 나가는 집단이 노동자민중으로 표현되고 실행이 되어야 한다. 노동자 서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 인민의 자기 지배가 이루어지는 세상이 민주주의 참 모습일 것이다.

 

현 시점에서 대선에 대한 보이콧을 선언한다는 것은 본인의 판단에선 옳다. 이후 주객관적인 상황은 어떻게 변할지는 모른다. 다만 예상을 하지만 파고는 어떠한 계기로 어디서 정점을 찌를지 아니면 쓰나미로 한반도를 휩쓸고 다닐지는 모른다. 본인도 세상은 뒤엎어져 새로운 세상이 문을 열고 들어오기를 열망한다. 하지만 아직도 요원하다. 화산이 터지기 전에 가스를 모아서 압력을 높이는 상황이 언제까지 유지 되고 있는지, 서서히 그 본심을 들어내는 대중들의 힘찬 발걸음을 언제 다시 들을 것인지 아직도 궁금하다. 그러나 그것은 올 것이다. 그러한 사태를 준비하기 위해서 과학적인 실천을 담보하고자 전술의 방침을 정하는 것이다. 전술의 방침은 현재의 상황에 맞게 해야 하는 것이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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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3 19:56 2012/04/23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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