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없이  2012/06/17 14:01

두개의 문

 

두 개의 문

 

6월 16일 집회에 가서 집회의 주체 측에서 두 개의 문을 다음주 6월 21일 상영을 하니 미리 예매를 하여 상영날짜를 연기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용산참사의 실화를 영화로 옮겨 놓은 것이고, 그 영화 속에서 한국의 법조계, 특히 사법부의 존경을 충격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선전물에 나왔다. 선전에 의하면 진실에 가까운 내용으로, 다큐멘타리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누구를 위한 영화인가? 그 동안 베일에 가려진채로 대중에게 격리된 사실들을 문화의 한 형태로 재현하여 대중에게 보여줌으로서 베일 속에 가려진 장막을 걷어 차 버린 것은 옳다.

 

그런데 그 영화를 가지고 부탁을 한 집회의 사회자의 요구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용산의 의미는 자본주의사회의 자본의 이익을 위해 처절하게 싸웠던 국가권력의 시녀에게 찬사를 보내고, 사망한 그들을 애도하기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사회에서 희생자들을 총알받이로 만들어 버리고 자신들의 이익을 얻고 있는 자본가들은 언제나 이윤이라는 신 앞에서 상대방을 무너뜨리고, 헤치고, 압살하는 모습을 용산이라는 측면에서 보여준 것을 우리는 잊어선 안 된다. 그런데 이영화의 상영에서 우리는 도 하나의 아이러니를 만나게 되니 참으로 어이가 없다.

 

영화의 예매율을 높여 영화에 대중의 관심을 지속시키자의 의미에서 두 가지의 엇갈린 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첫 번째로는 예매율이 올라가고, 영화의 관람객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이윤이라고 챙기는 것은 그 영화관을 가지고 있는 재벌들의 이익이 늘어나는 것이다. 재벌의 이익이 늘어나는 것은 제 2의 용산을 만드는 사회의 구조를 바꾸고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또 다른 재벌들의 문화를 양산하는 것 아닐까? 두 번째의 의미는 지배언론의 동원으로 베일 속에 가려진 용산을 새로운 시각으로 대중에게 선전 선동하여 철거민들이 오히려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진실을 가릴려고 했던 지배자들에게 손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는 진리를 보여주고 있어, 많은 관람객의 동원으로 또 다른 ‘도가니’의 영향력을 기대하는 순진한 발상이 숨어 있는 것이다. 관람객이 많고, 공감대를 형성하면, 이석기를 구속하고, 복역하고 있는 철거민들의 미래가 밝아질 것인가? 이석기가 구속되었다고 용산의 철거민들 투쟁의 모습을 왜곡하고, 그 분위기를 함께 했던 많은 이들, 그리고 그 정점에서의 이명박은, 자본주의는 무너져 내릴것인가? 아니면 그러한 투쟁으로 대중을 이끌어 나갈 수 있다고 판단을 하는가?

 

‘도가니’의 그 이후는 어떠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 성폭력이 줄어 들고, 성폭행이 사라지고 있는 것인가? 그러한 일은 없다. 그 사례를 통해서도 앞으로의 사례를 통해서도, 무수한 흐름들 속에서 자본주의질서가 바뀌지 않는 한, 아니 자본주의 사회가 유지되는 한 계속될 것이다. 용산은 한국의 작은 흐름이고, 자본주의사회가 유지되어 있는 모든 국가들에선 언제나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대중이 몰라서 함께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알아도 함께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두 개의 문’의 영화를 본 것은 아니고, 그 영화가 가지는 의미가 어떻다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대중들에게 많이 접하게 하기 위해서 그 영화관이라는 시설물에 너무 집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방식을 편하게 하면 편한 만큼의 이익은 온다. 그 옛날 5공화국시절에 광주에 대한 진실을 알리고자 영화관을 빌려서 상영하지는 않았다. 그러한 방식은 올바른 것은 아니지만 좀 더 폭 넓은 방식으로 대중에게 접하게 만드는 것이 옳지 않을까? 내가 알기로는 영화를 상영할 때, 영화표의 수익의 상당부분은 영화관이 가져가는 것으로 안다. 자리를 제공해주고 수익을 가져가는 재벌들의 모습에 배가 너무나 아픈 관계로 한마디 적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2/06/17 14:01 2012/06/17 14:01
http://blog.jinbo.net/choyul/trackback/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