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일씨의 중도와 중용에 대한 해석에 반해서

 

글을 시작하기 앞서 김광수씨가 제기한 1930년대의 독일의회방화사건에서의 디미트로프와 조선시대의 천주교탄압에서의 정약용, 두 사건에서의 중용의 의미가 어떻게 보여주었는지, 그리고 어째서 두려움을 떨쳐내고 용기를 내세운 것이 중용의 의미인지 도무지 이해가 될 수가 없다.

 

먼저 중용이란 “중(中)이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기울어지지 않으며, 지나침도 미치지 못함도 없는 것(不偏不倚無過不及)을 일컫는 것이고, 용(庸)이란 떳떳함[平常]을 뜻하는 것이라고 주희는 설명하였고[네이버 지식백과] 중용 [中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런한 의미에서 그 내용이 변질시키지 않는 이상 다른 내용을 첨가하기엔 문제가 많을 것이다. 그리고 중도라는것도 마찬가지여서 그 뜻은 “불교에서 밝힌 참다운 수행의 길.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중정(中正)의 도[네이버 지식백과] 중도 [中道]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의미를 가진다. 중도와 중용은 형식이 틀린, 그러나 같은 내용을 가진다. 불교라는 종교와 유교라는 교리의 차이가 빚어낸 말이다.

 

요즘들어서 중도라는 말은 그 의미를 이솝우화의 박쥐와 같은 모습으로 투영시키는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박남일씨가 주장한 것처럼 중도실용이니, 중도진보니하는 것처럼. 그런데 박남일씨는 중도와 중용의 차이가 무척 크다라고 한다. 중도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중용을 외쳤기 때문이다. 핵심은 중도나 중용이나 그 어떠한 말도 기본개념도 없이 무지하게 사용하고 그렇게 그 뜻을 오도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마치 그것의 선두주자로서 일베의 환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래서 좌우의 끝은 통하는 것일까?

 

중도와 중용에서 한쪽에 치우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기 한쪽의 끝이 기준이 어디냐라는 말로 통하는 것이다. 기준이 존재할 때만이 치우침이 있다 없다라는 것으로 나오는 것이다. 결국 기준이라는 것은 상대적이며, 무엇을 기준으로 할 때만이 가운데라는 절대적인 의미가 생성된다. 상대성이라는 것은 변증법에 중요하게 자리를 잡는 이유가 그것이다.

 

중도진보니, 중도실용이니 하는 자들이 하는 말이나, 박남일씨가 중도와 중용이 틀리다라는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어떠한 내용을 가지고 한 것인가? 기준도 없이 그냥, 개념도 없이 자신이 하고픈 말만 해서 쓴 글이다. 모든 신문들이(정치신문이라고 하는 좌파신문들도 마찬가지다) 어떠한 책임도 가지지 않고 자신이 하고픈 말만 하면 그만인 것이다.

 

계급사회에 살아가고 있는 이상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물들어 가는 것은 쉽다. 변증법을 실생활에서 찾아 생활화하는 것은 어렵다. 개념을 무시하면서 자신의 말만 하는 것은 쉽다. 중도나 중용이라는 말을 사용할땐 언제나 주의를 해야 하는 것이다. 기준에 따라서 그 내용이 엄청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중도 진보니 중도 실용이니, 도는 중도좌파니 하는것에 따라서 중도의 의미는 달라지고 중용이 가지는 가치도 기 기준에 따라서 달라질 수밖에 없다. 보수에서 이야기 하는 중용과 좌파단위에서 이야기하는 중용, 그리고 일상적인 생활에서 제시되는 중용의 내용은 그 차이가 다르게 나타난다. 박남일씨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 글에서 그러한 기준이 명확하게 제시되어져 있는가? 안경을 박남일씨와 김광수씨가 사용하는 것이 옳은일일 것이다.

 

단어들을 말도 안되는 개념으로 바꾸는 것은 일베 하나면 족하다. 거기에 동참을 하고 싶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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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5 14:14 2013/06/25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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