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와 중용에 대한 재해석

박남일동지의 어용사전 75 중도의 글에 대하여 본인의 비판을 “감정을 다스려 과학적 실천으로 이끄는 중용의 태도는 자칭 '진보주의자'들에게 더 필요한 태도임을 말하려는 것입니다.”라고 젊잖은 모습으로 타이르셨다. 본인은 박남일동지의 변증법에 대한 강의를 한번도 들어본적도 없어서 변증법에 대한 견해를 알 수는 없어 일반적인 견해로 생각을 하고 그에 대한 비판의 글을 올린다.

 

동지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진보와 보수의 차이는 무엇인가? 중도와 중용의 차이를 두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차이는 절대적인가 상대적인가, 그리고 무엇을 위한 내용을 담보해야 하는가? 과학적 실천을 하고자 주장하는 사람들은 변증법적인 모습을 항시 중요하게 여긴다. 변증법은 그 의미가 정체되지 않고 항시적인 운동을 함으로써 변화 발전한다는 것이다. “ 중도는 갈림길 사이에 난 길이다. 대립하는 두 입장 사이의 입장이다. 기회를 보다가 결국 유리한 쪽을 택하겠다는 태도이다”라고 했다.

 

대립하는 두 입장의 사이에서 자신의 유리한 입장으로 입장을 바꾸는 것은 변증법이 아닌가? 변화하지 않고 정체되어 있는 것이 동지의 변증법인가? 동지가 예를 들은 정약용의 중용은 양반집지배체제를 그대로 유지해야하고, 자신의 친인척을 배반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중도라면 현재의 자본주의사회에서 부르주아들과 프롤레타리아트가 상생을 하기 원하는 것은 중용이고 혁명의 과정에서 중간에 있어 동요하는 세력을 중도세력이라고 하여 내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 동지의 중도와 중용의 의미인 것이다.

 

중도와 중용의 의미는 동지가 해방연대의 정치학교 철학강사이면 변증법에 대해선 잘 알것이라고 판단되어지는데도 전혀 철학적이지 못하고 관념적인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지가?. 혹시 해방연대의 동아리적인 사고방식에 물들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과학적인 학습이 부족해서 그런 것인지 ……

 

중도와 중용의 의미는 항상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것이다. 진보와 보수도 마찬가지다. 그 기준을 명확히 하지 않는 동지의 글은 언제나 관념적이고 고정된 시각으로 나타나 동지만을 위한 글일 수밖에 없다. 민주당과 새누리당에서의 중용은, 민주당과 진보당들에서의 중용은, 진보적인 인사들과 사회주의자들사이에서의 중용은 현 자본주의지배체제를 유지하고 위한 가장 큰 길이며, 역사의 반동이다. 동지의 글들은 이러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동지의 글이 가지는 가장 큰 문제는 계급적이지 않고, 유물적이지 않는 자유주의적부르주아사상의 최첨단을 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박남일동지에게 다시 한번 이야기를 한다면 계급전선에서 무엇을 어떻게 보여줄것인가를 보여줄 필요가 잇다. 현재는 계급 투쟁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박남일동지의 글 

 

박남일
<어용사전75> 중도

‘중도 실용’이니 ‘중도 진보’니 하는 해괴한 말로 표를 구걸하던 자들이 가끔 ‘중용(中庸)’을 들먹일 때가 있다. 하지만 중도와 중용 사이의 거리는 박정희와 전태일 만큼이나 멀다. 중도는 갈림길 사이에 난 길이다. 대립하는 두 입장 사이의 입장이다. 기회를 보다가 결국 유리한 쪽을 택하겠다는 태도이다. 날로 먹고, 거저먹고, 손 안 대고 코 풀겠다는, 기회주의자들의 변명이다. 반면 중용은 욕망, 분노, 두려움 같은 감정을 냉철한 이성으로 다스리는 변증법적 태도를 말한다. 다산 정약용은 “사람의 욕심과 이성이 가슴 속에서 싸우게 되면, 욕심을 누르고 이성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중도가 욕망이라면 중용은 이성이다. 중도가 비겁한 길이라면 중용은 용감한 길이다. 중도라는 허상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 그것이 중용이다. 

*중용
1801년 1월. 순조의 수렴첨정을 하던 정순대비는 ‘오가작통법’으로 천주교신자들의 씨를 말리려 했다. 이때 정약용의 셋째형 정약종이 천주교 문서와 성물(聖物)을 도성 밖으로 옮기다가 발각되었다. 당연히 정약용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국문장에 끌려온 정약용에게 형리는 “형 약종의 죄상을 아는 대로 진술하라.”고 다그쳤다. 난감했다. 동생으로서 형을 감싸는 게 도리였고, 신하로서는 형의 죄상을 밝힐 의무가 있었다. 신하와 형제의 도리 사이에서 고민하던 정약용은 “신하로서 임금을 속일 수도 없고, 아우로서 형의 죄를 증언할 수도 없다. 형이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오직 같이 죽는 길만 있을 뿐이다. 함께 죽여주기를 바란다.”고 진술했다. 당시 다산의 법정 진술은, 목숨이 위태로워도 부인할 것은 부인하고 시인할 것은 시인하는 중용의 모범으로 평가되었다.
 
 
  • 안경 중용이 변증법 적인 모습이라~~~. 그것이 중도라는 개념을 그렇게 만들었을때, 그 상대적인 개념으로 보이는것일뿐.중용은 적극적으로 모순의 해결을 바라는것이 아니라 대립하는 한쪽 , 즉 현실을 유지하고자 하는 보수진영에 가담하는 태도에 그 본질이 있다.
  • 최아란 사실과 진실도 이처럼 중용의 모범을 보여주면 좋을텐데...=^^=
  • 박남일 색안경/감정을 다스려 과학적 실천으로 이끄는 중용의 태도는 자칭 '진보주의자'들에게 더 필요한 태도임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 박남일 그리고 색안경 좀 벗으시죠.
  • 김광수 우리가 재판의 모범으로 삼으려 하는 디미트로프 재판도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독일 나치법정에서 재판을 받아도 자신의 신념을 밝히는데 두려움이 없었고, 조작된 사실에 대해 철저히 투쟁했던 드미트로프도 두려움을 떨쳐내고 용기를 내세운 중용의 예입니다. 그리고 드미트로프는 국회방화라는 황당한 죄를 적용한 나치법정에서 무죄판결을 끌어냈죠
  • 색안경 ㅎㅎㅎ 재밌네요^^ 그래서 확인을해봤어요 그랬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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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4 13:32 2013/06/24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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