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  2011/10/19 11:32

강령토론 참관일기

강령토론회 참관일기

 

일요일 비가 온 뒤. 날씨가 화창하고 공기도 맑아 졌다.

기분 좋은 날 집에 있기가 뭐해서 마침 시간도 있고, 일이 없는 날이다 보니 가칭)노동자혁명당 추진모임(이하 추모라고 하겠다)에서 주최하는 강령토론회에 참관하기로 마음을 먹고, 전화를 하고 나서 느긋한 마음으로 아는 사람이 없어서 서먹서먹하다고 판단되었지만, 그래도 한 소절 귀로 동냥이라도 하겠다는 마음으로 갔다. 도착을 하니 3시가 넘어서 시작되지 않았나 생각을 했지만 아직 시작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듯밖에도 아는 동지를 만나 기뻤고, 전화를 미리 했던 탓에 구독자라고 환대를 해주어서 불안감은 가셨다. 그리고 토론회는 시작되었다.

 

토론회시작전에 받아 본 강령초안설명서를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토론회의 내용을 따라가면 대충 비슷해질 것이라고 판단되어졌고, 전철에서 사노위에서 발행했던 다시한번 더 5인안을 일고 평가하면서 갔기 때문에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었다. 그런데 웬걸 이것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깊게 나가는 것이 아닌가? 무엇인 문제인가? 어떻게 이런 일이 백주 대낮에 벌어 질 수 있단 말인가? 마른날에 날벼락이지 드디어 ·········

 

추모동지들의 깊은 혁명의 열기를 높이 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그 뜨거움이 지나쳐 용암으로 흘러 대중들의 살가죽을 태우고, 그 힘으로 대중의 전진하는 투쟁의 힘을 짓뭉갤 것 같은 두려움에 오늘도 뒷방 한구석에 도망쳐 이글을 남긴다.

 

1. 추모동지들은 누구도 하지 못하는 일에 선구자로 나섰다. 강령에 공산주의 혁명이라고 당당하게 외침으로서 대중보다 한 발짝 앞서서 같이 가자고 하던 일을 과감하게 두발, 아니 열 발을 앞서서 따라오라고 손짓하고 있다. Fallow Me. Fallow Me. 나를 따라 Fallow Me.

 

아직 사회주의에 대한 반감,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아픔이 가시기도 전에 더 강력한 해머로 대중의 다리에 내려쳐 그들에게 경각심과 반공이데올로기를 깨고자하는 일이지만, 이는 대중보단 자신들의 만족감을 느끼고자하는 것이며 내가 제일 잘나가를 강조 하는것일 뿐 대중의 전진에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공세에 추춤하게 만드는 도구를 만드는 꼴이다. 물론 공산주의혁명을 주장하는 것은 주요한 일이다. 천국으로 가는 문은 언제나 열려있기 때문이다. 들어가기 위한 구멍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힘이 든다. 사노맹이 사회주의를 들고 나온 것하고는 전혀 다른 문제다. 당시엔 자본주의의 대안적 사회의 모습을 제시하여야 하는 것으로써 사회주의를 들고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공산주의를 들고 나오는 것은 대안적 사회의 모습을 보여줄수 있음에도 그것을 무시하고자하는 이유는 코민테른의 창건의 모습에서 차용해 온 것 이상이 아닌 교조주의적 행태인 것이다. 차라리 그렇게 공산주의혁명을 외치고자 한다면 혁명당건설이 아닌 공산당건설이라는 푯말은 왜 안쓴 것인가? 대안이 없어서 사용을 한다면 대안의 모양새를 최대한 살리면서 다른 모양새로 순화 시킬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대안이 사회주의라는 말이 있음에도 그것을 버림으로서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한다면 누가 당신이 입은 옷이 깨끗하다고 인정하겠는가?

 

2. 소련의 사회에 대한 모습을 분석할 때 제시하던 형식적인 모습은 자본주의냐, 국가자본주의냐 라고 하는 모양새를 가지고 이야기를 했는데, 분명히 소련사회는 경제적인 모습이 복잡해져있어 하나의 과도기적인 모습으로 진행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예 과도기라는 의미로서의 국가자본주의라는 내용은 사라지고, 새로운 자본주의라는 모습으로 변하는 것과 더불어 그러한 내용을 담보하게엔 경제적인 모습에만 치우쳐 사회주의의 핵심은 아예 사라져버렸다. 이 내용은 강령의 구성에 커다랗게 다가와 노동자정부(국가가 아닌 정부다)와 노동자평의회라는 권력구성체에 대한 모습으로 투영된다. 여기서 본인은 소련의 사회가 어떤 사회라고 주장하고 싶어서 이글을 적은 것은 아니다. 그 부분은 여기서 논외로 한다.

 

그런데 이들 토론 중에서 재미있는 것은 다들 그동안 내부적인 결의가 이루어져 왔기 때문에 처음 참석한 본인은 느낌이 (국가)자본주의라는 형식에 내용을 짜 맞추기 하기 위해 급급한 모습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형식을 정해놓고 다른 내용은 들어가면 안되며, 형식의 미를 존중하고 형식을 만들어 가고자 내용을 끼워놓는 모습은 어떻게 표현할지 언어실력이 짧아 보여주기가 힘이 든다. 물론 형식을 세워 그 내용을 담는 그릇을 만드는 것은 필요하지만 너무 그 내용을 무시하고 형식에 급급하다보면 설익는 법이다.

 

3. 강령으로서의 모습과 전술과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강령을 대중에게 다가서는 것이 전술의 모습이지만, 그 시기와 상황에 다라 강령의 내용을 가지고 대중에게 표현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이다, 하지만 강령에는 대중투쟁의 모습을 총파업, 봉기, 평조합원운동 등등의 모습으로 구체화 시켜서는 안된다. 강령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봉기나 총파업은 대중의 피를 너무 많이 흘리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최후의 대중 운동의 모습이며 대중의 무장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총파업은 예외가 되겠지만). 4천만대중이 무장을 했을땐 굳이 봉기가 필요할까? 아직은 꿈이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봉기의 모습을 그려넣을 수는 있지만 강령은 대중의 투쟁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대중에게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사회를 건설할 것인가를 제시하고 대중을 끌어 오고 함께하는 것이다. 투쟁의 방식은 현실에서 결정된다. 강령의 내용을 차용하지만 전술은 전략의 일반성을 부정하고 특수성을 강조한다. 강령에 모든 것을 다 넣기만 한다면 강령은 부풀어 오르고 전술은 자신의 활용가치를 잃어 짜깁기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볼셰비키의 강령에서, 트로츠키의 이행강령에서, 그리고 어느 계급정당에서 그런식의 강령을 보여주는가? 전략(강령)은 혁명의 주어진 단계의 토대 위에서 무엇을 할것인가를 정하는 것이라면 전술은 현 시기에 어떻게 할것인가를 정하는 것이다. 투쟁의 목표는 강령이고 투쟁의 방식과 형식은 전술인 것이다. 그러나 그 성과를 합본을 할 경우엔 조잡해진다. 이는 급한 마음에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하는 식의 쁘띠부르주아적 습관이다.

 

4. 조급증과 형식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사상을 갈아먹는 원천으로써 작용을 하기 때문에 이후 이행강령이라고 내세우는 내용들은 초안이기 때문에 이후 대대적인 수정을 거쳐 제대로 된 모습을 내놓을 것이지만 현재의 전체과정상의 내용을 보면 혁명적이라고 보기에는 조잡하고 욕심꾸러기처럼 여러 사상이 혼재되어 있어, 인텔리들의 잔치로 보인다. 이는 필연적으로 모험주의적인 모습과 개량주의적인 모습으로 자신을 들어 낼 것 같은 운명으로 보인다.

본안은 강령토론회에의 3부 순서를 참관하지 않고 중간에 나왔다. 강령을 정하는 날이 아니고 자신들의 강령의 평가를 위해서 공개적인 자리를 가진 것으로 알고 있다. 의욕적인 만큼 실수도 많을 것이다. 그것은 아직 조직이 젊기 때문이다. 강령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을 것이고 아직도 머리를 싸매고 토론과 학습, 그리고 현실에 대한 분석을 계속적으로 하고 있을 것이다. 조잡하고 절충적이고 조급한 내용을 들은 다듬어지고 발전적인 모습으로 나올 것으로 기대가 된다. 이번 초안은 이전의 5인안보다 더 퇴보한 내용임에 틀림이 없다, 실제 퇴보를 거듭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항의적인 모습으로 자신들의 나약한 모습을 감추기 위한 역발상으로 과장된 글의 표현이 나온 것으로 보여진다.

 

일요일 비가 개서 날이 푸근했지만 바람은 차서 틈새를 스며들고 있었다. 그날 이루지 못한 감기가 오늘 몸살로 왔다. 하루 벌어서 먹고사는 처지에 하루 하루가 힘들지만 얼마전에 읽었던 글이 생각나 적어 본다.

 

두 눈으로

초원을 바라볼 때 면

나는 봄 속에서

여름을 느낀다.

 

가칭)노동자혁명당(추)님의 [[토론회] 노동자혁명당 건설을 위한 공개 강령토론회] 에 관련된 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1/10/19 11:32 2011/10/19 11:32
http://blog.jinbo.net/choyul/trackback/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