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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소설 분야에서 가장 소중한 성과는 이들에게서 영감을 얻은 비평들인데 이는 비평들을 소설이라는장르를 체계적으로 고찰하려는 인상적인 시도이다. 소설에서 아직까지는(1966) 이러한 비평들이 오늘날의 가장 흥미로운 미평이다.(모리스 르랑쇼, 롤랑 바르트, E. M. 시오랑, 알랭 로브-그리예, 나탈리 사로트, 미셸 뷔토르, 비셸 푸코) 이들의 평론이 소설보다 더 중요하다는 근거는, 이 글들이 지금껏 어떤 작가가 도달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광범위하고도 야심에 찬 기준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예로서 나탈리 사로트의 평론집 '의혹의 시대'이다. 사로트는 그가 주장하는 바를 소설에서 실현시켰다는 것을 떠나(작가는 결정적인 측면에서 아니라고 본다), 전통적 소설에대한 비판을 화제로 이끈 이 책을 소설의 이론적 반성의 좋은 출발점이 되리라 여겨진다. 사르트는 자연주의와 객관적 리얼리즘을 폐기하고 '심리의 어두은 공간'을 심문하는 것이 현대 소설가의 임무라 여긴 버지니아 울프의 입장을 뭘 모르는 '고지식한'태도라고 여기며, 메리 매카시의 견해에 대해서도, 그의 견해는 이야기 속에 하나의 실재 세계를 그럴듯하게 꾸며내고 기억에 남을 만한 주인공들을 만들어내는 낡은 소설의 속성으로 희귀할 뿐이라 비판한다.
리얼리즘에 반대하는 사로트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그럼에도 현실이 그리 명확한 것은 아니다. 세상사가 그리 현실감이 넘치지 않으며 소설에서 그려지는 현실이 편안하게 받아들여 짅다면 우리는 이를 의심해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사로트가 구식 소설을 반대하는 것은 납득 가능하다. 이러한 작품들은 훌룡한 작품이라고 여길 수 는 있어도 당신으로 하여금 주눅들게 만든다. 전지적인 작가가 인생이란 이런 것이고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라고 가르치는 것을 듣는 다는 것은 꽤나 곤욕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사로트가 전통적 수법(하나의 장면을 설정하고 주인공에 대해 묘사하고, 그를 이리저리 이동시키는 수법 )을 정당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 또한 옳다. 세세한 묘사, 어떠한 넥타이를 어떻게 매는 것을 세세하게 설명하는 것을 누가 관심을 가질까.
그럼에도 가장 복잡하고 문제가 되는 것은 소설 속에 심리 분석이 진부한 것인 동시에 반단 착오라는 사로트의 주장이다. 그가 말하는것은 울프, 조이스 프루스트의 소설이다. 사로트는 행동 밑바닥에 깔린 숨은 생각과 감정을 탐구하며, 사건을 등장인물과 플롯으로 대체할 수 있는 묘사 방법을 탐구하는 소설들 말이다. 사로트는 조이스가 이런 심연에서 건저 올린 것은 방해받지 않은 말의 흐름뿐이었다고 말하며, 프루스트 또한 독자가 그의 상상 속 박물관에 자리를 잡게 될 한 다발의 광범위한 허구적 등장인물들을 대번에 알아볼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슬프게도 사로트의 소설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 만금 조이스의 소설과 다름 없으며, 심리 또한 완전하게 거부하지 못한다. 물론 사로트가 원하는 심리적인 것은 등장인물과 플롯으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없는 심리적 요소이다. 그는 조건부의 심리학, 즉 낡아빠진 목적을 이뤄줄 새로운 수단으로서의 심리학에 반대한다. 이는 소설을 근본적으로 뒤바꿔야 한다는 뜻이다. 소설가는 살인이나 굉장한 연애등 구질구잘한 사건으로 독자의 주의를 흐트러뜨려서도 안된다. 사건은 자잘할수록, 밋밋할수록 좋다. 그러나 사로트의 주인공들한테는 정말로 무슨 행동이라 할 것들이 없다. 행동에 앞서서 행해지는 이런 준비 단계와 암중모색이 사로트 소설의 진짜 주제이다. 사로트가 주장하는 것은 끊임없는 독백으로 이뤄진 소설, 등장 인물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도 독백의 연장이 되는, 침묵의 연속만이 진짜 화법 소설이다.
인간의 감정과 감각이 복잡하다는 것은 무조건 존중해야 한다는 사로트의 소설 강령에는 무언가 고무적인 바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 안이한 점은, 사로트는 심리라는 것을 모호하게 평가할 분만 아니라, 이에 대해 지극히 교조적인 처방을 내린다는 것이다. 사로트는 심리의 미묘함에 대해 혼란스런 기준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감정이라 움직여 다니는 거대한 덩어리로 그 안에서는 뭐든 찾아낼 수 있다는 사로트를 누가 반박 가능하겠는가. 그러나 사로트는 더 나은, 더욱 면밀한 심리묘사 기법을 위해 심리를 공격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과 사로트가 제시하는 소설 강령은 별개의 것이다. 그러나 그 점을 인정한다 해도, 소설가에게는 그 동시를 좀더 세련되고 정말히게 재현해낼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는 것 말고도 선택의 여지는 많다. 그의 주장대로 등장인물의 성격이 조수와 물결, 소용돌이가 한데 합쳐지는 지점, 대양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스킨다이빙도 쓸모는 있다. 위헙을 각오하고 수중 깇숙한 곳에서 겪은 형체 없는 경험에 입체적 윤각을 부여하고, 그 세계에 정동된 형상과 감각적 몸체를 선사하여는 소설가의 노력을 경시하는 사로트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로트는 작가에게 동시대인을 즐겁게 하고, 가르치고 개심시키고픈 욕구를 억제하라 권고한다. 그저 자기 누에 보이는 reality,를 진지하고 날카로운 시각으로 보여주라는 것이다. 여기서 지적하는 것은 그가 말하는 현실의 정의가 얼마나 편협한가이다. 그가 말하는 현실이란 현실을 뒤덥는 선입견과 이미지가 제거된 현실이다. ‘현실’을 접하고자 하는 이라면 “지금까지 열려지지 않은 어떤 것, 자신이 보기에 자신이야말로 그것을 본 최초의 사람이라 여길 만한 것‘에 도달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리한다면 소설의 독자에겐 얼마나 많은 현실의 단면이 필요할 것인가. 소설가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을 조합하고 변형시키면 안될 이유가 있는가. 자신을 그가 지칭하는 선입견과 진부한 이미지에 가둬두면 안될 이유는 없다. 그는 현실이라는 관념을 들춰냄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쓸데없이 편협하게 만들고, 손상시키고야 말았다. 사로트의 선언은 마당히 그 가치를 인정받을 만한 입장을 제대로 옹호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해석에 반대한다. 수전 손택.
나탈리 사로트와 소설.
교훈주의는 실로 예술의 현대적인 요소이다.(1966년) 교훈주의의 중심 교리는 예술은 발전 해야하고, 그리하여 해당 장르를 진보시키며, 더 나아가 새로운 기법을 창조하는 것이 주요 목적인 것이다. 이 경우에는 예술이 친숙하거나, 즐거움을 주는 매체라기 보다는 교훈적이고 충고조의 작품이 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작품의 예로는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 스타인과 베케트가 쓴 산문, 베베른과 불레즈가 작곡한 음악이 있다.
그러나 소설이라는 장르는 이러한 경향, 책의 표현대로 전장에 멀리 떨어져 있다. 소설은 19세기 예술의 원형적인 형식으로서, 당대의 현실에 대한 철저히 현세적인 개념, 진정으로 야심에 찬 정신을 갖고 있지 못한 현실, '흥미로운 것'의 발견, E. M. 시오랑이 “하층 계급의 운명”이라고 부른 것을 완벽하게 확인 시켜준 장르이다. 소설은 사회속에 인간을 다룬다. 소설은 세계를 그대로 모방해 인물을 배치한다. 이 같은 기존 서사 형식에는 소설에 생기를 불어 넣어 주는 요소들이 빠져있다. 이러한 서사 형식은 심리를 발견했다거나 주제를 ‘경험’으로 치환하지 못했다. 소설이 열려있는 형식이 된 것은, 바로 이처럼 ‘경험’을 기록하고자 하는 열정, 사실에 대한 열정에 있다. 모든 예술 형식에는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경험계를 초월하는 일련의 절대적 기준이 적용되나. 소설은 앞서 서술한 이유로 어떠한 정보든지 구성이든지 생각을 수용할 수 있다. 그렇기에 소설은 재미가 있다. 그러나 음악, 조형미술 등 예술의 진보라는 교훈주의를 좇고 19세기 리얼리즘이 지녔단 교리에서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쓰는 동안 소설이란 예술 형식은 20세기 내내 그 어떤 것도 자기 것화 하지 못한 체 속물주의에 의해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결국 우리 시대(1966년 이후)의 소설은 예술의 ‘진보’라는 생각, 전위라는 은유에서 보여주는 전투적인 이데올로기 같은 미심쩍은 관념들에 연루될 수 밖에 없다. 결국 이는 소설이 독해되어야 하는, 몇 번씩 다시 읽어 뜻을 해석해야하는 된다는 것이고 이는 매우 지루하고 재미없는 짓일 것이다. 잘난 체하고 꼰대적인 책들이 범람하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한 대안들은 두 가지 흐름으로 주로 프랑스에서 일어나고 있다. 초기에는 모리스 블랑쇼, 조르주 비타이유, 피에르 클로스프스키가 이끌었다. 두 번째 흐름은 1950년대의 저자로, 미셸 뷔토르, 알랭 로브 그리예, 클로드 시몽, 그리고 나탈리 사로트가 봅힌다. 이들의 공통점은 19세리 리얼리즘 전통에 따라 성격을 묘사하는 것이 소설의 임무가 아니며, 심리라는 관념을 버리겠노라고 맹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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