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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자 14회

 

1


읽는 라디오를 찾아와주신 여러분 반갑습니다.
저는 성민입니다.


지난 주에 제가 영화 한 편과 책 한 권을 읽었는데
우연히도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시대적 배경만 비슷할 뿐 둘은 아주 다른 얘기를 하고는 있었지만
제게는 비슷한 코드로 다가오더군요.
그래서 오늘 방송은 1970년대에 대한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먼저, 1979년 미국의 작은 도시를 배경으로 한 ‘우리의 20세기’라는 영화 얘기를 해볼게요.
아들과 둘이 살아가는 어머니는 사춘기에 접어든 17살 아들이 걱정스럽습니다.
이미 50대인 어머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이 많지 않음을 인정하고 하숙집에 사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그런 어머니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별거아닌 도움을 줍니다.


급진적 패미니스트인 사진가는 페미니즘에 대한 책을 권하고
펑크음악을 즐기는 그 아이와 함께 클럽을 다니며 춤을 춥니다.
가정의 불안으로 더욱 혼란스러운 오래된 여자친구는 매일 밤마다 그 아이를 찾아와
섹스는 하지 않고 정서적 교감을 느끼면 잠자리를 같이 합니다.
히피문화에 빠졌다가 실망하고 나온 도예가는 이런 이들을 묵묵히 거들면서
사진가와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서 같이 방황하면서 행복을 찾습니다.


1920년대 태어난 어머니는 대공황과 전쟁을 겪으며 힘겹게 살아왔지만 꼰대처럼 통제하고 가르치려 들지 않습니다.
자유롭게 어울려 살아가는 삶을 추구하면서도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기꺼이 젊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들일줄 압니다.
사진가과 도예가도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강요하지 않고 서로 존중하며 어울리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서로의 가치관이 부딪치기는 하지만 그런 불협화음조차 서로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풀어갑니다.


가치관이 혼란스럽기는 사춘기의 아이들만이 아닙니다.
페니미스트도 히피도 펑크족도 기성세대도 다 혼란스럽습니다.
전후의 풍요과 70년대 초반의 혁명적 열기가 식어버린 세상 역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집니다.
그 혼란의 한가운데서 다섯 사람들은 서로를 배려하고 인정하고 갈등하고 이해하면서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정말 아름다운 그런 영화였습니다.


미국의 1970년대를 살아간 사람들 중에 이렇게 살아간 사람들은 드물겠지만
만만치않게 혼란스럽고 극도로 파편화된 201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그 다섯 사람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2


자, 이번에는 한국의 1970년대 얘기를 들어볼까요.
제주도 서귀포에서 나고 자란 서명숙이 1976년 서울에 있는 명문대학에 들어가게 됩니다.
가슴 설레는 대학생활을 하던 중 영초언니를 만나게 되고 그의 삶에는 많은 변화가 생깁니다.
서명숙씨가 천영초씨를 만나게 되면서 일어났던 거센 삶의 풍랑에 대한 얘기를 ‘영초언니’라는 책으로 풀어놓았습니다.


막걸리 먹다가 말 한마디 잘못하면 잡혀가던 그 시절
명숙은 영초언니를 통해 담배를 배우고, 세상을 배우고, 삶을 배워가게 됩니다.
그리고 겁 없이 박정희 독재에 맞서게 됩니다.
얼마없어 체포와 고문과 구속으로 아주 혹독한 댓가를 치르게 되지요.
이후 조금은 비겁해지기로 마음 먹은 서명숙은 운동권에서 멀어지지만
영초언니와 동료들은 고난의 길을 계속 이어가게 됩니다.
대학 졸업과 결혼, 취직 등으로 이어지는 삶 속에서
영초언니는 멀리서 여전히 열정적이었고 수배와 구속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다단계 판매에 빠져든 언니를 만나게 되고
왕따 당하는 아들을 위해 캐나다로 이민간 언니의 소식을 듣게 되고
가족을 책임지지 못한 언니의 남편은 폐인이 돼서 죽음을 맞이하고
캐나다 생활에 적응하던 언니는 교통사고로 겨우 생명만 유지한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한국으로 돌아와 오래간만에 만난 언니는 유아기의 지능에 식탐이 강한 아줌마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 책은 한때 유행했던 후일담 소설들처럼
치열했던 그 시절을 애써 멀리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30여 년이 세월이 흘러 그때와는 너무 멀리 떨어진 위치에 서 있게 됐지만
너무도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던 그 시절을 따뜻한 마음으로 보듬어안고 있었습니다.
단아한 외모에 차분한 성격으로 후배들을 챙겨주며 투쟁을 멈추지 않던 영초언니가
말도 잘 못하고 음식이나 탐하며 늙은 어머니의 푸념의 대상으로 변해버린
그 세월이 너무도 무겁게 다가오지만
그런 언니에게 대학 때처럼 다시 칭찬받고 의지하고 싶은 마음을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제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할 때
70~80년대 운동은 극복해야할 대상이었고
한때 운동을 하다가 떠나간 이들은 소부르조아 근성의 패잔병들로 여겼습니다.
이제 세월이 흘러
그렇게 비판했던 선배들의 자리에 제가 서있게 되보니
그들의 그 열정과 투혼으로 지금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음이 보입니다.
제 후배세대도 저를 향해 어떤 비판의 칼날을 들이댈지 못르겠지만
저의 과거를 따뜻한 마음으로 다시 품을 수 있다면
선배들의 상처와 후배들의 열정에 경의를 표할 수 있겠지요.

 

3


이번에는 저의 1970년대를 돌아볼까요?
저의 1970년대는 태어나서 첫 10년의 기간이기 때문에 온통 친구들과 놀았던 기억밖에 없습니다.
1979년 어느날, 주인님 누나가 대통령이 죽었다면서 울었고, 며칠 동안 tv에서는 추모방송만 나와서 짜증났었던 기억이 70년대의 마지막 기억이지요.
미국에서 혁명의 열기가 퇴조하며 정신적 혼돈의 시기가 왔든, 한국의 대학생들이 독재정권에 맞서 목숨 걸고 싸웠든, 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저 친구들이랑 재미있게 놀았던 것과 tv에서 보았던 만화영화들이 제 기억을 가득 채우고 있지요.


어릴 적 봤던 만화영화 중에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것이 ‘미래소년 코난’입니다.
엄청난 발가락 힘을 갖고 있는 ‘코난’에서부터 시작해서, 텔레파시로 할아버지와 대화를 하는 ‘라나’, 개구리를 엄청 좋아하는 못생긴 ‘포비’, 애꾸눈에 이마에 흉터가 있는 라나의 할아버지 ‘라오 박사’, 인더스트리아의 싸늘한 여자 ‘몬쓰리’, 얼굴이 네모난 최고의 악당 ‘레프카’, 길다란 콧수염의 변덕쟁이 ‘다이스 선장’ 등 대부분의 사람들이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어둡고 칙칙한 거대한 공장과 군대의 섬 ‘인더스트리아’, 밝고 여유로운 목가적 공동체의 섬 ‘하이하바’, 작고 고독하지만 사람과 자연과 동물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사는 코난의 고향 ‘홀로 남은 섬’을 주요한 축으로 하여 이야기는 전개됩니다.
할아버지와 단둘이 ‘홀로 남은 섬’에서 살아가는 코난이 표류해온 라나를 발견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되는데요, 인더스트리아 사람들과 하아하바 사람들이 대결하다가 결국 인더스트리아는 무너지고 사람들은 하이하바에서 다시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유명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이란 건 어른이 돼서야 알았지만, 이 tv시리즈물은 어른이 봐도 엄청 재밌습니다.


매주 일요일 아침 졸린 눈을 애써 비비면서 텔레비를 켜면 익숙한 노래가 들려옵니다.
너무 익숙한 노랫가락 이어서 노래가 나오는 동안은 잠이 아쉬워서 귀만 꽁끗 세우고 눈은 뜨지 않습니다.
이어 매번 똑같이 나오는 맨트까지도 비몽사몽 속에 듣고 있다가, 그 맨트가 끝나면 눈을 번쩍 떠서 텔레비를 쳐다보곤 했지요.
칙칙한 빌딩 숲과 어두운 하늘 위로 비행선들이 날아다니는 장면과 함께 암울한 배경음악 속에 나오던 그 멘트는 이랬습니다.


“서기 2008년 7월 인류는 전멸이라는 위기에 직면했었다. 핵무기를 훨씬 능가하는 초자력무기가 세계의 절반을 일순간에 소멸해 버린 것이다.
지구는 일대 지각변동을 일으켜 지축은 휘어지고 다섯 개의 대륙은 거의 대부분 바다 속에 가라앉아 버렸다.”


에고 에고, 어릴적 기억이 너무 살가워서 얘기가 너무 길어져버렸네요. 헤헤, 죄송합니다.
이 멘트에 대한 얘기를 하려던 건데 서설이 길어버렸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서기 2008년’은 정말로 머나먼 미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서기 2017년에 살고 있잖아요.
미래소년 코난이 살았던 2008년이 10년이나 지난 과거라니...


서기 2017년 핵무기를 능가하는 초자력무기는 나오지 않았지만
핵폭탄를 능가하는 수소폭탄이 저 북쪽에서 펑펑 터지고 있고,
지축은 휘어지고 대륙이 바다 속에 가라앉지는 않았지만
핵무기를 능가하는 지구온난화가 지구를 정신없이 할퀴고 있습니다.
제주도 중산간 마을 외진 곳에서 사랑이와 둘이서 살고 있는 저는
발가락 힘은 고사하고 손가락 힘도 별로 없지만
라나와 포비를 만난다면 지구를 구하러 나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4


김영진님
우연은 우리가 모르는 필연인지도 묘릅니다.
나이들면서 겨우 알게되는..?


Kil-Joo Lee님
오늘은 마음이 무척 따스해지는 글입니다. ^*^


김영진님
이 글들 모아서 책을 내도 좋겠네요~ 귀농이야기!

 


지난 방송에도 어김없이 김영진님과 Kil-Joo Lee님이 댓글을 남겨주셨습니다.
이 댓글들 덕분에 이 방송에 활력이 넘쳐서 오늘은 말이 너무 많아져버렸네요.
이 정도 수다는 좀 들어주실만 하지 않나요? 후후
아 그리고, 이 방송의 내용을 책으로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게 목표를 삼으면 얘기를 좀 더 멋있게 꾸미게 되고 그러다보면 가식적인 방송이 되거든요.
그리고 대한민국 출판사 중에 저같은 놈의 글을 받아줄 출판사도 없거든요.


오늘 한참을 1970년대에 대해 떠들어 봤는데
김영진님과 Kil-Joo Lee님의 1970년대는 어떤 기억으로 남았을까요?
아! 혹시 이 두 분이 포비와 라나가 아닐까요? 하하하


자, 이만 방송을 마칠까 합니다.
모처럼 말을 많이 했더니 입이 좀 아프네요.
1970년대를 회상하며 ‘미래소년 코난’의 주제곡을 들려드립니다.
수다스러운 얘기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https://youtu.be/Yw23Mg7GJ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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