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살자 22회

 

1


포항에서는 지진이 일어나고
제주에서는 제2공항 건설에 반대하는 단식이 40일을 넘었고
어딘가에서는 노동자들의 농성이 오늘도 이어졌지만
그 모든 것과 떨여져 살고 있는 저는
여유롭고 평화로운 나날입니다.


각자의 삶에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듯이
제게도 거리낌없이 평화를 즐길 너무도 많은 이유가 있기에
멀리서 벌어지는 일들을 무덤덤하게 바라봤습니다.


방에 보일러를 틀어놓고
따뜻한 녹차를 마시며
감미로운 음악과 함께
책을 읽고 있는데


소설의 내용이 제 마음에 칼로 꽃혔습니다.
이러저러한 상처들을 쓰다듬으며 살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였습니다.
가슴에 박힌 칼을 차마 뽑아내지는 못하고
상처만 어루만지는데
여유롭고 평화롭던 제 강물이 붉게 물들었습니다.


너무도 오랜 기간 저를 괴롭혔던 그 끔찍한 기억들을
강물에 흘려보내는데 성공해서
강물에는 여유와 평화만이 흐르는데
그 강물에 흘려보낸 것에는
제가 저질렀던 악행들도 있었습니다.

 

2


중학교 3학년때 부반장을 했었습니다.
제가 그때까지 살면서 맡아본 직책 중에 가장 높은 직책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반장이나 부반장이 선생님의 지시로 이런저런 일들을 위임받아 하는 경우가 많아서 부반장이라는 것은 은근한 권력이기도 했습니다.


부반장을 맡고 한 두 달이 지난 어느날
무슨 일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어떤 일을 수행하다가 반친구 중의 한 명이 제 말을 잘 따르지 않았고
그에 화가난 저는 다짜고짜 그 친구의 뺨을 때렸습니다.
그 친구는 집안형편이 좋지 않은데다가 언어장애가 조금 있었습니다.
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뺨을 맞은 친구는 황당한 눈으로 저를 쳐다봤고
옆에 있던 다른 친구가 제게 강하게 항의를 했었습니다.
저는 항의에 밀려 사과도 없이 자리로 돌아가버렸습니다.


부반장인 제게 그 자그마한 권력의 달콤함이 없었다면
그 친구가 가난하고 장애를 갖고 있는 그런 처지가 아니었다면
저는 그런 행동을 절대로 하지 못했을 겁니다.
당연한 결과였지만, 2학기 반장 부반장 선거에서 저는 탈락했습니다.

 

3


대학 다니면서 학생운동을 열심히 하고나서 노동운동을 막 시작할 즈음
학교 후배들을 챙긴다고 자주 후배들을 만나곤 했습니다.
당시 학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후배들은 노동운동 하는 저를 따랐지요.


그러던 어느날 후배들을 격려하기 위해 제 자취방에서 술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오래간만에 후배들과 편안하게 술을 마시고 제 방에서 쓰러져잤습니다.
새벽에 잠이 깬 저는 한쪽에서 잠들어있던 여자후배에게 다가가
몸을 더듬기 시작했고 성폭행에 가까운 성추행을 저질렀습니다.


이후 저는 그 여자후배를 찾아가 사과를 했지만 후배는 싸늘한 침묵만을 지켰고
저는 도망치듯이 서울을 떠나서 울산으로 내려갔습니다.
그 후배에게 편지를 써서는 나의 행동의 사랑의 발로였다는 어의없는 변명도 남겼습니다.


그리고 몇 년의 시간이 흘러 저는 울산에서 황성한 활동을 벌였고
지역에서 떠들썩한 투쟁으로 구속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출소 이후 후배들이 자리를 마련했다는 연락이 와서
후배들이 마련한 자리에 가서 적당히 폼을 잡고 있었는데
그 후배가 그 자리에 나타났습니다.
후배는 별다른 말이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기만 하더군요.

 

4


울산에서 노동운동을 하며 다양한 경험을 할 때
저는 자취방에서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 옆집의 빨래건조대가 지나는 통로에 있었고
어느날부터 저는 빨래건조대에서 옆집 아주머니의 속옷을 훔치기 시작했습니다.
속옷 훔치기는 이후 몇 년 동안 지속적으로 이뤄졌고요.


그리고 울산에서도 저의 성추행은 몇차례 더 있었지만 공개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저는 울산에서 중견 활동가로 성장했습니다.

 

5


‘밀양’이라는 영화를 보면
자기 아이가 유괴되서 살해당한 엄마가 거의 미치다시피 하다가
종교의 구원으로 의지할 곳을 찾게되고
그 힘으로 용기를 내서 살인범을 찾아갔는데
살인범은 편안한 표정으로 “하나님이 저를 용서하셨습니다”고 얘기하고
그 말은 들은 엄마는 할말을 잃어서 교도소를 나옵니다.
그리고는 자신보다 먼저 살인범을 용서하신 하나님을 저주하게 되지요.


제가 악행을 저질렀던 이들에게 용서를 받은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차마 용서를 강요할 자신도 없습니다.
다만, 오늘의 얘기가 하느님에게 먼저 용서를 구하는 일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뿐입니다.

 

 

 

 

(자우림의 ‘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