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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통 동수의 세월호 증언 1 - 세월호 사고 이전의 삶


김동수씨와 함께 얘기를 들으며 서로 공감하고 치유를 하기 위한 첫 번째 자리가 마련됐습니다.
이날 자리에 관심과 애정을 가진 열 다섯 분이 참석을 해서 사무실이 가득했고, 분위기도 예상 외로 뜨거웠습니다.


먼저 김동수씨는 “나는 그곳에서 살아남았고 그 관경을 봤는데, 그 기억을 기록하려 하지 않는 것이 너무 아타까웠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고 진상규명을 하는 것이 나의 목적이다”고 자신의 취지를 밝혔습니다.
김형숙씨도 “트라우마의 치유가 얼나마 힘들고 어려운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 이런 얘기를 하고 싶다고 했지만 기회를 만들어주는 자리가 거의 없었다”며 4년여 만에 처음으로 마련되는 자리에 감사를 표했습니다.


 첫 번째 자리에서는 세월호 사고가 일어나기 이전까지 김동수씨의 삶은 어떠했는지에 대한 얘기를 주로 나눴습니다.


1965년 구좌읍 김녕리에서 태어난 김동수는 어릴 적에 아버지의 존재를 모르고 자랐습니다.
두 집 살림을 하던 아버지는 강원도에서 작은 어머니와 주로 살다가 일곱 살 때 처음 김동수를 대면하고는 “얘는 누구냐?”라며 어린 마음에 큰 상처를 안겨줬습니다.
이후 김동수는 “나는 아버지 아들이 아닌 것 같다”는 자괴감과 어머니를 괴롭히는 아버지가 너무 싫었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들은 너무 엄격하게 자신을 대하는 바람에 집안에서는 주눅들어 살아야했습니다.
그러던 중 초등학교 5학년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너무 좋았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낸 김동수는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마라톤과 인연을 맺게 됩니다.
어릴 적부터 수영이나 달리기를 잘했던 편이었는데, 학교에서 마라톤을 하면 장학금을 준다는 말에 선 듯 나서게 됩니다.
마라톤을 하면서 이런 저런 대회에서 입상을 할 정도로 실력도 괜찮아서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북제주군 마라톤팀에 자연스럽게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생활을 이어가기에 너무 적은 임금과 결핵의 발병 등으로 인해 도망치다시피 해서 그곳을 나오게 됩니다.
이후 1984년부터 모교인 김녕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코치 생활을 하면서 마라톤과의 인연을 이어가게 되지만, 임금이 지급되지 않는 비공식 코치여서 신문배달이나 우유배달 등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가야 했습니다.
그렇게 6년간 코치 생활을 하며 꽤 괜찮은 성적을 내기도 했지만, 결국 생계를 위해 마라톤을 접고 택시운전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김형숙씨를 만나 1992년 결혼을 하게 되고, 잠시 서울 생활을 했다가 다시 제주로 내려와 매형과 함께 활어차를 몰며 활어장사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20년 동안 활어장사를 하며 열심히 살았지만 결혼할 때부터 빚을 안고 시작한 생활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새롭게 시작한 일이 화물기사였습니다.
그것이 2010년이었습니다.


화물차를 운전하는 첫날부터 사고가 나기도 하고, 처음에는 그곳의 생리를 잘 몰라서 많은 고생도 하고, 그러다보니 화물차 구입하느라 대출한 돈을 갚는데도 버거울 정도로 어려운 시기를 보냈습니다.
일주일에 2~3번은 육지로 왔다갔다하면서 뛰어야 돈이 되기 때문에 미친 듯이 일을 하면서 빚을 갚아나갔습니다.
나중에는 화물기사 생활에 적응이 돼서 한달에 많으면 10~11회까지 뛰고, 주행거리로는 700~1000km까지 정신없이 달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일했지만 빚을 갚느라고 큰 돈을 벌지 못했습니다.
빚을 거의 다 갚고 “이제 집을 살 수 있겠구나”하는 꿈을 갖기 시작했는데, 그만 세월호 사고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김동수씨는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틈틈이 마라톤을 이어갔습니다.
활어장사를 하면서도 마라톤 동우회 활동을 계속 했고, 특히 화물차를 운전하면서는 “남는 시간에 마음껏 달릴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고 회상합니다.
지금도 매일 사려니숲길을 2~3번씩 왕복할 정도로 마라톤은 김동수에게 있어서 중요한 활력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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