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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자 50회


1


어느날 ‘귀하의 계정이 해킹됐습니다’라는 메일을 받았습니다.
내용을 보니 포르노사이트를 방문했다가 바이러스에 감염됐는데
나의 온갖 자료와 행동이 녹화된 파일을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돈을 보내지 않으면 그 자료를 주변 사람들에게 돌리겠다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피식하고 웃었습니다.
포르노사이트를 방문하거나 바이러스에 감연될만한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메일 내용이 엉성해서 곳곳에 허점들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스펨처럼 다량으로 이런 메일을 보내서 누군가 걸려들게 만들려는 것 같더군요.
혹시 누군가 이런 메일로 피해를 입을지 몰라서 인터넷에 내용을 올리고는 무시해버렸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계속 메일 내용이 머리 속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혹시 내가 실수로 어딘가에서 감염된 것은 아닐까?”
“누군가 나의 은밀한 사생활을 녹화해두고 있을까?”
“나의 사생활이 100% 순수한 것은 아니니까 남들에게 알려지면 곤란하기도한데...”
이런 생각들이 자꾸 저를 옭아매더군요.


평소에 제가 저지른 악행들을 먼저 공개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제 추행이 들춰진다고해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저와 접촉하는 사람들이 극히 적기 때문에 공개된다고 해도 파급력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머리 속에 자리잡은 불안은 쉽게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날 저녁 인터넷으로 관련된 내용을 검색해봤더니
그 메일은 저만 받은 게 아니라 이미 무수한 사람들이 받았더군요.
예상대로 무작위적으로 발송된 스펨메일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나니 제 머릿속 불안이 스스로 사라졌습니다.


그 메일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저처럼 머리 속에서 불안을 키웠겠지요.
극히 드물겠지만 누군가는 협박범에게 돈을 보냈을지도 모릅니다.
욕망을 자극해서 돈을 버는 이 사회는 그 욕망을 이용해서 또 돈을 갈취합니다.
사람들을 연결하는 인터넷은 동시에 사람들을 분리시켜서 불안과 공포를 확산시키기도 합니다.
부처님처럼 욕망을 끓을수도 없고, 오지에 사는 사람들처럼 인터넷을 끓을수도 없으니 욕망과 불안을 벗으로 삼고 살아야 하는걸까요?
뜬금없는 협박메일 덕분에 철학적인 고민을 해봤습니다.

 

2


고향으로 돌아와서 농사를 짓기 시작한지 4년이 지났습니다.
4년 동안 이런저런 변화들이 많았습니다.
그 변화들 중 가장 중요한 변화는 제 마음에 행복이 자리를 잡았다는 겁니다.
헬조선에서 발버둥치며 버텨온 10년만에 너무도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됐습니다.
세상과 적당히 떨어져서 개 한 마리에 의지하고 식물들과 호흡하며 살다보니 편안해졌습니다.


저의 이 행복을 남들과 나누고 싶어지더군요.
그래서 조심스럽게 세상사람들과 접촉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나눌 수 있는 것들을 나누려고 했고
그들의 마음을 들을수 있도록 귀를 기울였고
다가설 수 있으면 조심스럽게 다가섰습니다.


행복을 공유하려는 노력을 2년째 하고 있습니다만
번번히 실패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파고가 너무 높아서 이런 작은 시도는 금방 묻혀버리기 때문이기도 하고
세상을 향한 제 발걸음이 너무 조심스러워서 금새 뒤걸음질치기 때문이기도 하고
행복을 공유하기 위한 코드가 맞지 않아서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기도 하고
제 마음 속에 또아리를 튼 불신과 불안의 힘이 여전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생각했습니다.
지금의 이 행복도 지나가는 것인데
여기에 집착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으며
이런 걸 다른 이들과 공유한다는 것 자체가 허망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행복을 버리기로.
그렇다고 불행을 자처하거나 고행을 찾아나서겠다는 건 아닙니다.
그냥 행복에 집착하지 않도록 해보겠다는 겁니다.
행복이든 불행이든 세월의 강물에 흘러가게 내버려두는 겁니다.
그냥 그 강물을 무심히 바라볼 수만 있다면 좋겠습니다.


이 얘기는 세상에서 뒤로 한발 더 물러서겠다는 겁니다.
그건 분명히 후퇴이지요.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으니 퇴보를 인정해야겠습니다.
언젠가 다시 앞으로 한 두 발 나아갈 때가 있을 겁니다.
그때 망설이지 않기를 바랄뿐입니다.

 

3


페이스북이라는 게 웃기는 놈이란 걸 요즘 느낌니다.
가끔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면 댓글이나 좋아요가 거의 달리지 않습니다.
당연히 제 글에 대한 다른 이들의 반응을 알리는 빨간불이 거의 들어오지 않죠.
그렇게 조용하게 페이스북을 유지하고 있었더니 최근에 페이스북이 알아서 빨간불을 켜주더군요.
제 친구중 누가 글을 올렸으니 가서 보라고 빨간불을 켜기도 하고, 새로운 친구를 맺어보라고 친구소개로 빨간불을 켜기도 합니다.
굳이 그렇게 빨간불을 켜주면서까지 알려주지 않아도 제가 알아서 할텐데 ‘그 녀석 참 정성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페이스북을 시작할 때 빨간불이 켜지는 게 신기했습니다.
제가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줬으니까요.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빨간불에 집중하게 되더군요.
어떻게하면 빨간불이 자주 켜지게할까 생각하게도 되고 말이죠.
그래봐야 친구가 많지 않아서 빨간불은 그리 자주 켜지지는 않았습니다.
댓글이 줄줄이 달리고 좋아요가 수십개씩 눌러져 있는 사람을 보면 부러워지더군요.
그래서 글도 자주 올리게 되고 남들에게도 자주 글을 남기곤 했습니다.
사람들과 소통을 넓히는 과정이기보다는 빨간불을 켜기 위한 노력이 되더군요.


그러다가 제가 근신을 한다고 잠시 페이스북을 중단했고
얼마되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도 소원해지고 말았습니다.
그 과정을 거친 후 다시 시작한 페이스북은 아주 고요한 공간이 됐습니다.
빨간불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죠.
그 고요함이 외로움을 안겨주기는 했지만 또 한편으로 자유로움을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빨간불의 노예가 되어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제 자신과 대화하며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페이스북은 그런 고요와 자유로움이 싫은가봅니다.
자꾸 빨간불을 켜면서 사람들을 만나러 가라고 떠밀고 있으니까요.


페이스북에게 얘기해주고 싶습니다.
사람들에게 내 얘기를 하는 것도 즐겁지만 사람들의 다양한 얘기를 듣는 것도 너무 즐겁다고.
그리고 세상 사람을 만나는 것은 내 욕구와 의지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행해졌으면 좋겠다고.


4

 

 

사용자 삽입 이미지

 

몸에 힘이 쭉 빠진 채 의자에 앉은 여자가 힘없이 압생트 한 잔을 바라본다. 빈말로도 예쁘다고는 못하겠다. 축 처진 눈꺼풀이 안쓰럽다. 나라면 옆자리의 험상궃은 남자를 어떻게든 피해 앉았을 텐데...... 그녀는 그 무엇에도 신경 쓸 여력이 없다. 어깨는 축 내려가 있고 등은 굽어 있다. 긴장이 풀린 모양인지 두 발이 벌어져 있다. 저 커다란 모자라도 좀 벗었으며 좋겠다. 목이 아프고 어깨가 뻐근하리라. 멍한 눈빛에 서글픈 표정, 무너져내린 어깨, 흐트러진 옷자락, 무엇을 보아도 생기라곤 없이 진이 빠진 여자. 한참 전에 나온 압생트 한 잔을 들어올릴 기력도 없다. 오늘 일터에서 어떤 괴로움이 있었단 말인가. 주문한 술 한 잔을 마실 힘도 없이 유령처럼 앉아 있다.
(김수정의 책 『그림은 마음에 남아』중에서)

 


드가의 ‘압생트 한 잔’이라는 그림과 김수정씨의 그림 해설입니다.
여기에 무슨 말을 덧붙이기가 민망해지네요.


추석 연휴가 이어지는 한 주입니다.
외로움과 힘겨움을 싸구려 술 한 잔으로 버티는 분들이 떠오릅니다.
드가의 그림과
김수정씨의 해설과
브로콜리너마저의 노래를
전해봅니다.

 


(브로콜리너마저의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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