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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자 54회


1


추석 선물로 들어온 꿀이 있었습니다.
제가 먹으려고 여분으로 하나를 두고 있었는데 손이 잘 않가더군요.
그래서 이걸 누구에게 줄까 생각하다가 이웃마을에 있는 고모할머니를 찾았습니다.
잔정이 많으셔서 이것저것 많이 챙겨주셨던 할머니였는데 그동안 무심하기도 했습니다.


할머니를 찾았더니 역시나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꿀을 건내드리고는 차 한잔을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습니다.
얘기의 대부분은 몸이 아픈 것에 대한 거였습니다.
어머니 아버지는 아픈데 없느냐는 걱정에서부터 시작해서
머리가 아파서 어디 나다니지도 못한다는 얘기
석 달에 한번 병원에 가는 것도 힘들다는 얘기
눈이 어두워서 소일거리도 못한다는 얘기
매일 한움큼의 약을 먹는다는 얘기
얘기 중간중간 어미니 아버지뿐 아니라 제 걱정을 하시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서로 웃으면서 이런 얘기를 가볍게 나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할머니랑 20분 정도 얘기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온통 몸 아픈 얘기만 했는데도 돌아오는 발걸음이 상쾌했습니다.


다음날 할머니에 대한 생각이 머리 속에 남아있더군요.
천사처럼 착하게만 살아오셨던 분도 나이가 들면 질병에 고통받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도 할머니처럼 늙고 병들어 가겠지요.
아마 10년쯤 지나면서부터 몸의 기관이 하나둘씩 망가지기 시작해서
20년쯤 지나면 지금 부모님처럼 기력도 약해지기 시작할테고
30년쯤 지나면 지금 할머니처럼 약에 의지해서 하루하루 견딜지 모릅니다.
늙고 병드는 것이 금방이라고 생각이 드니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휘젓더군요.


그래서 생각하기를 멈췄습니다.
생각하기를 멈추고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춤추던 생각들이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어지러워진 생각자리를 가볍게 청소했습니다.
생각청소를 하며 또 생각을 했지요.
“가끔 할머니를 찾아가야겠다. 그리고 지금의 내 삶을 잘 보듬어줘야겠다.”

 

2


예맨분들에게 겨울옷이 필요하다는 글을 보고 옷을 전해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겨울옷을 찾는 글이 계속 올라오더군요.
사람은 많은데 옷은 턱없이 부족한 모양이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어서 안타까운 마음에 글을 하나 올렸습니다.
저의 사회적 접촉면이 워낙 좁아서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런 글을 올리는 것으로 마음의 위안을 삼으려고 했던거지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런데 예상치도 않은 택배들이 들어왔습니다.
정성스럽게 차곡차곡 쌓아서 하나라도 더 넣으려는 마음이 보이는 택배였습니다.
내가 세상을 향해 마음을 전하면 이렇게 응답이 온다는 사실에 엄청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런 기분을 느껴본 것이 얼마만인지...


보내주신 옷들을 살펴보는데 문득 어릴적 생각이 났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돈 벌러 일본을 자주 갔다오곤 했거든요.
외가가 일본에 있어서 친지방문 명목으로 가서는 가방공장이나 식당 같은데서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몇 달 동안 일을 하고 돌아올 때는 한짐 가득 선물을 들고 오십니다.
그 선물들 속에 저희들이 입을 옷들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모들이 조카를 생각해서 입던 옷들을 챙겨서 넣어준 모양이었습니다.
색깔도 화려하고 디자인도 세련된 일본옷(일본스타일의 옷이 아니라 그냥 일본에서 온 캐주얼한 옷)을 입고 학교를 가면 은근히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새옷이 아니라 입던 옷들이라는 건 친구들 사이에서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의 그런 태도에 좋지 않은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친구도 있었지요.


언젠가 이모가 한국에 오신 적이 있습니다.
이모를 마중하러 나가는 길에 아무 생각없이 일본옷을 입고 갔는데
이모가 “옷이 잘 어울린다”고 얘기를 하더군요.
그 순간 내가 입고 있는 옷이 ‘새옷이 아니라 입던 옷’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인식했지요.
그때 내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예맨분들의 상당수가 20~30대 청년이라는데
그리고 예맨에서는 비교적 잘나가던 사람들도 많다던데
그들에게 이 옷들이 어떤 느낌으로 다가설지 생각이 많아지더군요.


가을이라서 그런가봅니다.
저의 고질병이 심해지네요.
쓸데없이 생각을 많이 하는 병이죠.
아, 뭐, 가을이라서 그런거라면 그런가보다 해야죠.
가을에는 가을에 맞게 살아야하니까.


오늘 방송은 가을 분위기 물씬 나는 노래로 끝낼까요?
그 유명한 베사매무쵸(Besame Mucho)입니다.
노래는 Cesaria Evora라는 아프리카 출신의 유명한 가수인데요
노래 속에 내공이 절절하게 흐릅니다.
애절한 사랑노래 들으며 쓸데없이 생각이 많았던 오늘 방송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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