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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자 51회


1


안녕하세요, 성민입니다.
읽는 라디오 ‘살자’ 쉰 한 번째 방송을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주에 추석 연휴가 있었는데 어떻게들 보내셨는지요.
저는 명절이나 제사 이런 것들이랑은 담을 쌓고 사는데다가
농사를 짓고 있기 때문에 연휴개념도 없어서
추석이라고 특별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추석날에도 오전에 일을 하고 여유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었는데
오래간만에 아는 분이 연락을 해오셨습니다.
제주도에 왔는데 시간되면 얼굴이나 보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즐거운 마음으로 시내에 나갔습니다.
오래간만에 만난 그 분과 예전에 알던 사람들 안부를 물으며 기분좋게 술 한 잔 했습니다.
두 시간 여 동안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집으로 돌아왔더니 사랑이가 반겨주더군요.
약간 흥겨운 기분이 남아 있어서 혼자 한 잔 더하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추석 다음날에는 가족들이 모여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서로 준비해온 음식들로 밥을 먹고 이런저런 얘기를 편하게 나누고 있는데
초등학교 6학년인 조카가 갑자기 “삼촌, 안씻엉 완?”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오전을 일을 하고 샤워를 하기는 했는데 조카가 그렇게 묻길래 “씻었는데, 왜 냄새나?”하고 대답해죠.
그랬더니 조카가 “아니, 안시성 봤냐고?”하는 겁니다.
“안시성 봔?”이라고 묻는 걸 “안씻엉 완?”으로 알아들은 거였죠.
그래서 유쾌하게 웃음을 날리고는 조카랑 같이 영화 안시성을 봤습니다.


영화는 그럭저럭 볼만했고
영화를 보고나서는 근처 식당에서 맛있는 저녁도 먹었습니다.
저녘을 먹는데 조카가 뜬금없이 “오늘 삼촌 집에서 자도 돼?”라고 묻는 겁니다.
지금까지 그런 적이 없어서 “그래도 되는데, 갑자기 왜?”라고 물었더니
“그냥 삼촌 집에서 한 번 자보고 싶어서”랍니다.
그래서 조카랑 같이 집으로 돌아와서 밤늦게까지 추석특선영화를 봤습니다.
다 좋았는데 조카랑 같이 한 침대에서 잤더니 잠을 설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은 몸이 많이 무겁더군요.


이렇게 연휴를 보내고 나서 무거워진 몸을 달래러 목욕탕을 갔습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좋더군요.
사우나에 들어가서 땀을 흠뻑 흘리고 났더니 기분도 개운해졌습니다.
모처럼 행복하게 보냈던 추석연휴를 땀과 함께 흘려보냈습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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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와 산책을 하고 있으면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우정이가 이렇게 바라보곤 합니다.
우리를 보면 꼬리를 흔들며 달려오는 일은 더이상 없습니다.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 뿐이지요.


이렇게 떨어져 있으면 다정한 목소리로 “우정아, 안녕”이라고 인사를 건냅니다.
제 목소리를 들은 우정이는 제 목소리에 담긴 마음도 알아들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정이의 몫이지요.


가끔 우정이와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긴장을 합니다.
우정이가 사랑이를 공격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랑이도 심하게 으르렁거리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면 단호한 목소리로 “우정이, 가까이 오지마!”라고 얘기합니다.
제 목소리에 담긴 냉정함을 알아들은 우정이는 주춤하고 멈춰섭니다.


이제, 우정이와는 더 이상 가까워지기 어려워진거겠지요?

 


수많은 실패를 겪고 나서야 알게 돼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흐름과 같아 이를 인연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인연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오가듯 물 흐르듯 그저 주어지는 것이며 또한 결이 같아 행동과 생각의 흐름이 비슷한 사람이라면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어느덧 얽혀 같이 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김수정씨의 책 『그림은 마음에 남아』중에서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우정이와 저의 관계도 물이 흘러와서 지나가듯이 그렇게 된것일까요?
노력한다고 될 일이 아니니 이렇게 주변에서 볼 수 있음으로 감사해야겠지요.
그저 지금의 관계에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이마저 언제 흘러가버릴지 모르니까요.

 

3


브로컬리를 올해 먹었었나 헷갈리네..

 


‘김국남’님이 지난 방송에 댓글을 남겨주셨습니다.
이 뜬금없는 댓글은
지난 방송 마지막에 브로콜리너마저의 노래를 들려드렸더니
브로콜리를 먹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남기신 겁니다. 프흐흐흐
이 아재스러운 자유로움의 배경에는
고요함이 넘치는 이 방송에 사람의 발자국을 남겨주기 위한 배려가 깔려있습니다.
덕분에 썰렁함이 많이 가시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림 보고 울었습니다 펑펑펑

 


‘호리’님도 지난 방송에 소개된 드가의 그림을 보고 댓글을 남겨주셨네요.
어떤 면이 그림 속 여성과 감정의 접촉을 하셨나보네요.
울수 있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겠죠? 그쵸, 호리님?
호리님 덕분에 이 방송이 촉촉해지고 있네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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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랭글리의 ‘저녁이 가면 아침이 오지만 가슴은 무너지는구나’라는 그림입니다.
때로는 ‘슬픔은 끝이 없고’라는 이름으로도 소개되는데
저는 원래 제목보다 ‘슬픔은 끝이 없고’라는 제목이 더 와닿습니다.
그림이 말하려는 게 너무 분명해서 굳이 토를 달지 않아도 될 것 같지만
김수정씨는 이렇게 감상을 적어놨더군요.

 


슬픔은 거대한 것이다. 감히 평가할 수 없는 크기이며, 감히 참견할 수 없는 깊이이며, 감히 조언할 수 없는 복잡함이며, 감히 직면하기 두려운 세상의 불합리함이다. 누군가의 슬픔에 참견하지 않는 것, 그 슬픔 곁에 그저 머무는 것, 그의 슬픔을 존중하는 것만이 한낱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김수정의 책 『그림은 마음에 남아』중에서)

 


이 그림과 김수정씨의 글을 보며 생각해봤습니다.
“나는 어느 위치에 있을까?”


끝없이 밀려오는 절망에 눈물도 나오지 않던 시기를 지나
누군가의 슬픔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기는 한데
그림 속 노인처럼 바로 옆에 앉아 등을 토닥일 자신은 없습니다.
그게 뭔지 알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서는 게 두렵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옆에서 이렇쿵저렇쿵 쏟아내는 말이 꼰대의 훈수가 될까 두렵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저 말없이 그 곁에 머물러 있는 것도 만만치 않게 힘들고 고통스럽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는 이 그림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한 발 떨어진 자리에서 그냥 바라만 봅니다.
그리고 혼자서 속으로 주문을 외워봅니다.


“내가 불안과 고통에서 벋어나서 편안하고 평화롭기를 바랍니다.
내가 불안과 고통에서 벋어나서 편안하고 평화롭기를 바라는 것처럼
모든 생명들이 불안과 고통에서 벋어나서 편안하고 평화롭기를 기원합니다.”

 


(범능스님의 ‘먼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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