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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자 82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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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감귤나무 전정을 하고 있습니다.
3년째 하는 전정이라서 조금은 감이 잡히지만 아직도 가지를 잘라내는게 무섭습니다.
이래저래 고민을 하면서 조심스럽게 전정을 하고나면 깔끔해진 나무 모습에 제 마음도 깔끔해집니다.


나뭇가지를 붙들고 끙끙거리다보면 하루가 금새 지나가버립니다.
요즘은 일하기에도 너무 좋은 날씨여서 일하는 기분도 좋습니다.
혼자서 일을 하고 있으면 사랑이가 살며시 주변에 나타나 제 마음을 달래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일을 하고나면 밥맛도 좋고 밤에 잠도 잘 옵니다.


그런데
일에 속도가 붙지 않습니다.
한 그루를 전정하는데 한 시간이 걸리는 속도입니다.
이 속도로 하루에 일고여덟 그루를 작업하는 게 고작입니다.
작업해야할 나무는 많고 속도는 붙지 않으니 마음만 급해집니다.
전정 이외에도 해야할 일들이 주위에 널려 있어서 마음이 더 빨라지게됩니다.
그러다보면 일을 하는데 힘이 들어가고
힘이 들어가면 속도는 더 느려지고
마음은 급해져서 시간을 자꾸보게 되고
그렇게 하루 일을 마치고나면 피로가 쌓이고 맙니다.


조급해지는 제 자신을 느끼게 되면 일을 내려놓고 놀러갑니다.
영화를 보러가기도 하고, 공연을 보러가기도 하고, 목욕을 하러 가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몸과 마음에 쌓인 피로를 풀어보는 거죠.
그렇게 피로를 풀고나서 다시 일을 하면
몸은 조금 개운해지는데
마음은 금새 조급해집니다.
그러면 제 마음에게 한마디 쏘아붙이지요.
“에이, 빌어먹을 놈의 마음아! 좀 가만히 있어라. 나도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너도 조금만 더 노력해줘.”
그렇게 한마디 하고나면 제 마음이 미안해졌는지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뒤로 물러섭니다.
그러면 저도 괜히 미안해져서 씩 웃어보이지요.

 

2


어느 날부터 우정이가 보이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날씨가 조금씩 더워지면서 활동력이 떨어진거겠거니 했습니다.
5일이 지나도 보이지 않으니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도 보이지 않으니까 마음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특별히 주거가 없는 개가 일주일 넘게 보이지 않는다는 건 이 주변을 떠났다고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니 마음이 많이 착찹했습니다.
알고 지낸지 3년 가까운 시간 동안 정이 많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의 여러 가지 우여곡절들이 머리 속에서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부디 불길한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니길 빌어봤지만
나이가 많고 덩치가 큰 유기견을 누군가 입양해 갔을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심란해지더군요.


우정이 생각을 하면서 평소와 다름없이 사랑이 산책을 하던 날
저 멀리서 하얀 개 한 마리가 보였습니다.
첫눈에 우정이인걸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우정이도 저를 알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더군요.
순간 기분이 너무 좋아서 얼굴에 환한 미소가 일었습니다.
저를 본 우정이는 꼬리를 흔들며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우정이가 달려오는 걸 보더니 사랑이는 이빨을 드러내면서 으르렁 거리기 시작했고
저는 그런 사랑이를 끌면서 전속력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둘이서 아주 살벌하게 싸우거든요.
저를 보고 신나서 달려오는 우정이를 피해 열심히 도망가면서도 기분은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다시 우정이가 보이지 않더군요.
그때 알았습니다.
우정이가 이 동네를 떠난 것이 아니라
이 동네에 사는 누군가가 우정이를 기르기로 한 것 같았습니다.
우정이에게도 집이 생긴 거였습니다.
집에 있을 때는 묶여 있어서 마음대로 나다닐 수 없지만
가끔 풀어줄 때면 그 반가운 모습을 볼 수 있게 된 거였습니다.
우정이에게 집이 생겼다는 건 아주 반가운 일입니다.
떠돌이 생활 3년만에 새로운 가족이 생겼으니 축하해줘야죠.


사랑이와 싸움을 피하기 위해 전속력으로 도망치는 일도
저녁이 되면 제 집으로 놀러와서 쓰다듬어 달라고 머리를 내미는 일도
저를 발견하면 꼬리를 흔들며 달려오는 일도
가게에서 물건을 사들고 오면 조용히 뒤에서 나타나 비닐봉투를 툭 치는 일도
이제는 기대하기 어렵게 됐지만
우정이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아늑하고 행복하길 진심으로 바래봅니다.

 

3


바쁘게 일을 하다가 잠시 쉬면서 인터넷 검색을 하는데
김동수씨가 국회 앞에서 자해를 했다는 소식이 떴습니다.
4월을 무사히 잘 넘기나 했었는데...
다음날 부인인 김형숙씨와 통화를 했습니다.
서로 웃으면서 상황 얘기를 하고 통화를 마쳤습니다.
그렇게라도 버텨나가야하는 거겠죠.


일을 마친고난 저녁에 주변을 둘러봤더니
처리해야할 일들이 곳곳에 보이더군요.
나중에 천천히 하자며 게으름을 피우는데
텃밭에 심어놓은 모종이 시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더운 날씨에 물을 주는 걸 깜박했던겁니다.
부랴부랴 물을 골고루 주고나서 모종에게 사과를 했지만
이미 하나는 말라 죽어버렸습니다.


어린이날도 조카들에게 선물도 해주지 못하고 지나가버렸습니다.
다가오는 어버이날도 역시 일하느라 별다른 걸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주말쯤에 가족모임을 한다고 하니 그때 미안함을 달래야겠군요.
그냥 이렇게 살아가는 요즘입니다.

 


(이루마의 ‘River Flows in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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