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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자 84회

 

1


어느 날 우연히 ‘싸이월드’를 검색했더니 예전 홈페이지가 살아있는 겁니다.
10여 년 동안 잊고지내던 옛동지를 만난 기분이었죠.
그곳에 올라온 글과 사진들을 보다보니 예전 감성이 다시 살아나더군요.
10여 년 전이면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닌데 제가 너무 멀리 와버려서 그런지 까마득한 기억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면서 예전의 성민이랑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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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언제 어디에서 찍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환하게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30대의 성민이는 이렇게 밝고 열정적이었죠.
지금도 나름 밝고 열정적으로 살려고 노력은 해보지만
그때와 같이 넘치는 에너지를 발휘하는 건 좀...
이렇게 얘기하면 늙은이가 되어버린 느낌이 확 밀려오기는 하지만
사실은 사실입니다. 헤헤헤

 

2


올 겨울은 어느 해보다 참 따뜻하게 시작하더니 중반을 넘어서면서 매서운 추위가 몰아쳤습니다. 그러나 입춘이 지나고 갑자기 봄을 기약하는 날씨로 변하더니 오늘은 비가 내립니다.
비 오는 교도소는 좀 처량할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운동을 할 수 없어서 30분의 달콤한 시간을 빼앗아 버리고, 추적거리는 날씨가 기분을 가라앉게 만들어버려서 더 처량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살포시 듭니다.
유난히 겨울이 길게 느껴지고 봄이 멀어 보이는 그곳에서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으세요?”라는 질문이 사치스럽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잠시나마 마음의 사치를 즐기시라고 질문을 드립니다.


박현정 동지, 마음에 봄의 기운이 전해지십니까?
제 마음에 사치스럽게 다가온 봄의 기운을 전해드립니다.


집 컴퓨터에 ‘김해교도소 500번 박현정’이라는 메모지를 한 달이 넘게 붙여놓고 있습니다. 매일 그 메모를 보면서 “편지를 써야지”하면서도 지금까지 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바쁜 것도 있었지만, 쉽게 쓰기가 힘들었습니다. 2001년 7.5총파업을 철회했던 현대자동차 집행부 현장조직의 간사였던 제 마음 속에는 효성 동지들에게 갚아야 할 빚이 너무 크게 있어서 아직도 효성 동지들 앞에서는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리고 너무 경악스럽게 구속된 박현정 동지와 효성 동지들 앞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서 마음이 더 아픕니다.
제가 갖고 있는 이 마음의 빚과 안타까움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저에게는 그게 흔들리지 않고 활동을 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출소하고 나서 병 요양으로 쉬고 난 후 1년 반 만에 복귀한 울산에서 처음 참여한 집회가 효성 동지들의 순회투쟁이었습니다. 언양공장과 울산공장으로 이어진 짧은 투쟁에 결합하면서 정말 많은 힘을 얻었습니다. 복직과 노조민주화에 대한 희망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 가운데 3년을 넘게 해고자 생활을 하면서도 굳건히 싸우고 있는 동지들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습니다. 효성 동지들을 보면서 “투쟁은 아무리 힘들어도 웃으면서 당당히 버티어 서 있는 것”이라는 점을 새삼스럽게 확인했습니다.
아마 제가 노동운동을 하는 한 평생 가슴에 갖고 있어야 할 마음의 빚과 효성 동지들을 보면서 느꼈던 투쟁의 힘을 다시 꺼내서 보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오늘도 투쟁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효성 동지들만큼 간절하지는 않겠지만, 박현정 동지가 출소할 때까지 제 컴퓨터 앞에 붙여놓은 메모지를 떼지 않을 것입니다. 솔직히 제 마음 속에 항상 자리 잡고 있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그 메모지를 보는 순간만큼은 박현정 동지를 생각하면서 간절히 소원을 빌겠습니다.


박현정 동지!
아프지 마세요.


2005년 2월 15일
부산에서 성민

 


당시 구속돼 있던 분에게 썼던 편지입니다.
지금 다시 읽어도 그때의 감정이 살아움직입니다.
나중에 이 분이 출소를 하고 제게 하는 말이
“그때 니 편지를 읽고 나니까 마음이 편한해지더라”라고 하시더군요.


진심을 담아서 표현하면
그 마음이 그대로 전해질 뿐아니라
시간이 흘러도 그대로 살아있는가 봅니다.


이분은 몇 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가 더 와닿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박현정, 거기서도 내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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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2003년 제가 구속됐을 때 모습입니다.
유치장에서 구치소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응원와준 분 중에 한분이 찍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뜨거웠던 때의 모습입니다.
그때의 기억은 너무 강렬해서 되새김만으로도 금새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제 삶에서도 아주 중요한 분기점이 됐던 때입니다.
이 사진을 보면서 그때의 성민이에게 변명처럼 한마디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때의 니 모습을 되새기다보니 지금의 내가 초라해보이는 것 같아 솔직히 좀 불편하네. 하지만 성민아, 나도 최선을 다해서 지금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어.”

 

4

 

솔연(率然) - 김남주

 


대가리를 치면 꼬리로 일어서고
꼬리를 치면 대가리로 일어서고
가운데를 한가운데를 치면
대가리와 꼬리가 한꺼번에 일어서고


뭐 이따위 것이 있어
그래 나는 이따위 것이다


만만해야 죽는 시늉을 하고 살아야
밥술이라도 뜨고 사는 세상에서


나는 그래 이따위 것이다

 


내 인생의 좌우명처럼 외웠던 시입니다.
역시 김남주의 시답게 아주 서슬이 퍼렇지요?
그리고 결기가 철철 넘쳐 흐릅니다.


그때는 이런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마음을 다해서 진정성이 살아있게!
그리고 앞만 보고 뚜벅뚜벅 걸어갔죠.


그렇게 계속 앞으로 나아갔는데
어느 순간 저는 버림을 받았고
삶의 구렁텅이에 굴러떨어져서 발버둥쳐야 했습니다.
그때도 “그래 나는 이따위 것이다”라는 심정으로 버텼습니다.
그렇게 10년을 버티니 병든 몸과 마음밖에 남지 않더군요.


김남주도 일찍 죽었고
이 시처럼 살아왔던 많은 활동가들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제와 이 시를 다시 접하면서
30대의 성민이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까 잠시 고민을 하는데
아직 제게는 힘이 남아있더군요.


“그래, 나는 아직도 이따위인가보다.”

 


(노래마을의 ‘나이 서른에 우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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