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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자 99회


1


몸과 마음이 쳐지는 요즘이었습니다.
가을로 접어들었음을 느낄 수 있을만큼 주변의 변화가 확연하고
더위도 많이 가셔서 일을 하는데 힘겨움도 줄어들었는데
좀처럼 일의 진척이 없고 마음만 조급해졌습니다.
그렇다고 밀린 일들을 내려놓고 무작정 휴식을 취할 수는 없기에
몸과 마음을 살살 달래면서 지냈습니다.


중간에 목욕도 갔다오고 영화도 보고오고 그랬지만
좀처럼 올라오지 않는 몸과 마음을 바라보며
가만히 제 자신과 얘기를 나눴습니다.


“왜 그럴까? 일이 많기는해도 엄청 쌓여서 헉헉거릴정도는 아닌데...”
“습도가 높아서 짜증나기도 하고, 밀려있는 일들 때문에 이래저래 신경도 쓰이고.”
“일이 밀렸기는 하지만 조급해하지는 말자. 다 할 수 있을텐데 말이야.”
“니 말이 맞기는한데 밀린 일들을 생각하면 그렇게 안되더라. 감귤나무 묶어주는 것만해도 한달 내내 했는데도 끝이 보이않잖아. 그 사이에 잡초는 무성하게 올라와서 처리해야하고, 비가 그치면 병충해 방제도 해야하고, 영양제도 뿌려줘야하고, 참깨도 빨리 털어야하고, 텃밭도 정리해서 겨울작물 들어가야하고, 벌초도 해야하는데...”
“성민아, 알잖아, 이럴 때일수록 여유를 가져야한다는 거.”
“알아, 그럴려고 노력은 하는데 자꾸 쌓인 일들이 보이니까 마음만 조급해지네.”
“비가 그치면 농약 치고 잡초 정리하는 것부터 먼저 하고, 참깨 터는 거랑 여름작물 정리하는 건 부모님에게 도와달라고 하자. 그리고 대장내시경 검사도 받으러가야하니까 겸사겸사해서 영화나 하나 볼까? 아님 오래간만에 공연 보러갈까?”
“우선 급한 것부터 먼저 처리하고나서 생각해보자.”
“이제 가을이야, 이 가을을 즐겨보자고.”


그렇게 얘기를 마치고 밀린 일을 다시 열심히 했습니다.

 

2


얼마 전에 세월호 생존자 김동수씨와 부인 김형숙씨가 찾아왔습니다.
근처에 왔다가 생각나서 들렀다고 했습니다.
오래간만에 밝은 표정의 두 사람을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차를 마시면 얘기를 하는데 사랑이까지 그 자리에 끼게 됐습니다.
동수씨네도 얼마전부터 개를 키우고 있기에 개에 대한 얘기가 자연스럽게 오갔습니다.
낮선 이를 경계하던 사랑이도 형숙씨에게 슬며시 다가가서 만지는 걸 허락하더군요.
하지만 동수씨의 부름에는 낮게 으르렁거리면서 거부의사를 분명히 했습니다.
그 모습에 모두가 한바탕 웃었습니다.
한참 수다를 떨다가 근처에서 일을 마친 분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갔습니다.
그분 역시 오래간만에 보는 것이어서 반갑게 인사를 했지요.
음식맛도 아주 좋아서 분위기 최고였습니다.
정말 오래간만에 더없이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형숙씨가 페이스북에 올리는 그들의 근황을 읽을 때마다
힘들고 불편하고 때로는 짜증이 나기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어쩌겠습니까, 그들이 살아가는 현실이 그런걸.
어쩌면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야 할지도 모르는 그들의 삶을
이해하거나 공감한다는 건 거짓일지도 모릅니다.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볼뿐...
지난 10년 동안 제 곁에서 그저 저를 지켜봐야만했던 제 가족들이 그랬던것처럼.

 

3


한참 바쁘게 일을 하는데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더군요.
잠시 뜸을 들이다가 하는 얘기는
아버지가 몸이 좋지 않아서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는데 폐암으로 보인다는 거였습니다.
서울에 있는 대형병원으로 가서 최종검사를 받아봐야겠지만 거의 확실해보인다고 하더군요.


그 얘기를 듣고 덤덤했습니다.
잠시 비가 그쳐서 감귤나무에 농약을 치고
농기계가 고장나서 고치러가고
동생들이 와서 같이 점심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습니다.
오후에는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벌초를 하러갔습니다.
이렇게 할 일이 많아서 다행이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벌초를 하러간 고내오름 위에서 주변을 내려다봤더니
하늘도 파랗고 오름들도 선명한게 주변 경치가 너무 좋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생각을 했습니다.
“아버지 소식을 전하는 동생은 울먹이며 얘기를 했는데 나는 왜 이렇게 무덤덤할까?”

 


(옥상달빛의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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