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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자 120회


1


항암치료 중인 아버지는 잘 견디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낙상사고로 엉덩이고관절이 부러져서 수술을 받아야했습니다.
수술 이후 힘겹게 재활을 하고 다시 3차 항암치료를 시작했는데
또 낙상사고로 엉덩이뼈가 부러져서 다시 수술을 받았습니다.
항암치료의 부작용으로 뼈골밀도가 약해진 것이 문제라고 하더군요.
항암치료 때문에 긴장하며 보내고 있는데 두 번의 수술까지 거쳐야했으니 이래저래 심란함이 밀려왔습니다.
그나마 암세포가 줄어들고 있다는 소식에 마음의 위안을 가져보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이 이어지다보니 환자인 본인뿐 아니라 가족들도 이래저래 고생입니다.
어머니와 동생들이 돌아가면서 고통을 나눈다고 하지만 힘든 건 힘든 겁니다.
그런데 정작 저는 그 대열에서 한발 빠져 있습니다.
서울에서 치료가 이뤄질 때는 혼자 사는 이곳을 비울수가 없다는 이유로 빠지게 되고
제주에 내려왔을 때는 조급해하는 아버지에게 짜증을 내고 화도 내고 하면서 제풀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처음에 아버지의 암발병 소식에 너무도 담담하기만 했던 제 모습이 당황스러웠는데
본격적인 치료가 진행되는 와중에는 너무도 가벼운 제 모습이 당황스럽습니다.


사랑이와 산책을 하는 길에 제 자신에게 왜 그러는지 물어봤습니다.
처음에는 이런저런 이유들을 늘어놓더군요.
그 얘기를 가만히 들으면서 조곤조곤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다보니 좀더 솔직한 얘기를 하더군요.
“지금 여기서 사랑이랑 둘이 이렇게 살아가는게 너무 편안하고 좋아. 이 편안함과 행복함이 어떤 이유로든 흔들리고 깨지는게 싫은 거야. 참 이기적이지?”


그 와중에 서울에서 수술을 마친 아버지가 내려오셔서 이곳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설준비 때문에 바쁜 동생들을 대신해서 제가 병원을 찾았습니다.
케어할 게 많지는 않지만 이래저래 신경써여할 건 있었습니다.
아버지도 밤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저도 잠자리가 불편해서 잠을 설쳤습니다.


빰새 뒤척이면서 제 자신이랑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습니다.
예전에 노동운동을 할 때는 길거리나 농성장에서 무수한 밤을 보내곤 했었습니다.
불편하고 피곤하기는 했었지만 그들과 함께하는 자리가 좋아서 즐겁게 찾아가곤 했었죠.
‘그런데 지금은 내 마음이 왜 이럴까?’하는 얘기를 나누다보니 한 가지 결론에 이르더군요.
그때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있었기에 그들과 함께하는 고통의 시간들이 즐거움으로 다가왔지만 신뢰와 애정이 사라진 지금은 고통의 시간이 편안함을 쫓아버리는 거였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야하는데... 그걸 할 수 있을지 자신있게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2


두 번째 이야기에서 자꾸 자기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동안 댓글을 달지 못했네요. 미안한 말씀드려요.^^ 기분 좋은 명절 보내시면 좋겠어요.^^

 


곰탱이님이 사연을 보내주셨습니다.
지난 방송에서 두 번째 이야기는 바로 앞에서 했던 얘기랑 비슷한 얘깁니다.
이러저런 얘기중에 그 얘기가 곰탱이님 마음에 걸렸다니 곰탱이님도 비슷한 마음의 파동이 있는 건가요?
서로의 파동이 부딪힐 때 비슷한 주파수로 넘나든다면 편안한 잔물결이 됩니다.
설혹 그게 아니더라도 뭐 어떻습니까,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느껴지면 좋은 거죠.
곰탱이님 덕분에 제 마음이 조금은 잔잔해졌네요, 고맙습니다.

 

3


설날을 병원에서 맞이했습니다.
밤새 잠을 설친 아버지는 아침으로 빵 한조각을 먹고는 ‘감귤을 따러가자’고 하더군요.
그런 아버지를 달래서 재우고는 어머니를 병원에 남겨두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왔더니 누가 설선물을 놓고 갔더군요.
그리고 사랑이가 저를 반겼습니다.
사랑이 밥그릇을 봤더니 별로 먹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랑이에게 미안하다고 얘기를 하고는 산책을 나섰습니다.


사랑이와 산책을 마치고는 너무 피곤해서 그대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세시간 정도 잠을 자고 깨었더니 제 인기척에 사랑이가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런 사랑이를 어루만지면 또 산책을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몸이 무거워서 이불 속에 그대로 누워있었습니다.
그렇게 빈둥대는데 서울에 사는 막내 내외가 설인사 전화를 해와서 서로 덕담과 격려를 나눴습니다.


저녁이 되었는데도 밥생각이 별로 나지 않아서 건너뛸까 생각하다가
조금이라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밥을 먹는데
사랑이도 제 곁에서 밥을 먹더군요.
밥그릇을 싹 비운 사랑이를 흐믓하게 바라보며 저도 밥그릇을 비웠습니다.


다시 자리에 누워 tv를 보는데
정신은 말똥말똥한데
몸의 피로는 살짝 남아있어서
술 생각이 살며시 올라오더군요.


맥주를 사들고 돌아오는데
명절을 마친 사람들이 돌아가는 모습이 보이고
길에는 겨울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여유롭고 편안하고 즐거운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이런 설날도 그리 나쁘지는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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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rahim Ferrer & Omara Portuondo의 ‘Quizas Quizas Quiz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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