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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자 122회


1


오늘은 투병중인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투병중인 아버지에 대한 얘기’라고 하니 눈물겨운 사연 같은 걸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거랑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걸 미리 말씀드립니다.


저희 아버지는 지난 시대를 살아왔던 아주 평범한 남자입니다.
그러다보니 가부장적인 생활방식이 뼈에 인이 박힐 정도로 굳어져있습니다.
다른 분들보다 특별히 더 완고하거나 그렇지는 않지만 굳어져있는 생활방식은 좀처럼 바뀌지 않습니다.


얼마 전까지 어머니와 둘이서 농사를 지으셨는데요
농사일을 하면서도 힘든 건 잘 하지 않습니다.
농사 중에 가장 힘들지만 중요한게 파종인데요
가만히 쭈구려앉아서 일일이 모종을 심어야 하는 일은 여간 고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은 여자들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시기 때문에 절대 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잡초를 뽑거나 그런 일도 하지 않고 그저 농약을 치는 일을 할 뿐이죠.
감귤수확을 할 때는 감귤을 따는 일은 하지않고
전체적으로 관리하면서 판매처와 거래하고 인부들에게 돈을 주고 하는 일을 합니다.
힘든 일은 여자에게 맡겨버리고 생생내는 일을 주로 하시는 거죠.
그렇다고 집안일을 하시느냐하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건 물론이고 옷장속 자기 옷을 챙기지도 못합니다.
일일이 누가 옆에서 챙겨줘야합니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이 특별하지는 않습니다.
주위를 보면 대부분이 그렇게 살고 있거든요.
그나마 술먹고 어머니를 때리는 일은 사라져서 다행이지요.

 

2


몸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있다고해서 이런 모습이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먹는 거에서부터 싸는 거까지 일일이 다 챙겨줘야하는 고된 일을 가족들이 하고 있는데
미인하거나 고마워하는 마음은 별로없고
손이 차다고 뭐라고 하고, 늦게 왔다고 짜증을 내고 그럽니다.
그나마 다 큰 자식들에게는 눈치가 보여서 덜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노골적으로 그럽니다.
여자는 종과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머리 속에 꽉 박혀있는 거죠.
힘없이 누워만 있는 늙고 병든 아버지의 모습을 볼때면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너무도 당연하게 행동하는 이런 모습을 볼때는 욱하고 화가 치미는게 한두번이 아닙니다.


어머니와 동생들은 기력이 쇠한 아버지를 최대한 이해하려고 하면서 정성껏 보살피지만
제 기준에서 벗어나는 걸 잘 참지못하는 저는 수시로 짜증을 해고 화를 쏟아내곤 합니다.
그러다가 제 성질을 못이겨서 뛰쳐나와 버리기도 하지요.
그러면 그 모든 걸 동생과 어머니가 고스란히 감내해야합니다.
그런게 미안해서 최대한 성질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3


인생에서 힘든 시기가 닥쳤을 때
남자보다는 여자가 더 잘 버텨낸다는 건 여러번 느낍니다.


아픈 아버지 병간호에서부터 전반적인 치료과정을 딸과 어머니가 책임집니다.
아들과 사위는 이런저런 이유로 한발 뒤로 물러서 있고
그나마 병간호를 한다고 붙어있는 아들도 성질을 참지 못해서 짜증내고 화를 내기 일쑤죠.
동생과 어머니가 그런 것까지 다 감내하면서 묵묵히 아버지를 간호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남자라는 족속들은 목소리만 크다는 걸 새삼스레 실감합니다.


예전에 노동운동을 했을 때도 그랬습니다.
투쟁이 막 시작됐을 때는 남자들이 앞장서고 목소리도 높입니다.
크고 작은 충돌들이 생길 때도 남자들이 여자들을 보호한다면서 나서지요.
그러다가 투쟁의 돌파구가 좀처럼 보이지 않으면 내부에서 불만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남자들입니다.
그렇게 투쟁이 길어지기 시작하면 남자들이 먼저 이탈하기 시작합니다.
나중에 투쟁이 점점 힘들어져서 장기전으로 들오갈 때쯤이면 목소리를 높이던 남자들은 상당수 빠져버리고 그 중심에서 묵묵하게 투쟁을 이어가는 건 대부분 여자들입니다.


그런 모습을 볼때마다 조용히 마음 속으로 한마디 합니다.
“좆도 아닌 것들이 가오나 잡고 지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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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

 

밤늦은 시간 잠들어있는 아버지를 뒤로하고 도시의 야경을 바라봅니다.
제가 어렸을 때 밭들만 있던 이곳이 지금은 아파트로 가득찼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좀처럼 변하질 않으니
변하는 세상이 신기루일까요? 아니면 사람이 강인한 것일까요?

 


(Billie Holiday의 ‘Strange fru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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