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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자 143회

 

1

 

 

장마가 한 달이 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덕분에 폭염이 늦춰지고 있어서 다행이기는 하지만

이제 슬슬 장마가 지겨워지고 있습니다.

 

 

눅눅해진 이불과 베개를 말려야하는데 그럴 수가 없습니다.

감귤나무에 농약도 뿌려야하는데 간헐적으로 비가 계속 내립니다.

햇볕을 제대로 보지 못해서 텃밭에 심어놓은 채소와 과일들의 상태가 별로입니다.

잡초들은 왕성하게 자라서 주변이 지저분하고 고구마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그래도 하우스이기 때문에 큰 피해는 없지만 주변에 수박농사를 하는 밭들은 피해가 많습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날씨라는 게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비가 멈춘 틈을 이용해서 이런저런 일들을 재빨리 처리하고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그 조건에서 해볼 수 있는 건 해 보고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건 그냥 장마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수시로 일기예보를 챙기는데 인근마을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나왔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여러 명의 확진자가 동시에 나와서 그곳은 발칵 뒤집혔다고 하는데 확진자 중 한 명의 동선이 이곳 근처까지 이어졌다고 합니다.

동생이 조심하라면서 전화가 오기도 했습니다.

 

 

몇 개월째 전세계를 숨죽이게 만드는 코로나지만 가까운 곳에서 감염자가 나오지 않아서 그리 긴장하지는 않았었습니다.

더군다나 만나는 사람 없이 시골마을 외곽에서 사랑이랑 단둘이 살아가는 처지라서 그저 뉴스로만 접하는 소식일 뿐이었죠.

그런데 이게 바로 턱밑까지 발길이 닿았다고 하니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이곳에서 사랑이랑 둘이 조용히 살아가면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래도 조심해야 하니 당분간 밖으로 나가는 일은 자제해야 하겠습니다.

이 국면이야 그렇게 조심하며 넘기면 되는데 점점 더 사람을 멀리하게 되는 세상이 되는 건 고민스럽네요.

세상에서 멀어질수록 더 세상 속으로 귀를 기울이기 위해 읽는 라디오를 더 열심히 진행해봅니다.

 

 

 

 

2

 

 

죽음을 대한 명상을 해봤습니다.

가만히 호흡을 하면서 제가 죽음을 맞이하는 상황을 상상해보는 거죠.

 

 

가족이 없고 돈도 별로 없을 것이기에

허름한 요양원이나 중소병원 다인실에 입원해 있을 것입니다.

기력이 없고 몸 이곳저곳 통증이 있기 때문에 가급적 움직이지 않으려 하겠지요.

대소변을 비롯해서 먹을 것을 챙겨주는 것도 그곳 직원이 대강대강 하겠지요.

그렇다해도 이미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알기에 무기력하고 무감각하게 반응할지 모릅니다.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셔서 곁에 없을 것이고

동생들도 나이가 많고 병든 몸이어서 얼굴 보기 힘들 겁니다.

그나마 조카들이 있지만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외삼촌을 신경쓰기는 힘들겠죠.

그래도 죽어가는 오빠 얼굴을 보겠다고 동생들이 찾아와준다면 정말 고마울 겁니다.

그 발걸음이 걱정스러워서 조카가 같이 와준다면 제 얼굴에 미소가 지어질 겁니다.

만약 조카의 아기들이 함께 와서 재롱을 부린다면 제 마음이 아주 환해지겠죠.

 

 

처음 해보는 명상이라서 그리 오래하지는 못했습니다.

10분 정도 그 상황을 상상하면서 가만히 제 마음을 지켜봤습니다.

처음에는 점점 가라앉아서 무기력함이 감싸더니 나중에는 마음속에 환한 빛이 스며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짐했습니다.

지금 제 곁에서 같이 호흡하고 있는 이들에게 정말 잘 해야겠다고 말이죠.

 

 

 

 

3

 

 

아, 안녕하세요, 저는 사랑입니다.

성민이가 예전에 찍은 동영상을 보여줬습니다.

음... 우정이라고 집 없이 이 동네에서 돌아다니던 녀석인데

어... 산책하는 길에 걔를 만나서 잠시 노는 모습입니다.

 

 

제가 밖에서 살 때

어... 어느 날 우정이가 다가와서 ‘밥 좀 먹을 수 있겠냐’고 하길래 그러라고 했습니다.

음... 그래서 그 다음부터 우정이가 배고프면 찾아와서 밥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친해졌습니다.

저랑 우정이랑 친하게 지내니까 나중에 성민이랑도 친해졌습니다.

 

 

그런데 어... 어느 날 맛있는 것을 먹다가 우정이랑 싸웠습니다.

그리고 어... 그 다음부터 우정이랑 사이가 나빠졌습니다.

그래도 뭐... 저는 쿨하게 우정이를 대했는데 우정이는 토라져서 가까이 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우정이가 갑자기 저를 공격했습니다.

그래서 어... 저도 우정이를 공격했습니다.

그 다음부터 우정이를 보기만하면 으르렁거리게 됐습니다.

 

 

그런데 우정이는 성민이랑은 친하게 지냈습니다.

성민이랑 같이 산책을 하고 있으면

우정이는 성민이 보고 꼬리를 흔들면서 달려오고

저는 달려오는 우정이 보고 으르렁거리고

그러면 성민이는 저를 데리고 재빨리 도망가고 그랬습니다.

하하하 지금 생각하면 웃깁니다.

 

 

그런데 어... 이제는 우정이를 보지 못합니다.

어느 날부터 우정이가 보이지 않게 됐습니다.

어떻게 됐는지도 모릅니다.

 

 

성민이가 동영상을 보여주니까 이 녀석이랑 친했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나보다 덩치도 컸는데 제가 밥도 주고 그러니까 어... 제 기분을 잘 맞춰줬습니다.

음... 지금 생각해보면 좋은 녀석이었는데...

우정이가 잘 살고 있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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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jsa Siik의 ‘Hig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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