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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자 48회 – 수시로 개무시 당하는 허접한 인생이지만

 

 

 

1

 

읽는 라디오 시작하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성민입니다.

 

택배노동자의 과로사 소식이 연이어 들려올 때

많은 분들이 안타까워하며 택배노동자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저 역시도 가급적이면 택배를 줄이려고 노력했고

택배를 받게 되면 기사님에게 음료수라도 전해드리고 싶었지만

워낙 바쁘셔서 그러지도 못했습니다.

 

택배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든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는

마음으로라도 박수를 보내며 끔찍한 현장이 조금이라도 바뀌길 바랬습니다.

택배노동조합과 택배회사간의 인력충원문제로 마찰이 생겼다는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려오면

코로나로 배만 불리면서 노동자를 혹사시키는 택배회사들을 비난했습니다.

여론도 점점 택배회사들에게 불리해지자 정부까지 나서서 사회적 합의를 시도한다고 했지만

택배회사의 꼼수로 논의가 난항을 겪을 때도

큰 탈 없이 잘 풀리기만을 바랬습니다.

 

어렵게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고 조금 더디지만 문제가 조금씩 풀려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작년 연말부터 택배노조의 파업소식이 들려왔고 아직도 해결되지 못해서 장기파업으로 이어진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연말연초에 설 대목까지 끼어있어서 이렇게 오랫동안 심각한 상태로 이어지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저도 지난 연말에 울산으로 택배를 보내려다가 파업 때문에 고생했던 기억이 있는데

연말연초와 설 대목을 앞둔 상인들이나 농민들은 택배를 제때 보내지 못해서 걱정이 많다고 합니다.

 

과로사가 휑휑하던 택배현장이 1년 만에 극적인 반전이 이뤄져서 노동조합의 해방구가 돼버린 것일까요?

최저임금 공약도 지키지 않던 정부가 임기말에 친노동정책을 밀어붙여서 세상을 노조천국으로 만들어버린 걸까요?

코로나특수를 역이용하는 노동조합의 영악한 전술에 순진한 택배회사들이 말려들어버린 걸까요?

 

택배회사는 작정을 하고 노동조합에 맞서고 있고

일부언론은 ‘각종 지원은 다 받아먹으면서 툭 하면 파업이다’면서 노골적으로 노동조합을 비난하고

정부도 ‘사회적 합의는 잘 지켜지고 있는데 노조가 너무 한다’며 무게의 균형추를 사측으로 밀어주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다보니 sns에서는 택배를 보내지 못하는 분들이 노동조합을 욕하고 있더군요.

 

어제 저는 새벽부터 일을 하는 택배차량을 봤습니다.

밀려드는 택배물량 때문에 헉헉거리는 우체국노동자의 소식도 들었습니다.

세상은 계속 이렇게 삐걱거리고 있는데

뭐라고 한마디라도 해야 될 것 같아서

세상 돌아가는 얘기해봤습니다.

 

 

2

 

바지의 자크가 고장 나서 수선집을 찾았습니다.

싸구려 바지라서 그냥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아직 입을만한데다가 큰 돈 드는 수선이 아니라서 고쳐서 입기로 했습니다.

바지 호크도 조금 불편하고 주머니도 터진 곳이 있어서 겸사겸사 같이 고치기로 했습니다.

 

시골에는 옷 수선집이 없어서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갔습니다.

아파트단지 근처에 조그만 수선집이 있어서 들어갔더니

주인이 반갑게 맞이해주더군요.

자크가 고장났다고 하니 반갑게 “네”라고 하더니

이어 옷을 보이면서 호크도 손봐야 한다고 했더니 살짝 목소리 톤이 낮아지면서 “그건 기계가 없어서 안 되는데요” 하더니

자크랑 바지주머니만 수선해달라고 했더니 잠시 뜸을 들이고는 “수선을 하려면 세탁을 하고 가져오셔야 하는데요”라고 하더군요.

옷수선을 맞기면서 옷의 청결상태를 문제 삼는 것은 처음이었고 제 바지 상태가 그리 불결하지도 않았기에 저는 잠시 당황했지만

가게 주인이 수선을 맡지 않겠다고 돌려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그 문제로 인상을 쓸 필요 없겠다 싶어서 그냥 나와 버렸습니다.

 

엄청 불쾌해진 저는 다른 수선집을 찾지 않고 그냥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을 해봤더니

제 몰골이나 옷차림이 후줄근한 시골 아저씨였고

제 바지는 고칠 곳이 세 곳이나 되는 싸구려였다는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도시의 아파트단지 고객들을 상대하는 그분 입장에서는

별로 맡고 싶지 않은 허접한 일감이었던 샘이었나 봅니다.

 

살면서 이런 식의 대접을 받아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어서

이제는 그러려니 하며 툴툴 털어버릴 만도 한데

이 더러운 기분은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코로나로 인한 영업손실에 항의하는 자영업자들에 대한 뉴스가 들여오는데

가슴 속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를 느끼며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나는 자영업자에게 개무시 당하는 허접한 시골농부랍니다.”

 

 

3

 

두세 달에 한 번만이라도 문자를 보내며 살아 있는지 물어봐주는 사람

서너 달에 한 번만이라도 술 한 잔 같이 먹어 줄 수 있는 사람

일 년에 한 번만이라도 영화 보러 가자고 전화해 줄 수 있는 사람

애써 위로하거나 동정하지 말고 더러운 성질만 좀 받아 줄 수 있는 사람

그런 단 한 명이 있다면 꽉 막힌 세상에서 숨은 쉴 수 있지 않을까요?

 

 

10년 전 읽는 라디오에서 제가 했던 얘기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제게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를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저도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 단 한 명’이 내게 없다고 해서 내가 ‘그런 단 한 명’이 될 수 없는 이유가 될까?

10년 전 성민이가 씁쓸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더군요.

그래서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않던 친구에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이혼을 하고 오래된 직장까지 옮긴 채 외롭게 살아가던 친구였습니다.

 

 

찬바람 때문에 잔득 웅크린 오늘

문득 00이 생각이 나서

오래간만에 메일을 보내본다.

 

아직도 남해에 있을까?

겨울에 감기를 달고 살았는데 지금은 괜찮을까?

술은 좀 줄였을까?

남해의 싱글길은 자주 갈까?

울산 사람들이랑은 가끔 연락을 하며 지낼까?

 

오랫동안 연락이 없이 지냈던지라 물어볼 게 이런 것 밖에 없네.

이제 곧 설인데 대구로 가냐?

새해 복 많이 받고 올해는 예전의 씩씩한 00이 모습을 조금 되찾길 바란다.

 

 

친구에게 메일을 보내고 sns를 둘러보는데

박준성님의 페이스북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한라산>의 이산하 시인이 대장암 수술을 하고 투병을 해야 하는데 보험 든 것도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지인들이 죽어서 부조 대신 살아서 치료비 보태자고 '조의금 선결제'를 제안하고 나섰습니다. 얼마 전 저도 대장암 항암의 고통이나 무보험 가난의 서러움을 먼저 체험해 본지라 그 외롭고 쓸쓸함이 남 일 같지 않습니다. 그나마 저는 곁에서 두번이나 항암을 수발해준 아내가 있습니다. 많은 분들의 사랑과 관심과 응원, 무엇보다도 물질적 도움이 항암을 버텨내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고마운 마음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이산하 시인은 곁에서 거들어 주는 사람도 없이 홀로 버텨내야 한답니다. 조의금으로라도 항암에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국민은행 762302 04 116218 이상백(이산하 시인의 본명)

 

 

암투병 끝에 돌아가신 아버지 장례식 때 들었던 생각이 있습니다.

“죽은 후에 장례식장 가서 조의금내지 말고 힘들게 투병할 때 한번이라도 찾아가자”

이산하 시인은 그저 이름으로만 알고 있는 분이지만 얼마의 돈을 생전 조의금으로 보내드렸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제가 방송 원고를 쓰고 있는 걸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랑이를 불러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으면서 서로의 온기를 나눴습니다.

 

 

 

(정태춘의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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