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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32회 – 오래간만에 보고 싶던 이들을 만나고

 

 

 

1

 

결혼과 동시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살고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갔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는 해외여행이라서 약간 설레기도 했지만

두 번의 비행기 환승과 미국 공항에서 다시 두 시간을 더 달려 도착하는 21시간의 여정이어서

친구의 집에 도착해서는 그냥 쓰러져버렸습니다.

 

다음날에도 피로가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시차문제까지 생겨서 몸이 힘들기는 했지만

저를 위해 일부러 휴가까지 내면서 시간을 내준 친구를 생각하며 무거운 몸을 움직였습니다.

간단히 미국식 식사를 하고 친구와 함께 인근으로 드라이브를 나갔습니다.

친구네 집은 도심 외곽이어서 번잡하지 않았고 조금만 나가면 탁 트인 경관이 펼쳐져서 시원해서 좋았습니다.

제주도에서 바라보는 쪽빛바다와 한라산의 풍경과 비교하면 조금 밋밋하기는 했지만

아기자기한 제주와 달리 시원시원한 그곳의 모습은 이국적인 감상에 금방 빠져들게 만들더군요.

 

거의 30년 만에 만나는 친구였지만 3년 만에 만나는 것처럼 편하고 즐거웠습니다.

고향에서처럼 제주어로 수다를 떨면서 그동안 살아왔던 얘기들을 정신없이 나눴습니다.

저는 저대로 살아왔던 과정을 요약해서 설명했고

그리 말이 많은 편이 아닌 친구도 그곳에서의 삶에 대해 이래저래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장시간 이어진 얘기 속에 무수한 이들의 이름이 오고가면서

반가운 이름과 그때의 기억에 마음이 환해지기도 하고

잊혔던 이들의 얼굴이 떠오를 때는 소중했던 뭔가를 다시 찾은 듯한 기분이었고

뜻하지 않은 이의 안타까운 소식에는 한숨이 절로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 오랜 세월동안 저나 친구의 삶에 만만치 않은 풍파가 있었겠지만

생략할 건 생략하고, 살짝 가려둘 건 가려두고, 쓰다듬을 건 쓰다듬으면서

조심스러우면서도 다정하게 서로의 안부를 물어가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날 저녁에는 친구네 가족과 함께 시내에 있는 식당에서 근사한 요리를 먹었습니다.

친구의 아들은 한국어를 하지 못해서 한국어와 영어가 섞인 대화가 오고갔지만

영어를 못하는 저도, 한국어를 못하는 친구의 아들도 재미있게 대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적 분위기가 대화 속에 끼어들어서 조금 낯설기는 했지만

그런 거리감이 오히려 서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서 좋더군요.

친구네 가족들의 대화 속에 서로가 부딪히는 불편함이 아주 살짝 느껴지기는 했지만

멀리 한국에서 온 오래된 친구와 함께 하는 그 순간만큼은

서로를 치켜세워주며 배려하고 격려하는 말들이 왕성하게 오고갔습니다.

그 말의 성찬 속에는 이해관계를 따지는 계산이 들어있지 않았기에

더없이 즐겁게 마음껏 웃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친구와 저는 시내에 있는 재즈바에서 술을 마셨습니다.

저는 재즈바를 처음 가보는데다가 미국 분위기가 강해서 처음에는 그리 편안하지 않았는데

술 한 잔 들어가면서 조금씩 분위기에 익숙해지더군요.

친구와의 편한 이야기, 여행지에서의 살짝 들뜬 분위기, 맛있는 식사 뒤에 서서히 차오르는 알콜 기운, 라이브로 들려오는 재즈 음악까지 더해져서 제가 슬슬 말이 많아졌습니다.

그동안 연락한 번 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얘기부터 시작해서

친구들에게 얻어먹기만 하고 제대로 쏘아본 적 없었던 과거에 대한 사과

고단했던 내 삶에 대한 약간의 변명

고단함 속에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기억들의 소중함

서로에게 상처 없이 소중했던 기억들만 남아있음에 대한 감사함

그 마음을 다시 꺼내서 확인해볼 수 있는 그 순간의 행복까지

술 취한 제 얘기가 주절주절 이어지자

기분이 좋아진 친구도 평소와 달리 말이 많아지면서

신혼의 즐거움과 유학의 힘겨움이 함께 했던 젊은 시절

미국생활의 어려움 속에서도 비교적 잘 풀렸던 직장생활

아들의 성장 속에 더 힘들게 다가왔던 이민자의 괴로움

문득문득 저며 오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

아들의 여자 친구와 함께 휴가를 보냈을 때의 행복함 등

자신의 얘기를 줄줄 풀어놓았습니다.

상대에게 으스대지도 않고

그렇다고 자신의 불행을 푸념처럼 늘어놓지도 않으면서

어릴 적에 소중한 자신의 애장품을 절친에게만 보여주듯이

삶의 보따리를 가볍게 풀어봤습니다.

그날 재즈바에서는 어느 가수가 아주 감미로운 노래를 들려주는데 귀에 착착 감기더군요.

 

 

 

(Nina Simone의 ‘I Loves You, Porgy’)

 

 

2

 

미국에서 가슴 따뜻해지는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

그냥 제주도로 와 버리기에는 조금 아쉬워서

예전에 노동운동을 했던 울산을 찾았습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편하지는 않지만

끝까지 저를 챙겨주려고 노력했던 형님이

‘나 살아있을 때 얼굴 한 번 볼 수 없는 거냐?’는 메시지를 보낸 적이 있어서

그 형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10년 만에 만났건만

머리는 백발이 됐고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 하더군요.

“그 사이에 할아버지가 돼 버렸어요”라고 농을 던졌더니

“야 이놈아, 이년 후면 칠십이다”라고 웃으며 반겨줬습니다.

내부에 황토페인트를 칠해서 나름 황토흙집 분위기를 띄웠다던 무허가 판넬지붕집은

올 초에 옆집에서 난 불이 옮겨 붙어 모두 타버리고

그 자리에 다시 쌓아올린 조그만 쉼터가 안쓰러우면서도 포근하게 자리하고 있더군요.

 

형님은 “너 오면 대접하려고 예전부터 찜해둔 곳이 있다”면서 저를 어느 조그만 횟집으로 안내했습니다.

‘자연산 참가자미회 전문’이라고 쓰인 출입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4인용 테이블이 몇 개 놓여있고

10여 년 전에 그곳에서 촬영했던 드라마의 출연자들의 사진과 사인이 한쪽 구석에 빛바랜 채로 걸려있었습니다.

 

생각보다 푸짐하게 차려진 상 앞에서

술잔을 주고받으며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눴습니다.

화재 이후 막막했던 상황을 쉽게 이겨낼 수 있게 해줬던 주위 사람들의 도움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예전에 제가 있었을 때 함께 했던 사람들에 대한 얘기

지금 하고 있는 이주노동자 활동에 대한 얘기

어느새 듬직하게 자라버린 손주들에 대한 얘기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있는 동지들에 대한 얘기 등

밀린 숙제를 하듯이 추억 속 빈칸들을 채워나갔습니다.

 

회 맛도 좋고

분위기도 좋고

사람도 좋아서

술이 술술 잘 넘어가던 중

울산지역 노동운동의 현실에 대한 얘기가 이어지며

제 입이 또 풀려버리고 말았습니다.

 

성민이 : “아~ 십여 년이 지났는데도 변한 게 별로 없어요. 진보가 변하지 않고 갇혀버리니까 보수가 되고 있네.”

 

형님 : “옛날 팔구십 년대만큼 들썩이는 일이 있겠냐?”

 

성민이 : “아니, 옛날처럼 혁명의 에너지가 넘치는 건 기대 하지 않아도, 운동을 한다고 그러면 최소한 뭔가를 변화시키려고 노력은 해봐야 하잖아. 그런데 이건 뭐야, 권력의 언저리에서 콩고물 주워 먹으려고 혈안이 된 것도 아니고. 에이씨, 사람들이 늙으면 좀 추해지지는 말아야지.”

 

형님 : “아니 뭐, 꼭 나이 들어서 그렇다고 볼 수는 없잖아.”

 

성민이 : “지금 울산에서 잘 나가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다 오육십 대들이잖아. 30년 전에 노동운동 좆나게 하다가 민주노총하고 진보정당 만들어지면서 핵심에 들어가고, 이젠 다 한자리씩 차지하고 앉아서 자기 나와바리 관리나 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래도 옛날 노땅들은 젊은 애들이 마음껏 활개 치도록 뒤에서 병풍역할하면서 바람도 막아주고 그랬다고. 그런데 지금은 뭐야. 늙은이들이 맨 앞에서 ‘나만 따르라’ 그러면서 설쳐대고 있고, 젊은 것들은 그 뒤에서 맥아리 없이 줄 맞춰서 졸졸 따라가고나 있으니... 꼬라지가 이게 뭐예요?”

 

형님 : “(짜증을 내면서) 야, 그럼 니 꼬라지는 뭐냐? 니 말 이해는 하겠다만 사람들을 그렇게 쉽게 얘기하는 거 아냐.”

 

성민이 : “(고개를 숙여) 제가 쓸데없이 목소리만 크고 말이 많았네요. 미안해요, 형.”

 

형님 : “새끼, 성질 여전하네. 야, 다시 복귀해서 일해라.”

 

성민이 : “제가 복귀하면 이 성질머리 누가 받아주는데요? 옛날에는 어린놈 열정으로 받아주기라도 했지, 이제는 꼰대짓 한다고 가까이도 하지 않을걸요.”

 

형님 : “새끼, 주제파악 너무 잘해도 세상 살기 고달 퍼, 임마. 자, 한 잔 해라.”

 

 

그날 저와 형님은 거나하게 취했고

취하면 기타를 치면 노래 부르길 좋아하던 형님은

역시나 낡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김호철의 ‘포장마차’)

 

 

3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동생이 돌보고 있던 사랑이를 만나러 갔더니

사랑이가 아주 격하게 저를 반겨주었습니다.

너무나 반가워하는 사랑이 모습에

여행의 피로가 금세 날아가 버려서

사랑이와 함께 마을 오름으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약간 쌀쌀한 기운은 있었지만

맑고 화창한 하늘이 몸을 가볍게 만들어주고

바람에 살랑거리는 억새가 마음을 부드럽게 해줘서

더없이 편안하고 즐거운 산책이었습니다.

 

관광이나 일 때문이 아니라

오롯이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서 찾아갔고

조심스러우면서도 편안하게 서로의 마음을 나눌 수 있어서

너무 너무 즐거웠던 여행이었습니다.

이제 이곳에서

사랑이를 더 사랑하고

그 사랑과 행복을 좀 더 나누며 살아가야겠네요.

 

 

 

(이진아와 스텔라장의 ‘여행의 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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