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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35회 – 마음의 거리와 자리

 

 

 

1

 

텃밭에 다양한 채소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얼갈이배추는 아주 왕성하게 자랐고

무는 병에 걸려서 상태가 엉망이고

쪽파는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먹기에 적당하고

브로콜리는 모종이 좋지 않아서 자라는 상태가 들쭉날쭉 하고

쑥갓은 발아가 많이 되지 않았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큼은 나오고

상추와 양상추는 시차를 둔 덕분에 꾸준히 잎사귀를 내놓고 있고

봄동은 뒤늦게 자라면서 어린 순을 풍족하게 공급하고 있고

시금치도 이제야 먹을 만한 크기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래저래 편차는 있어도

다양한 채소들을 풍요롭게 먹을 수 있어서

이 겨울에도 몸이 한결 개운해지는데

문제는 이것들을 혼자서 다 먹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동생과 어머니에게도 자주 건네고

옆 마을에 사는 친척 할머니에게도 가져가고

이웃에 사는 분에게도 한가득 선물하고

경기도에 사는 동생에게 택배도 보냈지만

그래도 많이 남습니다.

 

겨울 내내 먹을 것이기 때문에 처리 못해서 버릴 걱정은 없지만

가능하면 주위 사람들과 나누는 즐거움을 갖고 싶어서

산책길에 자주 마주치는 분에게 조금 드리려고 했더니

괜찮다면서 어색하게 거절하더군요.

마주치면 인사하는 것 이상으로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는 뜻으로 느껴져서

괜히 머쓱해져 버렸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다 자기만의 방식이 있으니

그분이 원하는 거리를 유지하며 지내야겠습니다.

 

소소하게 서로 나누면서 사는 삶을 꿈꾸지만

외진 곳에 사랑이랑 둘이서만 살아가는 저는

풍요로운 채소들을 나눌 사람도 딱히 많지 않네요.

레몬도 노랗게 익어서 조만간 수확을 해야 하는데

이건 또 누구랑 나눌까 하는 고민을 즐겁게 해봅니다.

 

 

2

 

하우스나 텃밭에도 특별히 할 일도 없고

날씨도 춥고 그래서

방안에 가만히 있는 시간이 많습니다.

 

저는 침대에 누워서 tv나 컴퓨터를 보고

사랑이는 자기 자리에 누워서 멍을 때리고 있노라면

한 방에 있는 둘의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것 같아

의자에 앉아 사랑이를 부릅니다.

 

사랑이가 슬글슬금 다가와

머리를 들이밀면

살며시 쓰다듬어줍니다.

 

사랑이의 보드라운 감촉이 제 손으로 전해지면

제 마음도 보드랍게 펼쳐지고

그 마음이 제 손을 통해 사랑이에게 전해지면

사랑이도 가만히 있으면서 그 온기를 느낍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3

 

저녁 시간에 집으로 향하는 시장에서 한 아저씨가 “고등어, 두 마리에 오천 원!”이라고 외친다. 순간 눈이 고등어로 향한다. 푸른 등의 고등어가 나란히 놓여있다. 군침이 돌면서 지갑 속에 얼마가 있나 생각했다. 칠천 원이 있다. 고등어 두 마리를 사고, 무와 대파와 고추를 살 수 있는 돈이다. 그러나 그러면 지갑은 비워진다. 매정하게 눈을 돌리고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와 고등어를 생각하면서 지긋지긋한 라면을 끓여 먹었다.

 

어릴 적 엄마 손을 잡고 시장에 가면 참 먹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이것저것 눈요기만 할 뿐 엄마에게 사달라고 조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빚 때문에 자주 싸우는 부모님과 때가 되면 돈 벌러 일본으로 가야 하는 엄마를 알기 때문이었다.

 

20살이 되면서 집을 나와 서울에서 자취를 하기 시작했다. 밤늦은 시간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장을 지나야했다. 싸구려 자취방은 종종 시장 안쪽에 있기 마련이다. 배는 고픈데 늦은 시간에도 상인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유독 눈에 들어오는 튀김과 오뎅들... 역시 침을 삼키며 자취방으로 돌아와 지긋지긋한 라면을 끓여 먹었다.

 

너무도 익숙한 삶이 지긋지긋한 삶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그러면 드는 생각이 있다.

“나는 이 삶을 벋어날 수 있을까?”

앞으로 다시 몇 년이 지나서 내 나이 오십이 됐을 때에도 이 지긋지긋함은 찾아올 것이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10여 년에 써놓았던 글입니다.

지금 저는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던 그 삶을 벗어났습니다.

지금의 삶이 단조롭고 외롭기는 하지만 더 이상 지긋지긋하지는 않습니다.

 

연말이 다가오고 있어서

‘사랑이랑 둘이서라도 송년회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해보다가

내가 함께 해야 할 사람들은

배고프고 외롭고 아픈 사람들임을 다시 새겨보며

살며시 그런 분들을 위한 마음의 자리를 만들어봅니다.

 

 

 

(김한의 ‘꽃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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