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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실력을 키워야 합니다 - 현대중공업 대의원 남정대 씨

 


무너져 내린 거함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에는 200여 명의 대의원이 있다. 그 중 민주파라고 불릴 수 있는 대의원은 단 3명이다. 숨소리 하나 제대로 내기 어려운 현장, 울산지역에서도 잊혀지고 있는 그 현대중공업에서 대의원 활동을 하고 있는 남정대씨를 만났다.

진주가 고향인 남정대씨는 진주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소규모 업체에서 샤시일을 하다가 현대중공업에 다니고 있던 형님의 권유로 스물여섯의 나이에 94년 6월 훈련생으로 들어가서 95년 1월부로 정식입사를 하게 된다.

95년은 신입사원을 거의 뽑지 않던 현대중공업이 2야드를 새롭게 증설하면서 새로운 인원을 몇 년 만에 뽑기 시작한 해이고,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의 무쟁의 역사가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입사 시기의 현장 분위기가 어땠느냐는 질문을 먼저 던졌다.

“94년 임단협이 한창 절정에 이를 때 우리가 교육을 받고 있었죠. 당시에는 정문 들어가서 오른쪽 편에 훈련소가 있어서 집회나 투쟁과정을 아주 가까이서 보고 들었죠.
95년에는 회사에서 현장관리자들을 중심으로 조합원들을 대거 탈퇴시키는 사건도 있었고, 무쟁의 서명운동이 대대적으로 진행되었어요. 94년 파업할 때 무노동무임금 정책이 아주 엄격하게 적용되어서 조합원들 속에서는 ‘이제는 파업을 하게 되면 파업기간 임금을 받지 못한다’는 위기의식이 작용했어요. 그 틈새를 비집고 중간관리자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하는 것처럼 모양새를 갖춰서 ‘너무나 소모적인 싸움은 이제 피하자’면서 서명을 받았어요. 그렇게 현장이 무너지기 시작한거죠.”

노동조합 조직력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입사했는데, 어떻게 해서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했는지를 물었다.

“소위 활동가라고 할 정도로 하기 시작한 것은 98년부터 학습소모임을 하기 시작하면서였고, 그전에는 그냥 노동조합의 집회나 지침에 열심히 따르는 열성조합원이었어요. 87년 이후에 인원충원이 거의 없다가 저희가 몇 년 만에 들어왔기 때문에 중간에 연결고리들이 상당히 많이 끊어져 있던 상태였어요. 그래서 새롭게 노동조합의 미래를 생각하게 되는 상황이 우리에게 맡겨진다는 생각들을 많이 했고, 그 당시 좀 열성적이고 적극적인 사람들이 학습모임도 가졌습니다.
그러다가 2001년에 대의원선거에 출마할 때 조합원 20명 추천서명을 받도록 한 제도를 삭제하게 되었는데, 학습모임을 같이 했던 사람들이 결의를 해서 대의원선거에 대거 나오기로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조합활동을 하면 빨갱이다’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을 때였는데, 제 집사람이 아주 적극적으로 반대를 했어요. 회사 관리자들의 회유와 협박은 별로 어렵지 않게 버텨낼 수 있겠는데, 결국 내 가장 작은 울타리에서 그게 잘 안되다보니까 아주 큰 난관에 봉착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그 당시 고민 고민 하다가 도저히 안되겠다 생각이 들어서 후보사퇴를 하게 되었죠. 그래서 주위 동지들에게 많은 실망감을 안겨주었죠.
그러고 있다가 집행부에 있던 한 상집간부가 현장활동을 더욱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집행부에서 내려오게 되었어요. 그래서 조합에서 그 자리를 대신해서 할만한 사람을 찾았는데 저를 지목해서 2001년 6월부로 집행간부로 올라가게 되었어요. 그 당시 화섬3사 투쟁이 한참 진행되던 때여서 여기저기 열심히 쫓아다니면서 본격적으로 활동가의 길을 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죠.”

얘기가 나오자 한 없이 흘러나오는 것을 잠시 정리하고, 그 이후에서 현재까지 활동과정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해달라고 했다.

“2002년 16대 대의원 선거에 출마해서 당선되어 2003년 17대 대의원에도 당선되고, 18대 선거에서 떨어지고 나서, 다시 현재 19대 대의원에 당선되어 활동을 하고 있죠.
2002년 대의원을 할 때 당시 강호동 비리사건으로 김덕규 집행부가 내려가면서 보궐선거에서 민주후보추대위원회(민추위)가 구성되어 제가 부위원장 후보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선거에서 참패한 이후 다시 2003년 17대 대의원에 당선되어 활동을 했죠. 그 당시에 최윤석 집행부가 해고자들을 정리하는 만행을 저지르면서 해고자들과 함께 싸움을 벌이기도 했죠.
이어서 다시 연말 임원선거에서 참패를 하고 18대 대의원선거에서도 떨어졌어요. 그러면서 공대위 분과대표를 맡으면서 활동을 계속했고, 2004년 박일수 열사투쟁이 벌어지면서 또 깨지면서 싸움을 했죠.
맨날 깨지고 처지는 모습만 보아왔고, 한 번도 신나게 해보는 것이 없었어요. 가장 신났던 것이라면 화섬3사 투쟁을 할 때였어요. 그때 신나게 싸우면서 그래도 뭔가 좀 살아있다는 감을 받았던 잠깐의 시기가 있었어요.”



여기까지 얘기를 들으니 자연스럽게 한숨이 나왔다. 입사 이후 노동조합 활동을 하며서 신나본 적이 거의 없이 현재도 고립된 대의원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조건에서 대의원 활동을 하는 게 어떻냐고 물었더니 오히려 편하다고 대답한다.

“한편으로는 오히려 편해요. 저 역시도 활동의 내용을 제대로 채우는 이런 시간은 없고 일련의 사건에 휘말리면서 오다보니까 저 역시도 많이 지쳐 있었어요. 대의원이 다섯 명이라도 되면 홍보물 낸다고 서명이라도 할텐데, 그것도 안되다 보니까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홍보물 뿌릴 일도 없고, 앞번에 두 번 했던 것에 비하면 대의원 활동하기가 그지없이 편하죠. 놀고먹는 대의원이죠.
대의원대회 가서 발언을 해도 전혀 씨알도 안 먹혀요. 의견이 있어서 손들려고 하면 ‘의견 있습니까? 없죠?’하면서 끝나요. 떠들어 봐야 소용없고, 맥 빠지는 일들이 많아요. 개인적으로 몇몇을 만나서 신나게 설득해놓으면 결국 의결장소에서는 ‘니가 그 얘기 했던가?’ 이러는 거예요. 참 많이 답답하죠.”

그래도 현장에서는 조합원들과 함께 하면서 조금은 다르지 않을까 싶어서 현장조합원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물었더니 더 답답한 현실을 토론했다.

“우리 조합원들도 회사가 어떤 구도이고, 노동조합이 가는 방향이 어떻다는 것은 다 알고 있어요. 그러다보니까 조합원들도 제가 외톨이라는 것을 잘 알아요. 대의원이라고 저에게 물어오는 사람들은 많이 없어요.
회사하고 적극적으로 부딫일 수 있는 사안들은 어용대의원들에게 조차도 제대로 말을 못하고 삭이고 있죠. 산재 관련한 것이 가장 심해요. 옆과나 옆반에 누가 다쳤는데도 다친 사실을 2~3일 지난 다음에야 알게 되고, 우리 조합원들도 대의원들에게 이런 일을 잘 얘기 안해요.
어떤 한 분이 일을 하다가 발등에 뭐가 떨어져서 다쳤어요. 처음에는 큰 불편이 아니라서 신경을 않썼나 봐요. 그런데 뒷날 아침 일어나보니 영 걸음도 힘들고 해서 병원 가서 찍어봤더니 발등에 금이 갔다가 그래요. 그래서 산재를 낸 줄 알았죠. 근 한 달 가까이 안 나오더라고요. 어느 날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보니까 산재처리를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얼마 있으니까 그 사람이 출근해서 일을 해요. 그래서 제가 찾아가서 ‘선배님 산재처리 왜 안했습니까?’ 그랬더니 뭐 어쩌고 저쩌고 그래요. 산재처리를 하지 않으면 임금에서부터 여러 가지로 손해라는 것을 얘기했는데 애써 외면해 버리시더라고요.”

이런 어려운 조건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앞으로 어떻게 이 조건을 극복할 생각이냐는 질문에는 실력을 키워야 한다고 몇 번을 강조했다.

“한마디로 하면 대가리 터지도록 싸워야 하는데, 그러려면 내 실력을 키워야 하겠죠. 조합원 대중들은 활동가들이 얼마만큼 깨어있고 얼마만큼 열심히 하느냐에 따라서 충분히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믿음이 우선적으로 있어야겠죠.
우리의 실력이라면 우선 조직력, 지금 남아있는 사람들은 제대로 조직할 수 있도록 해야겠지요. 그 다음에는 사상적으로 재무장을 해야 한다고 봐요. 교육이나 토론, 자기 나름대로 이후 전망이나 방향성에 대한 고민들도 많이 해야 되겠죠. 그랬을 때만이 조직력이 살고 투쟁력이 살지 않느냐 싶어요.”

어려운 조건에서도 열심히 투쟁하는 중소사업장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보다 더 어려운 조건에서 살아남는 것이 우선 중요한 과제가 되어 버린 현대중공업 노동자들! 그 속에서 고통스럽지만 다시 민주노조를 복원하기 위해 열심히 움직이는 활동가들!
그 노동자들의 고통과 활동가들의 힘겨움이 아직도 현대중공업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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