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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식을 심는 활동을 할겁니다 - 공무원노조 회복투 손성호씨

 


공무원노조는 아직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투쟁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사회적 파급력과 규모로 인해 많은 주목을 받고 있지만, 아직 그에 걸맞는 노동조합으로서의 활동이 안착되지 못한 과도적 상황이기도 하다.
최근 대규모 징계가 확정되고, 그에 맞서 ‘희생자 원상회복투쟁위원회’(회복투)를 구성해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공무원노조 울산본부의 활동은 과도적 상황을 진전시킬 수 있는 주요한 계기가 되고 있다. 이에 최근 파면통보를 받고 다시 회복투 활동을 벌이고 있는 손성호씨를 만나서 얘기를 들었다.

손성호씨는 울산에서 자라서 대학졸업 후에 94년 공무원 시험을 치렀지만 탈락했던 경험이 있다. 이후 부산에서 소위 노가다를 하다가 친척분의 제의로 과적차량 단속업무를 하는 청원경찰이 되었다.

“그때 성수대교 붕괴사건도 있었고, 울산 명촌교 확장 공사도 하고 있었고 과적차량 단속에 대한 필요성이 많이 제기되어서 사람을 뽑았을 때 들어왔어요. 처음에는 6개월 정도 생각하고 왔었는데, 하다보니까 3년을 다니게 되었어요.
과적차량에 대해서, 정부도 그렇고, 신경을 많이 쓰는 바람에 단속을 많이 다녔습니다. 2주간 교육을 받고난 뒤에 현장에 투입되었는데, 그때 벌금이 어머어마 했거든요. 그래서 실랑이도 많이 했고, 자동차 타이어에 발도 밟혀 봤고, 96년도 설 연휴 전날 눈이 많이 왔는데 단속하러 쫓아가다보니까 현대중공업 정문까지 간적도 있었고... 초소근무 할 때는 지겹고, 단속하러 돌아다닐 때는 재미있고... 제 성격이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다보니까 알게 모르게 3년 동안 있게 되었어요. 현장을 2년 6개월 있었고, 행정보조로 구청에 6개월 정도 있다가 시험 볼 기회가 있어서 시험에 합격했어요.”

98년 1월부터 동사무소에서 공무원 일을 시작한 손성호씨는 우연치 않은 기회에 문화공보실로 발령이 나서 몇 년 동안을 일하게 됐다.

“그때 삼산동에서 공한지 청소하는 공공근로 담당자를 맡았는데, 작업과정에 대해서 사진 찍는 게 일이었어요. 그러다가 9개월 정도 지났을 때 구청에서 내가 사진 찍는 것을 봐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문화공보실로 발령을 내렸어요. 그때부터 사진 담당자로 6년 7개월 정도 일했어요.
전문가용 사진기로 찍었는데, 저는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여직원에게 조금 배우고, 사진기자들에게도 많이 배우고, 관공서에 있는 사진 담당자들도 만나서 많이 배우고 그랬어요. 그래서 이왕 자리에 앉았으니까 취미생활로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울산공공기관 사진동호회’라는 조직을 만들었어요.”



공보실에서 사진만 열심히 찍으면서 몇 년을 있다보니 불합리한 모습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친 그 즈음에 직장협의회 움직임 생기면서 손성호씨는 직장협의회를 시작으로 공무원노조 활동을 하게 된다.

“구청장 따라다니고 하다보니까 아무래도 정보를 많이 알게 되니까 불합리한 점이 많더라고요. 구청장의 부당한 시지라든가, 정치인다운 행보가 저한테는 좀 안맞더라고요. 처음에는 사진에 대한 것만 공부하고 싶어서 그런데 의미를 두지 않고 한 2년을 있었는데, 3~4년 지나다보니까 자리도 안정이 되고 옛날에는 안보이던 부분이 보이게 되더라고요.
이런 것들이 눈에 거슬리던 와중에 2001년쯤에 우리 공보실에 있던 직원이 ‘직장협의회 만들어야 된다’ 그러기에 저는 ‘그 말이 맞다’ 그러면서 동참을 하게 되었어요. 그때 틈틈이 짬날 때 조합활동에 대한 사진이나 찍어주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2002년에 공보실에 있던 직원 한 분이 조직부장을 하고 있었는데, 노래패를 만들어보자고 그랬어요. 동구 만들고, 중구 만들고, 남구에서도 만들었어요. 낮에는 지부사무실에서 노래연습을 하고, 밤에는 매구마당에 가서 하고 그랬어요. 그렇게 지부에 와서 노래패 활동을 하다가보니까 노조의 필요성이나 이런 것도 공부하게 되고 그랬죠.
그렇게 노래패 활동을 하다가 제가 사진도 찍고 그러니까 교선부장을 맡아달라 그래서 교선부장을 하게 되었어요. 교선부장을 2004년까지 하다가 2004년 2기 지도부로 전환할 때 부지부장을 하게 되었어요.”

노동조합 활동을 하게 되면서 어떤 변화가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성격이 좋아졌다고 웃으면서 얘기한다.

“저는 학교 다닐 때는 학생운동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어요. 이거 하게 되니까 몰랐던 부분을 많이 알게 되고, 배우면서 커간다는 느낌이 많이 들어요. 집안도 보수적인 집안이었는데, 현실을 알게 되니까, 다는 바뀌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생각이 진보적으로 많이 바뀌었어요. 이제는 다른 사람들 얘기도 잘 들어주게 되고, 성격이 좋아졌어요.
개별적으로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하면 얘기가 좀 되지만, 그 사람들도 공무원이라는 현실적 조건에 묶여버리다 보니까, 조합원들에게 노동자의식을 갖게 만드는 게 힘들죠. 자기들도 동조는 하지만은 막상 행동에 나설 때는 분위기 따라가는 게 있어요.”

두 번의 큰 투쟁의 경험에 대해 얘기해달고 했더니, 겸손해서인지 간략하게 설명했다.

“2002년에는 교선부장을 하고 있었지만 직책에 따른 개념이 별로 없었어요. 업무를 보면서 활동을 하다보니까 활동을 대대적으로 한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그때 중식집회를 하고, 아침 선전전하고, 벽보 붙이고, 실·과 순회선전전하고, 분위기 띄우고 이런 식으로 하면서 남구에서 50명 조금 넘게 서울에 연가투쟁 하러 갔었어요.
서울에 가서 노래연습 하다가 전경들 들이닥쳐서 연행되어서 처음으로 유치장 신세를 져봤어요. 처음에는 속에 천불이 나더니만, 조금 지나니까 밥도 먹을만 하고, 다른 지부에서 온 사람들 하고 이런 저런 얘기도 하면서 많이 배웠어요.
연행하는 과정에서 전국방송에 나오는 바람에 집에서도 난리가 나고 어려움이 좀 있었어요. 그때부터 활동이 좀 주춤하다가 2003년 하반기부터 조금씩 활동이 이루어지면서 2004년 2기 지도부 구성하면서 다시 활발해졌어요. 노래패 활동은 계속 하다가, 2004년에 지도부 구성하면서 부지부장으로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2004년에는 열성적으로 했었는데, 작년 파업 이후에는 분위기가 급전직하 되었어요. 저도 복귀하는 와중에 집안에서 어른이 연락이 오고 집안이 발칵 뒤집혔어요. 그래서 집안에도 무마를 시키기 위해서 조합 활동은 잠시 손놓고 동사무소에 내려가서 일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파면을 당하고 다시 이 자리에 오게 되었어요.”

손성호씨는 다시 회복투 활동과 지부활동을 하면서 조합원들의 노동자의식을 높여내는 활동에 전념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징계받기 이전부터 활동을 못하고 있었지만, 가끔 지부사무실에 들러서 미안하다 그러고, 언제는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고는 있었어요. 해임까지는 생각하고 있었는데, 파면까지는 생각하고 있지 않았거든요. 그러다가 파면통보를 받고 짐을 싸들고 나와서는 회복투 활동에 전념을 하면서 복귀를 했어요.
회복투 활동을 하면서도 총액인건비 문제들도 있고 하니까 조합원들 의식을 높여내는 활동을 함께 할 생각입니다. 징계는 징계대로 하고, 조합원들 노동자의식을 심어주는데 전력투구해야 하지 않을까합니다. 알면서도 움츠리는 것보다, 지부장님 말씀하시는 것처럼, ‘잠자는 척 하는 사람은 못 깨우고 잠자는 사람은 깨울 수 있다’라는 것처럼 잠자는 사람들 깨우는 활동을 하고 싶습니다.”

한참 얘기가 진행되는 와중에 현안문제에 대해 구청장 항의방문이 있어서 간부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인터뷰도 다소 아쉽지만 간단하게 마칠 수밖에 없었다.
공무원노조와 회복투를 보면 ‘정중동(靜中動)’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조용하듯 하면서 나름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전열을 정비해서 다시 제대로 된 투쟁을 하기 위한 것이길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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