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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현대중공업 노동자, 나는 비정규직 - 자치단체 비정규직 노조 조합원 최정숙씨

 


자신이 공무원인줄 알았던 사람들이 비정규직임을 깨닫고 난생 처음 노동조합이라는 것을 만들고, 어렵게 어렵게 해서 쟁의행위 결의까지 달려온 사람들이 있다. ‘울산광역시 자지단체 비정규직 노동조합’이라는 다소 긴 이름의 노동조합 사람들이다. 모든 것이 처음해보는 것이라서 낯설고 힘들지만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의 힘으로 바꿔내고자 하는 의지는 매우 강하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최정숙씨를 소개받았는데, 기자와 인터뷰라는 것을 처음 해보기 때문에 혼자 하기는 부담스러워서 몇 명이 같이 하면 안되겠냐고 물어왔다. 그래서 너무 많지 않은 범위에서 하자고 했다. 그러나 막상 약속 장소에 나갔다니 다른 사람들을 조직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는지 동구지부장만이 함께 자리를 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가벼운 얘기를 하면서 부담을 좀 줄이고 나서 생맥주를 시켜놓고 얘기를 시작했다.

울산에서는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네 살 적에 울산에 내려온 이후 대학 다닐 때를 제외하고는 계속 울산에서 살았다고 한다. 대학을 다니다가 잠시 자퇴를 하고 3년 동안 도매서점과 영어학원 등에서 일들을 잠시 했다고 한다. 그렇게 아르바이트로 일들을 하던 중 2000년 경에 동사무소에서 공공근로를 잠시 한 적이 있는데, 복학하고 졸업을 앞둔 때에 당시 동사무소에서 알고 지냈던 언니가 ‘일자리가 있는데 해보지 않겠느냐’는 소개로 2002년 2월 4일 남목1동 동사무소에 취직하게 된 것이 첫 직장이자 현재 직업이 되어버렸다.

동사무소에서 하는 일이 어떤 것이고, 비정규직들은 무슨 일들을 하는 지 설명해달라고 했다.
“주민자치센터 보조요원이거든요. 요가라든지 노래교실, 스포츠댄스 등 자치센터 프로그램 관리와 회원관리 등을 하는 게 주된 업무인데, 직원이 결원이 생기면 보충을 시켜주지 않으니까 결원생긴 업무도 다른 직원들과 나눠서 해요. 서류정리, 우편물 관리, 자판기 관리, 예식장 관련된 일들도 보고요.
남목1동 동사무소에는 정직이 9명인데 유아휴직이 2명이라서 현재는 7명이고요, 저를 포함해서 3명이 비정규직이고, 공익이 2명 있어요. 비정규직 3명에서 저는 주민자치센터 업무를 하고 있고요, 다른 한 분은 저소득계층 가정지도원이라고 해서 사회복지 쪽 업무를 하고 있고요, 또 한 분은 사회복지 계통의 도우미인데 점식식사 때 식사준비도 하시고 청사 청소도 하시고 그래요. 자치센터 업무는 동구에 있는 10개 동사무소마다 1명씩 해서 모두 10명이 있는데, 전부 저와 같은 비정규직이에요.”

이런 조건에서 일을 하는데 애로사항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최근 벌어지는 연가문제에 대한 것을 정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요즘 들어서 연가문제 때문에 부딪혀요. 저희 같은 경우는 연가라는 게 아예 없는 줄 알았거든요. 이번에 노조를 결성하고 이런 저런 자료를 대하다보니까 연가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동안 저희가 연가를 보상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거든요. 근로기준법에도 명확히 명시되어 있는데도, 구청에서는 ‘선례도 없고, 윗선에서 별다른 얘기가 없기 때문에 어떻게 하기가 애매하다’ 그래요. 어떤 경우는 ‘알아보니까 연가라는 게 없다더라’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어요. 서류상으로 제시를 해도 안 먹혀 들어가는 경우가 많거든요.
노조차원에서 일일이 찾아가면서 해결하라고 얘기하기도 그렇고... 현재는 기획감사실에서 이 업무를 보고 있는데,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몇몇 담당자들과의 자리를 마련해달라고 요구를 했어요. 그래서 ‘알겠다’고 그랬는데 아직까지 대답이 없어요.”

3년 여 동안 어떤 생각을 하면서 일을 해왔냐고 물었더니 3년 기간 동안 생각의 변화과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여기서 일하는 것에 대해서 아빠가 반대를 하셨어요. ‘대학까지 보내놨더니 기껏 한 달에 50~60만원 정도 하는 일자리 얻으려고 학교를 다녔느냐. 1년에 천 만 원이 넘게 들었는데...’하시면서 반대를 하셨어요. 저는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공부해서 나중에 공무원 하겠다’고 생각해서 다녔거든요.
그런데 짬밥이 조금씩 늘면서 제가 하는 일이 비중이 조금씩 커지고, 주변여건도 어느 정도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러다보니까 ‘일은 이렇게 많이 시키면서 나한테 돌아오는 건 뭔가?’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러다가 몇 년 전에 학교비정규직이 교장선생님하고 충돌이 생겼던 일이 있었는데, 그게 남 얘기가 아니더라고요. 그때 ‘학교비정규직이기는 하지만 이게 내 얘기다. 나는 이 자리에서 뭘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때 계기로 많이 삐딱해졌거든요.
그러다가 뉴스에서도 비정규직 문제가 많이 화두로 떠오르고, 정부에서도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대한 발표도 하고 그래서 내심 기대를 하기도 했어요.”

최정숙씨의 경우는 지금 자치단체비정규노조에서 가장 쟁점이 되고 있는 ‘280일 단기계약직’이다. 280일 계약직이라는 것은 1년 실근무일수가 280일인 사람들을 일컫는 말인데, 1년 상용직과는 불과 10일 밖에 실근무일수에서는 차이가 없지만, 상용직이 아니기 때문에 임금과 상여금, 연가 등에서 차이를 받는다고 한다. 행자부에 사용인력을 보고할 때 상용직을 기준으로 보고 하기 때문에 280일 단기계약직들은 제대로 보고되지 않는 편법이라고 한다. 최정숙씨는 한 달에 80~90만원 정도의 저임금을 받고 있는데도, 임금문제보다 고용문제가 가장 먼저 해결했으면 한다고 얘기했다.
“280일은 IMF 이후에 생겼다고 들었어요. IMF 터지니까 상용직으로 근무를 하던 사람들에게 ‘나갈래? 아니면 임금이 좀 줄더라도 일할래?’하는 강요된 분위기에서 나가지 않고 남은 사람들 중에서 280일로 근무하기시게 된 분들이 많거든요. 오래되신 분 중에는 17년 이상 되신 분도 있어요. 그런데 그 분들도 3년 된 저와 임금이 비슷해요. 모두 계약직들이라서 오래되었든 처음이든 임금수준이 똑 같아요.
제가 3년 근무를 하면서 매년 연말만 되면 불안했어요. ‘내년에 이 자리가 없어질 수도 있다’라는 얘기가 근거가 없이라도 나오면 얼마나 불안하겠어요? 작년 같은 경우는 가정봉사원으로 있던 분하고 동장님하고 사이가 안좋았던 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가정봉사원 자리가 필요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을 거수로 물었다고 하는 얘기가 있더라고요. 그런 얘기를 했다는 자체가 사람을 참 비참하게 만들지요.”



술도 조금 들어가면서 분위기가 조금 편해지는 듯 했다. 본격적으로 노동조합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동구 자체센타 운영하는 10명 모임이 있었거든요. 한 달에 한 번씩 밥 한 끼 하면서 얼굴 익히는 수준으로 모이고 있었는데, 모임 소집을 담당하시던 분이 어느날 긴급 모임을 하니까 필히 100% 참석을 하래요. 그래서 모였더니 ‘노조를 만들기 위해서 이런 이런 움직임이 있다. 근데 나는 애기가 고3이고 중3이다. 그래서 나는 충실히 하고 싶지만 가정 때문에 어렵다. 그래서 활동적이고 충실히 할 사람이 필요하다’면서 저를 찍었어요. 그 상황에서 저도 생각을 해보니까 다들 이런 저런 상황들이 있는데 그나마 내가 조건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신은 없지만 ‘내가 조금 희생하자’ 그래서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2004년 9월부터 회의참석을 하고, 준비위원회로 회의를 하면서 준비를 하다가 10월경에 노조 창립을 하고, 12월에 창립총회를 중구청에서 했어요.
그렇게 노조 창립을 하고 각 구청에 교섭 요청을 했어요. 그런데 이런 저런 핑계로 안한다고 하지요. 당장에 총무과 내지는 기획실 업무가 되는데, 없던 업무가 생기는 거지요. 자기가 하던 업무가 아니니까 미루고 싶었던 거고, 노조 일이면 골치 아픈거죠. 그래서 ‘노조 전담부서를 만들고 있으니까 4월까지 기다려 달라는 둥 2005년 안으로 얘기해보자는 둥 하면서 피하더라고요.
그렇다고 저희가 무작정 기다릴 수 있는 상황은 아니잖아요. 당장에 2005년 7월부터 주5일제가 실시되면 임금이 깎이는데... 그리고 매년 재계약이라는 고통을 겪고 있는데... 그리고 노조라는 것을 만들어서 움직이고 있는데 뭔가를 맺지 않으면 그 사람들이 무시할거 아니예요? 최악의 경우는 해고라는 것도 생각할 수 있는데... 그래서 미루지 않고 그래서 밀고 나갔거든요.”

처음으로 노동조합 활동을 해보니까 어떠냐고 물었더니 ‘함부로 무시를 못하는 것이 달라졌다’고 얘기한다. 동장은 걱정해주는 척 하면서 앞에서 나서지 말도록 회유하기도 하고, 공무원노조 조합원으로서 파업을 경험했던 직원들은 우호적인 얘기들도 많이 한다고 한다.
“구청 근무하는 분들은 뭉쳐 있기 때문에 조끼를 입는다거나 이런 일들이 크게 마음의 부담은 없는데, 저희처럼 동사무소에 한 명 씩 있는 경우는 조금은 위축되는 게 없지 않아 있거든요. 그런 분들 보면서 노조 힘을 키워서 조끼 하나 입는 것도 떳떳하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저희가 처음에 노조를 만들면서도 이런 저런 요구사항들은 있어도 과연 얼마나 해낼 수 있겠느냐 하는 의구심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하다보니까 힘들더라고 다 같이 뭉치고 하면서 하다보니까 뭔가를 이루는 것 같더라고요. 조금만 더 힘을 내면 저희가 요구하는 것에서 상당히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할 때마다 가장 대답하기 힘들어 하는 질문을 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물었더니, 역시나 원론적인 답변을 하다가 어려워하길래 맥주로 다시 목을 축였다. 맥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우스개 소리를 한다.
“7월 전에 모든 것을 다 쟁취하고, 7월말에 연가보상금도 다 받고, 올해 안에 결혼하는 것이 개인적인 목표예요.”

최정숙씨는 아버지가 현대중공업에 노동자로서 노동조합 활동도 하셨던 경험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노동조합에 대해서는 거부감 없이 노동자의 자연스러운 권리로 생각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 얘기를 듣고 왠지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현대중공업의 노동자들이 그 모진 탄압 속에 노동조합을 만들고 싸워왔지만 지금 와서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은 무너졌고, 그 자식은 대학까지 나와서 비정규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이 땅의 현실임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비정규직 투쟁은 과거 투쟁의 뼈아픈 연장선이고, 우리의 미래를 다시 가늠하게 하는 가늠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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