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투쟁 속에 용기가 생겼습니다 -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 강현식씨

 


이제 비정규직 투쟁은 더 이상 선도투쟁이나 몇몇 헌신적 간부들의 투쟁이 아니다. 이미 대공장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투쟁은 엄청난 파급력을 가지면서 투쟁의 핵으로 등장했고, 화물연대나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처럼 새롭게 대규모로 조직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전국전선의 중심에 우뚝 서 있다.
그렇다고 이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지가 획기적으로 나아진 것은 아직 없다. 아직도 어렵고 힘겨운 조건에서 비정규직이라는 멍에를 안고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다.

2년여 전부터 현대자동차라는 거대 자본에 맞서 숙명과 같은 사내하청 노동자의 처지를 극복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조합원 강현식씨를 만났다. 매서운 눈빛에 자르지 않은 수염이 2년 여 동안의 투쟁 속에 단련된 노동자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고향이 통영인 강현식씨는 92년 고3 때 취업연수생으로 현대자동차 납품업체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 첫 직장경험이자 현대자동차와의 인연이었다. 그러나 조금 있다가 몸이 좋지 않아 다시 통영으로 내려가 쉬다가 제주에 있는 막내이모 집에서 양식장 일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2000년 다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울산으로 와서 ‘교차로’에 난 광고를 보고 현대자동차 업체에 들어오게 된다.

실질적인 첫 직장에서 강현식씨는 키퍼(팀장)로 일하게 되면서 업체이기는 하지만 현장관리자 일을 하게 된다.
“그때 업체가 막 생겼을 때 입사를 했어요. 1년 정도 일하다가 회사가 자리 잡고 그러면서 키퍼로 올라가게 되었죠. 알아주는 키퍼였어요. 일하다가 화장실 보내 달라 그러면 ‘내가 화장실 보내주는 사람이다’ 그러고, 일반 작업자들에게 탄압을 많이 했죠.”

강현식씨는 2000년에 현대자동차 3공장에 있는 1차 하청업체에 입사한 후 최근 해고되기 까지 4년 6개월 동안 6개월 마다 형식적인 재계약을 하면서 한 업체에서 계속 일을 해왔다. 그러면서 비정규직으로서의 서러움이 쌓였다.
“업체는 직영들 심부름꾼이었어요. 거기서 일하다보면 직영들이 욕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직영 조·반장들이 청소까지 시키고 그런 일들이 상당히 많았어요. 직영이 파업한다하면 항상 휴게실에 모여서 대기상태였는데, 직영 대의원들이 와서 ‘너그 나가라’고 하면서 욕하고 그러면 싸운 적이 상당히 많았어요. 대의원들 보면 업체 일반 작업자들에게 직접 뭐라 하는 게 아니라 키퍼를 통해서 요구하는 게 많아서 오히려 키퍼니까 더 마찰이 많았어요.”

처음에는 잠깐 와서 2~3달 일자리 구할 때까지 일하는 데라고 생각해서 들어온 곳이었는데 왜 이렇게 오래 있었는지를 물어보았다.
“나가면 납품업체들 중에서도 세종이나 이런데 들어가야 그나마 대우를 받고 그러는데, 갈 데가 없었어요. 나가면 어디 대출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뚜렷이 다른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변변히 일할 곳도 없어서... 그나마 여기가 낫다 싶어서 계속 있게 된거죠. 그러다가 2000년부터 직영 노동조합이 나서서 임금인상이 시작되고 처우개선 한다면서 좀 챙겨주고 쉬는 날 많고 그러면서 회사가 조금씩 나아졌어요. 그러다보니까 요즘에는 1차 업체 들어가는 것도 하늘의 별따기라고 하니까 여기서 일하는 게 낫다는 생각들을 하게 되죠. ‘이러다가 직영이 되면 로또 당첨되는 거다’ 뭐 이런 생각들이죠.”

그러나 비정규직은 역시 비정규직이라서 항상 불안하다.
“해마다 모듈협상이나 m/h협상이나 할 때마다 ‘인원 잘라낸다’ 하는 소리 들을 때마다 ‘이번에 잘리면 어떻게 하나’ 이런 불안감이 상당히 크죠.”



강현식씨의 삶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2003년 비정규직 노동조합이 결성되면서 부터이다.
“정규직 활동가 형님들 중에 고향 선배님이 있어서 평소에 이런 저런 얘기를 듣기도 했고, 비정규직 노조 하려는 사람들 중에 평소에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안면이 있었죠. 그럴 때 열심히 활동하는 동지들 보고 ‘대단하다’ 느껴서 같이 하게 되었어요. 투쟁조끼 입고 다니고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키퍼자리를 그만두게 된거죠.
솔직히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욕 들어가면서 중간관리자로 일을 할 수가 없더라고요. 내 자신도 처참하고 사장 시키는 대로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그렇게 하면서 더 이상 일하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러면서 3공장 2차 업체 싸움을 하면서 대놓고 같이 뛰어다니고 공부하고 하면서 2003년 7월에 노동조합 대의원 선거에서 초대 대의원이 되어서 활동을 하게 된거죠.”

2003년 하반기로 들어서면서 수많은 열사들이 목숨을 끓고 여기저기 많은 투쟁들이 생기면서 강현식씨는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법이나 이론을 배우면서 ‘이런 게 있구나’ 하는 것을 알았던 거고요. 구체적으로 연대투쟁 다니면서 노동자들이 많이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죠. 언론이나 방송에서 나오는 거 하고는 완전히 반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구나. 그런데도 열심히 싸우는 것을 보면서 자동차 비정규직 노조와 비교해 보면, 비정규직 노조 싸우는 거는 그 사람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하는 것을 많이 생각했죠.”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조가 현장투쟁을 활발히 벌이기 시작한 것은 2003년보다는 2004년이었다. 이 시기 강현식씨는 어떤 투쟁들을 경험했는지 물어보았다.
“3공장에 경일이라는 업체가 있는데 2004년 1월 달에 갑자기 사고를 쳐버린거예요. 화장실도 제대로 가지 못하게 하고, 월차도 제대로 쓰지 못하게 하니까 자기들끼리 단체로 작업을 거부하였어요. 그때가 현대중공업 박일수 열사 투쟁이 벌어지는 시기였거든요. 그래서 중공업에도 갔다가 다시 현장에 들어와서 사람들도 챙기고 선전전도 하면서 왔다갔다 하면서 정신없이 했어요. 그러다가 경일투쟁과 박일수 열사 투쟁이 정리되고는 임단협투쟁에 들어가면서 비노조 조직국에서 일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죠.”

처음 해보는 활동 속에서 여러 가지로 사람들과 치이면서 힘이 들어 2004년 임단투 이후에 몇 개월 동안 노동조합 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다시 불법파견 문제가 불거지면서 2004년 11월부터 활동을 재개하여 이런 저런 투쟁들을 하다가 2005년 2월 4일 해고되어 지금까지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다고 했다.

이런 우여곡절 속에 2년여 동안 투쟁을 해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 몇 가지를 얘기해 달라고 했다.
“아직도 못잊는 게 2003년 현대세신과 해성 2차 업체 임금인상투쟁 할 때예요. 비가 엄청 오늘날 아주머니들과 밤새도록 농성하다가 합의서를 쓰고 새벽에 나가는데, 비가 그치고 안개가 깔려 있는데, 그때 기분은 뭐라고 표현하기가 어려웠어요. 처음으로 맛보는 승리였으니까요.
좀 아쉬웠던 거는 2004년 경일투쟁이 막 끝나고 합의를 하는 시점이었어요. 처음에 생각했던 만큼 다 관철을 못 시키고, 경일사람들은 다 지켜있고, 경일사람들이 ‘이 정도면 됐다’고 하면서 정반 정도의 승리로 그칠 때 참 아쉬웠어요. 조금만 더하면 제대로 따낼 수 있는데, 제대로 못했다는 아쉬움이 참 많았어요. 밤에 사람들 하고 수고했다면서 술을 먹는데 너무 아쉬워서 할 말이 없었어요.
제일 열 받는 거는 어용 정규직 활동가들을 만났을 때예요. 2003년 세진·해성 투쟁 할 때 몇 몇 정규직 대의원들이 우리보고 대놓고 무시하고 그랬거든요. ‘니들은 여기 있어서는 안되는 사람들이다. 니들은 공장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러는 대의원들이 있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어용이 뭔지 모를 때였는데... 사람한테 실망하고 그러는 게 참 컸어요.”

처음으로 이런 투쟁을 경험하면서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생겼냐고 물었더니 간단하게 대답했다.
“용기가 생겼어요. 예전에는 속으로 삼키고 그랬던 거를 이제는 잘못된 거는 잘못되었다고 얘기할 수 있다는 용기가 생겼어요.”

현재 80여 일 동안 농성투쟁을 해오면서 제일 힘든 것이 뭐냐는 질문에는 답답함을 토로했다.
“현자노조는 취업비리다 뭐다 해서 아무 것도 못하고 있고, 그렇다고 우리도 뭐 하려고 해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 제일 힘들죠. 현장에 들어가더라도 사람들한테 현재 상황은 어떻고 앞으로 어떻게 할거다 얘기를 해줘야 하는데 할 말이 없어요.”

강현식씨는 ‘이후에는 어떻게 할거다’ 하는 것은 이번 투쟁이 끝나는 시점에서 생각하려고 지금은 생각을 안는다고 했다. 어떻게든 지금 투쟁에 모든 것을 걸겠다는 의지가 단호했다.
어떤 사업장이든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항상 여러 가지 고민들을 하면서도 판단은 아주 단순하고 단호한 법이다.
정규직 노동조합과 비정규직 노동조합이 임단투와 불법파견관련 특별교섭이 본격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이런 조합원들의 단호함을 어떻게 투쟁으로 받아 안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게 다가오고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