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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강력한 투쟁을 벌일 겁니다' - 대덕사 조합원 곽영섭씨

 


대덕사 농성장을 찾아가서 인터뷰를 하겠다고 했더니 지회장이 옆에 앉아 있던 한 분을 소개해주었다. 서글서글한 표정에 조용하고 얌전한 말투가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를 그대로 연상시켰다.

나이가 마흔셋인데 대덕사에 들어온지는 2년 4개월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길래 그 전에는 뭐했는지 물었더니 한 시간 동안 파란만장한 삶의 얘기를 늘어놓았다.
경북 달성에서 나고 자라다가 고등학교 3학년 때 학교도 졸업하지 않고 실습생으로 현대중공업에 입사하게 되면서 울산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5년 동안 군특례병으로 일하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아서 의무복무기간이 끝나자마자 현대중공업을 그만두고 그동안 모은 돈으로 배지밀 대리점을 시작했다. 그러나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시점에서 경기가 나빠지고 생산업체에서 대리점에 대한 공급조건도 나빠져서 첫 사업은 실패하고, 다시 소규모 판매업을 해보았지만 남는 게 없어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시작한 것인 택시운전이었고, 그러다가 돈을 빌려서 개인택시를 하게 되면서 사는 게 나아질라고 하니 IMF가 닥쳐온 것이다. 어렵게 어렵게 불황을 극복했지만 애들이 크면서 나가야 될 돈들이 많아지다보니 다른 것을 찾게 되었고, 그래서 택시를 팔고 조그마한 사설 경비업체를 운영하게 되었다. 소사장 형식으로 공탁을 걸고 시작한 경비업체는 시작한지 4개월만에 폐업해버리면서 모든 재산을 다 날려버리게 된다. 이런 저런 사업들을 전전하다가 모든 재산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결국 자동차 부품업체에 취직하게 되고, 이어서 현대자동차 2차 업체에서 사내하청 노동자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렇게 이 일 저 일을 전전하다가 나이가 사십이 넘어서니까 이후를 고민하게 되었고, 그래서 정규직 일자리를 찾아서 들어온 게 대덕사인데 2년 4개월만에 회사가 폐업을 해버려서 다시 실직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중간 중간 “머리를 빨리 굴린 게 탈이다”고 몇 번을 얘기하면서 살아온 얘기를 듣다보니 노동자는 뭘 해도 제대로 먹고살기 힘들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확인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요즘 살아가는 얘기로 이어지면서 곽영섭씨는 한숨을 자주 쉬면서 말을 이었다.
“2년 정도 근무해서 퇴직금이라고 사백만원 받았는데 투쟁 3개월이 가까워오다 보니까 많이 힘들죠. 자동차 보험이 만기가 되고, 애들 두 놈 다 수학여행 가면서 목돈 백만원이 나가버리더라고요. 고용보험이 2주에 40만원 정도 나오는 걸로 의식주는 해결하지만 애들 학원은 끝어 놓고, 문화생활이니 이런 것은 생각도 못합니다. 집에서는 생활비가 없으니까 돈 벌러 가라고 하는데... 막막하죠. 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꽤 됩니다.”



얘기가 현재의 고민으로 이어지면서 절박한 심정이 다소 과격하게 나타났다. 곽영섭씨 같은 경우는 근속년수가 길지 않아서 고용보험도 3개월로 끝이기 때문에 다음 달부터는 고용보험이 중단되게 된다.
“그러다보니 우리 노동자들이 극한 상황을 택하는 것 같아요. 저도 전에는 ‘왜 자살을 할까’ 그랬어요. 그런데 이제는 ‘자기 목숨을 던질 때는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하고 이해가 되고, 주위에서도 그런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앞으로 조금 더 길어진다면 극한 상황으로 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저도 지금 노동조합에 가서 강력하게 가자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저 같이 처지가 급하지 않은 사람들은 ‘시간을 두고 가자’고 하는데 저는 시간을 둘 여유가 없거든요.”
마침 이런 얘기를 할 쯤 밖에서 한 조합원이 흥분한 상태에서 다른 조합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나중에 얘기를 마치고 그 이유를 알아봤더니 이번 달로 고용보험이 중단되는 조합원이 투쟁방법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의견충돌이 생겨서 그런 것이란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이런 절박함 속에서 단호하고 완강해지는 것임을 새삼 확인했다.

‘노동조합 경험도 거의 없고, 머리가 빨리 돌아가서 다른 직장을 알아보는 것도 빨리 빨리 하는데 왜 석 달 가까이 이런 투쟁을 하느냐’고 직설적인 질문을 던졌다.
“노동조합을 믿고 승리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보이니까. 누구나 다 그렇듯이 희망이 없다면 안하겠죠. 폐업자체가 너무도 부당하고 어의 없는 것이어서 열받기도 했죠.”
폐업 얘기가 나오니 조용한 목소리 톤이 약간 높아졌다.
“이거는 분명히 계획된 프로그램이예요. 기업이 폐업을 해서 망했다면 무일푼이 되어야 하는데 똑같은 자동차 부품회사를 하면서 회장으로 굴림하고 있잖아요. 우리가 2월 28일 폐업공고를 받았는데 2월 26일 27일까지도 잔업 특근을 하고 있었으니까 상상이 안되는거죠. 폐업하는 그날 까지 일을 했던거죠.”

‘80일 가까이 이렇게 투쟁을 하니까 어떠냐’고 물었더니 엇갈리면서도 현실적인 대답을 했다.
“이렇게 해서 얻을 게 뭐고 잃을 게 뭔가 하는 생각도 많이 들고, 주위에서 연대해주시는 분들도 고맙게 생각되어요. 그리고 여기에 좋은 사람들 많아요. 거의 가족 같은 동지애 때문에도 투쟁하고 있는 게 배우는 것도 많죠.
혼자 있으면 고민이 많죠. 저하고 우리 집사람 사는 거라면 그런대로 살겠는데, 내 같이 무식하게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식들 공부를 시켜야 하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거든요.”

얘기를 하다가 건설플랜트 얘기가 나오더니 마치 건설플랜트 조합원인 것처럼 건설플랜트 투쟁의 정당성에 대해서 한참을 얘기하면서 공권력과 언론을 강하게 질타하였다. 이렇게 노동자는 투쟁 속에서 함께 투쟁하는 이들과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여러 가지로 어려운 조건에서 앞으로 이 투쟁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질문에 대해 좀 걱정스러운 대답을 했다.
“지금까지 해온 투쟁강도를 가지고는 상대가 꿈쩍을 안하고 있으니까 어짜피 극한 상황으로 갈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장 6월부터는 투쟁강도를 올리거든요. 누구 하나는 생을 포기하지 않으면 투쟁이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공식적인 인터뷰를 마치고 잠시 극한 투쟁이 아니더라도 승리하는 사례들을 얘기하면서 막판에 뜨거워진 분위기를 달랬다. 그리고 나서 농성장을 살피는데 한 여성조합원이 내가 기자라고 공장 곳곳을 보여주면서 설명을 했다. 이런 부당한 현실을 꼭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좀 멀쓱하기도 하고 그런 절박함에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도 없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1인 시위를 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피켓 중에 문구가 기발한 것을 몇 개 골라서 사진 찍어 드리겠다고 했더니 아주 환하게 웃으면서 모자와 머리띠를 찾아들었다.
몇 장의 사진과 2시간 동안의 인터뷰 내용만으로 대덕사 조합원들의 절박함이 얼마나 전달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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