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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주의에 저항하다 조합주의에 갇혀 버린 투쟁

조합주의에 저항하다 조합주의에 갇혀 버린 투쟁
- 2003년 현대자동차 민투위의 근골격계 투쟁에 대해


1. 철지난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

이글은 지난 2003년 현대자동차 현장조직인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민투위)의 근골격계 투쟁에 대한 얘기이다. 2년이나 지난 얘기를 지금 와서 하는 것이 뜬금없기는 하지만 뜬금없음에는 나름대로의 변명거리가 있다.

첫째, 당시 투쟁이 제대로 평가되지 않은 채 유야무야 넘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투쟁은 울산지역에서 주요한 관심사로 떠올랐고, 그런 만큼 그 투쟁을 바라보는 시각들이 다양했다. 그러나 그 투쟁을 주도했던 민투위나 그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그 어느 세력도 그에 대한 평가를 하지 않았다. 뒤늦게나마 이에 대해 공개적으로 의견을 제출함으로서 그 투쟁의 성과와 한계를 확인하고, 현실의 과제를 찾아보고자 한다.

둘째, 조합주의 극복에 대한 주요한 단초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장조직이 집행부와 대립하면서 벌였던 투쟁은 많은 오해와 억측을 낳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 투쟁의 성격이 왜곡되기도 하였다. 또한 그 투쟁을 주도했던 민투위가 이후 임원선거에서 당선되는 과정을 전후로 하여 투쟁의 성격이 심각하게 희석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런 몇 가지 왜곡지점을 걷어낸다면 그 투쟁은 조합주의 문제를 전면에서 제기했고, 대중적인 극복의 단초를 제출했다는 중요한 지점이 있다. 이는 조합주의의 고착화로 인해 질식되고 있는 현장운동의 활력을 되찾기 위해서도 중요하게 검토되어야 할 점이다.

2. 2003년 민투위의 근골격계투쟁은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가?

1) 자기반성에서 출발한 투쟁

2003년 근골격계투쟁은 자기반성에서부터 출발하였다.
9대 집행부(*) 당시 근골격계 사업의 기본방향을 협상중심의 노사공동사업으로 하여 시작한 것에 대한 자기반성에서 출발하였다. 9대 집행부의 사업기조에 근거해서 10대 집행부는 연속선상에서 사업을 진행해왔고, 그를 근거로 민투위의 투쟁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민투위는 이런 점에 대해 대중적으로 분명히 자기비판의 입장을 밝히면서 사업을 진행하였다. 이런 자기비판은 그동안 노동보건활동에 대한 무지와 경시, 그리고 관료화되고 제도화된 조합주의적 활동에 대한 자기반성으로 이어졌다.
9대 집행부 당시 오류 역시 노동보건활동을 현장의 투쟁과제로 바라보지 않고, 관성적인 산안활동의 일환으로 봐왔었던 것에서 기인한다. 즉, 노동보건활동이 대중투쟁영역이 아니라 관료적 조합활동의 한 부분으로 바라보고, 소위 ‘산안통’을 중심으로 한 담당자 중심의 활동으로 제한되어왔던 관성을 그대로 승인한 것이 9대 집행부의 잘못된 사업기조였다.
이런 관성이 자기반성 없이 10대 집행부에서도 계속 이어지면서 노사합동사업은 상당정도 진척되었지만, 현장에서는 무지한 상태로 노동자들의 고통은 증가해갔다. 또한 2002년 대우조선투쟁 이후 근골격계투쟁이 전국적으로 급속히 확산되었지만, 이런 투쟁흐름에 결합하지 못한 현대자동차에서는 과로사와 근골격계 직업병이 급증하는 와중에도 철야, 특근이 어떠한 제동도 없이 진행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활동가들은 어떠한 문제의식도 없거나, 문제의식을 갖는다 하더라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본의 이윤극대화에 일조하였다.
2003년 근골격계투쟁은 바로 이런 대공장 노동조합운동의 관료화된 조합주의적 활동에 대한 자기반성이 없으면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이런 자기반성이 이후 왜곡되고 불철저하게 진행되면서 조합운동의 혁신을 힘 있게 추동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2) 현장조직의 독자적인 대중투쟁

그 이전의 근골격계투쟁이 공식조직인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진행되어왔다면 민투위의 투쟁은 현장조직이 직접 대중 속에서 투쟁을 벌였다는 특징을 갖는다. 특히, 현대자동차에서는 노동조합 차원의 근골격계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현장조직이 그와 별도로 투쟁을 벌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에 대해서 ‘공조직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연말 임원선거를 앞둔 선명성 경쟁이다’ ‘대중을 볼모로 한 정파적 발상이다’는 등의 비판이 있었으며, 그로 인해 투쟁의 성격이 왜곡되기도 하였다.
이런 비판들에 대해 민투위는 공개적으로 ‘노동조합이 잘못된 사업방향을 수정하고 대중투쟁으로 나아가야 함’을 강조하면서 그를 위한 현장조직의 활동임을 역설하였다. 즉,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투쟁을 해야 한다는 점을 확인하면서도 노동조합의 잘못된 사업에 대해 비판하고 견인하는 것이 현장조직의 활동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민투위의 근골격계투쟁은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갔다. 노동조합이 현장의 비판을 무시하면서 잘못된 사업을 고수할 때, 그에 대해 비판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감하게 대중에게 직접 호소하면서 독자투쟁을 벌여 잘못된 노동조합 활동을 바로잡으려 한 것이다. 바로 이 점이 현대자동차에서 2003년 근골격계투쟁을 얘기하는 데 있어 중요한 포인트이며, 동시에 이로 인해 투쟁이 왜곡되기도 하였다.
현장조직이 관료화된 노동조합 질서 내에서 경쟁과 비판을 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직접 대중투쟁을 조직하는 순간 조합주의적 질서에 균열이 생기는 동시에 정파적 대립이 극대화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투쟁의 긍정적 요소와 부정적 요소가 동시에 나타나면서 기존 관행과 질서에 균열이 생길 때 어떻게 새로운 관행과 질서를 만들어내는가 하는 것이 현실적 과제로 떠올랐다. 이 문제는 결국 ‘어떻게 위력적인 대중투쟁을 현실화할 것인가’의 문제가 되었다.
바로 이 점이 ‘현장조직이 어떻게 조합주의적 질서를 넘어선 계급적 노동운동을 현실화할 것인가’하는 과제를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러나 2003년 근골격계투쟁은 바로 이 과제를 드러내는 수준에서 더 진전되지 못하였다.

3) 비정규직과 함께 한 투쟁

근골격계 직업병의 급속한 확산 원인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따른 노동강도 강화임을 명확히 하면서 시작된 투쟁은 구조조정의 핵심인 비정규직 문제를 동시에 포괄해야만 했다. 특히, 하청투입이 제도화되고 하청구조가 중층화 된 현대자동차에서 사내하청의 광범위한 확산은 구조조정과 노동강도 강화의 핵심이기에 그에 대한 목적의식적인 대응이 요구되었다.
그를 위해 민투위는 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 목적의식적으로 비정규직을 포괄하면서 사업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비정규직과 관련한 별도 매체를 발간하는가하면, 집단요양 신청자에 비정규직을 포함하면서 투쟁을 벌였다. 그 결과 비정규직도 요양승인을 쟁취하는 성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비정규직과 함께 하는 투쟁’이라는 점은 아주 초보적인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 집단요양에 비정규직이 포함되었다는 점이 제대로 부각되지 못하였고, 이후 벌어진 비투위(**)를 중심으로 한 비정규직 투쟁과 근골격계투쟁의 결합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는 기존 사업에 비정규직도 포함시키는 수준으로 접근해서는 한계가 있다는 점과 좀 더 공개적이고 목적의식적으로 구조조정과 비정규직의 문제로 나아가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4) 전국투쟁전선에의 목적의식적 결합

근골격계투쟁이 2002년 이후부터 급속히 확산되는 가운데 전국투쟁전선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의식적 노력이 전국노동자연대(***) 결성으로 이어져다. 민투위는 이런 전국투쟁 흐름에 적극 결하하면서 투쟁준비단계에서부터 단사투쟁과 전국투쟁을 결합해나갔다. 이런 계급적 노동운동세력들의 결집이 있었기에 민투위의 투쟁은 가능했던 것이다.
단사투쟁을 중심으로 사업을 벌여왔던 관성과 사안이 발생했을 때 지원하는 식의 연대투쟁의 관성을 뛰어 넘어 투쟁준비에서부터 여타 투쟁주체들과 공동으로 전국투쟁전선을 형성해온 점은 주요한 차이를 보여준다. 또한 노동조합과 현장조직, 노동정치단체가 서로의 조건의 차이를 넘어 공동으로 하나의 투쟁을 벌여낸 것은 조합주의적 질서를 뛰어넘기 위한 중요한 진척이었다.
그러나 이런 활동도 투쟁의 집중 이상으로 지역과 전국에서 광범위한 대중투쟁의 확산으로까지 나아가는 데는 한계를 보였다. 특히, 울산지역에서는 현대중공업에서의 연속된 중대재해사건과 결합하여 지역차원의 대중적인 건강권 쟁취투쟁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었지만 그렇게 진행되지 못했다.
근골격계 투쟁이 현대자동차 내 정파 간 경쟁으로 왜곡되고, 지역단체들의 비판적이고 관조적인 입장 등으로 인해 투쟁을 지역으로 확산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3. 투쟁은 어떻게 활성화되고, 어떻게 죽어갔나?

1) 조직내부 준비기간 (2002년 하반기)

11기 민투위(****) 출범을 전후하여 민투위 내에 노동보건활동의 필요성을 느낀 동지들이 주체형성을 위한 논의를 시작하였다. 그 결과 11기 들어 노동보건부가 신설되어 본격적인 사업이 논의되었고 노동보건부를 중심으로 자체 역량강화와 사업 준비를 위해 다양한 내·외부 활동들을 열성적으로 벌였다. 이런 적극적 노력의 결과 12월부터 조직원교육을 시작으로 사업들이 시작되었다.
사업주체가 얼마만큼 의지를 갖고 적극적으로 움직이느냐 하는 점이 초기 조직 내 준비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즉, 싸울 생각이 있느냐 없느냐가 사업을 시작하는 데 중요한 관건인 것이다.

2) 대중적 공론화시기 (2003년 1월~2월)

근골격계 직업병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극도의 무지상황에서 우선 시작한 것이 매주 발행하는 기획대자보였다. 1월 초부터 발행한 기획대자보는 가장 초보적인 홍보에서부터 시작해서 대중이 직접 문제를 자각하고 자기문제화 할 수 있도록 7월까지 지속적으로 발행하였다. 이후 현장설문조사와 분석결과가 발표되면서 순식간에 현장의 가장 핵심적인 사안으로 등장하였다.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심각한 상황을 폭로하고, 그 문제에 대해 대중 스스로 자각 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선전사업을 벌였던 것이 주요하였다. 이런 대중적 반향 속에서 당시 집행부가 추진하던 노사합동사업의 문제가 드러나면서 대중적 긴장관계가 형성되었다.
이렇게 대중 스스로 자기문제를 확인한 이후에는 누구도 그에 대해 침묵할 수 없게 되었으며, 정파적 논쟁보다 대중의 관심과 요구가 앞서나가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요구되는 것은 대중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반복해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요구를 행동으로 조직하는 것이었다.

3) 공개검진과 집단요양투쟁 준비기간 (3월)

대중적으로 관심이 증폭되고 요구가 높아지고, 노사합동사업이 노골적으로 강화되려는 상황에서 민투위는 독자적인 공개검진을 실시하여 집단요양투쟁을 준비하게 되었다.
현장조직이 독자적으로 진행하는 검진사업은 노동조합과 여타 현장조직들의 비판, 사측의 방해, 현장 밖에서 진행되는 검진의 한계 등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5일간의 검진에 100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할 정도로 대중의 반응은 높았다. 그리고 검진과정에서의 교육과 면담 등을 통해 현대자동차 노동보건활동이 얼마나 낙후되어 있고, 얼마나 심각하게 사측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는지가 생생하게 확인되었다. 이러한 성과들을 바탕으로 더욱 공세적으로 현장의 심각성을 선전하고, 노사합동사업의 기만성을 폭로하면서 쟁점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공개검진 이후 집단요양투쟁을 준비하면서 더욱 공세적이고 조직적인 사업배치가 요구되는 상황에서 조금씩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민투위 내부적으로 급속히 노동보건부와 집단요양대상자들의 사업으로 축소되면서 조직적 결합력이 약화되기 시작하였고, 현장에서는 집행부와 민투위의 정파적 대립으로 왜곡되면서 대중행동을 조직하는 데 한계로 작용하였다. 이런 점을 극복하고자 민투위 내부로는 교육과 선전사업 등을 강화하였고, 현장에서는 공조직을 추동하고 여타 현장조직과 공동활동을 모색하려고 하였지만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결국, 집단요양투쟁을 기점으로 노동강도 저하투쟁을 위한 대중적 흐름을 만들어내는데 실패하였다. 결국, 이 지점을 극복하지 못함으로 해서 이후 투쟁을 점차 조합주의적 질서에 수렴되어 간다.

4) 집단요양투쟁기간 (4월)

4월 9일 집단요양신청을 전후로 하여 현장과 근로복지공단 등에서 다양한 실천투쟁들이 배치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들은 민투위와 집단요양신청자들의 공동투쟁으로 힘 있게 진행되었다. 독자적인 출근투쟁과 본관항의집회, 근로복지공단 앞 집회와 피켓시위, 집단면담투쟁과 점거농성투쟁 등 점차 투쟁수위가 높아지면서 강고한 투쟁이 계속된 결과 4월 21일 28명 전원에 대한 집단요양승인을 쟁취하는 성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점차 투쟁수위가 높아지면서 투쟁 지도단위가 왜소화되거나 불명확해졌으며, 4월 18일 점거농성 투쟁에서는 돌발적 행동이 전체 흐름을 좌우하는 문제를 낳았다. 이는 실질적인 전조직의 사업이 아니라 노동보건부의 사업으로 진행되어왔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한 상황에서 사측, 공단, 언론, 경찰의 입체적 공세와 노동조합의 방관이 겹쳐지면서 나타난 문제이다.
4월 18일 투쟁을 앞두고 노동보건부초자 제대로 투쟁에 결합하지 못하고, 조직적 결합조차도 제고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전술논의조차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결국 대중적 성과는 쟁취하였지만 조직적으로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5) 탄압에 대한 대응기간 (4월말~5월초)

4월 18일 투쟁 이후 지역 보수언론의 집중포화, 근로복지공단의 고소고발, 경찰의 출두요구서 발송, 인터넷을 통한 사이버테러 등으로 심각한 탄압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에 맞서 각종 성명서 조직과 현장선전강화, 기자회견 등을 진행하였다.
여러 가지로 어수선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탄압에 대한 대응을 나름대로 해나가면서 투쟁의 정당성과 성과를 지켜내기는 하였지만, 투쟁구심과 조직체계를 복구해내지 못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속한 조직정비와 안정적인 이후 사업을 위해 고소고발자들의 자진출두문제로 조직내부 논란이 벌어졌다. 그 논란이 말끔히 정리되지 못한 가운데 5월 14일 고소고발자 전원이 자진출두 하여 3명이 구속수감 되었다.
논란이 말끔히 정리되지 못한 채 자진출두가 진행되었던 아쉬움이 있기는 하지만, 조직적 구심이 극히 약화된 상태에서 시급한 조직정비가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상황에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결과적으로 3명의 구속 이후 직무대행을 중심으로 이후 사업들이 안정화되고 대중적으로도 높은 관심을 이끌어냄으로 해서 이후 투쟁을 위한 조건을 잡아나갔다.

6) 구속 이후 임단투 기간 (5월~7월)

민투위는 조직체계를 다시 복구하고 선전사업과 현장조직 공동사업을 중심으로 이후 사업들이 진행되었다. 집행부가 집단요양투쟁을 선언하면서 다시 투쟁방식에 대한 논란이 발생하였고, 그에 대해 현장조직 간에도 입장 차이를 나타내면서 공개토론회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제대로 된 토론이 진행되지는 못하였지만 현장토론회가 진행되면서 문제의식이 좀 더 분명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당시 논쟁이 요양의 문제를 벋어나지 못함으로 해서 당시 진행되고 있던 임단투와 결합된 노동강도 저하투쟁을 현실화시켜내지 못하였다. 그리고 민투위도 독자적인 대중활동을 벌여내지 못한 채 노동조합 중심의 임단투 속에서 다시 비판적 입장을 제기하는 수준의 활동으로 회귀하여 버렸다.
결국, 2003년 근골격계투쟁은 대중적 문제의식의 확산이 노동강도 저하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라는 핵심으로 발전하지 못한 채 요양의 문제에서 머물러버렸다. 그리고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노사합동사업의 문제를 대중적으로 드러내고 돌파하면서 조합주의적 질서에 파열구를 냈지만, 다시 임단투를 거치면서 그 질서 속으로 갇혀버리고 말았다.




(*) 9대 집행부는 2001년 이상욱 집행부(민투위 소속)를 말한다. 그리고 근골격계 투쟁이 있었던 2003년의 10대 집행부는 이헌구 집행부(민노투 소속)를 말하며, 현재 11대 이상욱 집행부(민투위 소속)는 2003년 근골격계 투쟁이후 연말 임원선거에서 당선한다.

(**) 2003년 5월 ‘현대자동차 비정규직노동자투쟁위원회’가 공개적인 활동을 벌이면서 현대자동차에서의 비정규직 투쟁이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비투위는 얼마 후 ‘현대자동차비정규직노동조합’으로 전환한다.

(***) 노동강도 강화 저지와 현장투쟁 승리를 위한 전국노동자연대. 전국노동자연대는 근골격계 투쟁을 노동강도 투쟁으로 본격화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하에 노동조합, 현장조직, 정치조직, 노동보건단체, 개별 활동가 등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공투체였다. 당시 전국노동자연대의 투쟁을 통해 근골격계 투쟁이 전국에서 매우 공세적으로 진행되었고, 그 힘을 통해 금속연맹이 집단요양투쟁을 조직하는 등 조합주의적 질서를 뛰어넘는 모범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 2002년 10월 민투위는 정기총회를 통해 김태곤 의장을 중심으로 한 11기 민투위를 출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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