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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공화국에 성공하는 노동조합은 만들고 말겠다 - 삼성 SDI 해고자 송수근 씨

 


해마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끝이지 않는 울산에는 끝임 없이 해고자들이 생겨나고 있다. 최근 조직을 결성한 공무원노조 해고자들과 같이 새롭게 생겨난 해고자에서부터, 사측에 의해 해고된 지 10여 년이 지나서 어용노조에 의해 조합원 자격까지 박탈당한 현대중공업 해고자까지 다양한 사업장의 해고자들이 아직도 열심히 투쟁하고 있다.
해고자들의 힘겨움과 기막힌 사연들이 어느 하나 경중을 따지기 어렵기는 하지만, 삼성SDI에서 해고된 이후 쉼 없이 투쟁을 벌이고 있는 송수근 씨는 유난히 더 힘겨워 보이는 이유가 있다. 무노조경영의 신화인 초거대재벌 삼성을 상대로 한 외로운 투쟁, 울산이라고 하지만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언양에서의 투쟁, 사업장에서의 구속과 해고가 아니라 사업장에 쫓겨난 해고 이후 두 번이나 구속되어야 했던 투쟁 등이 유독스레 송수근 씨에게 눈을 돌리게 한다.

송수근 씨는 언양에서 나고 자라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합기도체육관에서 사범을 했다고 한다. 군대를 갔다온 후에 당시 삼성전관(현 삼성SDI)에서 사업을 확장하면서 대규모로 신입사원을 뽑던 87년 24살의 나이로 공장생활을 시작한다.

“삼성SDI의 거의 70%가 제 나이 또래입니다. 그때가 칼라시대가 열리면서 사업이 가장 확대될 때였습니다. 그 당시 이후 3년 정도 더 모집하고, 그 이후 10여 년 동안 정규직 모집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87년 당시를 보면 노동탄압이라기 보다는 인권탄압이 심했습니다. 머리가 귀를 덮으면 총무부장이 나와서 직접 머리를 깎고, 사내에서 남녀가 같이 앉아서 이야기만 해도 풍기문란이라면서 징계를 할 정도였어요. 그런 시기에 불만이 한 번 폭발해서 16일 동안 파업을 한 적이 있어요. 파업을 하면서 노동조합 요구가 있었는데, 회사에서는 이것을 무마시키기 위해서 임금을 22% 올려주고, 노동조합을 포기하는 대신 노사협의회를 만들어주고, 노사협의회 위원 60여 명을 전원 상근시켜주었습니다.”

노사협의회의 퇴색과정에 대한 얘기로 이어지자 송수근 씨는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회사가 다각도로 노사협의회를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금전, 일하지 않아도 되는 근무형태 운영 등을 제공했어요. 비공식적인 노사협의회에 대한 대우는 ‘국회의원도 부럽지 않다’고 얘기할 정도였어요.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그 누구도 타치하는 사람 없고, 일상적으로 자기가 생활하는데 쓰는 경비까지도 회사에 청구해서 처리했어요. 회사는 그것을 알면서도 묵인을 해주는 거죠. 노사협의회가 조용해야 사원들의 불만을 회사가 통제를 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장기적으로 봤을 때 그렇게 하는 게 회사에 득이 된다고 본거죠. 관리자들이 노골적으로 한 얘기가 ‘노동조합 만들어서 파업 하루 하는 것보다 노사협의회 위원들 몇 명이 아무리 먹어 제키는 것보다 낮다’는 거예요. 그런 풍토 속에서 노사협의회에서 제대로 일을 하려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회사의 금전적인 유혹에 휩쓸리다 보면 알게 모르게 빠지게 되요. 그러다보니까 현장에서는 ‘자기들 배만 채운다’는 불만이 너무 컸어요.”

할 말이 너무 많아서 그런지 한 번 입을 열기 시작한 송수근 씨는 좀처럼 말을 끊지 않았다. 내가 어렵게 중간에 말을 끊고는 어떤 계기로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93년 김학권 씨 해고에 맞선 자발적인 투쟁에 대해 자세히 얘기하기 시작했다.

“93년에 김학권 씨가 회사정책에 휘말려서 해고가 되었어요. 바닥 청소를 하기 위한 용도로 하이타이를 갖다 놨는데, 김학권 씨가 차를 세차하기 위해서 하이타이를 하나 가져나가다가 정문에서 경비에게 발견되었어요. 운전석 밑 조그마한 통에 하이타이 하나를 놓았는데, 경비들이 다른 데는 검사도 안하고 바로 찾아냈어요. 회사가 김학권을 해고시키기 위해서 계획적으로 그런 것이라고 봐요. 460원짜리 하이타이 하나 때문에 회사물품 밀반출로 회사가 자진퇴사하지 않으면 해고시키겠다고 그랬어요.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만약에 김학권을 해고시키면 이런 공정에서 일할 수 없다. 생산을 거부하고 김학권을 구제하기 위한 활동을 하겠다’ 그러면서 회사와의 마찰이 생겼어요. 그러면서 노사협의회 활동을 했던 사람이 ,저하고 둘도 없는 친구였는데, 회사에 격렬하게 항의했어요. 그러면서 생산이 급격히 떨어지니까 회사가 ‘전원 해고시키겠다’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김학권 씨 혼자서 10여 일을 버티다가 현장의 힘도 모자라고 그래서 사직서를 쓰고 회사를 떠나게 되었어요. 그 이후에 얼마쯤 지나서 당시 노사협의회 위원한테 생산차질에 대한 책임을 묻고 손배 처분을 하고, 우리하고 같이 계중 했던 사람들을 회사가 탄압하기 시작한거죠. 그러면서 그때 제가 회사가 탄압한 것에 대한 진상을 밝히기 위해 처음으로 노사협의회에 출마를 했는데 6표 차이로 떨어졌어요.”


▲ 해고자 동지이자 친구인 김학권 씨와 함께

93년 노사협의회 선거에서 회사의 노골적인 방해로 아쉽게 떨어진 이후 노사협의회에 대한 관심을 끊고 지내게 된다. 그러다 96년 자동화에 따른 고용문제가 발생하면서 다시 활동을 시작한다.

“96년에 자동화가 들어오면서 남자사원들이 고용이 불안해졌어요. 회사가 일방적으로 발령대기를 내고, 마음에 드는 사람들은 회사가 원하는 공정에 보내면서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회사 말을 듣게 하도록 만들었어요. 그 과정에서 우리하고 평소에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이 피해를 많이 보고 마음의 상처도 많이 받았어요. 그러면서 현장에서 불만들이 높아졌죠. 그를 통해 불안을 느끼게 된 사람들이 ‘이제는 노사도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우리를 보호할 수 있다’고 나를 적극적으로 추천해서 노사협의회 선거에 출마하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회사에서 나를 떨어트리기 위해 별별 일을 다 하는 거예요. 내가 쉽게 이동하지 못하도록 몇 년 동안 이용하던 출입문을 막고, 여사원 불러서 나를 안찍는다고 할 때까지 집에 안보내주는 등 아주 노골적으로 그랬어요. 그래서 내가 조회시간에 ‘지금까지 선거에 개입해왔던 거 아는데, 이제부터는 그러지마라. 그런 사람은 나하고 같이 일을 하기 싫어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겠다’ 그랬어요. 그 이후에 계속 선거에 개입했던 직장은 내가 당선되자마자 자기 스스로가 직장 자리 그만두고 물러났습니다. 그렇게 해서 96년부터 98년까지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노사협의회 위원에 당선이 되었어요.”

이 시기가 송수근 씨가 현장에서 활동하면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참 많은 얘기를 쉼 없이 쏟아내다가, 98년 구조조정과 그에 맞선 투쟁에서 해고되는 과정으로 얘기가 이어졌다.

“IMF가 찾아오니까 회사가 일방적으로 97년 연말 보너스를 삭감하고, 이후에 복리후생비를 삭감하고, 희망퇴직을 받는다고 면담을 하면서 거의 강제퇴직 수준으로 사람들이 쫓겨나고, 소사장제를 도입한다면서 한 공정의 사람들이 전원퇴사하여 그대로 비정규직으로 전화하게 되었어요. 당시에 1700여 억 원의 흑자를 낸 회사가 현장에서는 망할 것처럼 홍보하면서 구조조정을 한 거예요. 그때부터 분사를 하기 시작한 게 57개 공정 2~3천 명 정도가 비정규직이 되요.
회사가 ‘노사협의회는 경영권에 참여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고, 그래서 내가 ‘현대자동차는 지금 구조조정 문제 때문에 저렇게 시끄러운데, 우리는 노사협의회이기 때문에 경영권에 참여할 수 없다면 우리도 노동조합 만들어서 당당하게 하겠다’ 그랬거든요. 그러면서 본사에 항의방문을 가게 되었는데, 그게 해고 사유가 되었어요. 그때 9명이 갔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월차 처리 됐고, 오직 저만 무단결근으로 처리해서 해고사유로 삼았어요.
징계위원회 개최 한 후에 회사가 결정을 내리지 않고, 그날 밤에 공장장에게서 직접 전화가 왔는데 ‘내가 니를 해고시킬 이유가 뭐있느냐? 노사협의회 안하면 안되겠느냐?’라는 거예요. 결국 회사는 현장과 저의 관계를 때어놓기 위한 목적이었지, 해고가 목적이 아닌 것 같았어요. 그런데 내가 해고되지 않기 위해서 그런 조건을 받아들이는 것은 나를 위해 함께 해주었던 많은 사람들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했어요.”



송수근 씨는 93년 박미경 씨와 결혼을 하려고 했다가 김학권 씨 해고에 맞선 투쟁을 하면서 결혼을 미루고, 94년에야 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애를 낳고 애가 한 참 재롱을 피울 때에 해고가 된다.
해고 이후의 투쟁은 정말 목숨을 걸고 해야 하는 힘겨움의 연속이었다. 해고 초기 과정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듯한 위협과 협박과 회유의 연속이었다.

“해고 당일도 회사가 여관방으로 봉투를 들고 왔어요. 거기서 저는 ‘어떤 것이든 나는 당당하게 회사 안에서 받겠다. 회사 밖에서 받을 이유가 없다’고 거부했어요. 그리고 회사로 출근하려고 가니까 럭비선수들 하고 경찰해서 100명이 정문에서 막더라고요. 그날 4시간 가까이 출입을 요구하면서 실랑이를 벌였지만 결국 출입을 못했어요. 그 이후에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라서 한 달 가까이 계속 출입만 요구했어요.
이렇게 해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그전에 안면이 있었던 경주 만도기계 사람을 찾아갔더니 민주노총을 소개해줘서 민주노총 사람들과 만나게 되었어요. 그때부터 지방노동위윈회에 구제신청도 넣고, 피켓도 만들고, 조끼에 글자도 넣고 하면서 1인 시위를 시작했죠.
그러다가 민주노총이랑 같이 첫 집회를 잡으니까 회사에서 친구들, 고향선배들, 회사에 물건을 납품하는 업체사장들을 동원해서 ‘회사가 대화를 원하는데 회사를 한 번 만나보자’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마지못해 언양 고기집에 갔더니 회사 관리이사가 나왔더라고요. 저는 복직을 요구했지만 관리이사는 안된다고 그러기에 ‘그럼 얘기 끝났다’면서 나오려니까 선배들이 근처에 가서 소주 한 잔 하자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소주 한 잔 하자고 차를 탔는데, 차를 타니까 문이 잠기면서 막바로 고속도로로 올려버리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이건 납치다’그러면서 차에서 난리가 났어요. 그렇게 난리를 치니까 경주에 내렸어요. 경주에 내리니까 또 다른 차에서 다른 선배들이 와서 소주 한 잔만 먹자고 그러더라고요. 안갈라고 하다가 하도 그러기에 다음부터 이렇게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고 술 한 잔 먹으러 들어갔어요. 그런데 거기서 술 석 잔을 먹고 정신을 잃었어요.
정신을 차려보니까 어떤 콘도인데, 옆에는 아가씨가 있고 밖에는 누가 지키고 있었어요. 나가니까 몇 팀들이 지키면서 못 가게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사람들 중에 한 사람에게 집에 걱정하니까 전화 한 통화만 하자고 해서 핸드폰 빌려서 집에 전화를 했죠. 집에 전화해서 ‘이 새기들 날 납치했다’ 그러니까 112에 신고했어요.
그때 감포, 영덕 이쪽까지 잡혀가면서 ‘회사하고 합의 봐라. 안 그러면 쥐도 새로 모르게 죽는 수가 있다’면서 협박을 엄청 받았어요. 그때 불안도 했지만 마음을 독하게 먹자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 좋다. 나를 죽여라. 만약 죽이지 못하면 내가 나중에 가만 안놔두겠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협력업체 사장들이 ‘돈이 얼마 필요하냐?’고 그러더라고요. 그러는 와중에 신고가 들어가고 그래서 24시간만에 풀려났어요.”

그 이후에도 회유와 협박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노총의 지원 속에 시작한 투쟁도 시간이 가면서 점점 사람이 줄어들면서 힘을 잃어가면서 혼자만의 외로운 싸움으로 이어졌다. 그런 가운데 99년 업무방해와 명예훼손 등으로 구속된 이후 집행유예로 나왔지만, 이후 계속 투쟁을 벌이자 선전문의 내용을 문제 삼아 다시 2001년에 명예훼손으로 실형을 받아 1년 8개월을 복역하게 된다. 그러나 그 모진 과정에서도 회사의 감시와 탄압은 그치지 않았다.

“그 전까지만 해도 회사에서 집 앞에 와서 지키고 동태파악하고 그랬는데, 이게 사회적으로 문제되니까 방식을 바꾸더라고요. 그래서 2003년 만기출소 하고 나온 이후부터는 휴대폰을 통한 위치추적을 시작했어요. 2003년 8월부터 위치추적이 시작되어서 700여 건 정도 위치추적 당했어요. 중요한 회의나 행사가 있는 날은 더 집중적으로 위치추적을 했더라고요.”

한참을 초거대재벌 삼성에 맞서 싸운 과정에 대한 얘기를 듣다가 시간도 많이 지났고, 서서히 정리해야 되겠다 싶어서 ‘생계와 건강상의 어려움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가장 큰 고민인데, 저 혼자만 몸이 나빠지는 게 아니라 가족들도 감시 미행 등으로 고통을 많이 받아요. 집사람도 정신병원에 갔다 올 정도로...” (송수근 씨는 말을 더 잊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 부인 박미경 씨와 비디오 가게를 보고 있다

괜한 질문을 했다는 미안함과 해고자 생활 8년의 고통을 동시에 느끼면서 애써 다른 질문을 던졌다. 최근 삼성SDI 안에서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는 것에 대해 얘기해달라고 했더니 울먹이는 목소리를 억누르면서 다시 얘기를 이어갔다.

“작년에 저를 돕기 위한 일일호프도 하면서 화사의 많은 탄압도 받았지만, 현장에서 자발적으로 나서서 이런 저런 움직임을 하고 있는 것은 큰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이 작은 인원이지만 저희 가족들이 버틸 수 있는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2003년 노사협의회 선거에 대한 회사의 개입해 항의하는 분신사건이 터지고 그러면서 회사가 부담을 가졌는지 이번 노사협의회 선거에는 회사의 개입형태가 좀 바뀌었어요. 윗선에서 노골적인 지시에 의해 움직이던 방식에서 이제는 윗선의 지시가 아니라 일선 관리자들이 알아서 움직이는 형식으로 바뀌었어요.
저는 이번 노사협의회 선거가 당선보다는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의식을 끌어올리고 변화의 바램을 만들어내기 위한 계기로 생각했어요. 그런 가운데 6명이 출마해서 3명이 당선된 것은 예전에는 불가능 했던 일이예요. 선전물을 우편으로 발송하기도 하고, 문자메시지를 보내기도 하면서 현장에서 여러 문제들을 현장에 알려냈다는 점에서 상당부분 우리의 목적은 달성하지 않았나 봐요.
이런 것들이 통해서 현장에서 함께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하는 노동조합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라고 봅니다. 과거처럼 몇몇 활동가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어서 회사 탄압에 깨지고 하는 과정은 반복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이렇게 현장활동가들이 끝임 없이 현장에서 활동한다면 성공하는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언양에서 허름한 비디오가게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송수근 씨는 요즘 목 디스크가 매우 심각한 상황이라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천 만 원에 이르는 수술비를 마련하기가 만만치 않은 것이 가장 큰 고민이다.
그러면서도 송수근 씨는 삼성공화국에 성공하는 노동조합을 반드시 만들고 말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고 매일 저녁 5시가 되면 삼성SDI 정문 앞으로 1인 시위를 나간다. 지난 8년 동안 1인 시위를 쉼 없이 계속되고 있다. 송수근 씨가 구속되어 있을 때는 부인 박미경 씨가 1인 시위를 계속 이어서 해왔다. 또 오늘도 송수근 씨 홈페이지(http://www.antisdi.com)에는 사람들이 끝임 없이 찾아오고 있다. 그 누구도 가능하리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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