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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치의 턱

2인치의 턱

이희연(장애여성 공감)


하루는 하루가 아니야
어느 날이었다. 도무지 일도 안 되고 기온은 쑥쑥 올라가고 의욕도 안 생겼다. 시원한 극장에 가서 영화나 볼까? 전동휠체어를 타는 동생을 꼬셨다.“영화나 보러 갈래?”“좋아요, 언니” 이렇게 우리의 아주 가벼운 외출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게 길고 긴 하루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누가 알았을까?

지하철을 탔다. 다행히 엘리베이터가 고쳐져 있었다. 아침에 보니 점검중이라고 붙여 놓아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엘리베이터가 없으면 당장 출근길이 막막한 장애 여성들이 있다는 것을 지하철 관계자는 알기나 할까? 모르는 이들은 지하철도 공짜고 엘리베이터 설치도 많아져서 좋은 세상이 되었다고 한다.‘슬슬 나들이도 다닌다’면서. 장애인 그것도 장애 여성들이 일을 한다는 것을 생각지도 못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를 쉽게 한다. 하지만 장애 여성들이 이 사회 누구보다도 치열한 삶을 산다는 걸 알까? 지하철을 탄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을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을 맞받아치면서 생각해 본다.

이야기는 끝이 없다. 기획안 얘기, 사업 얘기, 사람 이야기, 이런 이야기들을 함께 하고 있다 보니 목적지에 도착했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아무 소식이 없다. 옆에 동생을 보니 ‘짜증 반 불안 반’이다. 2분 정도 기다려도 소식이 없다. 이럴 때 역무실로 뛰어가는 것은 나의 일. 나는 보행이 가능한 장애 여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무원들은 언어장애가 있는 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 결국 소리 한번 질렀더니 그때서야 뛰어 나온다. 장애 여성이라 무시하는 건가? 이럴 때마다 사회가 원망스럽다.
결국 엘리베이터는 고장난 것이고, 우리는 다시 지하철을 타고 한 정거장 뒤로 가서 걸어야 했다. 뜨거운 날 한 정거장은 너무나 멀었다. 게다가 나는 허리가 약해서 오래 걸으면 통증도 있다. 옆의 동생 얼굴엔 피곤함이 가득하다. 전동휠체어도 역시 2인치 정도의 턱은 넘기 어렵기 때문에 조금만 턱이 있어도 그 충격을 온몸에 받는다. 피곤함도 더하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 더 피곤한 것은 전동휠체어를 붙잡고 밀어준다고 나서는 사람, 얼마냐고 묻는 사람, 전동휠체어에 맘대로 손을 대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장애 남성보다 장애 여성들한테 더 많이 달라붙는다. 장애 여성은 반말을 해도 좋고 함부로 해도 좋은 만년 어린아이로 보이나 보다. 일 때문에 만난 공무원들이나 여러 사람들이 내가 어떤 일의 책임자라고 하면 다시 한 번 신기하다는 듯 본다. 그럴 때마다‘난 그리 어린 소녀가 아닙니다’하고 외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어쨌든 극장엔 도착했다. 예매표를 찾으려고 하는데 직원인 듯한 아저씨가 다가온다. 그리고 대뜸“어, 무슨 영화 보러 왔어? 예매했어? 잘 했네”하고 말을 건다. 늘 당하는 일이지만 상당히 불쾌했다. 우리는 둘 다 그 직원을 무시하며 발권기를 통해 표를 끊으려 했다. 그런데 그 직원은 계속 둘레를 맴돌며 뭔가 미심쩍은 듯이 우리를 보았고, 끝내 내 입에서는“아저씨, 그냥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 다른 일 보세요!”하고 큰소리가 나왔다. 그때서야 슬금슬금 물러나기는 했지만 입장하는 내내 따라 붙어“휠체어 탔으니 뒤에 앉아야겠네. 언니는 표 좀 줘 봐. 자리 알려줄게”등등의 너무나 당연한 듯 반말에 과잉 친절을 베풀어 오히려 꺼려지는 마음마저 들었다. 극장뿐만 아니라 쇼핑을 해도 그렇고, 음식점을 가도 이런 일은 번번이 일어난다. 결국 장애 여성은 보호 받아야 할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건지…….

우여곡절 끝에 영화를 본 우리는 너무 지쳐 밥을 먹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전동휠체어가 들어갈 만한 곳은 보이지 않는다. 결국 밥은 간단히 샌드위치로 때우고 또 한 번 지하철 전쟁을 겪으며 각자의 집으로 향해야 했다. 서울 시내에 턱이 없는 건물이 과연 얼마나 될지 정말 궁금하다. 하다못해 화장실에도 턱이 있으면 휠체어를 탄 사람은 화장실에도 갈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영화 한 편 본 평범한 하루이다. 결코 우리 사회에서 낯선 문화가 아니다. 30대 직장 여성들이 퇴근해서 친구와 영화 한 편 보고 저녁을 먹고 집에 들어오는 것, 그 평범한 하루가 장애 여성들에게는 너무나 어렵다는 것이다. 장애 여성에게 일상은 투쟁이다. 투쟁 속에서 하루는 그냥 평범할 수 없는 하루인 것이다.

장애 여성의 삶도 다양할 권리가 있다
앞에서도 잠시 이야기했지만 난 장애 여성이다. 보행이 가능하지만, 언어장애가 있고 높은 계단은 질색이다. 그래도 웬만한 일은 스스로 할 수 있지만 허리가 부쩍 안 좋아지면서 힘이 점점 약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는 장애 여성이다. 학교를 다니고 간간히 돈을 벌고 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이 사회에서 장애 여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조금 더 알게 된 평범한 장애 여성이다. 그러나 여전히 장애 여성은 평범한 삶을 살 수 없다. 남들 다하는, 일하고 공부하고 사람을 만나고 하는 과정들이 장애 여성들에겐 너무나 어렵다. 왜 그래야만 할까?

사람들은 장애 여성들이 일을 한다고 하면, 흔히 대한항공의 포스터나 모 통신회사의 광고를 떠올린다. 단정한 머리 모양에 얼굴엔 미소를 띠고 한 손으로 전화를 들고 있는 휠체어 장애 여성. 아니면 휠체어를 타고 자신 있게 일터에서 웃고 있는 장애 여성. 하지만 그 밖에는 어떻게 살아갈까 생각하지 못한다. 장애 여성이 바로 곁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장애 여성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전혀 관심 없다.


학교 시설 때문에 배우지 못하고, 일하고 싶어도 이동이 자유롭지 못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있어도 사회의 차가운 시선 앞에 좌절하고 있는 장애 여성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생각할 수 있을까? 그만큼 우리는 ‘있어도 없는, 있긴 있지만 안 보이는’위치에 놓여 있다. 그러니까 앞의 일처럼 지독한 반말에 지독한 시선들을 보내는 것이다. 자신들과 다르게 걷고, 자신들과 다르게 이동하고, 말하는 것이 이상한 것일까?

내가 몸담고 있는 《장애여성 공감》은 이런‘정상성’에 반대하고 있다. 정상의 기준이란 사람들을 통제한다. 개인의 다양성이 무시되는 이데올로기이다. 그래서 그 기준에 조금이라도 벗어난 사람들은 함부로 대하더라도 묵인된다. 장애를 가진 여성은 남성 중심적인 문화를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장애 여성이 살아가는 곳곳에 차별과 억압이 존재한다. 이런 삶은 장애 여성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
그러나 장애 여성에게는 다양한 삶을 꾸릴 능력도 있고 권리도 있다. 능력대로 일할 수 있는 권리도 있고, 다양하게 가족을 구성하며,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권리가 있다. 그러니 장애 여성을 알고 싶고 돕고 싶으신 분들이 있다면, 제발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2인치의 턱부터 없애시길!

- 작은 책 2005년 9월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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