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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함 속의 결단력

 


나는 가급적이면 간부들보다는 조합원들을 중심으로 인터뷰를 하려고 해왔다. 그러나 이번에 노동조합 위원장과 얘기를 나눴다. 인터뷰라는 명목으로 그의 얘기를 듣고 싶었던 것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조합 위원장이라는 자리는 엄청난 중압감을 가져야 하는 자리이다. 그러나 박현제 위원장은 전혀 그런 중압감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또 그와 얘기를 나누다보면 성실한 조합원 정도로 느껴지지 위원장으로 느껴지는 점은 많지 않다. 그런 매력이 사람들을 끌리게 한다.

박현제 위원장은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찍 군입대를 했다. 제대 후 공부를 할 것인지 돈을 벌 것인지 고민을 하다가 당장 살아가야 하는 문제가 있어서 영세사업장에 취직을 했다. 그래도 공부에 대한 욕심은 있어서 자동차 정비기능상 자격증이라는 자격증은 거의 다 땄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생계문제에 대해 집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고자 했던 박현제 위원장은 직장을 그만두고 직접 장사를 벌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장사수완이 좋아서 당시에는 돈을 좀 만졌다고 한다. 중간에 울산에 있는 삼촌을 도와주러 와서 일을 배우다가 다시 부산으로 돌아가기도 하면서 부지런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한다.

99년 결혼을 하고 나서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가 유통 쪽에 아는 형이 있어서 유통에 대한 일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어느 정도 능력도 인정받았다. 하지만 가게를 열고 직접 일을 벌일만한 형편이 되지 않아서 유통 일은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그때 일자리를 찾은 것이 현대자동차 하청업체였다. 2003년의 일이다.

처음에는 모비스 하청업체에 들어갔지만 일이 너무 힘들고 노동조건이 좋지 않아서 금방 그만두고, 승용1공장 사내하청업체인 성화산업에 들어가게 됐다.
성격이 좋아서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고, 관리자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사내하청 업체는 시급이 제대로 오르지도 않고, 여러 가지 노동조건에서도 들쑥날쑥하기가 일쑤였다. 그런 점들에 대해 불만은 있었지만 나서는 사람들이 없어서 그냥 속으로 삭이고 지나가곤 했다.
2003년은 노동조합의 전신인 비투위(현대자동차 비정규직 투쟁위원회)가 공개적인 활동을 하면서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운동이 매우 활발해지는 때였지만 관심이 많지는 않았다. 그때는 자신과는 크게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고 1년여 지난 2004년 연말쯤 성화산업에서 먼저 노조에 가입한 동료의 권유로 노조에 가입하게 된다. 그리고 막바로 2005년 1월 투쟁이 벌어지게 됐다.
5공장 대체인력 투입을 저지하면서 전공장 투쟁으로 급속히 확산된 1월 투쟁 과정에서 당시 1공장 대의원대표였던 최병승 현 사무국장을 만나게 되면서 많은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투쟁 과정에서 최병승 대표가 1공장 원·하청 연석회의 성원으로 참여할 것을 강하게 권유하면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투쟁의 중심에 서게 됐다.

1월 투쟁 이후 조직력이 붕괴되기 시작한 노조는 이후 집단조직화를 거치면서 다시 활력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노조 내에서 이후 투쟁방향과 조직체계 정비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조합원이 확대된 것에 맞춰 대의원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이 난다. 대의원선거에 나서서 대의원이 되자 사업부 회의에서 대의원대표라는 부담스러운 자리까지 맡게 된다.

1공장 대의원대표를 맡고 나서 바로 닥쳐온 것이 8월 투쟁이었다. 파업을 목표로 해서 진행된 8월 투쟁은 폭풍이 몰아치는 시기였다.

“1월 투쟁 이후 조합원들에게 경고장이 날아가면서 조직이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그래도 우리 업체 조합원들은 20명 이상이 계속 모였다. 8월 투쟁에서도 우리 업체 조합원들이 징계를 많이 당했지만 계속 뭉쳐서 싸웠다. 우리는 후생복지나 근무조건 등 현장의 작은 문제들을 갖고 계속 싸웠고, 그 속에서 조금씩 해결되는 것을 보면서 자신감이 생겼다. 노동조합 활동한지 얼마 되지 않는 내가 1월 투쟁과 8월 투쟁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현장에 그런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총파업에 들어서기 직전에는 고민이 매우 많았다. 당시 집행부는 파업에 들어가야 한다는 의지는 매우 강했다. 하지만 정규직노조와의 관계는 매우 악화돼 있었고, 현장동력은 심각할 정도로 무너져 있었다. 1공장, 2공장, 3공장이 그나마 조직력을 갖고 있었지만, 2공장과 3공장은 파업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1공장 동력만으로도 파업에 들어가야 하는 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1공장 동력마저 무너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활동가들이 보기에는 중대한 판단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고민이 많지 않았다. 노동조합 결정이었기 때문에 가야한다고 생각했는데, 2공장과 3공장 동지들과 같이 가려고 노력했다. 나중에 2공장과 3공장이 어렵다고 하길래 1공장은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그 당시에는 1공장 조합원에 대한 판단보다는 노동조합의 존폐가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예상대로 파업투쟁은 위력적으로 이뤄지지 못했고, 많은 이들이 징계를 당하게 됐다. 그리고 류기혁 열사의 자결과 철탑농성 투쟁이 이어졌고, 정규직노조의 임단협 타결 이후 투쟁전선을 급속히 붕괴됐다.
노조 내부에서도 투쟁과정에 대한 평가와 이후 방향에 대해서 격렬한 논란이 일었고, 결국 1기 집행부가 사퇴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2기 임원선거를 앞두고 강하게 위원장 출마권유를 받게 됐다.

“노동조합을 책임져야 하는 자리에 경험이 많지 않은 내가 있어야 하는 것에 부담이 많았다. 1공장 동지들도 구속이나 해고에 대한 우려 때문에 반대가 많았다. 그래서 갈팡질팡 했다.
2기 집행부는 뒤처리 하면서 욕먹어야 하는 집행부였다. 누군가 지금 이 상황을 책임져야 한다면서 위원장으로 출마하라는 권유가 강했다. 솔직히 내가 자발적으로 결정한 측면보다는 타의에 의해 떠밀린 측면이 강했다.“



위원장에 당선되자마자 현대세신 투쟁에 집중했고, 이어서 무너진 조직력 속에서 최소한의 집행체계를 만들어내는 것에 매달렸다. 그런 속에서 독자임단투로 2006년 투쟁기조를 결정하고 다양한 사업들이 정신없이 이어졌다. 노동조합 내부에서도 크고 작은 일들이 끝이지 않았다. 그렇게 8개월이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조직력은 크게 강화돼지 못했고, 투쟁전망은 잘 보이지 않는다.

“1공장 대표할 때도 사람들이 추진력이 부족하다는 얘기를 많이 했다. 나는 동지들의 얘기를 많이 들으려고 노력했다. 지금도 집행간부들이 많이 답답해하지만 나는 사람들의 의견을 많이 듣고 그 결정에 의해 밀어붙이려고 한다. 내가 결정하고 내가 밀어붙이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 무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결정해야 될 때는 결정하겠지만, 다른 사람들의 얘기는 많이 들으려 한다.”

점점 투쟁국면이 상승하고 있지만 내·외부의 조건이 좋은 것은 아니다. 당장 3공장 m/h합의에 따른 대규모 정리해고에 대한 싸움도 고민이 많다.

“요즘 어떻게 할거냐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묻는다.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붙어야 한다고 대답한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한다. 싸움을 피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제대로 싸우고 싶다. 잔잔하게 여러 번 싸우기 보다는 한 번을 싸우더라도 제대로 싸우고 싶다. 그렇게만 생각하고 싶다. 깊게 생각한다고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냥 동지들과 함께 싸우는 생각 밖에 없다.”

박현제 위원장은 전임이 인정되지 않는 상황에서 노조 일정이 많아지자 휴직을 냈다. 생계문제가 걱정되기는 하지만 일을 하면서 각종 교섭과 투쟁에 달라붙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휴직이 빌미가 돼서 징계위에 회부되기도 했다.

“노조 활동하기 전에는 나름대로 애를 낳고 집을 사기 위해서 잔업과 특근을 열심히 했다. 그리고 나름대로 이후 삶에 대한 계획도 세웠었다. 지금 노조 위원장을 하다보니까 그런 점에 대해서 편하게 생각한다. 내가 위원장 하고 있는 동안은 돈 버는 것에 연연하고 싶지 않다.”

상황이 어렵고 힘들 때일수록 투쟁을 회피하고자 하는 지도자들은 생각이 복잡해지고 상황에 대한 이유가 많아진다. 하지만 투쟁하려는 지도자들은 아주 단순하다. 박현제 위원장에게서 새삼스럽게 그런 점을 확인했다. 그런 위원장 앞에서 ‘어떻게 할거냐?’고 질문하는 내가 평론가처럼 느껴져서 얼굴이 뜨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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