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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꿈꾸는 아름다운 세상, 우리는 실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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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팔병(넝마주이)





<윤팔병의 가족사>

아버지 윤상인, 어머니 송남순 사이에 9명의 아들이 있었다. 함평군 학교면 사거리 율농이 고향인데, 아버지는 일제시대 때 서울로 올라와 포목상을 크게 하였다. 그래서 아들들은 모두 서울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해방 후 아들들의 전력 때문에 갖은 고초를 당하다 1969년도에 객사하였다.


윤일병 1921년생 통일전쟁 중 서울역 위원장으로 근무하다 부인과 아들 건, 딸 순이를 서울 동암동 자택에 남겨두고 9월 후퇴할 때 월북하였다. (윤일병 씨 부인은 모진 고문 속에 고통을 당하였고, 혼자 남겨진 딸 순이는 추운 날씨에 동암동 집에서 굶어 얼어죽었다. 부인은 무안에 정착하여 아들을 키웠고, 아들 건이는 광주 근처에서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윤이병 1924년생 이태원 초등학교 재직 중 약혼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선생으로 머물지 않고 의용군으로 해방전쟁에 참여하였다.

윤삼병 1926년생 해방전쟁 중 서울에서 전쟁수행 활동중 행방불명되었다.

윤우병 1929년생 함평군 학교면 사거리 율농에서 국군이 밖으로 나오라 하여 학살하였다.(양민학살) 인민군 사살하였다는 전과기록용으로.

윤오병 1932년생 해방전쟁 때 경동중학교 2학년으로 있다가 해방전쟁에 자원 입대하였다.

윤두병 1935년생 중학교 1학년생으로 휴학하여 집에 있다가 해방전쟁에 자원 입대하였다.

윤인병 1937년생 13살 나이에 모 기관 지하실에 끌려가 형님들 숨어있는 곳을 말하라고, 15일간 모진 고문으로 고막이 터지고 왼쪽 발을 못 쓰게 되었다. 그 후 정신이상이 생겨 자살하였다.

윤팔병 1940년생 어린 나이부터 거지생활로 시작하여 지급도 쓰레기를 뒤져 먹고살고 있으며, 1982년부터 함께 사는 세상 나눔과 섬김의 세상을 만들자고 넝마공동체를 만들어 활동하며, 대치동 다리 밑에서, 포이동 시유지 1,000평에서 나간다 못나간다 시청과 싸우고 있다. 결혼도 못하고 몽달귀신이 될 뻔 하다가 하해와 같은 은덕으로 이옥순과 결혼하여 큰 아들 사비(巳飛)와 작은 아들 하민(下民)이를 두고 있다.

윤구병 1943년생 상머슴이 꿈이었던 구병이는 외도를 하여 교수가 되었다가, 자본주의 교육의 역기능에 견디지 못하고 전북 변산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제수씨 왈 '똥장군 메고 똥폼 잡고 있다'고 한다.


<윤팔병의 개인사>

1940년 함평군 학교면 사거리 율동에서 태어았다. 국민학교 3학년 중퇴가 학력의 전부이고, 간판을 보면서 한문을 익혔다. 13살 때 집을 나와 구두닦이, 신문팔이, 여자소개, 제비족 뒷바라지..... 안 해본 것이 없을 정도. 부산에서 유조선 탱크 청소하는 일도 하였다. 69-70년도에 부산에서 합숙소 생활을 2년 동안 하면서, 배에서 짐 싣고 내리는 작업을 하였다.

그후 동생이 서울에 있어서 서울로 왔다. 74년도 해태에 지게질 일꾼으로 취직하였다. 밥도 안주고 일을 시키는데 항의하여 매일 전국으로 나가는 하루 일을 못나가게 하여(파업주도?) 3개월만에 쫓겨났다. 부산에서 사귀었던 여자가 서울까지 쫓아와서 75년도에 결혼하였다. 결혼하고 동생 집에 기식하다가 1977년부터 헌 책방을 시작하였다.

이후 80년대 초에 넝마들을 통해 양아치 왕초들을 자주 만나고 함께 살아보려는 꿈을 키워갔다. 82년부터 기초작업을 하여 84년도에 넝마공동체를 구성하였다. 84년(삼성동 아파트 사이에)과 85년(대치동 다리밑)에 작업장을 하나씩 만들어 여러 사람이 추렁작업을 통해 재활용품들을 수집하여 판매하였다. 처음 2년 동안은 '넝마공동체'라는 소식지를 5호까지 만들어 냈다. 추렁, 리어카, 경운기 등을 가지고 2-3명이 조를 이루어 작업을 하였다. 작업은 대개 새벽 3-4시에 시작하여 아침 8-9시에 끝낸다.

90년대 들어서도 계속 작업장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점차 트럭을 가지고 작업하는 방식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2명이 1조가 되어 골목길이나 (중간)쓰레기 하치장 등 현장에서 폐품을 수집한다. 그리고 아파트 단지에서는 월 일정액을 주고 계약하여 분리수거된 것을 사들이기도 한다.

현재 대치동 다리 밑에는 대형 트럭 2대와 1톤 포터 5대, 승용차 2대가 있고, 포이동에 1톤짜리 포터가 10대 이상 가동되고 있다. 현재 12개의 콘테이너에 40여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부부도 3쌍이 있다. 이들은 따로 생활을 한다. 한 달에 두 번의 회의도 갖는다.


<합숙소 생활>

노점 장사 20년 가까운 나날 속에 단속경찰관들에게 쫓기며 힘겹게 몇푼 벌어 상납, 벌금, 구류로 털어 넣기 일쑤였고, 시청 구청 경찰 소방 단속권한 가진 기관에 상납하기 바빴다. 노점장사들은 착취와 억압 속에 끽소리 못하고 오랜 고통으로 짓눌려 살아왔다.

거리의 생활 터전이나마 비바람 속에 삭풍을 온몸으로 감당하는 노점장사. 스스로 권리를 찾고 자유롭게 장사를 하자. 노점상인연합회 회칙과 취지 목적 서명 날인란을 만들고, 부산 충무동 육교 아래서부터 남포동 입구 황태자 제과점 앞까지 노점상인들은 단속과 갈취에 넌더리치며 모두 환영하며 취지와 목적에 공감하여, 노점상인 연합회가 결성되고 책임부서가 선출되고 회원 가입시키는 일을 끝냈다. 마음들은 들뜨고 기뻐하는 것도 잠시였다(1969-70년 부산에서).

상납하는 돈을 노점상들한테 갈취하여 각 기관에 적당히 상납하고 자기주머니를 채우던 전직 폭력배, 감옥에도 제집 드나들던 똘마니는 자신의 수입이 없어지자, 노점상인 연합회에 가입한 노점상인들에게 '장사 고만 둘 참이냐', '너희들은 관을 건드리는 것이다', '잠자는 사자 코털 뽑는 짓이지' 라고 협박과 회유 폭행하며, '탈퇴해라'. 노점상인들은 '죽어도 탈퇴 못하겠다'. 단속상납 지긋지긋 하다. 단결을 외쳤지만 그 이튿날 대대적인 단속과 벌금 물리고 구류 살리며 몇날 며칠 장사를 못하게 경찰관들이 지켰으니 견디지 못하고 자기들 권리를 포기해버렸다. 나와 적극적으로 일하였던 몇 사람들은 노점터에서 쫓겨나고 같은 동료들 힘없이 변신, 배신에 한동안 울분을 삭이느라 무척 힘들었다.

쫓겨난 몇 사람들은 허름한 대포집에서 술잔을 나누며 울분을 삭이는데, 누군가 이야기한다. '고통받는 노점장사들 대표로 우리 권리를 찾겠다고 노점상인연합회를 처음 결성했다는 것 그것에 위안을 삼읍시다.'

노점장사 상인들은 뿔뿔이 헤어지고 나는 오고 갈 곳도 직업도 없이 공사판이나 기웃거리고 떠돌이가 되었다. (그리고 나서 15년이 지난 후, 한양대 수배학생으로 쫓기면서 우리 헌 책방에 있던 김원표는 회칙 규약을 만들어 초대 회장 양연수와 더불어 서울에서 노점상인 연합회를 결성하고 많은 조직이 만들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김원표는 안기부원들에게 헌 책방에서 체포되어 국가보안법으로 고생하였다.)

부산은 겨울에는 따뜻하다지만 겨울은 역시 겨울이다. 한겨울에 난장꿀임하기가 힘들었다. 가마니 한 장 펴는 곳이 내 방이었지만 서리가 얼굴이며 머리카락에 수북히 쌓여도 견딜 수 있지만, 겨울비 영하의 날씨에는 난장꿀임도 힘들었다. 구걸하는 사람 귀뜸으로 대교동 시청 옆 제주도 가는 여객선 도라지, 아리랑호 터미널 앞에 가면 적은 돈으로도 겨울을 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리고 배타는 사람, 내리는 사람, 떠드는 사람, 북적북적 거렸다.

00합숙소. 붉은 벽돌 삼층건물이 반듯한 모양새로 버티고 있다. 건물 앞 계단에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햇살을 받고 있다. 봉지에서 꽁초를 꺼내 신문지에 말아 피우는 사람들, 남루한 옷차림에 힘들이 없어 보였다. 정문 현관문을 밀치고 들어가니 오고 갈곳 없는 거지가 얼어죽지 않으려고 찾아들고 있구나하는 표정들이었다.(1970년)

시청 사회과에서 파견 나온 직원들의 간단한 설명 속에 '이곳은 특수한 사람들이 200명 넘게 모여 사는 곳이니까 질서를 잘 지키고 모범된 합숙소 생활을 하기 바란다.' 주의를 듣고, 방 배치는 두 직원의 오고가는 표정 속에 1층 5호실로 되었다. 1층 5호실에 들어서니 사람들은 없고 썰렁한 한기 속에 나무침대가 여덟 개 놓여있는데, 개관한지 10년이 넘어 침대 위에 놓여있는 이불은 한결같이 더럽고 토한 자욱, 세계지도를 마음대로 그려낸 솜씨에 너덜너덜 떨어진 이불구멍 속에서 기어나온 이름 모를 털들이 날아다니는 것을 물끄러미 보면서 가마니 한 장 난장꿀임이 일류호텔이구나 생각하며 기분이 막막하였다. 짐이라 해봤자 세면도구, 수건, 여름 내의. 짐을 방에 두고 사무실에 재차 들어가 난로불에 몸을 녹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시간 정도 나누었다. 한 직원이 '윤씨, 2층 7호실로 방을 옮겨요.' 하길래, '됐습니다. 처음 정한대로 있지요.' '아무말 말고 옮기라는 데로 옮겨요. 나중에 사정을 알게 될 테이니까.'

2층 7호실을 찾아가 문을 열려고 하는 데 색다른 풍경이 나를 맞이한다. 손으로 미는 곳과 발길이 닿는 곳에 거북선 등의 창날처럼 큰 못들이 위 아래로 촘촘이 박혀 있다. 사람 사는 곳 문의 살벌한 모양새에 어리둥절해지며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방에 들어가 방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간단히 '서울에서 온 윤팔병이다. 길에서 난장꿀임하다 너무 추워 이곳에 왔다.' 각기 소개하는 인사 속에 용두산 공원 밑에 구두수선하는 육십이 넘은 재일 교포로 일본 부인과 아이들이 한국에 다니러 왔다가 자기만 일본에 못 돌아가게 되어 혼자 떨어져 가족을 그리며 구두고치는 것으로 생활하는 어씨로부터, 소주병에 참기름을 담아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 못함) 행상하는 육십이 넘은 김씨, 부두에서 밀수품 운반으로 사는 전직 깡패 40대 구룡이. 아홉 마리 용이 몸을 감고 있어 얻은 별명. 육교 위에서 앵벌이로 생활하는 종구, 종태 형제간. 노상에서 움직이는 뱀, 개구리 등 플라스틱으로 만든 장난감 파는 정씨. 오후 늦게 나가 밤늦게 술에 쩔어 들어오는 술주정이 심한 신씨. 7호실에 기거하는 사람들 이력이 이러하니 거지 합숙소에서 살고 있는 200명 넘는 사람들 환경도 크게 다를 것 없다.

방 사람들과 인사를 끝낸 후 아까부터 궁금한 것을 물어봤다. '왜놈이 처들어 오는 세상도 아닌 것 같은데 문에 박혀 있는 대못들은 무엇입니까?' 방에 있는 사람들의 대답하기를 싫어하는 침묵을 깨고 신문지를 잘라 담배가루를 말아 피우던 구두수선하는 어씨가 느긋하기 '좀 있으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걸세' 라고 입을 막아버린다.

아침부터 다른 환경에 접하다보니 신경쓰이는 일도 많았고 피곤하여 떨어진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이 들었다. 잠든 사이 뭔가 웅성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방 사람들이 인사하는 소리, 술에 약간 취한 걸걸한 목소리, 사내에게 아부 섞인 인사가 오고가는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덥고 있는 이불이 확 제껴지면서 주먹과 발길질이 얼굴 몸뚱이 가릴 것 없이 날아왔다.

옆자리에 있는 어씨가 말린다. '오늘 처음으로 들어왔는데 피곤하여 자고 있어'라고 열심히 나를 위해 변명해주고 있다. 그 사나이는 자기가 방에 들어왔는데도 일어나지 않고 있는 내가 괘씸죄에 해당된 것 같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니. 이런 경우를 두고 나온 말인 것 같다. 방 사람들이 무마시키고 진정시키며 '다음에는 조심하게. 저 분은 쌍둥이 형인데 부두에서 쌍둥이 형제라면 알아주는 형제야. 술도 대접하고 각별히 신경써 주게.' 쌍둥이 형은 의기양양해 가지고 목에다 힘있게 기부스하고 '자식 조심해 첫날이라 그만큼 봐 준거야'. 으름장을 놓더니 방을 나간다. 대교동 부두깡패들은 밀수운반이 주업이고 각 중소도시로 가는 여객선에 선주들을 위협 공갈쳐서 배에 올라가 물건을 팔고 산다. 이곳 생활 3년이 지나면 귀먹어리가 귀가 뚫리고 벙어리가 말을 할 수 있는 곳이라고 악명을 떨치는 악질들이 모여있는 곳. 악질 깡패놈들이 매일 합숙소로 몰려와 술 마시고 땡강 부리며 폭행, 갈취, 노름. 복도에서 아무데서나 오줌갈기고 토하고 별의별 짓 다한다. 심하게 맞고 파출소에 신고를 하여도 밀수 운반을 허용하면서 상납 받아 먹는 것이 일상적이라 피해자만 신고했다는 이유로 합숙소에서 살지 못하고 도망자 신세가 되어버린다. 합숙소에 들어오고 방문을 열 때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고 들어오니까 못을 거북선 등의 창처럼 박아 놓는 소극적인 반항을 하는 것이다.

나는 소장에게 면담을 신청하고 부두깡패들의 합숙소 내 출입을 금지시켜 달라고 강력히 요구하였다. 소장은 묵묵부답이었다. 직원이 화가 나 있는 나를 조용히 부르더니 다른 방에 가 이야기인즉 '파출소에 신고해도 소용없고 깡패들한테 맞아 이빨이 빠져 신고한 조씨는 반병신 되고 죽이려고 덤비니 야밤 도주해 버렸어. 세관원들이 가끔 바다 밑에 잠수부를 동원하여 물 속에 숨겨 논 밀수품을 뒤지다가 돌 달아맨 뼈만 남은 시체를 종종 본다는 거야. 그놈들 짓이지. 수틀리면 없애 버리는 거야.' 나는 어안이 벙벙하였다. 법치국가 대명천지에 어찌 이런 일이. 며칠이 지난 뒤 초저녁 때 쌍둥이 형이란 자가 우리 방에 들어왔다. 나를 힐끗 보더니 '야 정신 좀 차렸냐'. 거만함이 몸에 배어 눈깔을 깔고 나를 고양이가 쥐를 갖고 노는 꼴이었다.

방에 있는 사람들은 더 경을 치기 전에 내 등을 떠밀며 1층 식당(술과 음식을 파는 구내식당)에 가 대접하라고 눈짓으로 신호를 보낸다. 나는 두 말 않고 앞장섰다. 의기양양하게 따라오던 쌍둥이 형은 1층 계단으로 내려가지 않고 2층 계단으로 올라가는 나를 보고 잠시 멈칫하더니 힘차게 따라온다. 짜식 거지 주제에 별 생각을 다하면서 혼내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찼겠지. 나는 합숙소 3층 옥상으로 올라갔다. 넓고 시원한 공간이 어둠 컴컴해지고 있었다. 뒤따라 올라온 쌍둥이 형한테 손가락으로 부르면서 싸울 태세를 취했다. 자기 생각과 동떨어진 상황에 당황하면서도 거지 새끼 주물러 버리겠다는 식으로 맹렬히 돌진해온다. 뒷골목 시험을 거친 싸움꾼으로 둘째 가라면 서러웠던 어린 시절. 아마 복싱선수, 프로선수까지 거친 비쩍 말라 비틀어진 사내를, 그놈이 싸움꾼이었으면 비쩍 마른 사내에게서 품어 나오는 싸움꾼 냄새를 맡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일부러 천천히 온갖 폼을 잡아가면서 연습용 빽 치듯 두들겨 팼다.

빈 공간, 구멍이란 구멍 생긴 곳이면 사람 머리통이 들어차 숨죽여 보는 구경꾼들이 인산인해였다. 우리 거지 합숙소 신출내기와 쌍둥이 형이 옥상에서 한판 붙었다는 소문에 순식간에 구경꾼들이 많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하룻밤에 유명인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이튿날 아침이었다.

합숙소 전회장으로부터 각호실 반장들, 합숙소 생활하면서 폭행과 금품 갈취당한 사람들 모두 피해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흥분하였고 '부두 깡패들이 가만 있겠느냐'며 보복을 걱정하는 사람들까지 북적거렸다. 부두 깡패들은 조용하였다. 원래 소문이란 부풀려지기 마련이다. '서울의 유명한 깡패 유지광이 밑에 신임 받는 놈'이라느니 '프로 권투선수로 유명하다'느니.

합숙소 1층 5호실에 있는 악어눈물이라는 자는 부두에서 밀수품 운반책으로 경찰관들과 가까운 사이로 그 바닥에서는 알아주는 건달이다. 악어눈물이란 자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 처음 합숙소에 들어왔을 때 1층 5호실의 주인공이다. 악어눈물이라는 괴상한 별명을 가진 100㎏ 거구에다 술만 퍼마시면 개구신이다. 합숙소에는 별의별 망나니들이 전국에서 모여드는 곳이니 시청 사회과 소장·직원들이 관리하는데 골치깨나 썩히고 있었다.

목자(눈초리)가 불량하게 생겼거나 술을 많이 퍼마시는 초병이거나 말썽소지가 있어 보이는 자는 무조건 1층 5호실로 잠자리를 만들어준다.

악어눈물은 술을 밥보다 좋아한다. 술만 취하면 방에 있는 사람들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두들겨 패니, 한 놈도 견디어 내지 못하고 거름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쳐 버린다.

그래서 1층 5호실은 항상 빈방으로 남아 악어눈물 독방이나 다름 없다. '우리 방에 사람이 없는데 안 보내줘요. 혼자 있으니 심심해요'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곳에 나를 보내려고 했으니 죽일 놈들. 악어눈물은 필요악이다. 합숙소 사회과에서 기르는 불독이란 개의 별명을 붙였다.

유명무실해진 합숙소 조직개편을 서둘렀다. 각 호실 반장을 맡았던 사람들을 소집하고 처음 모임에 소집된 반장은 25명중 15명이 모였다. 인사가 끝나고 내가 합숙소 생활 중에 느낀 점을 이야기하였다.

'200명이 넘는 사람이 사는 곳에 화장실이 절대 부족하다. 대변 보는 곳이 5군데이고 소변 보는 데가 너무 협소하고, 우리 숙소에 사는 사람도 부족한데 외부사람들, 여객선 타고 내리는 사람들, 부두깡패들 변이 넘쳐나도 치우지 않고, 소장 직원들은 방관만 하고 있고 하물며 합숙소 사람들에게 화장실 청소를 시키고 있다.'

'합숙소 사람들은 화장실이 넘치고 더러워서 사용치 않고 복도에다 오줌똥 토해 버리고 있다. 그러므로 건물 전체가 악취가 진동하여 살 수 없을 정도로 되고 있다.'

'부두깡패들은 매일 와서 행패부리고 금품갈취하고 소장과 직원들과 함께 노름만 하고 있으니 당장 시정토록 해야 한다'. 각 호실 반장들은 모두 공감하고 '방법을 연구해보자'고 이구동성으로 나왔다. '그러면 소장에게 우리가 요구한 건의서를 보냅시다'. 반장회의에서 만장일치로 보내기로 하였다.

① 부두깡패를 합숙소 내에 출입 금지시킬 것, 폭행 금품갈취를 금지시키고, 소장 직원 등은 노름 깡패들과 어울리지 말 것.

② 구내식당 식사비가 1969년, 1970년도에 150원으로 비싸니 100원으로 인하해 줄 것.

③ 화장실에 외부사람 출입을 금지시키고 긴급히 예산 책정하여 똥수거를 제때 해줄 것. 합숙소 사람들에게 화장실 청소시키지 말 것.

우리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우리도 그에 준하는 자체 노력이 필요하다. 술을 마시고 싸우고 아무데서나 똥 오줌 토하고 합숙소 공동생활을 저해하는 사람은 대표 직권으로 즉시 퇴소시킬 것. 각방에 전하고 문서화 작업을 할 것. 소장에게 건의서를 전달하고, 소장 직원 합숙소 내 식구들 전체가 옥상에 모여 전체회의를 열었다. 소장과 우리 합숙소 사람들과 옥상회의 결과는 이렇다.

소장. '부두깡패들을 억제하기엔 자신이 무력하다. 깡패들을 출입 금지시켜 봤지만 실패했다. 다시 깡패들과 노름을 하지 않겠다. 합숙소 부두깡패들 폭행이나 금품갈취는 경찰에 신고하라. 구내식당 운영하는데 계속 적자를 보기 때문에 식사비를 인하하기 힘들다. 화장실 예산은 책정되지 않아 방법이 없다. 직원들도 이곳이 한직이라 합숙소사람들에게 화장실 청소시키는 것을 강력히 못하게 할 수 없다.'

이런 취지였다.

우리 요구에 부정적이었다.

소장과 직원들은 잠시 머무르고 다른 부서로 떠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서, 우리는 생활하는데 고통이 컸다.

두 번째 부두깡패들과 충돌은 의외로 빨리 왔다. 부두 깡패들은 스트레스 푸는 장소로, 도박장으로 합숙소를 이용하고 소장과 직원들은 200명 앞에 노름 안 하겠다는 말에 신경도 안 쓰고 또 그들과 매일 노름판을 벌리고 있었다. 밖에서 일 보고 합숙소에 들어오는데 부두에서 짐꾼으로 짐을 날라주고 근근히 생활하는 노씨가 그만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술을 좋아하는 것이 화근이었다.

소장을 위시하여 부두깡패들이 노름하는 자리에 술 한잔 하려고 개평 뜯으려다, 다방 아가씨를 발가벗겨 젖꼭지를 잡고 끌고 다니며 폭행하여 징역을 깨고 나온지 며칠 안된 구로독사란 별명을 가진 자에게 늘씬하게 두들겨 맞았다. 눈, 코, 입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닦아주는 동료들이 두털대는 소리, '왜, 그런데 가서 개평 뜯으려는 네 놈이 잘못이지.' 나는 꼭지가 돌아버렸다.

소장 이게 노름 않겠다고 해놓고서.

2층10호 문을 거칠게 밀어 부쳤다. 소장 직원을 위시하여 구경꾼들까지 끼여 15명. 열이 후끈거릴 만큼 방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있었다.

'야 구로독사 네놈이 그렇게 사람을 잘 치냐.' 정말 북어 패듯 두들겨 부셨다. 피가 튕기고 고함소리. '사람 죽인다' 악쓰는 소리. '말려 말려' 소리. 열십자로 뻗는다는 말이 이럴 때 나오는 말이구나. 성질로 망한 놈 뒤 생각 않고 일 저질러 버리는 것이 나였다. 구로독사는 병원으로 실려갔다. 경찰서에 신고해야 된다. 난장판에서 나와 내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어수선하였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걱정하였다.

'술 좋아하는 노씨가 화근'이라느니 '진단서 떼어서 고소하면 우리도 노씨 진단서 떼어서 맞고소하자'느니, '이 기회에 상습적으로 도박하는 소장직원들을 고발하자'느니.

저녁때 악어눈물이 소식을 가지고 왔다. '이가 흔들리고 눈가에 3바늘 꿰맸고 입천장을 4바늘 꿰맸다'고, '몇 주는 입원해야 할 것 같다'는 것이다. '땡전 한푼 없으니 몸으로 때우자'고 마음을 정한 뒤 사무실 문을 밀고 들어섰다. 사무실 분위기가 침통했다. 소장과 함께 노름했던 계장이 반갑게 맞이한다. 나는 소장을 노려보면서 '몸으로 땜질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했다. 계장은 참으라고 제지하면서 '구로독사 치료문제는 우리들이 알아서 하겠다'며 '노씨도 폭행당해 진단서 떼면 구로독사도 교도소에서 나온지 얼마 안돼 가지고 또 사고를 쳐 교도소에 가면 되겠느냐', 자기들 문제는 덮어두고 인심쓰듯 말한다. 그후 소장과 직원들 노력으로 무사히 끝났다.

그후 확연히 달라졌다. 합숙소 내부 뿐만 아니라 부두깡패들이 굉장히 조심스러워 졌다. 폭행갈취 부당한 학대가 줄어가고 있었다. 합숙소 내부의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해결해 나갔다. 악질이란 말을 들을 만큼 독하게 일을 처리하였다. 술 마시고 싸움 등 조그마한 잘못도 비켜가지 않고 퇴소시켰다. '너나 나나 불쌍한 놈들이 오죽 갈 곳 없으면 천대와 멸시, 사람취급도 못 받는 이런 곳까지 흘러왔겠느냐.'

그리고 부두깡패들 한테 심심풀이로 몸푸는 것을 도와주고 힘들게 몇 푼 벌어 술 사주고 밥 사주고 불안하게 눈초리 돌리며 살다 퇴소당하면서, '야 거지 합숙소에서 천년 만년 살아라 새끼야'라고 욕을 퍼붓고 나가는 사람들 한테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아무 소리도 못하고 고개 숙이고 추운 날씨에 떨고 나가는 사람들 보면 마음이 미어진다. 대표한테 월급을 주자는 얘기가 반장회의에서 나왔다. 나는 단호히 거절하였다. 반장들은 윤선생이 일을 하러 다닐 때 교통비 등, 그리고 다른 일에 매달려 일을 못하니까 식사 등 기본적인 것을 해결하기 위해 월급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가 두 번 다시 나오면 대표직 그만 두겠다'. 어지간한 집단이래야 받아들이지.

소장 직원 등. 우리가 요구한 문제들이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우리 대표들, 나를 위시하여 책임자들이 시장면담을 하기 위해 우리 애로사항을 만들어 문서화하여 부산시청을 방문하였다. 우르르 몰려온 우리들의 꼴을 보고 눈쌀부터 찡그리고 짜증섞인 소리를 지른다.

'무슨 일이냐.' 우리 힘든 현재 입장을 설명하고 시장면담을 청하였더니, '지금 안 계시니까 문서화해 올리라'고 하길래 재빨리 '여기 우리 애로사항을 만들어 왔습니다'. 시장에게 보고하겠다는 말을 믿고 돌아왔다.

한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다. 우리는 다시 30명 정도 우르르 몰려갔다. 시장면담하자니까 또 없다는 것이다. '시장 만나자, 못 살겠다'.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쳤다. 당황한 시청직원은 '시장은 안 계시니까 보건 국장님을 면회시켜 줄테니 애로점을 이야기하면 시장님께 연결될 것'이라고 사정한다.

떡 버티고 앉아 거만함이 잔뜩 배인 국장을 만나 우리가 적어간 건의서를 주었다. 건의서를 보는 둥 마는 둥 힐끗 처다보며 성가셔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는, '대교동 합숙소는 도시 미관상 좋지 않고 민원이 많이 들어와 철거할 계획이며 합숙소에 쓸 돈도 예산에도 없고 여러분이 살기 힘들면 나가면 될 것 아니냐'는 요지였다. 반들반들한 마빡이라도 한번 처 줬으면 시원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한 친구가 '야 밥장사 하숙칠래면 똑똑히 해라. 그러고도 밥장사 해 처먹냐'. 나는 그 친구를 제지하고 '보건국장하고는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시장하고 면담을 주선해 달라'고 했다. 보건국장은 '시 방침은 변하지 않는다. 합숙소에 더 이상 신경 안 쓴다'고 단언하였다.

나는 시청에 가서 시장을 만날 수 없으면 노상면담을 하자고 생각했다. 부지런한 박영수 시장은 현장에서 살고 있다시피 하였다. 태종대, 장전 몇 군데에서 노상면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용두산 타워 준공식 전에 용두산 공원에서 만났다. '시장님 전할 말이 있습니다'.

소리소리 지르니까 보좌관 두 명이 앞을 가로막고 손을 비틀었다.

나는 소리를 질렀다. '부산 시민이 애로사항이 있어 시장을 면담하겠다는 데 왜 방해하느냐'고 소리소리 질러댔다.

보좌관들을 제치고 박영수 시장이 '무슨 일이냐'고 반문한다. '나 대교동 거지합숙소 대표요. 무수히 시청에다 건의서를 보냈는데 회답이 없었고 시장님을 만날 수 없어 노상면담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발 우리 합숙소에 한번만 와서 실상을 보시오. 그리고 우리의 어려움을 기재한 것을 보시오'. 시장은 직접 건의서를 받아들고 알았다고 짤막하게 말하고 떠났다.

거짓말처럼 그날 저녁때 시장이 바람처럼 왔다. 처음 화장실 문을 열 때 넘치는 똥 악취풍기는 현장에서 시장은 지옥을 보았다. 복도마다 배어 있는 악취, 방 문마다 큰못이 촘촘히 거북선 창날처럼 박혀있는 문들, 폭행과 갈취당하면서 붕대 감고 있는 합숙소 사람, 부두깡패들과 매일 노름으로 지새우는 소장과 직원들, 건의서에 적혀있는 것 하나도 틀리지 않다는 사실에 시장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속전속결로 이루어졌다. 소장으로부터 직원들까지 즉시 직위해제. 퇴직금 한푼도 받지 못하고 쫓겨났다. 합숙소 안은 완전히 열광 속에 파묻혔다. 고기, 술, 떡이 나오고 합숙소 식구들은 나를 안고 '윤선생 수고했습니다'. 악수를 받아주느라 손이 아팠다.

50년도 천재시인이라는 사람으로, 부산일보 문화부 기자한테 금전적으로 도움을 받아 근근히 합숙소에서 생활하는 분이 있었는데 초배기(신참)였다. 술 중독이 되어 술만 먹으면 아무데나 싸버리는 버릇이 있었다. 방안에 이불에다 세계지도를 그리고 작업에 참여했다가 지린내가 엄청 났던가 보다. 악어눈물이 그 꼴을 못 볼 위인이었다. 얼마나 두들겨 팼는지 얼굴이고 몸뚱이가 말이 아니었다.

우리 합숙소 사람들 그 누구도 폭력을 용서하지 않았다. 밖에 부두깡패든 합숙소 내에 싸움이든 폭행과 금품갈취가 없다시피 되었고 부두깡패들이 합숙소 안에 잘 못 드나들었다. 제반 여건상 깡패들이 기가 많이 죽어있었다.

나는 악어눈물한테 화를 내었다.

'네가 뭔데 사람을 죽 사발 만들었냐.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절대 폭력은 안 된다고 했지 않느냐.' 말이 거칠게 오고가고 악어눈물은 '거지 합숙소 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네 말을 듣지 않겠다.'고 했다. 통금 직전에 잠자는 나에게 발길질하고 소리소리 질러댄다.

요점은 '자기 친구들을 개 패듯 하였어도 친구로 알고 눈감아 주었는데 실수 투성이 초배기를 좀 때렸다고 심하게 질책할 수 있느냐'였다.

나도 화가 치밀어 '야 꺼저. 술 먹고 개기지 말고. 고향생각하기 전이 행복한거야.' 두들겨 맞고 고향생각 하지 말라는 야유였다.

악어눈물은 길길이 날뛰면서 '좋다 어데 부서져도 법에 하소연 하기 없다. 법에 호소하는 비겁한 놈이 되지 말자.' 나도 냉정하게 악어눈물을 훑어보면서 분석하였다, '술을 많이 마신 것이 너는 큰 실수다.' 나는 술을 마신 놈하고 싸우기 싫었다. 그는 내 모가지를 잡아 억지로 밖으로 끌어냈다. 합숙소 앞마당 넓은 장소, 가로등이 대낮처럼 밝다.

한 시간 이상 싸움이 계속되었는데, 아까도 말했지만 거구의 사내 악어눈물은 술 마신 것이 치명적이었다. 나를 잡으려고 덤비면 잽을 날려 빠르게 두들겨 패고 빠지고 해, 한 시간 이상 두들겨 맞은 악어눈물은 얼굴이 완전히 부어 찌그러지고 눈 코 입에서 피가 범벅이 되었다. 그는 지쳐 주저앉았으며 더 이상 손댈 수가 없었다. 불쌍하였다.

나는 방으로 들어왔지만 마음이 착잡하였다. 사이 좋게 지냈는데... 악어눈물이 나를 좋아한 것도 알고 있었다. 피곤한 몸을 주체 못하고 쓰러져 잠이 들었다. 손목에 차가운 감촉이 오면서 금속성을 내며 은팔찌[수갑]가 내 손에 채워지는 것이다. 눈을 떴다. 늦은 아침이다. 곰 세 놈이 있다. 덩치 큰 것을 보니 형사계에서 나왔나 보다. 옆에 악어눈물 친구들인 부두깡패들이 함께 온 것을 보니 '이놈들이 고발조치를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악어눈물은 아무 말 않고 고개 숙이고 있다. '이 자식 악질이예요. 여러 사람이 이 놈한테 작살났어요. 이런 놈은 진작 잡아 넣었어야 해', '몇 년 가다밥(콩밥)을 먹여야 해' 라며 난리를 쳐댔다. 악어눈물은 찌그러진 얼굴에 눈도 뜨지 못할 정도로 부어 올라 처참하였다. 고발하면 남자가 아니라고 하였던 그가 친구들이 강력하게 고발하라는 강요에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표정이었다. 이런 계기로 '목에 가시 같은 놈 제거해버리자'는 생각이었을 거다.

부두 깡패들은 제3부두에 있는 항만 파출소에 가 조서를 진단서와 첨부하여 나를 중부경찰서로 넘겼다. 조서를 넘겨받은 형사에게 나는 부산 지검 누구의 이름을 말하고 전화를 부탁하였다. '이 거지 새끼가 영감님을 팔아먹네' 하면서 내 뺨을 때린다. '이 상놈의 새끼야 왜 때리는 거야'. 가진 욕설을 다 퍼붓고 소리지르는데 저쪽 큰 의자에 앉아있던 중늙은이가 '왜 떠들고 야단이야' 하니까, 형사가 '거지 합숙소에 있는 놈이 폭행죄로 들어왔는데 검사를 팔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황당한 표정으로 자기 상사한테 이야기한다. 형사과장은 귀찮다는 듯 '바꾸어 달라면 바꾸어 줘.' 형사한테 인상을 쓴다. 그 형사는 내 이름을 말하고 '폭행죄로 들어왔는데 영감님을 바꾸어 달라고 해서'...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그 사람도 다치지 않았어? 병원에 데려가 진찰받게 해.' 이 말 한마디에 (쌍방고소) 경찰서 정문을 당당히 나섰다. 부두 깡패들은 사색이 되었고 그들에게 나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후 거지 합숙소 내에 부두깡패들은 한 놈도 들어오지 못하였고, 박혀있던 큰 못들을 문에서 뽑아내면서 '참으로 자유가 왔다'고 10년 전부터 부두에서 짐을 날라주고 생활하던 김씨가 오랜만에 말하였다.

새로 부임하여 온 소장을 면담하고 창고로 사용하는 방을 교실로 쓰겠다고 허락을 받아 부산에 있는 여러 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방에 필요한 도구, 책상 의자 칠판 분필 기타 여러 가지 비품을 협조 받는데 재미있는 일이 발견되었다. 부자들이 운영하는 학교에서는 창고에서 물건들이 썩고 있어도 안 준다는 것. 여러 학교 도움으로 그럭저럭 공부할 수 있는 교실이 완성되었다.

교양을 위주로 하였는데 첫날은 교실이 좁아 사람들을 수용 못했는데 갈수록 공부방에 오는 사람이 적어졌다. 합숙소에 있는 조경사 조수가 나에게 귀뜸 해준다. '요새 일본 관광객들이 많이 들어 오는데 한 시간은 교양 한 시간은 일본어를 나누어 가르치면 많이 참석할 겁니다'. 조경사 조수 생각이 맞았다. 먹고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새삼 깨닫게 한 순간이었다. 늙은 학생들 초롱초롱한 눈을 바라보는 것은, 가방끈이 짧아 위축되어버린 나에게 색다른 기쁨이었다.

젊은 날, 짧은 현장 경험을 살려 실천해 보는 일들, 지금도 내 마음에 무엇인가 가득 고여온다.


<넝마공동체 그리고 재활용하는 사람들>

1977년 초, 영동고등학교 앞에서 단돈 8,400원으로 헌 책방을 열었다. 중앙시장에서 앉은배기 저울 5,000원 주고 사고 3,400원으로는 고물상 넝마주이 막을 찾아다니며 헌책을 모아 팔기 시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쓰레기 뒤져 먹고사는 넝마주이들 하고 인연을 맺어 왕초들을 자주 만났고, 고기도 썰고 술도 나누어 마시며 옛날 선배도 만났고 후배들도 소개받고 자주 만나는 과정에서 싸움도 하고 정도 깊이 들었다.

강남지역에 후리가리(주1) 때는 수십 명 수백 명 죄도 없이 전과자라는 이유만으로 경찰관 밥이 되어 버리고, 천대와 멸시, 개만도 못한 현실이었다.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자, 나눔과 섬김의 세상을 만들자. 준비기간 중에 대표 선정작업이 제일 힘들었다. 강남지역 뿐만 아니라 난지도 까지 포용할 수 있는 잠재적인 인물이 없었다. 나름대로 대표를 설득하여 제1 넝마공동체가 1983년도에 설립되었다. 1984년도에 제2 넝마공동체가 대치동 다리 밑에 대표를 선정하고 만들어지고, 20년 세월 속에 말할 수 없는 어려움과 밑빠진 독에 물 붓는 식으로 들어가는 돈. 쓰레기통에 코 박고 죽을 수밖에 없구나 절실히 느꼈다.

작년(1999) 4월 수년 째 계획 세웠던 것을 행동에 옮겼다.

포이동에 있는 땅 1,000평을 점령하였다. 삼일 천하도 좋다. 우리는 이 땅에 살 권리가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쓰레기 뒤지는 과정에서 지독한 악취를 향기로 알고 쓸 물건들을 추려내어 경제에 큰 몫을 했으며 환경 살리는데 우리 보다 많이 한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면 나와 봐라.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 일했지만 큰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도 항상 가지고 있었다. 계고장, 경고장, 고발장, 구청 경찰서 검찰청 하루가 멀다고 보내오는 소환장. 포크레인을 동원하여 수십 명이 몰려와 작업장 정문을 째 파 엎어버리고 절대출입엄금.

나는 소리를 질렀다. '야 콘테이너고 뭐고 다 가지고 갈테면 갖고 가라. 우리는 영하 20도가 넘는 날씨에도 가마니 한 장이면 그곳이 우리 집이며 방이다'. '우리가 추위와 굶주림으로 병들어 죽어갈 때 너희들은 무엇을 했느냐. 5,6십이 넘어 결혼커녕 여자 손목 한번 잡지 못해보고 죽어갈 때 너희들 무엇했느냐.' '쓰레기 썩는 악취를 한순간도 맡지 못하면서도 저 밑바닥에서 고통으로 비명 지르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 보았느냐. 비명지르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보았느냐. 관심을 가졌다면 구체적으로 방법을 생각하고 실천에 옮겼느냐.'

통일전쟁 직후 10살 때부터 미국 구조물자 포대 자루를 메고 떨어진 유리조각, 쇠, 나무 등 재활용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어 담아 생활을 꾸렸다. 구두닦기, 팸푸, 신문팔이, 찐빵장사, 성냥 권련초 장사, 노동판에 전전하고, 소년원, 교도소 드나들며 힘들게 살며 고통스러워 할 때 위로와 격려를 주었고 더불어 사는 세상 나눔과 섬김의 세상을 만들자는 교육을 현장에서 받았다.



여러분이 꿈꾸는 아름다운 세상

우리는 실천하고 있습니다.

재활용하는 사람들 T. 529-2569



간판을 올려다 본다. 나는 흔들리지 않으리라.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바둑이>

바둑이를 보고 입맛을 다시는 작업장 식구도 있다. 된장 발라 보겠다는 음흉한 생각.

바둑이는 영리하다.

십년 전 다리밑을 찾아왔을 때 한쪽 다리가 거의 못쓰는 절둑발이였다. 상처 아픔 때문에 비명을 질러대는 바둑이를 지극 정성으로 치료해주고 영양 높은 고기도 자주 먹여 다정한 식구가 되었다. 버림 받은 개들, 병들었거나 상처가 심해 오갈 곳 없는 개들, 굶주려오는 개들이다.

작업복 입는 사람들 한테는 꼬리를 흔들고 친분을 표시한다. 구청직원, 경찰관, 신사복 입은 사람들이 오면 적개심을 드러내며 심하게 짖는다. '우리 개 도통했네. 우리와 오래 살다보니 도둑놈을 알아본다'고 우스개 소리도 자주 한다. 바둑이는 아직 아기를 가져 보지 못한 숫처녀다. 10년이 넘어서도 아이가 없으나 남자친구는 많다. 작업장 사람들이 일터로 나가면 다리 밑 작업장에 아무도 없다. 고물 중에 가격이 될만한 물건들이 곧잘 없어지곤 한다. '야 그놈 배짱 한 번 좋다. 다리 밑에 와서 물건 가져갈 만치 배짱 있는 놈 어떤 놈인지 이바구(이야기) 터볼 만한 놈이다.'

바둑이가 들어온 후에는 작업장에 물건이 없어지지 않는다. 바둑이는 외출도 잘하지만 작업장 식구들이 일터에 나가면 절대 외출을 않고 집을 지킨다. 바둑이는 요새 부쩍 남자 개 친구들을 데리고 온다. 곧잘 데이트를 즐긴다. 아마 아기를 갖고 싶은가 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바둑이 남자(개) 친구들이 작업장에 들어오면 작업장 식구들이 옛날 솜씨 자랑 때문에 우리 바둑이가 애를 못 가지나 보다. 작업장 식구들은 남자 (개)친구만 데리고 들어오면 살살 꼬셔 낙시질 해버린다. 먹음직한 고기덩이를 낚시에 끼워주면 어느 정도 경계심이 풀린 상태에서 낚시에 달린 고기를 덥석 물어대니 작업장 식구들 영양 보신에 협조할 수 밖에.

바둑이는 자기동료 고기를 절대 먹지 않는다. 물론 화도 나고 배신감 때문이기도 하겠지. '야 그만 잡아 먹어라. 바둑이도 결혼도 하고 아기도 갖고 개같이 살아야 할 것 아냐.' 나는 꽥 소리를 지른다. 아득한 옛날 내 어린 시절(13살 때)이 떠오른다.

영하 20도가 넘어가는 오십년도 추운 겨울 날씨에 여름 옷을 걸치고 밤늦도록 이 골목 저 골목 추위를 피할 장소를 찾아 헤메일 때, 굳게 닫힌 대문을 채운 빗장들은 시커먼 공포였으며 인간에 대한 절망이었다. 열려있는 문들이 있어야 내가 얼어죽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간절함 속에 필사적으로 찾았지만 열려 있는 문은 한군데도 없었다. 단골 잠자리인 국화빵 붕어빵 틀(도라무 통)은 20도가 넘은 영하 속에 어름처럼 차가워져 있었다. 가마니 한 장이면 해결되었던 난장꿀임은 더 이상 내 몸이 받아주지 않았다. 술 마시고 길거리에서 자다가 동사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고 현장에서 느꼈다. 잠들면 죽는다는 것을. 허우적거리며 잠들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걸어갔던 길가에 발견한 불빛, 미군용 대형 텐트였다.

텐트를 밀고 들어가는 동시에 의식을 잃어버렸다. '움직이네, 눈 깜빡거리네, 야 눈떴다.' 고함소리. 눈앞에 가로막는 시커먼 얼굴들. 고약한 목자에 웃고있는 이빨들이 유난히 하얕다는 것을 느꼈다. '꼬마야 어데서 사느냐'부터 '자식아 얼어 죽으려거던 부자집 앞에서 죽지 이곳에서 죽으면 어떻게 해, 송장치울 돈도 없는데.' '꼬마야, 대복이 형한테 큰절하거라.' '밤새도록 주물러 너를 살려낸 형이야.' 떠들어대는 소리 속에 어렴풋이, '여기는 빗장이 없구나, 빗장이 없는 곳도 있구나.' 황소만한 싸나운 개도 형들 낚시 솜씨에 순한 강아지처럼 매달려 오는 것을 보고, 개밥을 빼앗아 먹을 때 공포의 대상이었던 그 개들이 형들 앞에서 줄줄이 불에 태워져 큰 가마솥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이곳 형들은 영웅이구나' 생각했다.

녹쓴 칼로 쓱쓱 썰어서 커다란 고기 덩어리를 먹여주며 영양보신, 마 최고야. 나는 가방끈이 짧아 교육다운 교육은 학교가 아니라 이렇게 살아가는 현장에서 배웠다.

추렁 메고 벙거지 눌러쓴 쓰레기통을 뒤지는 형들에게서 배웠고, 시장바닥에서 생선을 팔면서 손님과 악다구 쓰는 아줌마한테 밥 한 그릇 얻어 먹으면서 배웠고, 단속 경찰관 멱살을 잡고 사생결단하자고 싸우는 노점장사한테 배웠다. 그 교육현장에 보람과 긍지를 느끼고 있다. '교육은 잘 받았다'고.


<일상>

넝마줍는 신립이가 하루는 여자를 데리고 왔다. 모두들 눈이 동그래져서 쳐다보며 '왠 여자' 하는 표정들에 멋적은 듯, '야 큰형님이야 인사드려.' 인사하는 모습이 얌전하다. 자기 끼리 하는 이야기들은 '청량리 588에 가 외로움을 풀다 눈이 맞아 데리고 왔다'는 둥. 이런 경우가 가끔 있었다.

여러 가지 말들이 많았는데 두 사람에게 따로 막사를 지어주고 따로 식사를 만들어 먹게 하였다. 술을 좋아하는 신립이는 형들이 권하는 술도 입에 일절 대지 않고 농땡이 피우던 지난 일이 언제 있었느냐는 듯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쓰레기통을 얼마나 열심히 뒤지는지 쓰레기통에 물건이 없다고 형들이 투덜댈 정도였다. 곧잘 함께 사는 동료들도 모르게 찐빵, 떡, 과일을 슬쩍슬쩍 자기 여자한테 갖다 주다가 형들의 놀림감도 되는 신립이, 아빠가 된다는 것이다.

벌써 세월이 흘러 만삭이 되고 진통이 오기 시작하였다. 우리들은 십시일반으로 돈을 걷었는데 10만원 정도뿐이었다. 이웃에 있는 산부인과에 입원시키고 그 날로 예쁜 딸이 생겼다. '여자애가 태어났으니 우리 넝마 공동체가 이제는 부자가 되겠다'느니 여러 미담으로 즐거워했다. 산모가 병골이라 산후 후유증으로 조금 오래 입원하였다. 병원에서 내민 청구서가 50만원이 넘었다. 우리는 의논해 보았지만 해법이 없어 의사 선생님께 우리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옆에 쓰레기통을 뒤져 먹고사는 넝마공동체 식구들입니다 식구들이 모아온 돈 10만원이 있으니 이걸 받아주시고 벌어서 갚아드리겠습니다.'

선비처럼 맑게 생긴 의사는 안경알을 닦으면서 '우리는 흙 파서 먹고사는 줄 아세요. 안됩니다. 다 마련해 가지고 퇴원하세요.' 우리는 멀쑥해질 수밖에. 우리는 모여서 궁리를 하였다. '의사새끼 깨버리자'는 성질 급한 친구가 있고, '돈 없어 퇴원 안 된다면 아예 병원에서 퇴원 않고 살아버리자'는 소리도 있고, 제일 막내가 갑자기 소리 지른다. '하이방(도망) 까면 돼. 바람잡아 입원실이 이층이니까 뒤 창문으로 빼돌리면 돼.' 모두 이구동성으로 '야 그러자'. 전직, 직업이 직업이라 눈 깜짝할 사이에 의사, 간호원들 넋을 빼고 탈출시켜 버렸다. 그 뒤가 재미있다. 그 의사는 10만원이라도 보내 달란다. 그 뒤 이야기는 상상에 맡기겠다.


<국가를 도둑질할 실력을 기르고 있는 중>

따르릉. 우리 집 고물 전화기 소리는 유난히 크다. 한밤중 2시, 3시경에 울려대는 소리는 놀람과 피곤으로 녹초가 된 마누라 육신을 일으켜 세운다.

'여보세요.' 저쪽에서 가느다란 소리가 들린다. '저 돼지인데요.'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여기 00파출소인데요.' 알만하다. 공사장에서 고철 몇 덩이 추렁(대나무 넝마도구)에 담아 오다가 방발이(방범)한테 걸려 파출소에서 조서를 받고 있구나. 공사장 책임자가 와서, '낮에 고물장사가 담배 두 갑 값 달라고 하는 인부 말에 한 갑 값밖에 못 주겠다고 하여서 공사장 근처에 던져 논 필요 없는 물건입니다.' 공사장 감독이 설명을 하여도 남의 물건을 가져갔으니 절도라며 기필코 경찰서에 넘긴다. 경찰서에서 더욱 황당한 일은 우리는 꿈도 희망도 없는 갈 데까지 간 양아치들인데, '야 실망하지 말고 희망을 가져 열심히 살다보면 좋은 날이 올 것이다.' 시커먼 옷이며 목욕 한번 못한 꼬락서니를 보면 설렁탕 한 그릇이라도 시켜주고 등이라도 두드려 줄만도 한 인심인데,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이거 가져왔어?' 대가리 당 십 만원씩, 넝마공동체 시작한 이후 숫하게 반복된 일이다.

20년 전 일이니까 경찰관도 지금은 달라졌겠지만 그때는 양아치들은 본 사람이 임자였다. 아무 빽도 없고 말썽소지가 없는 전과자들(거지들)을 상대해 본 그들 나름대로 경험한 공돈이었기 때문일 게다.

나는 경찰서 문을 나오는 즉시 애들한테 분풀이를 한다. '야 xx같은 색끼들아.'

'내가 말했지. 조세형이 만한 기술이 없으면 아예 남의 물건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손도 대지 말란 말이야. 학교(감옥)에 가 일이 년 살고 나면 본전생각 나는 장사가 아니야. 너희한테 도둑질하지 말라는 것 아냐. 해. 그렇지만 밑지는 장사는 하지 말란 말야.'

수도 없이 반복되어온 일. 이제는 밑지는 장사 절대 안 한다. 그런 어리석은 친구들은 이제는 없다. 우리는 국가를 도둑질할 실력을 기르고 있는 중이니까.


<헌 책방>

영동고등학교 헌 책방, 도곡동 헌 책방, 서초동 헌 책방. 각 대학교 학생들이 수백 명 거쳐갔다. '그 헌 책방에 사회과학 책이 많다드라.' '그 주인은 전과자인데 주먹세계에서 알아 주는 두목이라고 하드라.' '말만 잘하면 책도 공짜로 준다드라.'

온 국민을 동태 만들어버린 전두환이는 학생들을 깔본 게 실수였다. 수배학생, 각 대학교 학생회장 등 몇 년씩 수배생활 중 은신처가 되었고, 각 대학 집행위원들의 긴밀한 정보교환 장소로 활용되었다.

나는 가끔 우스개 소리로 '너희들 다 잡아 넣으면 팔자를 고치겠는데' 하고 입맛을 쩍쩍 다시기도 했다. 포도주, 매실주, 모과주 담가 놓으면 그 많은 술이 하룻밤에 동이 나버리는 것이다.

이제야 말하지만 우리 애 엄마가 없으면, 그 적극적인 협조가 없었으면, 나도 우리 애 엄마한테 내 머리를 잘라 짚신을 만들어 주어도 모자란다고 생각하며 마음 절절히 느끼고 있다. 하루도 빠짐없이 빨래며 방청소 설거지 커피까지 끓여준다. 진심으로.

팔불출. 마누라 자랑 그만두고.

80년도, 한신대학 다니던 승현이, 후배 제혁이, 여섯 일곱 학생들이 군사정부와 열심히 싸웠다. 승현이는 수배생활에도 공장에 갔다. 넝마공동체 식구가 되어 쓰레기통을 열심히 뒤지며 경제와 환경살리기에 열심이었다. 영국제 중절모를 뒤집어 쓰고 '사진 한 장 잘 찍어 주시요잉. 1930년대 독립투사 같지 않으요.' 옆에 형들은 '야 꿈 깨라. 아편 파는 일본놈 밀대 닮았다.' '아이구 무슨 험한 말씀인가요. 역사에 남을 인물 잘 찍어 주시오 잉.' 추렁(대나무로 만든 용기)을 메고 쓰레기통을 뒤지며 코를 막는 시늉을 내며 열심이었다.

넝마공동체 만든 날을 기념하기 위해 아는 사람들을 모시고 떡, 과일, 고기, 술, 음료수를 장만하여 우리 사물놀이 패와 흥겨운 장단에 맞추어 노래, 춤, 음식을 나누어 먹고 흥겹게 노는 행사날이었다. 승현이는 술기운이 오르자, 술에 취하여 손님과 이야기하는데 자꾸 방해를 놓으며 횡설수설하니까, 옆에 짜증스럽게 보고 있던 태규가 버릇없이 군다고 맥주병으로 머리를 갈겼다. 공동체 식구들은 학생 놈이 조금 아는 게 있다고 잘난 체 하는 게 건방지다고 불만이 있었고, 승현이 입장에서는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고 똘마니처럼 함부로 하고 주먹질한다고 하던 차에 양쪽 불만이 터져 버렸다.

피 좀 흘리는 것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여기서도 빨리 병원에 가봐야겠다며 승현이를 엎고 뛰다시피 갔는데 큰 병원으로 가려고 하다 부랴부랴 대학병원에 갔다. 증상은 두개골 함몰이었다. 병원수고로 다행이 함몰된 머리는 정상으로 되었다.

승현이는 가버렸다. 승현이 친구 후배들, 라면하나 끓이지 못해 찬물에 라면을 담가 먹겠다고 덤비던 그들, 등사기에 먹물이 너무 많아 글씨가 보이지 않는다고 투덜대면서 열심히 싸우던 승현이는 떠난 지 17년이 되었다.

무정스럽게 소식 한번 없다. 젊은 날에 동지들에게 당한 폭행, 충격이 컸을 것이고 배신감도 들었겠지. 나에게도 많은 섭섭함이 있었겠지.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열심히 키우고 있겠지. 열심히 살자. 어데에 있드라도.


<새 식구>

새로운 식구들이 들어왔다.(주2)

노숙자로 떠돌아 다니던 종철이 부부는 육 개월 넘은 딸아이와 하께 지친 모습으로 들어왔다.

교통사고를 당하여 한쪽 발을 아직 못쓰는 원또라이는, 50원 남은 돈으로 전화 한 통 하고 10원 밖에 없어서 물어물어 걸어서 다리 밑에 찾아 왔다는 동진이가 짜장면 곱빼기 빨리도 먹는구나 생각하면서 굶주린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콘테이너 박스(주3)로 된 잠자리를 마련해주고 공동체 생활에 방해가 되지 않는 몇 가지 수칙을 말해주었다. 흩어진 마음도 정리할 겸 당분간 쉬는 것도 좋고, 고물 수집할 수 있는 도구 리어카 차 등이 있으니 작업을 하든가 양재동 노동시장에 가 노동을 하든가 본인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된다.

6개월간은 의식주를 완전히 해결해준다. 원또라이는 차 사고로 당분간 집에서 치료를 하고 걷기가 불편하니 종철이와 동진이는 고물 일을 하겠다고 한다. 종철이는 원규와 같이 (차, 일톤 포터) 작업하기로 하고 동진이는 리어카로 고물 작업을 하겠단다. 동진이는 부지런하였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쉴새 없이 작업장 근처 쓰레기통을 다 뒤져 재활용품을 수집해오고 부지런함과 성실함이 근처에 알려져 동진이 한테만 고물들을 모아 주는데 수입도 꽤 되는 것 같다. 그 나름대로 자세한 이야기는 안 하는데, 파리 에펠탑도 몽마르트 언덕에 그림 그리는 그림쟁이 이야기도 하는 것으로 보아, 파리 뒷골목 구석구석 뒤지고 온 모양인데, 형들이 시키는 심부름도 잘하고 작업장에서 모범적으로 자기 책임을 다하였다.

공동체 식구가 되어 6개월간 생활에서 성실하게 지내면 자동차운전학원에 등록시킨다. 면허증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운전학원에 등록하는 비용은 80만원 정도 든다. 면허증 취득하는데 시간이 지연되면 비용은 더 든다. 십년 전만 하여도 추렁으로 쓰레기통을 뒤져 생활하였는데 수많은 경쟁자들이 차로 덤벼드니 옛날 방식으로는 살아가기 힘들다.

이 직업도 경쟁자가 많아 살아남으려면 기동력을 가져야 하며 운전면허증이 절대 필요하다. 십년 전부터 면허증을 취득하도록 해 왔는데 앞으로도 계속할 것이다. 예를 들어 백 만원을 들여 운전면허증을 취득해 주었다 하자. 취득하여 그 기술로 생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형님이 운전면허증을 취득하도록 해줬다'는 그 생각 하나만으로도 나는 기쁘다.

동진이가 6개월이 되어 운전학원에 등록하자고 하니까, '형님 저의 저금통장에 돈이 좀 모였습니다. 제 힘으로 면허증을 취득하여 형님께 보여 드리겠습니다.' 동진이의 건강한 마음, 그 동안 쌓였던 피로가 풀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종철이 딸아이가 벌써부터 잘 웃는다. 내 어린 시절 얼마나 척박하였으면 사진 한 장 없다. 종철이 아가야에게는 나와 같은 사진 한 장 없는 서글픔을 주지 않겠다. 부지런히 사진을 찍어 주련다.


<장기수 할아버지들과>

16세 어린 나이로 빨치산 전투병으로 싸우다 동지들 시체 속에 쌓여서 살아났던 김연승 선생은 긴 감옥생활을 거처 인천에 살다가 강남 논현동에서 주차장의 징수원으로 근무하며 산다. 뒷통수로 뚫고 나와 한쪽 눈을 깨부수고 나간 총알에 기적적으로 살아 긴 감옥생활 속에 자신의 몸에 수천 번씩 침을 꽂아 배운 의술로 빚고을 광주에서 탕제원을 운영하면서 무료 의술을 펴고 있는 김영태 선생. 온몸에 집중사격을 받고 벌집이 되다시피 된 몸 속에 지금도 (총알) 한 알을 지니고 있는 불세출 함세환 선생. 많은 선생들을 인연으로 알게 됨을 기쁘게 생각한다. '함 선생, 북쪽에 가면 북쪽 인민들이 선생 남쪽 생활을 알고 싶어 할 것입니다.' 기름 주유소에서 자동차에 기름 넣는 일. 노동자로 노동판에서 일하며 살고 있다.

어떤 기회에 우리 작업장에서 며칠 일을 같이 했는데 청년들이 쩔쩔매는 작업을 60이 넘는 함 선생은 힘차게 하였다. 나는 우스개 소리로 '동무 북조선 양질의 노동력 세계 시장에서 알아 모시겠소다.' '밑바닥에서 힘들게 사는 사람들 생활을 몸으로 체험하고 가시오.'

과천 장기수 선생 사는 곳 가까운 노상에서 좌판을 만들어 헌옷, 전자제품, 구두, 그릇, 쓰레기통에서 가져온 온갖 만물을 갔다놓고 판매하였다.(주4) '골라 골라 얼마요.'

제주도 고병화 선생, 부산 김동수 선생, 광주 김인서 선생, 대전 함세환 선생, 수유리 윤희보 선생부부, 박선희 선생, 세계 최장기수들 김선명, 안학섭 선생, 안학섭 선생은 노점상으로 참여하면서 시커먼 색안경을 쓰고 있어, 나는 우스개 소리로 '동무는 안기부원 갔소다.'고 했다.

함세환 선생의 목메이게 하는 노래 가락을 들으며 토, 일요일은 많은 선생들이 참여한 벼룩시장터였다. 함세환 선생 노래 실력은 대단하였다. 민예총에서 주관한 연세대에서 노래패들 축제에서 김용태 아우한테 강력하게 요구하여 함세환 선생이 노래를 불러 많은 청천중한테 박수갈채를 받았다.


<동지들에게로 보내주오>(주5)

작업장으로 전화가 왔다. 윤희보 선생님의 부인 박선희 선생님한테서 구의동 정신병동에서 최남규 선생님이 단식을 하고 자해를 하니 빨리 가보란다. 윤희보 선생님은 대구에 강연이 있어 내려가시는 길에 나에게 들리셨다. 나와 윤희보 선생님은 구의동 정신병원으로 갔다. 최남규 선생님는 우리를 보더니 그냥 우신다.

내용을 들어보니 초기 치매증상이 있어 병원에 입원시켰는데 병신병자들과 여럿이 20명 넘게 있는 곳에 기거하게 하고 젊은 사람들이 윽박지르고 때리니까 강압에 못 이겨 밥도 안 먹고 이틀간 내보내 달라고 소리소리 지르니 제지하느라 쥐어박고 성질이 급해서 병을 깨 자신의 몸에 상처를 입히고 병원에서는 골치가 아파 쩔쩔매고 있는 중이었다.

최남규 선생을 들쳐업고 우리 집까지 와서 차로 싣고 천계산 밑, 금재성 선생이 병환으로 오갈 데 없어 임시 거처로 사용하는 곳에 갔다. 금재성 선생은 거처할 집을 마련할 때 까지 하숙비 40만원씩 주고 임시로 있었다. 금재성 선생님는 '최동지가 오면 나도 안 있겠소.'라고 하였다. 윤희보 선생은 금재성 선생한테 심하게 꾸짖었다. '아니 동지가 몸이 위태로운데 불편하다고 그런 고약한 말이 어데 있어요.' 하루밤 그곳에서 재우고는 들쳐업고 과천에 여관방을 얻어 생활을 시작하였다.

정말 죽을 지경이었다. 침대 위에 오줌을 막 싸버리니 빈 방에 들어가 재빠르게 침대 카바를 베껴 바꿔치고 둘둘 말아서 세탁기에 모르게 집어넣는 것도 한두 번이었다. 또 소리까지 질러대며 낙성대 동지들이 있는 곳으로 가겠단다. 윤희보 선생님은 낙성대(장기수 할아버지들이 집단으로 모여 살던 곳)로 연락하였는데 모두들 싫어해 받지 않겠단다. 중간에 낀 나는 심부름하는 죄, 고래 심줄 같은 돈을 쓴 죄 밖에 없었다.

여관에서 소리소리 지르고 오줌 싸는 것도 들켜버려 쫓겨나 갈 곳이 없었다. 생각해낸 것이 안양에서 안과병원 하는 조카 생각이 났다. 입원실이 있으니 그 곳에 당분간 신세를 지자. '병원에 가서는 제발 소리지르지 말라'고 윤희보 선생은 잔소리 섞인 부탁을 한다.

조카에게 부탁하고 병원에 입원시켰다. 조카 이동식 씨는 나보다 두 살 위인 안과 전문의로 눈병이 심한 작업장 식구들 수술도 해주고 안경도 돈 안 받는 등 헌신적으로 돌봐준 사람이었다. 장기수 선생님들도 많이 그곳에 가 눈치료, 안경 등 신세를 지고 있었다. 삼촌이 하는 일이라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 주었다.

부산에 계신 김동수 선생님 보고 이곳 사정을 이야기하고 '선생님이 최남규 선생님과 함께 기거하며 최남규 선생님을 간병해 달라' 부탁하니 흔쾌히 허락하였다.

작업장에 일을 보고 이틀 후에 안과병원을 갔더니 조카 병원장이 기가 막힌 표정을 하고 '삼촌'하고 부르는 폼이 싸울 듯 덤빈다. 이틀간 밤새도록 낮이나 밤이나 소리소리 지르니 이곳 입원 환자들의 고통과 불만이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김동수 선생님도 하는 말이 밥도 먹지 않고 소리소리 질러대니 잠 한숨도 못 잤단다. 미안하다고 이야기하고 또 들쳐업고 할 수 없이 코딱지만한 우리 집으로 왔다.

최남규 선생님한테 이야기하였다. '선생님이 식사를 중지해 몸이 쇠약해졌으니 고기국에 밥을 많이 드셔 몸이 건강해져야 동지들 있는 곳으로 가실 것 아닙니까.' 최 선생님은 '언제 동지들에게 갈 것이냐' 하여 '이틀 후면 가겠다'고 한즉 거짓말처럼 소리지르는 것을 멈추신다. 식사도 꼬박꼬박 잘하시고 흥얼흥얼 알지 못할 노래 흉내도 내시고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웃으면서 이야기도 나누신다.

약속이 칼이다. 약속시간이 지나도 보낼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울그락 불그락 하시면서 '윤선생 왜 신의가 없는 거요. 약속을 했지 않소. 빨리 실천해요.' '권오헌 선생이 오면 함께 가기로 했습니다.' 권오헌 선생과 의논하여 우리 집에 당분간 있기로 작정하였다. 몸이 허약하니까 몸을 추스린 뒤 옮기자고. 권오헌 선생을 보자 가자고 또 소리를 지른다. 나는 화를 내면서 '갈테면 선생님이 혼자가시오.' 걸음도 못 걷는 선생님은 오층 아파트였는데 기어서 나가신다. 도로 끌고 들어와 보내기로 의논하고 낙성대로 권오헌 선생과 김동수 선생이 부축하여 데리고 갔다.

금재성 선생과 최남규 선생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고향을 목메어 했는데, 고향에 있는 가족들은 또 어떨까. 일년만 더 사셨다면 최남규 선생은 청진 앞 바다를 보셨을 텐데.


<반미시위>

누가 우리 우방이라고 했나, 혈맹이라고 했는가? 승전국 대장 더그라스 맥아더가 '조선인에게 고함' 포고령 1 2 3호로 진실을 말하지 않았는가? 쓰레기 속을 뒤지는 들쥐처럼 평생을 살아온 우리 현실에 그들은 책임이 없는가?

국제 사기꾼을 데리고 와 친일 민족 반역자들을 그대로 고스란히, 미국놈 앞잡이로 민족의 이익보다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그들 앞에, 가장 크게 당하고 오늘까지 비참하게 살아온 오늘의 현실은 미국놈 때문이다. 민족을 사랑하는 지도자 씨를 말리고 자기 말 잘 듣고 자기 민족을 잘 물어뜯는 싸나운 개같은 놈들을 키운...

작업장. '여러분이 꿈꾸는 아름다운 세상 우리는 실천하고 있습니다. 재활용하는 사람들'에게 귀에 딱지가 덮힐 만큼 자주 이야기를 나눈다.

미군범죄 근절운동본부가 주관하는 매주 금요집회 때 자주 미군부대 철조망 너머로 '미국놈은 물러가라', '살인만행 저지르는 미국놈 규탄한다.' 시위 현장은 살벌하다.

전투 경찰들은 몇 겹으로 포위하고 책임 인솔자들 표정들은 굳어있다. 일제시대에 친일 경찰들도 저런 철부지 모습이 아니었을까.

나는 공동체 식구들에게 독립자금을 독촉한다. 힘닿는 대로 내는 그들의 돈은 귀하고 값진 돈이다. 쓰레기를 뒤져 힘들게 만든 돈이다. 매달 후원해줄 돈을 나는 찾아야 한다. 몇 년간 매달 20만원씩 보낸 고래 심줄 같은 내 돈. 미국 놈이 이 땅에 더 이상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게 하고 쫓아내는 것만이 내 돈을 찾는 길이다. 한 달에 오십 만원 벌어 20만원을 보낼 때도 있는 기막힌 내 돈이다.

사람이 적에 모이면 침묵시위를 하고 수백 명이 모이면 힘이 난다. 미군부대 앞에서 삼각지 전철 앞까지 사람들이 모이면 미국놈을 자동적으로 쫓아낼 텐데. 매향리 농민들과 평통 사람들과 운동단체에서 미국대사관 앞에 새로 들어온 식구들을 반드시 참여시키라고 하였는데, 한 사람만 오고 네 사람이 불참하였다고 투덜대는 대표에게 '첫술에 배부르냐. 가자.' 동료들과 보신탕 집으로 몰려가 술을 따르며, '자 이제 시작이다.'


<우리도 인간답게 살고싶다!!>(주6)

"여자가 갈 때까지 가면 막다른 길이 창녀 밖에 없지만 남자가 막바지에 다다르면 경비밖에 할 일이 없다!" 고물 주우러 아파트를 기웃거리다 경비들에게 주워 들은 말이다. 경비들도 오죽하면 있는 사람들 드나드는 구멍이나 지키겠으리오. 그 신세 집 지키는 개처럼 처량하겠지만 그보다 더 막다른 길을 걷는 인간이 넝마 줍는 우리들이다. 최하 이십 년에서 오십 년까지 쐬 빠지게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고물을 수집하면서 열심히 살아왔다. 하지만 우리들이 지하자원 하나 변변히 나오지 않는 나라에서 폐품을 재생해 내어 국가 경제에 얼마나 큰 기여를 해왔는지 생각해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더욱이 폐품으로 인한 환경문제, 특히 공해문제의 해소에 엄청난 기여를 해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 전혀 혜택을 받지 못하고 이 나라의 맨 구석탱이에 내팽개쳐져서 고물처럼 뒹구는 우리다. 설흔은 고사하고 마흔, 쉰 살이 넘어도 결혼조차 못하고, 덜렁이는 가건물에서 굶다가 먹다가 하며 고통스럽게 살다 병들어도 치료 한 번 변변히 못 받고 죽어간다. 그래도 죄 안 짓고 자력으로 어떻게든지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 우리다.

그런데 요사이 텔레비젼이나 방송을 보면 환경문제가 어쩌니, 공해가 어쩌니 하면서 그럴듯한 배경을 깔고 이상한 단체가 하나 생길 모양이다. 폐품 재활용을 전문으로 하는 용역공사를 설립해서 모든 재생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흡수하거나, 여러 가지 기술들을 습득하게 해서 취직을 시키든지 용역회사의 일꾼으로 채용한다는 이야기들이 있다.

실제로 요사이 아파트 단지들을 돌아보면 [자원 재생 공사]라고 써붙인 트럭이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벌써부터 우리들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오죽하면 쓰레기 더미 속에 묻혀 살겠는가. 배운 것 없어 죄 짓지 않으려고 죽지 못해 하는 일이다. 피눈물 흘리며 일해서 가건물이라도 한 채 짓고 살아 볼려면 관에서는 때려 부수는 게 일이다. 건국 이래 지금까지 오랜 세월 동안 당국에서 폐품 재생산에 종사하는 우리에게 도와준 게 뭐 있는가? 옷 걱정을 해 주었나, 밥 걱정을 해 준 적이 있나, 집 걱정을 해준 적이 있는가 말이다. 아니다. 집 걱정은 해 준 적이 있다. 때려 부수는 일로 말이다. "동냥은 못 줘도 쪽박은 깨지 말라"는 얘기도 있다. 이야길 들으니 공무원들이 각 아파트 부녀회에 압력을 넣어서 '자원재생공사'에 폐지를 팔도록 종용하고 있다. 지금은 시범적으로 소규모 운영을 하지만 앞으로는 모든 고물업종으로 영역을 넓혀서 몽땅 먹어치울 심산이란다. 안 되면 공권력을 동원해서라도 강제로 집행할 모양이다.

경비 용역회사, 청소 용역회사 등을 만들어서 퇴역 군인들에게, 말단 인생들이 피고름 짜내어 버는 인건비를 뜯어먹게 해 주더니, 이제는 어디 해 먹을 데가 없어서 넝마주이들까지 벗겨 먹으려고 드는지 모르겠다. 안기부, 보안사 등 기관 예산은 천문학적으로 쓰면서 넝마를 주우며 폐품 재생산에 애쓰는 넝마집단을 도와는 못 줄 망정 쪽박을 깨려 하고 있다. 신문에 보니 국내 폐품 재활용율이 46%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가 알기로는 20%도 채 안 된다. 정부는 외국 폐지수입에 그만 열 올리고, 무슨 용역회산지 뭔지도 우리들 삶의 터전까지 말아먹으려고 생떼 쓰지 말고 폐지를 비롯한 고물가격 안정에 먼저 힘을 쏟아 주어야 할 것이다.

일본에서는 농민들로부터 쌀 한 가마니를 15만 원에 사서 소비자들에게 5만 원에 팔아 농민들 주름살도 펴 주고 시민가계도 도와준다는데, 우리도 국가예산으로 폐지를 1킬로에 200원 정도로 구입한 다음, 재생공장에는 30원이나 50원에 팔든지 해서 폐품 수집하는 사람들에게 생활안정 대책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참 정치를 실현하는 길이다. 국가예산 백억 원이면 폐품 재생산에 종사하는 백만 명의 식구들에게 안정된 생활을 하게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쓰레기 파 먹고 사는 백만이 넘는 우리 넝마주이들은 우리 스스로 국가경제에 이바지해 온 공로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이제부터는 우리들의 권리를 당당히 주장해야 한다. 요구할 것은 요구하고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이젠 함께 뭉쳐야 할 때라고 본다. 우리가 거지 노릇을 한 것도 아니고 새벽잠 설쳐가면서 먹고 살겠다고 고생했는데도 정당한 대우를 해주지 않는다면 우리의 밥줄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 갈라터진 손 마주잡고 우리가 지켜야 한다.

넝마 공동체 일동


<구청장님께>(주7)

우리들은 강남구 개포동 영동5교 다리 밑에서 쓰레기를 재활용하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문명의 이기인 모든 시설에서 제외된 채 20년 넘게 다리 밑에서 굶주림과 병마, 추위에 허덕이며 고통스럽게 살아오면서도, 한 번도 공공기관에 의지 않고 자립으로 살아오면서 더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눔과 섬김, 함께 사는 데 힘써 왔습니다.

철거하라는 최고 계고장을 보내면 마지막 다리 밑까지 밀려온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토를 주겠다고 해놓고 (다리 밑을 떠나는 조건으로) 사단법인이 안 되어 있어 곤란하다는 등 생색 아닌 생색도 많은 시간이 흘렀고, 기다리다 계고장을 받아든 우리들의 생각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윤팔병 형님을 축으로 하여 열심히 생활하여 우리보다 힘들게 사는 분들에게 나눔과 섬김으로 살아왔습니다. 우리들 사는 모습은 신문(7), 잡지(13), TV(5), 라디오(6) 등에 소개되었고 작가, 기자, PD들은 우리들의 생활을 잘 알고 있고 물심양면으로 열열히 성원하고 있습니다.

구청장님!

개포동 소재 혈액원 옆 시유지 땅은 우리들같이 땅이 필요한 사람들은 제외되어 있고 돈 가진 자들이 결탁하여 사고 팔고 나누어 먹는 부정과 비리로 얼룩져버린 사실을 구청장님은 알고 계시는지요.

시유지인지 사유지인지 분간이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구청장님께 건의합니다.

시유지 안에 주차장인가 테니스장인가 만들려고 비워둔 빈터가 있습니다. 그 땅을 우리에게 빌려주시면 다리 밑에서 힘들게 사는 우리들에게 크게 도움이 되겠습니다.

자립의 기틀이 되고 우리들이 오늘날까지 해온 대로 나눔과 섬김, 더불어 사는 일을 계속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999년 1월 15일

다리 밑 공동체 식구들 일동


- 다리 밑 식구들 현황 -

* 거주자 * 출소자 * 복역자

○ 윤팔병 ○ 임덕우 ○ 김영훈

○ 김차균 ○ 강대철 ○ 김규성

○ 정동진 ○ 박영민 ○ 임복건

○ 이한준 ○ 문영삼 ○ 잠 바

○ 김경배 ○ 신용욱 ○ 조일태

○ 신정희 ○ 임영규 ○ 신 립

○ 신재관 ○ 이도일 ○ 박건행

○ 박영철 ○ 달 마

○ 정수길 ○ 김금호

○ 김종태 ○ 이승구

○ 박경희 ○ 김윤호

○ 김원기 ○ 김승권

○ 송경산

○ 강창식

○ 장병하

○ 안태웅

○ 임성룡

○ 김자근

○ 김충기

○ 박현민

○ 조성일


<지난 일에 함께 고생했던 분들께>

"무식한 공동체 식구들에게 야학을 열어 문맹을 줄이려고 애쓰던 직장인들"

"병들어 신음하는 식구들에게 온갖 치료를 다해주던 의사, 한의사, 뼈 교정하는 분들"

"메마른 생활 속에 노동력과 정서를 심어주겠다고 사물놀이를 가르쳐준 국악 하시는 분들"

"넝마 공동체 회보를 계속 편집하여 책이 나오도록 헌신적으로 도와준 여러 출판사 분들"

"추렁을 메고 쓰레기통을 뒤져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며 실천으로, 나눔과 섬김의 세상을 배우겠다고 방학 때 현장에서 함께 하던 학생들"

"6년간 월급 한푼 없이 거칠고 무자비한 형들과 넝마 공동체 총무로 뭐 빠지게 고생만 하였던 80학번 송경상"

경상이가 떠날 때 남긴 말 '내 생애 가장 값진 체험이 될 것입니다.'


지난 일에 함께 고생했던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고맙다는 인사드린다.



<미주>

1) 도둑놈 강조주간을 정하여 형사들에게 몇 명씩 도둑놈을 잡으라고 할당이 내려온다. 그러면 도둑놈들을 숨어들고 애매한 양아치들을 잡아간다. 이러한 일이 있으면 경찰에서 몇 사람 잡아가겠다고 흥정이 들어온다.

2) IMF 이후 노숙자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부인은 식당에 나가고 남편은 노동판에 나가서,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낸다. 그러나 한달 정도 노숙생활을 하면 대개는 더 이상 노동판 일도 하지 않으려고 하게 된다. 이런 노숙자들을 받아들여 함께 하도록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10여명(어른 남자 기준) 이상의 노숙자들이 들어왔고, 계속 들어오고 있다. 중국인 부부, 6개월 된 아기를 가진 젊은 부부도 들어왔다.

3) 3*6m 되는 크기의 철판 구보물로 현재 12개가 있다. 하나를 만드는데 2백만원 정도 든다.

4) 작업장에 가까운 곳에 장기수 할아버지들이 노점상을 열었다. 내가 모아온 재활용품들을 가져다가 할아버지들이 판매하였는데, 등산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서 하루 10-15만 원 어치씩 팔곤 하였다. 1년 정도 계속하였고, 각지의 장기수 할아버지들이 놀러 오시곤 했다.

5) 장기수 선생님들과 알게 되면서 1995년 과천에 방 3개 짜리 거처를 마련하여 몇 분들이 생활하시도록 하였다. 일명 '고향의 집'에서 생활을 꾸려 가지다가 작년에 자원봉사자들이 식사 등을 해 주는 '한백의 집'으로 옮기셨다. 그리고 여기에 내가 지금 살고 있다.

6) 1990년 자원재생공사가 만들어지면서 넝마주이들을 위협하던 때에 넝마공동체에서 시민들에게 호소한 전단.

7) 다리밑에 설치해 놓은 컨테이너 등 작업장들을 철거하라는 구청의 수십 차례에 걸친 경고에 대해 넝마공동체 성원들이 강남구청장에게 보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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