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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뒤흔든 세계 노동자 파업

<<기획연재>> 20세기를 뒤흔든 세계 노동자 파업 ①
1905년 러시아 대중파업

                                                           이가림 <카피레프트모임>
독일의 겨울 날씨도 동유럽에 못지 않았다. 12월의 프리드리히역은 사람들이 내뿜는 입김과 출발을 앞둔 기관차가 토하는 증기가 섞여 마치 안개 속에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속에서 한 일가가 전선으로 떠나는 아들을 배웅하는 것마냥 상기된 얼굴들로 한 키 작은 여인을 배웅하고 있었다. 남편 칼이 다소 어설픈 몸짓으로 이 여인, 로자 룩셈부르크의 어깨에 여행용 모포를 덮어 주는 가운데, 카우츠키 부인은 웃음을 머금은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불안한 눈빛으로 그녀의 손을 놓을 줄 몰랐다. 뭔가에 깊이 흥분한 듯 안절부절 못하던 그 작은 여인은 출발을 재촉하는 기적 소리에 맞추어 손을 뿌리치며 마치 소녀같이 달뜬 목소리로 소리쳤다. "자, 루이제, 이제는 일터에 갈 시간이에요." -- 그녀는 어디로 가는 길인가? 폴란드로, 그리고 핀란드를 거쳐, 다시 러시아로. 대체 그곳에 무슨 "일"이 그녀를 기다리기에? 올해 1월부터, 아니 로자 자신의 생각에 따르면 1903년부터 시작하여 그때까지 최소한 12개월 이상 요동친 파업의 물결이 ...
뉴스거리에 목말라 하던 서유럽의 신문가에 놀라운 전보가 타전된 것은 그 해 1월 9일이었다. 한 명의 신부가 이끄는 20만명의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막연한 자비를 꿈꾸면서 차르의 궁전을 향해 찬송가를 부르며 행진하다가 총알 세례를 받았다는 소식. 500명이 죽었다고도 하고 150명이라고도 했다. 수도 페체르스부르크에서는 곧 총파업이 벌어졌고, 파업의 물결은 거짓말 같이 러시아의 전역으로, 그 광대한 대륙의 곳곳으로 퍼져갔다. 처음에는 노동자들이 선도했고, 다음에는 도시의 중간계급들이 동참했으며, 해빙기가 되어서는 반란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농촌이 없었다. 6월에는 포촘킨호의 수병들까지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는가! 독일 사회민주당의 그 누구도 신문의 보도 내용들을 단박에 믿을 수는 없었다. 중세 농민들의 사촌쯤으로 여겨지던 러시아의 노동자들은 이제 서유럽 노동자들이 단 한 번도 펼쳐보인 적이 없는 정치 행동의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벌써 1년이 다 되었다. 한때 소강 상태를 보이는 듯 하던 대중들의 파업은 두 달 전인 10월에 다시 한 번, 이제까지의 돌풍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폭발적으로 타올랐다. 모스크바의 인쇄공들로부터 시작된 10월 총파업은 곧바로 러시아의 모든 철도망의 마비를 불러왔고 급기야는 대학이나 관공서까지 모두 일을 놓았다. 차르의 대신들이 호수 너머 별궁에 내려간 차르를 만나기 위해 손수 노를 저어야 할 판이라는 기사 따위가 마치 지난 5월 러시아 함대가 일본 연해에서 대패했을 때처럼 적대국 러시아에 대한 통쾌한 복수라도 되는 양 독일 신문들을 장식했다. 결국 10월 17일 차르는 제헌의회의 소집을 약속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하지만 ...', 수레 짚더미에 숨어 떠난 지 17년만에 마주하는 조국 폴란드의 황량한 겨울들판이 눈에 들어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면서 로자는 최근의 소식들을 골똘히 되씹었다. '페체르스부르크에는 소비에트라는 노동자들의 대의기구가 만들어졌었다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또 모스크바는 ...' 기차가 어두운 수풀을 지나치면서 그녀의 얼굴에 잠시 어둔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작은 신음소리에, 신문을 펼쳐들고 있던 정장 차림의 옆자리 신사가 그녀 쪽을 곁눈질했다. 남자의 눈길을 피하려던 그녀의 두 눈이 열흘이 지나서야 그 전모가 밝혀진 모스크바에서의 노동자 학살 소식에 꽂혔다. '노동자 밀집지역인 프레스니야에 뿌려진 천 명의 피.'
총파업 와중에 페체르스부르크의 파업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대표를 뽑아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라는 대의기관의 탄생을 선언했다. 차르의 성명서가 발표되기 사흘 전에 결성된 이 기구는 차르의 마지못한 양보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자유!" "8시간 노동 쟁취!"를 외치며 두 달을 더 버텼다. 페체르스부르크 소비에트의 대의원들이 체포된 12월 3일로부터 닷새 뒤 모스크바 소비에트는 재차 파업을 선언했고 15만 명이 이 파업에 합류했다. 그리고 다시 파업 발발 이틀만에 차르 정부에 고용된 극우 깡패 집단들이 파업 대오를 공격하려 한다는 소문이 무성한 가운데, 노동자들은 권총과 갖가지 원시적인 무기들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결국, 입헌 개혁을 약속한 그 정부의 대답은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한 천여 명의 노동자 가족들의 학살이었다.
'처음부터도 그건 폭력에 대한 분노였지.' 로자는 동유럽의 전선으로의 여행을 결심하기 일주일 전 사회민주당 신문 [전진]의 편집회의실에서 벌어졌던 논쟁을 떠올렸다. -- "사실 이번 파업의 뿌리는 1902년 11월까지로 거슬러 올라야 해요." "그건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선동이요", 11월에 전원 좌파로 교체되었다는 이 신문의 편집위원들 중 한 명인 하인리히 쿠노브는 사회민주당 간부들 사이에서 낯설지 않은 거만한 자세로 대꾸했다. "이미 그 때 로스토프에서는 지금과 똑같은 총파업 형태가 등장했었어요. 노동자들은 독일 노조들과 다를 바 없는 경제적 요구를 내건 파업을 벌였는데, 이에 대해 경찰 당국은 파업 시위대를 유혈 진압하는 것으로 대응했죠. 그러자 폭력에 대한 분노는 이 단순한 경제파업을 삽시간에 지역의 모든 노동자들이 참여하는 정치적 총파업으로 발전시켰어요." "그래요?" "그리고, 이때부터 한 지역이 사그라들면 러시아의 다른 한 지역에서 이 소식을 듣고 다시 이와 똑같은 파업 양상을 되풀이하고 한 것이 바로 1903년과 1904년의 상황이었던 거예요. 그리고 이러한 양상은 이제 올해 들어 러시아 전역에 걸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거죠. 이러한 사태전개는 여기 독일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붉은 로자 양. 당신은 그럼 러시아의 저 반폭동 형태의 소위 파업투쟁이 우리가 따라 배워야 할 뭐라도 된단 말입니까? 그건 단지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사회민주당의 합법화가 채 이뤄지지 못한 러시아의 특수한 상황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그녀의 두 뺨은 그녀의 별명만큼이나 붉어지고 목소리는 높아졌다. "쿠노브 동지, 그럼 당신은 독일 노조의 거물들이 마치 자신들의 연설 속에서나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되뇌기만 하는 저 '준비된' 정치적 총파업이 지금 우리 눈 앞에 펼쳐지는 살아있는 파업 물결보다 더 대단하기라도 하단 말씀인가요?"
물론 쿠노브는 묵묵부답이었다. 하지만, 이 새로운 투쟁의 논리는 사실 그녀에게도 결코 분명한 것이 아니었다. 아까부터 조국의 풍경조차 가로막으며 로자의 머리 속을 떠나지 않던 의문들도 바로 이에 관한 것들이었다. 분명히 서유럽의 자칭 좌파 신사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대중운동의 논리가 러시아의 민중들에 의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이제까지 개별 노조의 협상용 수단으로나 여겨지던 파업이 파업과 파업을 서로 잇는 전 노동대중의 파업 물결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물결 속에서 민중들은 삽시간에 서유럽에서 30여 년이 걸려서야 이뤄졌던 수준의 정치적 의식을 획득하고 자신들의 조직을 만들어나갔다. 그 뿐인가. 임금인상과 작업조건 향상, 노동시간 단축을 두고 벌어진 경제파업은 차르의 압제에 대항하여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정치파업으로 발전했다. 실제로 10월 총파업을 이끈 인쇄공들의 파업은 독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제파업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일단 타오른 정치파업은 다시 소강국면 속에서 새로운 경제파업들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독일 노조들이 항상 조직화 불능의 영역이라고 치부하던 주변적 노동자들, 이 미조직층들이 단숨에 노동운동의 최전선에 나섰다. 서유럽에서 흔히 하루 이틀에 끝나고 마는 총파업 투쟁이 '대중파업'이라고나 해야 할 이러한 양상으로 발전하는 그 논리란 무엇인가? 제국의회에 의석수는 늘리면서도 늘 벽에 부딪힌 것만 같았던 독일 노동운동에 이는 과연 어떤 교훈을 던져주는 것인가? 어느새 차창 밖에는 어둠이 내리깔리고 있었다. 눈덮힌 들판이 하얗게 빛났다. 옆의 신사는 어느새 입을 잔뜩 벌린 채 코를 골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배우러 가는 것이다.' 들판을 따라 그녀의 눈빛도 빛을 발했다. 모스크바의 학살 소식에도 아랑곳없이, 러시아령인 조국 폴란드는 여전히 총파업중이라는 소식이었다. '투쟁하는 자들의 눈빛 속에는 ... 그들의 숨길 가운데는 ...'
기차는 잠조차 잊은 그녀의 번민은 아랑곳 않은 채 전선을 향해 달려나갔다. 모두가 잘 아는 그녀의 나머지 이야기들은 이제 우리의 몫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바로 이 기차에 승차하여 그녀와 함께 여행할 것이다. 20세기의 파업의 역사를 꿰뚫으면서 바로 그 대중운동의 논리를 발견하고자 하는 여행. 기차는 20년대의 영국, 30년대의 미국과 60년대 프랑스, 이탈리아 등을 거쳐 80년대의 한국과 지금 이 90년대로까지 치달을 것이다. 자, 우리 함께 떠나보자.                                                        [인터내셔널뉴스 72호]


<<기획연재>> 20세기를 뒤흔든 세계 노동자 파업 ②
1929년 원산총파업

                                                           김덕련 <카피레프트모임>
질문 하나. 20세기 한국의 파업 중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것은? 아마도 많은 이들이 88년 겨울에서 89년 봄까지 128일 동안 지속되었던 현대중공업을 떠올릴 것이다. 그럼, 시기를 일제 식민지기로 한정한다면?
네달동안 지속되면서 식민지 조선을 뒤흔들었던 1929년 원산총파업. 그 기억을 다시금 떠올리는 것으로부터 20세기 한국의 파업, 그 궤적을 살피는 첫걸음을 내딛어보자. 원산이라 하면 당신은 무엇이 떠오르는가? 관광명소에 관심이 많은 이라면 지금은 가볼 수 없는 명사십리와 송도원 해수욕장의 절경을 상상 속에 그려보겠지만, 잠시 접어두고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개항된 항구 중 하나라는 것에서 시작해보자. 개항 이전 '대부분 황량한 갈대밭으로 잡초가 무성한 들판'이던 원산은, 러시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서 눈여겨본 일본에 의해 대외 예속적 경제구조를 지닌 상업도시로 변모한다. 또한 평양, 서울, 수원 등 전통적 시장을 지닌 지역에서와 달리 원산의 공업자본은 일본을 상대로 한 수출품 가공 및 수선 위주였기 때문에 일본자본이 확대될수록 같이 성장할 수 있는 요소가 강하여 민족자본이라는 범주가 다른 곳에 비하여 훨씬 미약했다. 노동 역시 항구라는 특성을 반영하여 전근대적 노동조직과 취업의 불안정성으로 특징지워지는 부두노동자들이 중심을 이루게 된다.
노동조직의 전근대성, 정확히 말해서 온정주의적 노동관계는 원산총파업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원산노동연합회(원산노련)의 전신이었던 원산노동회의 결성(1921년)은 3.1운동 이후 증대되던 사회주의의 영향 아래 노동조직이 결성되던 당시의 전국적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봉건적 유대관계를 기반으로 한 온정주의적인 관행에 물들어 있던 도중(都中)을 기본단위로 한 것이었다. 특정 구역을 중심으로 노동공급권을 배타적으로 확보한 십장이 일자리를 제공하는 대신 임금의 일정한 몫을 착취하는 단위인 도중이라는 온정주의적 관계는, 노동단체의 대중적 기반을 넓히는 데 기여한 측면도 있지만 동시에 개량주의의 주요한 원천으로서 작용했다. 사회주의의 보급과 노동대중의 의식적 자각을 통해 갈수록 약화되긴 했지만 완전히 불식되지는 않았다. 이렇게 설립된 원산노동회는 40여 개 도중의 연합체 형식이었으며 초기에는 객주(당시 고용주)조합에 강하게 예속되어 있었다. 그러던 중 1925년 1월 객주조합에 대한 파업을 승리로 이끌면서 '지휘감독을 받는다'는 조항을 철폐하고 11월에는 7개 노조의 연합체로 개편함과 동시에 명칭도 원산노련으로 바꾼다. 이후 부두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인쇄 등 다른 직종까지 포괄하여 명실상부한 직업별 노조의 지역연합체로 발전했지만 주력은 여전히 부두노동자들이었다. 원산노련은 이후 눈부신 성장을 한다. 25년 이후 20여 회의 파업을 승리로 이끌었고 파업기금 적립, 소비조합 및 자체의 노동병원을 운영할 정도로 막강한 역량을 갖추게 된다. 더욱이 29년 이전의 파업 중 가장 규모가 컸던 27년의 파업승리를 통해 원산의 부두노동에 한해 기존의 십장-객주라는 고용관계 대신 원산노련이 단체계약권을 획득한 것은 주목할 만한 성과였다. 29년 총파업 과정에서 일제 권력과 자본이 본질적으로 노린 것도 단체계약권의 박탈 및 그를 통한 원산노련의 무력화였다. 더욱이 당시 한반도 북부 지역에 중화학 군수공업을 이식하고 있던 일제로서는 대륙침략을 위한 안정적 병참기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막강한 원산노련을 그대로 둘 생각이 없었다.
총파업의 발단은 1928년 말 문평제유라는 원산 인근의 한 회사에서 있었던 조선인 노동자 구타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일본인 중간관리자에 의한 구타로 문평제유노조가 파업에 돌입했고 상위기관이던 원산노련은 우여곡절 끝에 교섭을 성사시켰다. 이 때 회사 측은 구타자 해고에는 동의했지만 단체 계약과 관련된 사항은 3개월 뒤로 논의를 미루었다. 하지만 결국 지키지 않았고, 자본금이 흥남비료의 10배를 넘을 정도로 거대기업이던 문평제유에 단체계약권을 관철시킬 기회로 파악한 원산노련은 1929년 1월 14일 파업을 선언하게 된다. 자본측이 파업참가자들에 대한 무조건 해고 및 앞으로 원산노련 소속의 노동자들을 고용하지 않겠다고 선포하고, 일제 당국이 군대까지 동원하여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면서 국면은 전면전으로 변했다. 초기 상황은 원산노련 쪽에 유리했다. 일제와 자본은 관제신문들을 통해 매일같이 이데올로기 공세를 하는 동시에 대체노동력을 투입하여 파업의 공백을 메워보고자 했지만 파업규찰대의 활약에 의해 원산은 물론 인근 지역에서도 대체노동력을 모집하는 데 실패했다. 국수회라는 파시스트 단체를 멀리 인천까지 파견하여 겨우겨우 수백 명을 모아왔지만 숫자 자체도 턱없이 부족했을뿐더러 반강제로 끌어온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작업장에서 탈주하는 이들이 늘어나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게다가 원산노련 측은 식량과 자금 모두에서 충분히 대비를 한 상태였고, 폭동을 자제하면서 규율을 유지했기 때문에 전국적인 여론도 불리하지 않았다. 덕분에 각지에서 지원기금과 격려전보가 쇄도하고, 현지의 일본인 노동자들조차 원산노련에 동의하면서 파업을 전개하는가 하면 아직 원산노련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였던 노동자들이 파업 기간 중 자유노조를 결성하여 원산노련에 가입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4월까지 지속되었던 파업은 결국 패배했다. 물론 원산노련의 활동이 절정에 달하여 승리가 가까워졌던 1월 말부터 일제가 보다 노골적으로 개입(소비조합 수색, 규찰대 검속, 집행위원장 김경식 검거 등)했고 2월부터 자본이 조직한 함남노동회라는 어용단체에 일부 노동자들이 넘어가면서 대오가 흐트러진 점 등이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지만 문제는 그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었다.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치밀한 계획을 세워 원산노련 자체를 소멸시키기 위한 목적을 일관성 있게 밀고 나간 일제와 자본과는 달리, 원산노련의 지도부들은 교섭과 협상을 통해 적절히 타협할 수 있다고 상황을 오판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 점은 김경식 검거 이후 지도부를 구성하긴 했지만 굴욕적인 양보와 타협안을 제시하고 노자협조주의적으로 강령을 개정하는 등 수세적인 자세로 일관했던 김태영 지도부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요즘도 '원산노련의 뛰어난 운동가'로 기억되곤 하는(해방 이후 남한의 연구사에서 지속적으로 거론되는 바이며 최근에 나온 방현석의 {아름다운 저항}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김경식 지도부 역시 김태영 지도부에 비해 노동대중과 보다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긴 했지만 타협주의로 일관하면서 전체 노동대중의 역량을 최대한 끌어내지 못한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물론 노동자를 위한 상호공제적 제도들을 만들어내면서 노동대중의 광범위한 동의를 끌어낸 부분은 인정해야겠지만, 전면전이라는 악재를 뚫고 나가기 위한 적극적인 전략을 내지 못했던 점도 동시에 기억될 필요가 있다. 또한 여기에는 김경식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돌려버릴 수만은 없는 뿌리깊은 문제가 있으니, 앞에서 지적했던 온정주의적 전통이 바로 그것이다. 온정주의적 속성을 지닌 개량주의적 요소는 사회주의자들이 활발하게 개입했던 26-28년 경에는 적어도 외적으로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저류에서 원산노련의 기반을 이루고 있었다. 예를 들면 조합주의를 넘어서는 활동과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던 28년에도, 다른 한편에서는 기존의 조합원총회를 폐지하고 대의원회를 최고기관으로 하며 그 대의원회를 집행위원장이 주도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결정이 내려져 기층노동자의 자발성과 직접참여를 제한했고, 소속 노동자의 임금을 모두 모아 평등하게 분배하던 임금평균분배제도에도 공목(空木, 거저 얻는 돈이란 뜻으로서 조합기금과는 별개로 노련 및 도중에게도 1인분의 임금을 분배하는 것)이 기존의 온정주의적 관행 및 의식과 결부되면서 조직 내의 개량주의와 관료주의적 요소를 강화하고 이것은 역으로 민주적 운영을 가로막는 부정적인 역할을 한 것에서도 이러한 측면이 잘 드러난다. 특히 총파업 직전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원산노련의 사회주의자들이 대거 검거됨으로써, 온정주의 전통에 기반해 있던 김경식 지도부를 견제할 만한 세력이 약화되면서 개량주의적 전술이 파업 기간에 더욱 강화된다. 물론 파업 기간 중에도 선진노동자들로 이루어진 일부 규찰대들은 자본가들과의 협상이나 일제의 조정을 기대하던 지도부들과는 달리 기층에서 투쟁적 자세를 견지하면서 오랜 기간을 견딜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했지만 지도부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상황에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것이 지도부의 적극적인 전략과 결합될 수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으리라.  
원산총파업은 합법공간 위주로 활동했던 20년대 노동운동의 상황이 최대한 발현된 것이자 그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 직후 본격화되는 노동운동의 방향전환 논쟁도 20년대 노동운동에 대한 이러한 평가를 기본적으로 전제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후의 방향전환론에서 공통적으로 제기된 것들은 비합법 영역에 대한 관심, 조합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정치투쟁의 중요성, 산별노조 건설론으로서 이것들은 30년대의 당재건운동론과 연동되어 등장한다. 그리고 이후 민족해방운동론에서 민족부르주아지 대신 노동대중이 부각된 것도 원산 총파업 과정에서 드러난 조선인 중소자본의 행태, 즉 일본인 대자본과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시기에는 부분적으로 이탈하기도 하지만 자본진영의 승리가 확실시되는 국면에서는 대자본과의 동맹관계를 분명히 하는 기회주의적 양태에 대한 평가에 기반한 것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패배 이후 원산의 노동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한 축에서는 온정주의적 지도부가 배제되면서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한 노련의 재건시도가 지속적으로 있었고, 다른 한 축에서는 부득이 어용단체인 함남노동회에 가입한 노동자들의 노조민주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20년대의 경험을 통해 얻은 투쟁의 전통이 기층에 잠재해 있긴 했지만, 원자화된 노동자 상호간의 경쟁과 갈등, 무기력과 비관주의가 노동계급의 일상으로서 한동안 지속되었고, 대공황의 타개책으로 자본이 강요한 산업합리화 정책에 따라 노동계급 내에서도 노령자, 부상자, 실업자 등이 완전히 도태된다. 패배의 후유증으로 인해 온정주의의 마지막 영역조차 지켜내지 못하는 상황, 바로 그것이었다.
                                                             [인터내셔널뉴스 73호]


<<기획연재>> 20세기를 뒤흔든 세계 노동자 파업 ③
이탈리아의 붉은 두 해

                                                           이가림 <카피레프트모임>
역사의 바람은 다시 한 번 동방으로부터 불어왔다. 1905년의 대중파업을 뒤늦게 완성하기라도 하려는 듯 1917년 2월에 시작된 러시아 혁명의 바람은 전쟁의 참화에 싸인 서구를 강타했다.  
이 바람을 가장 적극적으로 환영한 나라는 이탈리아였다. 세계대전 중반쯤에야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가한 이탈리아에서는 전쟁이 지극히 상반된 현실을 초래했다. 한편에서는 노동자, 농민의 자식들이 전선에 끌려가 개죽음을 당하는데, 그 가족들은 생필품 부족과 물가고에 허덕였다. 다른 한편 자본가들은 군수물자 생산으로 유례없는 호황을 맞이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의 소식은 기름 가마에 던져진 횃불이었다. 1917년 8월 빵 배급이 중단되는 사태가 빚어지자 자동차 등 금속산업이 발달해 있던 북부 토리노시(말하자면 '이탈리아의 울산')에서는 당장 "러시아식" 투쟁이 시작됐다. 바리케이드에서 군대와 노동자 사이의 교전이 벌어졌고 50명의 노동자가 희생됐다. 이 사건은 이후 3-4년 동안 지속된 대중투쟁 물결의 전조에 불과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1905년의 대중파업을 관찰하면서 지적했던 수년간의 대중투쟁 물결이 드디어 서유럽 국가인 이탈리아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탈리아 사회당(PSI)의 어조는 갈수록 급진화되어갔고, 민중들도 지배자들도 혁명적 변화가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고들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이들 투쟁의 끝없는 진앙지 역할을 한 이 도시, 토리노를 주목해야 한다. 이 곳에는 이탈리아 전국을 선도한 금속 노동자들의 지성과 열정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자들의 힘을 실물화시켜내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한 몇 명의 놀라운 젊은이들이 또한 있었다. PSI의 젊은 당원인 안토니오 그람시, 팔미로 톨리앗티, 안젤로 타스카, 움베르토 테라치니, 이들은 1919년 메이데이에 맞춰 <신질서(Ordine Nuovo)>라는 잡지를 창간하여 이 잡지를 통해 눈 앞에 진행되는 대중투쟁에 제공할 지적인 무기를 개발하고 널리 선전하는 데 몰두했다. 이들은 대중파업의 도도한 밀물조차 그 투쟁의 와중에서 기존 질서를 대신할 민중들 자신의 사회 질서의 핵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결국 기존 질서와의 타협으로 끝나버릴 것이란 점을 누구보다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러시아에서는 1905년에 처음 등장하고 1917년에는 결국 새로운 권력의 기반이 된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가 그것이었다. 이탈리아에서 이는 과연 무엇일까?
이들이 주목한 것은 전시에 이탈리아 각 공장들에 등장한 내부위원회라는 것이었다. 1919년 2월에 자동차산업 단체협상을 통해 공식적 인정을 받은 내부위원회는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위원회의 중심이 되되 비조합원을 포함하는 모든 노동자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새로운 조직체였다. 그 해 6월에 <신질서>에 발표된 역사적인 논문 [노동자 민주주의]에서 그람시는 이 내부위원회가 자본가들 없이 노동자들이 직접 생산을 통제할 기관인 공장평의회로 발전해야 하며 또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화답이라도 하듯 2개월 뒤 토리노 자동차산업의 중심인 피아트 공장에서는 내부위원회가 자발적으로 해산한 뒤 보다 대규모의 대의원들로 구성된 공장평의회를 결성했다. 10월말까지는 5만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공장평의회로 조직되었고, 연말에 이르러 그 숫자는 15만명까지 늘어났다.
이러한 발전의 분수령은 사실 그 해 6월 20일-21일 양일간에 걸쳐 조직되었던 총파업이었다. PSI는 러시아, 헝가리 혁명 정부에 대한 연합군의 불법적 침공을 규탄하자는 의도에서 국제연대 총파업을 제안했고, 이는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 당시 러시아혁명에 대해 열렬한 지지를 보낸 제2 인터내셔널 출신 정당은 PSI 하나뿐이었고, 실제로 이 당은 의원단의 상당수가 개량주의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적인 제3 인터내셔널에 가입했다. 그러나 대중들은 총파업의 성공을 계기로 보다 높은 수준의 투쟁의 시작을 기대했지만, PSI 지도부에게 총파업은 단지 당의 혁명 수사를 충족시켜주는 일과성 행사에 불과했다. 당은 다시 한 번 11월로 예정된 선거 준비와 당내 파벌간의 논쟁에 몰두할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토리노의 노동자들과 젊은 당 활동가들만이 끊임없이 미래로의 문을 두드렸던 것이다. 1919년 12월 3일에 최초로 토리노 시 전체 차원의 공동행동을 시험한 공장평의회 운동은 다음 해 3월 자본가들의 대대적인 반격에 직면했다. 자본가들은 느닷없이 섬머타임제의 실시를 일방 선포한 뒤, 이에 반대하는 내부위원들을 모두 해고시켜버렸다. 이에 대해 토리노의 노동자들은 최초로 공장점거 전술을 사용하는 것으로 대항했다. 이 때의 점거는 자본가들의 신속한 공장폐쇄로 곧 소강상태에 빠졌지만, 그람시 등의 <신질서>그룹은 바로 이 때가 이탈리아 전역에서 공장평의회를 만들어 전국적인 공장점거 투쟁을 벌일 시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탈리아 노동총동맹(CGL)은 4월 13일 형식적인 총파업을 선언하는 것으로 그만이었다. 전국적인 공동 강령과 행동을 만들어내려는 어떠한 시도도 없이 이뤄진 이 총파업 결정은 단지 전국적인 소강국면만을 만들어주었을 뿐이다. 6월에 막 정권을 잡은 지올릿티의 자유주의 정부는 이 기간 동안 노동자 혁명의 가마솥을 노자타협이라는 식은 죽 단지로 만들 공작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여름 내내 진행된 지리한 임금협상 과정은 자본가와 정부의 의도적인 시간 끌기로 일관되었다. 참다 못한 50만의 토리노 노동자들은 1920년 8월 31일, 공장점거의 재개로 답했다. 이제 공장평의회는 아예 공장 경영진의 사무실을 장악하고 사장 없이 생산을 재개했다. 공장평의회가 자본가 없는 세상의 견인차가 되어야 한다는 <신질서>그룹의 생각에 직접적으로 영향받은 이 시도는, 비록 평소 생산량의 절반 정도이긴 했지만, 피아트 공장에서 매일 37대의 자동차가 생산되는 것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탈리아 자본가들의 황제인 아넬리 회장 없이, 이사들과 사무직원들 없이, 작업반장들과 공장 경찰들 없이 말이다!
하지만 토리노뿐이었다. 다른 지역에서도 공장평의회와 점거투쟁의 시도가 있었고, 금속부문 이외의 노동조합에서도 동참의 기운을 보이긴 했다. 하지만 CGL은 대중투쟁의 계속보다는 지올릿티의 협상 제안에 더 솔깃했다. PSI의 주류인 좌파는 공장점거를 전국적인 대중투쟁의 출발로 삼자고 CGL에 제안하긴 했지만 아무런 구체적인 전술도 준비되지 못한 책임회피성 제안에 불과했다. CGL은 결국 지올릿티의 타협안을 받아들였고, PSI는 10월 31일-11월 7일에 있을 지방선거 준비에 다시 골몰했다. 노동자들이 얻은 것은 그들이 경험한 실질적인 공장점거 대신 '경영참여'라는 새로운 수사뿐이었다.
하지만 더 나쁜 것은 일단 공장점거라는 형태로 이뤄진 대중투쟁의 물결이 어정쩡한 타협으로 끝나자 자본가들과 온갖 반동세력이 본격적인 반격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물론 '붉은 2년' 동안 PSI는 획기적인 성장을 했다. 득표수는 2백만으로 늘어났고, 전체 508개 의석에서 156석을 차지했으며, 당원 수는 2만명에서 18만명으로 증대했다. CGL도 마찬가지여서 조합원이 25만에서 200만으로 늘어나는 성장을 맛보았다. 하지만 노동대중의 변화에의 열정을 조직할 아무런 프로그램도 가지지 못한 채 이뤄진 이런 양적인 성장은 빈 껍데기에 불과했다. 1920년 11월 21일 PSI가 밀라노와 볼로냐라는 이탈리아 최대 도시들에서 시정부를 장악한 것을 기념하며 개최한 집회에서 울려퍼진 파시스트들의 수류탄 굉음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노동대중들의 물결이 흐지부지된 뒤에 도래한 것은 바로 그 노동대중의 학살을 동반한 반동의 물결이었던 것이다.
누구보다도 이 2년간의 기억을 쉼없이 되씹었던 것은 바로 그람시였다. 결정적인 문제는 토리노 노동자들의 선도에 따라 불붙었어야 했을 전국적인 화답의 부재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능성은 충분했다. 남부의 농민들은 토지문제로 신음하고 있었고, 실제로 일부 지역에서는 토지점거가 시도되기도 했다. 재향군인들조차 처음에는 파시스트가 아니라 좌파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하지만 PSI와 CGL은 이런 가능성을 살려내지 못했다. PSI에게는 남부 농민들에 뿌리내린 조직도, 그들을 동원할 강령도 없었다. '대중들의 약동을 실질적인 전국적인 힘으로 조직할 그런 정당, 이탈리아 사회의 구체적인 얼개를 이해한 뒤에 제시되는 강령이라는 무기, 그게 있었다면 .... 그게 필요하다!' 벌써 모든 것이 먼 옛날의 일처럼만 느껴지게 된 1921년의 1월에 사회당 전당대회를 위해 리보르노로 향하던 그람시의 가슴 속은 이러한 상념들로 차 있지 않았을까? 우린 그 상념을 따라 다시 새로운 기착지를 향해 떠나야 한다.
                                                             [인터내셔널뉴스 74호]


<<기획연재>> 20세기를 뒤흔든 세계 노동자 파업 ④
1930년 평양 고무노동자 총파업

                                                           김덕련 <카피레프트모임>
공상 하나. 일상생활에서 전통에서 근대로의 이행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무엇일까? 한복에서 양복으로의 변화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짚신에서 구두로의 변화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하지만 신발의 경우엔 고무신이라는 친근한 요소를 그 사이에 끼워넣어야 한다. 이번 호에 살펴볼 것도 바로 그 고무신과 관련된 것이다.  
짚신을 제치고 고무신이 대중적으로 보급된 것은 1920년대 들어서였다. 대중적 보급에 따른 수요의 급증을 통해 비약적으로 발전한 고무공업은 일제 시기 동안 조선의 중소공업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고, 그 고무공업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 것이 바로 고무신 제조였다. 전체 공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걸맞게 노동자들의 투쟁 역시 활발하여 파업 회수 또한 전체 부문에서 수위를 다툴 정도로 많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원산총파업에 버금가는 제2의 대파업'으로 불리는 1930년 8월의 평양 고무노동자 총파업이었다.
뜨거웠던 30년 여름의 투쟁을 온전한 모습대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평양이라는 지역적 특성과 고무공업이라는 업종의 특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울, 부산과 함께 고무공업의 중심지였던 평양은 당시 한반도에서 기독교와 민족주의 세력이 가장 강력한 곳이었으며 그 기반이 된 조선인 자본에 의한 공업이 어느 곳보다도 발달한 지역이었다. 조선인 자본은 비교적 적은 자본으로 시작할 수 있는 부문에 주로 진출한 중소자본으로서, 이른바 '민족자본의 산실'로 불렸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평양에서는 조선인 자본이 일본인 자본을 압도하고 있었으며 그 대표적인 업종이 양말과 함께 고무공업이었다. 이처럼 조선인 자본 중심이었다는 것이 일본인 대자본 위주로 고무공업이 발달했던 부산과 다른 점이었고, 고무공장 수가 서울에 비해 적긴 했지만 공장지대가 밀집해 있었다는 점에서 서울과도 달랐다. 전자는 20년대 초의 물산장려운동이나 실력양성론 등과 결합되면서 (항구도시의 부두노동자들 사이에서 도중이라는 독특한 노동조직으로부터 기원한 것과는 다른 이유에서) 온정주의적 분위기를 만들어냈고, 후자의 밀집성은 서울에 비해 노동운동이 더 활발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였다.
이제 이 시기 고무공업의 특징을 살펴보자.
가장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계절적 휴업'이 일상적으로 행해졌다는 것이다. 주 생산 품목이었던 고무신에 대한 수요가 계절에 따라 들쑥날쑥했기 때문에(예를 들면 1-3월은 수요가 거의 없고 추석을 앞둔 시기가 가장 바쁜 시기였다) 공장은 대개 주문이 있을 경우에만 가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고무공장이 1년 내내 작업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고 계절에 따라 노동시간이 다르거나 조업단축으로 직공수를 줄이는 등의 변화가 심했다. 이로 인한 고용의 불안정성은 노동의 교섭력을 약화시키고 노동자의 생활상태를 더 열악하게 만든 핵심적인 요인이었다.
두 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은 다른 업종에 비해 여성노동과 아동노동의 비율이 높았다는 점이다. 고무공업 자체가 비교적 중소 규모의 설비에 의한 노동집약적 산업이었기 때문에 소수의 남성 숙련공을 제외하면 대개의 직공은 값싼 임금으로 고용할 수 있는 여성으로 충원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특히 대공황을 거치면서 이 부문에서 생산과잉 및 판로경쟁이 더 격화되면서 값싼 여성노동력은 더욱 선호되었다. 30년대 중반 이후가 되면 상황은 약간 달라지는데, 새로운 기계의 도입을 통해 작업이 세분화·단순화됨과 동시에 노동운동을 제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성인)여성노동을 아동노동(물론 이 중에는 여아들도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다)으로 대체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어쨌든 여성노동자 비율이 높다는 점을 반영하여, 이 시기 고무공업에서의 파업 중 대부분은 여성노동자들이 주도한 경우가 많았다. 특기할 만한 건 이 시기 고무공업에 종사하는 여공의 대부분은 '어린아이를 가진 기혼여성 노동자'들이었다는 것인데, 이 점은 70년대 남한의 민주노조운동을 주도한 층이 미혼여성 노동자들이었다는 사실과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이 두 번째 특징은 특히 평양 고무노동자 총파업과 관련시켜 생각해 볼 때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다른 지역(특히 부산)과는 달리 평양의 고무공업을 주도한 것이 조선인 자본이었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전국적으로 보았을 때 원료구입이나 자본조달에서 일본인 대자본에 비해 불리한 조건에 놓여있던 조선인 자본가들은 임금 삭감으로 이 불리함을 극복하려 했기 때문에 평양은 전국에서 여성노동과 아동노동의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었으며, 여성노동자들 비율이 높은 고무공업에서 임금 삭감 시도는 다른 부분보다 더 지속적이었다. 특히 조선인 자본이 강력했던 평양에서는 자본가들의 결속력도 상대적으로 강한 편이어서 노동에 대한 압박 또한 심했다. 하지만 평양의 노동자들 역시 만만치 않았다. 23년 양말노동자들의 총파업을 시발점으로 해서 온정주의를 극복하면서 성장한 평양의 노동운동은, 서울에 비해 상급 단체(노동연맹) 및 사회운동 단체가 개별 파업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지원한 것과 맞물려 25년에 정점에 이르면서 자본가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그 후 26-28년 사이에는 노동연맹이 둘로 나누어지는 등 심각한 분열을 겪으면서 노동운동 또한 일시적으로 침체하지만 29년 이후 다시 활력을 되찾으면서(중요한 계기 중 하나가 원산총파업이었다) 30년에 또 한번의 정점에 도달하고 있었다. 고무노동자 총파업은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했다.
8월 총파업의 전초전은 그 해 5월 일본인이 경영하는 고무공장에서 시작되었다. 임금인하 및 불량품에 대한 벌금제도에 반대하면서 일어난 여공들의 파업은, 그러나 이 시기가 고무공업의 한산기로서 휴업을 하더라도 별로 손해볼 것이 없던 자본가가 버티는 바람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7월 하순에 발생한 다른 조선인 공장에서의 쟁의가 아직 결말이 나지 않고 있던 차에, 조선 전체의 고무공업 자본가들의 결의에 의하여 평양의 자본가들이 공동으로 임금 삭감을 통보하자 평양의 고무노동자들은 이에 맞서 총파업을 선언했다. 8월 6일 자본가들이 모여 평균 1할의 임금 삭감과 복귀하지 않는 노동자들에 대한 해고를 결의하면서 대오를 흩뜨리고자 했지만 7일부터 총파업(초기에 태업으로 동조했던 일부 공장에서도 파업선전단의 활약에 의해 9일까지는 모두 파업에 합류한다)에 들어간 노동자들의 기세는 꺾일 줄 몰랐다. 10일 열린 직공대회를 통해 강령과 요구사항을 결의한 직후에 관망하던 숙련공들마저 동정파업에 들어가면서 총파업은 절정으로 치달았으며, 대목인 추석을 앞두고 주문이 밀려들어오던 시기적 특성과 결합되면서 자본가들을 더욱 강하게 압박했다. 숙련공들마저 파업에 돌입함으로써 (비숙련공인) 직공을 새로 모집해 조업을 개시하려던 자본가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면서, 임시로 모아온 직공들을 각 공장에 균등하게 배분하면서 버티던 자본가들은 결국 요구조건의 일부를 수용하는 조정안을 내놓았다. 파업단 역시 17일 임시직공대회를 열어 전권위원을 선출하여 교섭에 응하였다. 그런데 이 때 (어느 정도는 예견된) 돌발사태가 발생했다. 일제 경찰이 끼어들어 스스로 조정에 나서서, 자본가들의 타협안보다 훨씬 불리한 조건을 강요했고 전권위원들은 강압에 못이겨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원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또다시 지도부의 타협이 문제가 된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20일 다시 직공대회를 열어 전권위원들에 대한 불신임안을 가결하고 경찰의 조정안도 부인하였으나 경찰은 모든 집회를 금지시킴과 동시에 조정안을 계속 강요했고, 때마침 숙련공들이 점차 복귀하는 것에 고무된 자본가들은 23일부터 조업을 재개할 것을 결의했다. 분노한 노동자들은 23일부터 작업을 개시한 공장을 습격하고, 전화선 절단·기계파손 등을 감행하면서 거리로의 폭력적 진출을 시도했지만 전권위원들의 굴복 이후 작업에 복귀하는 노동자들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결국 파업은 패배하고 말았다. 양말업을 비롯한 다른 직종의 노동자들과 사회운동단체들의 지원,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답지한 격려에도 불구하고.
이들 고무노동자들의 투쟁은 그 정점이었던 30년 이후에도, 임금 삭감과 노동조건 악화를 지속적으로 시도한 자본가들의 도발에 맞서 거의 매년 터져나왔지만 대부분 성공적인 결말을 맺지는 못했다. 여기에는 30년 이후 자본가들의 결속이 더 강화되었고 대공황의 영향으로 실업자가 급증하면서 숙련직공 모집이 더 용이했다는 점 등도 영향을 미쳤지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은 30년 파업 패배의 후과이다. 총파업 당시 전권위원의 굴복과 그에 대한 불신임을 계기로 직공조합의 영향력이 급속히 약화되면서 이후의 투쟁은 조직이 없는 개별분산적 형태를 띠게 되었던 것(예를 들면 교섭위원을 뽑는 것조차 거부감을 갖는 경우가 많이 생겨났다)에서 이 점은 잘 드러난다.
패배하긴 했지만, 고무노동자들의 지속적 투쟁은 다시금 기억될 필요가 있다. 평양을 뒤흔든 파업의 주인공이여서만은 아니다. 패배한 파업에 대한 동정 때문도 물론 아니다. 거기에는 화학약품 냄새에 찌들고 착취에 시달리면서도(특히 대다수를 이룬 여성노동자들의 경우 봉건잔재와 가부장제에 의한 고난이 더해졌으면서도) 새로운 세상을 꿈꾸면서 삶을 변화시키고자 했던 이들의 열망이 녹아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양말직공, 기계파괴 직물공...기만당한 추종자들까지도 후대의 막무가내의 폄하로부터 구하고자 한다'던 E. P. 톰슨의 말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들을 다시 우리의 기억 속으로 담아내야 한다.
                                                             [인터내셔널뉴스 75호]


<<기획연재>> 20세기를 뒤흔든 세계 노동자 파업  
세계를 하품짓게 한 9일 - 1926년 영국 총파업

                                                           이가림 <카피레프트모임>
5월초의 영국은 아직도 봄의 활기보다는 음산함이 감돌았다. 5월 11일, 총파업은 이미 7일째에 접어들고 있었다. 런던 시가는 정부에 의해 동원된 대학생들이 모는 버스들만이 불안한 몸짓으로 간간이 모습을 드러낼 뿐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시민들이 받아볼 수 있었던 단 두 개의 신문 중 정부 발행인 「브리티쉬 가제트(British Gazette」는 내란의 위험을 외쳐대고 있었고, 그에 반해 노동조합회의(TUC, 영국 노총)측 신문인 「영국 노동자(British Worker」의 어조는 오히려 천하태평인 것처럼 느껴졌다. '도대체 이번 투쟁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많은 시민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물론 뉴캐슬 같은 주요 산업도시들에서는 파업 노동자들의 시위 행렬이 경찰과 충돌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그러나 플리머스에서는 노동자와 경찰 사이에 축구 시합이 벌어졌다는 것이었다 ... 이것이 바로 세계역사상 초유의 '조직된 총파업'이라는 1926년 영국 총파업의 풍경이었다.
1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에서도 이탈리아에서처럼 장기간의 대중투쟁의 물결이 시작되었다. 전쟁 중의 직장위원(shop stewards) 운동은 그러한 폭발의 전조였는데, 이는 노조 상층 관료가 아닌 노동현장의 노조 직장위원들이 쟁의와 협상을 주도함으로써 작업장에 대한 노동자들의 통제력을 높이려는 운동이었다. 이 운동 자체는 1919년 스코틀랜드 클라이드사이드의 전투적인 조선산업 노동자들이 '주 40시간 노동'을 주장하며 벌인 파업이 군대와 탱크의 동원으로 패배를 맛보면서 한풀 꺾이게 되었지만, 그 여파는 전 산업으로 번져갔다. 심지어 1918∼19년에는 경찰관들조차 연이어 파업을 벌일 정도였으며, 1920년에 이르러서는 쟁의가 정치적 쟁점으로도 확산되는 양상을 보였다. 가령 런던부두노동조합은 혁명 러시아와 전투를 벌이고 있던 폴란드의 반동적 정부를 원조하기 위한 정부의 군수품 선적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시위를 벌였다. 정부도 이런 흐름에 대응해 그해 10월 '비상사태법'을 입법화했다.  
미국이나 독일의 노조 관료들만큼이나 정치 투쟁을 기피하는 것으로 유명한 영국 노동조합 상층부의 분위기에도 일정한 변화가 나타났다. 광업, 철도, 운수부문의 노조들이 사용자와 정부에 대한 직접행동에서 서로 연대하기로 한 '3자동맹'은 이러한 분위기의 대표적인 표현이었다. 하지만, 노조 상층부 내의 이러한 변화는 과연 얼마나 믿을만한 것일까? 이는 정말 기층 노조원들 사이에서의 변화를 제대로 뒷받침해줄 수 있을 정도로 진지한 것일까?
첫 번째 시험은 1921년 봄에 닥쳐왔다. 당시 영국사회의 초미의 관심사는 석탄산업 구조조정이었다. 석탄산업은 영국의 산업혁명을 이끈 주요 산업이지만 당시에는 이미 민간 자본가들에 의한 소유와 경영이 그 한계점에 도달해 있었다. 이미 정부 보조금 없이는 광산을 운영할 능력이 없었던 민간 광산업자들로서는 이윤을 창출하려면 노동자들의 임금삭감과 노동시간 증대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가뜩이나 전체 노동자들의 투쟁이 고양된 상황에서 이는 곧 첨예한 대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정부는 일단 노조의 투쟁을 무마하려는 의도에서 1919년, 석탄산업문제를 논의할 생키위원회(Sankey Commission)를 조직했다. 시드니 웹이나 R. H. 토니 같은 진보적이고 양심적인 학자들이 다수 참여한 이 위원회는 광산업의 국유화만이 노동자들의 생활을 위기에 빠뜨리지 않으면서 영국의 석탄산업을 구하는 길이라는 결론을 제출했다. 그러나 보수당 정부로서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오히려 정부는 위원회의 보고를 무시한 채 시간을 끌다가 1921년 초, 석탄산업에 대한 정부 관리통제를 그 해 8월부로 해제한다는 석탄산업 자유화 조치를 선언했다. 이에 맞서 1921년 4월 1일 광부노조는 철도 및 운수노조와 체결한 3자동맹을 믿으면서 15일을 기해 파업에 돌입하기로 했다. 하지만 막상 4월 15일이 닥치자 운수노조와 철도노조는 파업을 철회해버렸다. 영국 노동자들은 금요일이었던 이 날을 '검은 금요일'이라 부르게 된다.
검은 금요일 이후 전국적인 계급전선은 일시적으로 자본가들이 주도하는 국면으로 넘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이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나름대로 제도적인 혁신을 감행했다. 그중 하나는 실질적인 영향력이 없었던 TUC의 지도·조정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1921년부터 TUC의 집행기구로서 총평의회(General Council)가 활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또 다른 시도는 각 직종별 노조들이 통합하여 대규모 산별노조를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서, 영국 최대의 노동조합으로 등장한 운수일반노동조합(TGWU)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조합운동으로 쟁취하지 못한 것을 노동당을 통해 이루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마침 1923년에 무역규제를 둘러싼 보수당과 자유당 사이의 갈등을 등에 업고 노동당이 최초로 원내 소수파로나마 정부를 구성하게 되면서 새로운 실험의 기회가 다가온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맥도널드의 노동당 정부는 자유당과의 연정이라는 이유로 생키위원회가 권고했던 정도의 국유화 조치마저도 기피했다. 결국 1924년 보수언론의 '빨갱이' 공세에 몰려 노동당이 총선에서 패배하고 나서 노동자들은 1921년과 아무것도 다를 게 없는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총파업이 벌어진 것은 바로 이런 가운데였다. 새로 등장한 보수당 정부를 등에 업고 광산업자들은 다시 광산 노동자들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려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운수노조와 철도노조가 무슨 일이 있어도 광부노조의 파업에 동참할 것임을 확약했고, 노동자들은 이 약속을 열렬히 환영하면서 검은 금요일에 빗대어 이 날을 '붉은 금요일'이라 불렀다. 정부는 생키위원회의 전례에 따라 사무엘위원회(Samuel Commission)를 조직했지만, 이 위원회가 내놓은 안은 생키안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광산업의 사회적 재조직화라는 대안 없이 일방적인 임금삭감을 제시하는 것 외에는 정부의 카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광부노조는 메이데이날, 총평의회에 총파업 명령을 요구했다. 총평의회 간부들은 끝까지 주저했지만, 5월 4일 인쇄 노동자들이 극우지인 「데일리 메일(Daily Mail)」의 반노동자적 사설을 인쇄하길 거부하면서 파업에 들어감으로써 총파업은 이미 기정사실화돼 버렸다. 그날로부터, 250만 노동자가 참여하고 영국의 거의 모든 신문과 교통, 광산, 공장이 가동을 멈춘 총파업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투쟁의 주도권을 쥔 것은 투쟁의 의지도 없이 총파업 명령을 내려야 했던 총평의회 간부들이 아니라 정부였다. 정부는 처음부터 총평의회가 일종의 'TUC 소비에트'를 만들어 의회 바깥에 파업 노동자들의 대안적 권력 중심을 만들지 않는다면 총파업이란 것은 오히려 노동자들의 완전한 패배로 끝날 수밖에 없을 것임을 내다보고 있었다. 보수당은 파시스트 단체를 급조하면서까지 투쟁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았다. 반면 노동조합 상층 간부들은 정부가 가장 두려워하는 그것, 즉 대중파업의 급류와 그에 기반한 대안 권력 조직의 건설을 가장 꺼려했다. 각 지방에서는 노조 활동가들이 자발적으로 투쟁위원회(Council of Action)를 조직하는 등 도약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지만, 이러한 가능성은 파업 9일째인 5월 13일 총평의회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총파업의 무조건 종결을 선언하면서 역사 속에 파묻혀 버렸다. 광부노조만은 분개하여 파업을 지속했지만 이는 6개월 뒤 처참한 패배로 끝났고 말았다. 패배한 노동자들을 기다린 것은 가혹한 노동조합법, 허울뿐인 노사화합주의, 지속적인 임금삭감, 대량 실업사태로 점철된 이후의 십수년간이었다.
"그때 우리는 힘이 있었다. 우리는 계속해야 했지만, 그 힘은 우리에게는 감당키 어려운 엄청난 것이었다. 그 힘은 너무 컸다"는 한 파업 참여 노동자의 증언은 당시의 정서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하지만, 투쟁의 지속이 곧 유혈 동란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중적인 투쟁 중심들을 만들면서 총파업을 지속함으로써 영국 자본주의의 근간을 흔들 근본적이면서도 구체적인 개혁을 관철시킬 길이 충분히 존재했다. 가령 당시 광산업과 수출산업이 위기에 처한 것은 상당 부분, 금융자본주의의 중심이라는 전전(戰前) 영국의 지위를 헛되이 고수하려던 보수당의 금본위제 때문이었다. 하지만 노동조합운동도, 노동당도 이러한 금본위제의 철회와, 생키위원회에서 이미 권고한 바 있는 광산업의 국유화 등을 지배세력에게 강요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역사의 기회를 놓친 영국 노동계급은 그 정도의 개혁을 위해서 다시 공황, 파시즘, 전쟁, 기나긴 일상의 투쟁들로 점철된 20여년간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인터내셔널뉴스 76호]


<<기획연재>> 20세기를 뒤흔든 세계 노동자 파업 ⑥
1920년대 인쇄출판노동자들의 투쟁

                                                           김덕련 <카피레프트모임>
'이 책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신....인쇄노동자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대학가에서 몇 년째 나오고 있는 한 잡지의 마지막 장에 항상 담겨 있는 문구이다. 인쇄노동자,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이들이다. 인쇄노동자들의 선도성은 각국의 노동운동사(특히 그 초기에)에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 중 하나이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이 점은 마찬가지여서, 인쇄노동자들은 당이 건설되고 사상단체와 노동조합이 우후죽순처럼 결성되던 1920년대에 가장 활발한 운동양상을 보였다. 그리고 이번 호에서는 지역적으로는 서울을 중심으로 (지난 번에 원산과 평양을 돌아보았으니) 살펴보도록 하겠다.
인쇄노동자들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건, 상호공제적 기능이 중심이던 서울인쇄직공친목회가 1921년 성립되면서부터였다. 이 친목회는, 20년대 초반에 급속도로 확산된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으면서 24년 서울인쇄직공조합으로 변모한다. 인쇄직공조합은 이후 1·2차 조선공산당을 주도하게 되는 화요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화요계와 라이벌 관계이던 서울청년회계는 바로 다음 해인 25년에 서울인쇄직공동맹을 결성하여 인쇄출판업종의 두 조직은 경쟁적으로 조직사업을 벌이게 된다. 화요계의 인쇄직공조합이 이미 튼튼한 조직적 기반을 구축해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서울계는 아직 조직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지방단체를 인쇄직공동맹을 중심으로 규합하여 직업별 노조의 전국연합체를 결성하려는 시도를 했다. 당시 전국조직이던 조선노농총동맹이 무력화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26년에 전국연합체인 인쇄직공총연맹이 결성된 것은 일정한 의의를 갖고 있는 것이기는 했지만, 두 계파의 과도한 경쟁으로 인해 총연맹은 실질적으로 거의 활동하지 못하고 만다. 이른 시기에 조직이 결성되어 선도적 투쟁을 벌인 부문이었기 때문에 역으로 분파투쟁의 양상도 그만큼 격렬하게 드러난 것이 20년대 인쇄 부문이었다. 하지만 계속 분파투쟁만 벌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으니, 26년 말에서 27년까지 사회운동에 불길처럼 일던 '파벌주의 박멸' 논리는 인쇄업에도 영향을 주어 두 단체 합동을 통해 27년에 서울인쇄공조합이라는 통합조직이 새로이 결성되었다. 인쇄공조합은 신간회를 지원하고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에 참가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고, 이러한 흐름은 당시 운동진영에서 제기되던 직업별 노조의 한계에 대한 비판과 맞물리면서 28년에 출판노조라는 산별노조로 개편된다. 두 단체의 합동에 의한 통합조직의 결성에서 산별노조로 개편된 흐름은 다른 부문에 비해 2-3년 정도 빠른 행보였다는 것에서도 우리는 인쇄 부문의 선진성을 엿볼 수 있다.
여기서 잠시 산별노조로의 개편이 지니는 의미를 짚어보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20년대 말 이후, 특히 대공황을 거치면서 조선에서도 산업합리화정책의 진전, 생산기술의 고도화와 대규모 생산의 일반화에 따라 미숙련노동자가 증대하는 등 산별노조 건설을 위한 사회경제적 기반이 어느 정도 생겨나고 있던 건 사실이지만 그것이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던 점 또한 분명하다. 이 시기 산별노조 건설운동이 산업화가 집중적으로 진전된 지역보다는 운동의 선진성이 강한 부문과 지역에 집중되고 전반적으로 미숙한 형태로(단지 이름바꾸기에 불과한 경우들이 꽤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개편되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산별노조로의 이행이 단지 조직노선의 변화에만 국한된 것이었다기 보다는 이전의 운동에 대한 반성적 평가에 기반한 운동의 방향전환과 맞물린 것이었다는 점에서 쉽게 폄하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 가두에서 생산현장인 공장으로 활동중심의 이전(대표적으로 공장분회의 설치),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강령과 구호를 생산현장에 근접한 구체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과제 등에서 분명 이전 시기에 비해 진전된 측면이 있었고 미숙련노동자와 실업자의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는 상황에 대응해 노조들에 부인부, 청소년부, 실업부 등의 전문부서가 설치된 것도 그러한 개편의 성과 중 하나였다. 산별노조를 기초로 한 전국적 단일조직 결성을 위한 지속적 노력도, 비록 당시엔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러한 경험들이 해방공간의 전평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해방공간에서 인쇄노동자들이 산별조직으로서 출판노조를 결성하고 전평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것에서도 이 점은 잘 드러난다.
이제 이 시기 인쇄노동자들의 구체적 투쟁에 대해 살펴볼 차례인데 그 전에 인쇄업의 특징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남성노동자를 주축으로 하는 인쇄업은 주조, 활자, 문선, 교정, 인쇄, 제본부 등 공장 내부 조직이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고 작업의 성격상 그 각각이 비교적 독립적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다양한 이해관계의 차이를 극복하고 작업장 내의 모든 노동자들을 결집하는 것이 파업투쟁의 성패를 가늠하는 핵심요인이었다. 또한 다른 업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숙련 정도가 높다는 점도 하나의 변수였다.
이 시기 대표적인 인쇄공 파업은 25년 2월의 대동인쇄소 파업이다. 서울 전차노동자들이 대우개선을 요구하며 파업하고 있던 이 시기에 대동인쇄소의 노동자들은 약간의 보상이라는 떡고물 뒤에 견제와 감시를 통한 노동강도 강화라는 칼날을 숨기고 있던 '직공취체규칙'과 '성적고사'의 폐지를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문선부가 중심이 된 파업노동자들은 다른 인쇄소의 문선공을 임시 고용하여 작업을 하려는 자본에 맞서 신직공들에게는 작업거부를, 대동인쇄소 내의 다른 노동자들에게는 파업에의 동참을 호소했다. 이것이 주효하여 파업 3일째부터 신직공들은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 있다 하더라도 동업자가 동맹파업을 단행하면서 굶다시피하고 있는데 그 자리에 뛰어들어 남의 밥줄을 빼앗을 수 없다'면서 출근을 거부했고 인쇄소 내의 나머지 노동자들도 파업에 돌입하였고 더 이상 그럴 듯한 수를 낼 수 없던 자본은 인쇄직공조합의 중재를 받아들여 노동자들의 요구사항을 대폭 받아들이게 된다. 같은 시기에 전개되었던 전차노동자들의 파업이 협상으로만 일관하면서 패배한 것과 달리 인쇄소 내 모든 노동자들을 파업에 동참시켜 승리를 이끌어낸 것이다. 하지만 협상 타결 10여일 후 자본은 파업을 주도한 노동자들을 무단해고하는데 이 때 해고를 막아내기 보다는 해고 수당을 요구하는 쪽으로 대동인쇄노동자들이 대응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2월 파업의 승리는 부분적인 것이었고 당시 노동자들의 의식과 역량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이 무단해고를 전환점으로 해서 2월 파업 당시의 약속 사항을 자본이 무시하면서 대동인쇄소 노동자들은 8월에 다시 파업에 돌입하게 된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일감이 많지 않은 여름이었고 무엇보다도 2월 파업 때와는 달리 공장 내의 모든 노동자들을 파업 대오로 끌어들이는 데 실패하면서 8월 파업은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그리고 20년대에 보편적이었던 현상, 즉 인쇄직공조합과 인쇄직공청년동맹이 자본과의 교섭이라는 상층의 협상에만 의존하려 했던 것도 패배로 귀결되는 데 한몫 했다. 25년 패배의 영향으로 더 심해진 대표적 착취제도인 무임금 시간노동의 철폐를 요구하면서 대동인쇄소 노동자들은 27년에 다시 파업에 돌입하지만, 교섭을 위임받은 인쇄공조합이 조직적 단결과 역량 결집을 통한 문제 해결 대신 25년과 마찬가지로 상층협상에만 의존하면서 실질적으로 자본의 의도가 그대로 관철되는 형태로 종결된다. 이러한 양상은 20년대 내내 지속적으로 벌어졌던 다른 인쇄소들의 파업(예를 들면 28년 대성당인쇄소 노동자들의 파업)에서도 거의 그대로 되풀이된다.    
인쇄노동자들의 선도성과 인쇄노동자 조직의 개량주의. 20년대를 특징지웠던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대한 이야기로 끝맺어야겠다. 인쇄노동자들이 선도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것은 빈도높은 파업, 앞에서 이야기한 조직 발전에서 앞서나간 점뿐만 아니라 요구조건으로 내걸었던 사항들(8시간 노동제, 최저임금제, 부상시의 수당과 야업 수당 지급, 임시공 철폐 등)의 선진성에서도 잘 드러난다. 하지만 그 시기의 노동자들이 지니고 있던 인식이나 역량의 한계를 인쇄노동자들도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었을 것이며 20년대 노동운동 상층의 개량주의도 지도부 개개인들의 문제였다기 보다는 그러한 한계에 기반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층 대중의 '영웅적' 투쟁과 지도부의 극단적 개량주의와 파벌주의라는 두 극단을 설정해 놓고 전자가 후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좌절되었다는 식으로 바라보면서 20년대 운동을 전체적으로 폄하하는 건 적합하지 않다. 물론 20년대 노동운동 상층에 개량주의는 분명 존재했으며 분파투쟁의 해독도 심각했던 건 사실이다. 여기서 분파투쟁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 서울과 지방의 파업 투쟁 양상을 비교해 보자. 서울의 경우 개별 작업장에 속한 노동자들이 분산적으로 동맹파업을 행하고(앞의 대동인쇄소의 경우에도 지지와 격려 메시지는 많았지만 다른 인쇄소에서 연대파업을 벌이는 경우는 없었다) 조합은 개별작업장에서 일어난 파업을 사후적으로 지도(혹은 방조)한 반면, 평양 등의 경우 노동조합에 결집한 노동자들이 지역내의 전체 공장주에 대항하는 연대투쟁을 벌이고 조합이 전적으로 투쟁을 지도·조직한 경우가 많았다. 전적으로 환원시킬 수는 없지만 이런 대조적인 모습이 나타난 데는 지방의 경우 지역 내의 운동이 분파투쟁의 영향에 덜 노출되어 있거나 단일 분파에 의해 지도되어 통일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것을 근거로, 분파투쟁에 의해 20년대 전체가 총체적으로 좌절된다는 손쉬운 일반론을 끌어내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2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이전의 과도한 분파투쟁의 해독은 '자체적으로 교정'되고 있었으며 그것은 지식인 중심이었던 20년대 전반기의 운동을 현장노동자 중심으로 바꾸어 가기 위한 작업과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앞에서 살펴본 산별노조로의 이행과 함께 공장분회의 건설이 진행되고 27년경부터 노동운동의 방향전환과 함께 파벌주의 박멸 논리가 공감대를 확산한 것이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진행된 작업이다. 비록 그것에 부족한 점이 있었고 당시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를 무시하고 20년대 운동을 손쉽게 뒷전으로 밀어버리지는 말았으면 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 시기의 경험이 없었다면 해방공간에서의 폭발적인 활력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20년대 인쇄노동자들의 투쟁은 해방공간의 활력으로 이어진 바로 그 경험들의 선두에 서 있었다는 점만으로도 기억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인터내셔널뉴스 77호]


<<기획연재>> 20세기를 뒤흔든 세계 노동자 파업 ⑦
유산된 축제: 1936년 프랑스의 공장점거 파업

                                                           이가림 <카피레프트모임>
"파업은 그 자체 기쁨이다... 활짝 웃는 사수대의 허락을 받아 공장에 들어가는 것을 기뻐하라... 기계의 무자비한 소음 대신 음악 소리, 노래와 웃음 소리를 듣는 것을 기뻐하라...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당신의 사장 앞을 지나가는 것을 기뻐하라... 유사 이래 처음으로, 그리고 앞으로 영원히 이들 기계 주변에는 침묵, 강제, 복종과는 전혀 다른 기억들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의 가슴에 어떤 자긍심을 불러일으킬 기억들, 이 모든 금속 위에 인간의 약간의 온기를 남겨줄 그런 기억들." 1936년 여름 시몬느 베이유는 프랑스 노동자들의 '역사의 축제'에 이런 찬가를 남겼다. 1926년 영국의 실패한 총파업을 끝으로 사람들은 산업투쟁의 거대한 물결이 이제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다고 안도했다. 더욱이 1933년 히틀러가 독일의 수상이 되자 유럽은 우파의 완전한 승리를 기다리는 것처럼만 보였다. 그러나 안도는 너무 일렀다. 반격은 혁명의 진앙지, 저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됐다.
프랑스에서도 1930년대초부터 극우파가 발호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중도파 정부가 부패 사건으로 빈틈을 보이자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1934년 2월 6일 이들은 부패 사건의 해명을 요구하며 하원에 난입하는 사태를 빚었다. 당시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분열된 상태였다. 본래의 내셔널 센터인 노동총동맹(CGT)에는 사회당을 지지하는 노동자들만이 남아 있었고, 공산당을 지지하며 새로이 통일노동총동맹(CGTU)이 결성돼 있었다. 프랑스 공산당은 애초에는 1차 세계대전을 지지한 사회당의 기회주의에 반대하며 등장한 혁명적 정당이었으나 1930년대 초에는 스탈린 주도 코민테른의 '제3기' 좌경 기회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여 노동운동의 분열만을 초래하고 있었다. 1934년 당일에도 공산당은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극우파와 함께 중도파 정부의 퇴각을 열을 올려 외쳐대고 있었다.
사태를 선도한 것은 노동자 대중들 자신이었다. 대혁명의 기억과 드레퓌스 사건의 악몽을 통해 공화국을 방어하는 것은 바로 노동 대중이라는 자각을 갖고 있었던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어느 정당의 선도를 기다릴 것 없이 그들 스스로 극우파의 음모와 폭력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 기층의 여론을 주시하던 CGT는 12일 총파업을 선언했고 CGTU도 이에 질세라 대규모 시위를 감행했다. 상층 조직과는 상관없이 15만 명이나 되는 CGT 노동자들과 CGTU 노동자들은 파리의 거리에서 하나의 대오를 형성했다. 사회당과 공산당 지도자들 역시 이를 주목해야 했으며 CGT와 CGTU는 당장 재통합 논의에 돌입했다.
마침 코민테른 역시 독일에서의 패배와, 뒤이은 오스트리아에서의 파시즘 발호를 목도하면서 '제3기'의 좌경 기회주의에 대해 자기반성하기 시작했다. 파시즘을 금융자본의 반동 독재로 규정한 것으로 유명한 디미트로프가 의장이 된 것을 신호로 코민테른은 파시즘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부르주아 정치세력까지를 중요한 참여자로 하여-을 포괄하는 반파시즘 인민전선 노선을 내걸었다. 프랑스 공산당은 이 노선에 따라 1934년 7월에 사회당과 통일전선 협정을 맺었을 뿐 아니라 급기야는 여기에 급진당-프랑스의 전통적인 공화주의 중도파 정당-까지 포함시키기에 이르렀다. 공산당이 왜 급진당까지 통일전선의 상대로 포함했는가 하는 데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히틀러에 대항하여 사회당보다 더 적극적으로 친소 외교정책를 주장하던 급진당을 지지하라는 스탈린의 지령 때문에 그랬다는 비판이 있는가 하면, 당시 프랑스 상황에서는 극우파에 대항하기 위해 그런 광범한 연합이 필요했다는 옹호도 있다. 하지만 아무튼 부르주아 정치세력을 포괄하는 이 연합이 모든 좌파 세력의 연대를 주장하는 전통적인 통일전선 노선을 벗어나는 사상 초유의 실험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프랑스 인민전선은 1935년의 지방선거에서 커다란 성공을 기록한 데 이어, 1936년 4∼5월의 총선에서는 결국 의회의 다수를 장악하기에 이른다. 우파 220석 대 인민전선 378석의 의석분포가 이뤄졌고, 특히 공산당은 12석에서 72석으로 의석을 획기적으로 증가시켰다. 겸양으로 봐야 할지 책임회피로 봐야 할지 아무튼 공산당이 내각에는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한 가운데, 사회당의 레옹 블룸이 인민전선 내각을 조각했다. 하지만 역사는 이 다음부터가 진짜였다.
1934년부터 눈을 뜬 프랑스 노동자들의 대중투쟁 정신은 한편으로는 인민전선 정부의 수립을 뒷받침한 원동력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으로 가둬질 수 없는 폭발력을 지닌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블룸 정부가 출범하려 하던 그 해 6월 예상치 못한 대중파업의 물결이 유럽 대륙에 다시 부활했다. 4월에 미미한 움직임으로 시작되던 파업들은 5월에 선거가 끝난 지 5일만에 북부 프랑스에서 공장점거라는 새로운 형태로 불을 당기는가 싶더니 곧바로 프랑스의 다른 지방들에서 그와 비슷한 형태로 불붙기 시작했다. 6월에 이르러서는 600만이 넘는 노동자들이 파업과 공장점거에 참여했다.
이 파업은 대중파업에 대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견해와 공장점거에 대한 그람시의 통찰을 의식적으로 되불러들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놀라운 양상으로 전개됐다. 이제까지 전혀 노조로 조직화되지 못했던 미조직 노동자들이 순식간에 파업의 최선두에 나서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보험회사 노동자들, 은행 노동자들, 호텔과 상점 노동자들이 그들이었다. 다른 한편 공장점거라는 새로운 투쟁 형태는 자본가들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는 원래 파업 중에 자본가들이 파업 파괴자들을 고용하여 파업을 무력화시키는 것에 대비하여 공장 안에서 농성을 전개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점거 농성의 위력은 애초에 방어적 의도로 기획되었던 것 그 이상이었다. 혹시나 자신들의 기계 설비가 해를 입을라 고심하던 자본가들은 섣불리 파업 대오를 침탈하지 못했던 것이다. 프랑스 노동자들은 1919∼20년의 이탈리아 노동자들과는 달리 점거 중에 생산을 재개하지는 않았다. 그들에게는 <신질서> 그룹 같은 선도자들이 없었던 것이다. 대신 이들은 공장 안에서 축제를 벌였다. 때는 여름이었고 프랑스의 여름은 축제를 벌이기에는 더없이 좋았다. 그것도 그 나름대로 괜찮았다.
당시 노르웨이에 있던 트로츠키는 이를 보고 "프랑스 혁명이 시작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바야흐로 혁명이 필요한 때이기도 했다. 마침 스페인에서도 1936년 2월에 인민전선 정부가 들어선 뒤 6월부터 파업과 토지점거의 물결이 출렁이고 있었다. 스페인에서는 이에 대해 반동 군부가 쿠데타를 벌여 7월부터 내전 상태에 빠져들었다. 프랑스에서의 정치적 움직임은 스페인 노동 대중들의 운명을 결정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 공산당은 이 때 평소 자신이 그렇게 주장해대던 공산당으로서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미 1968년의 해프닝을 예고하기라도 하듯 당시 공산당은 급진당을 포함한 인민전선을 수호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파업 노동자들에게 오히려 "파업을 끝낼 줄도 알아야 한다"고 외쳤다.
공산당의 적극적인 중재로 6월 7일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마티뇽 협정이 체결되면서 파업 물결은 일단락되었다. 사실 협정의 내용은 참으로 획기적인 것이었다. 주당 40시간 노동이 규정되었는가 하면, 1년에 2주일 간의 유급휴가가 보장되었고, 전국적인 단체교섭이 약속되었으며, 임금인상이 공언되었다. 매년 여름마다 바캉스를 떠나는 프랑스 노동자들의 모습은 바로 이 때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토록 폭발적이었던 대중파업 물결이 꼭 이런 경제적 이해의 충족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을까? 애초에 파업과 공장점거의 요구사항들 중에는 임금인상 같은 경제적 요구들 외에도 직장통제나 국유화와 같은 비경제적 요구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당시 프랑스에도 막 도입되고 있던 테일러주의형 공장체제에 대한 반발심도 대중파업의 중요한 동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티뇽 협정에는 이러한 내용들은 빠져 있다. 공장 바깥의 떡고물들을 위해 공장 안에는 다시 자본가 독재가 확립되는 식이었다.
그렇다면, 프랑스 공산당은 대중파업을 조기에 종결시키는 것 외에는 달리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없었던 것일까? 히틀러로부터 프랑스 공화국을 지키려면? 하지만 히틀러에 대해서 유화조치와 말뿐인 견제를 반복하다가 결국에는 1940년의 패전을 낳고 만 것이 바로 블룸의 인민전선 정부였다. 이 정부가 공화국을 지킨다며 추구했던 것은 금본위제의 고수뿐이었고 이는 대량의 자본유출과 통화위기를 유발해 그나마 마티뇽 협정을 통해 노동자들이 얻은 임금인상을 허깨비로 만들어버렸다.
어쩌면 프랑스를 방어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길은 프랑스 노동 대중의 혁명적 열기를 정치 체제의 추동력으로 삼는 길이었을지 모른다. 그것은 대중투쟁에 기반하여 근본적인 경제적 변혁을 추진하고 노동 대중의 무장력으로 히틀러에 대항하는 길이었다. 그 기회를 프랑스는 마티뇽 협정과 함께 잃었던 것은 아닐까? 프랑스 공산당은 늘 자코뱅의 유산의 상속자임을 주장했지만, 바로 이 점에서 자코뱅에 결정적으로 미달했다. 무장한 대중의 힘으로 독일로부터 혁명을 지킨 것이 바로 자코뱅이었던 것이다.              [인터내셔널뉴스 78호]


<<기획연재>> 20세기를 뒤흔든 세계 노동자 파업 ⑧
1935년 진남포 제련소 노동자들의 투쟁

                                                           김덕련 <카피레프트모임>
"제련소를 타도하자!"
1935년 7월, 대동강 어귀에 자리잡고 있는 진남포 시내를 지나던 행인들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제련소 타도라는 구호 때문만은 아니었다. 제련소 노동자들의 파업이 벌어지고 있던 당시, 그 구호 자체는 시내에서 어렵쟎게 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발걸음을 잡은 것은 다름 아닌 한길가에서 홀로이,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절절하게 구호를 외치고 있는 한 사내의 행색이었다. 꾀죄죄한 걸인 차림의 앉은뱅이 사내, 한때는 제련소 내에서 손꼽히는 숙련공이었지만 작업중 용광로에 데여 두 다리를 잃고 해고당한 후 질긴 생을 힘겹게 이어가고 있던 그가 기계를 멈춘 옛 동료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구호를 목이 터져라 외치는 모습은 스쳐지나던 뭇 행인들의 발걸음을 돌려세울 정도로 뭉클한 것이었다.
약 40년 전 개항(1897년)되기 이전에는 조그만 어촌에 불과하던 진남포에 제련소가 들어선 것은 1915년이었다. 대동강의 수리와 평남선의 철도라는 편리한 교통, 제련에 필요한 무연탄(평양 부근) 및 광석 산지(황해도)의 인접이라는 좋은 입지조건을 갖춘 진남포 제련소(주로 금, 은, 동 제련)는, 1930년대에 들어와 금 가격이 급격히 상승하고 대륙 침략을 위해 일제가 금 산출을 장려하면서(참고로 이야기하면, 이로 인해 전국 방방곡곡에서 채광이 열풍처럼 일어나면서 바야흐로 30년대는 '골드 러시'의 시기로 들어서게 된다) 호황을 맞게 되었다. 좋은 입지조건에 눈독들인 일제에 의해 개항된 후 비교적 이른 시기에 설립되어 낙후된 설비와 기계로 호황기를 맞은 진남포 제련소는 자기완결적인 생산체계를 갖춘 곳은 아니었다. 값싼 원료와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는 진남포에서 광석이 일차적으로 제련된 후, 많은 전력과 높은 기술 수준이 요구되는 공정은 일차 제련한 광석을 일본으로 옮겨서 수행되는 전형적인 식민지적 생산체계였다. 이러한 점에서 같은 금속 부문의 대기업이면서도 진남포보다 늦은 시기(32년)에 설립되어 당시로서는 선진적인 설비를 갖추고 있던 흥남 제련소가 완결된 생산체계를 지니고 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일제의 대륙침략을 위한 후방군수기지로서의 역할과 골드 러시의 광풍으로 인해 진남포 제련소는 호황을 구가하고 있었지만, 제련소 노동자들은 매일매일 사선을 넘나드는 생활을 해야 했다. 9m 높이의 고가선로에서 난간 설비 하나 없이 작업해야 했고, 용광로의 배수 시설에서 나오는 뜨거운 물에 데어 살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그대로 감수해야 했으며, 굴뚝이 낮고 좁아 용광로에서 발산되는 연기와 가스가 제대로 배출되지 않는 지옥 같은 상황에서도 마스크 착용 없이 견뎌내야 했다. 제련소 측에서는 개근 수당(기본적으로 28일 개근 이상)이라는 당근을 제시했지만 참람한 작업 환경으로 인해 아무리 건장한 사람이라도 2, 3일을 일하면 하루를 쉬어야만 하는 상황에서 그건 결코 손에 잡히지 않는 당근이었다. 이처럼 아무런 안전 시설도 없는 조건에서 매일 12시간 이상 노동해야 하는 노동자들이 납중독에 걸리거나 신체 일부가 잘려나가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더욱이 대개의 노동자들은 인근 농촌 출신으로서 농업 이외의 일에 종사한 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공장의 작업, 특히 유해 물질에 그대로 노출되어야 하는 작업에 적응하기 쉽지 않아 이직과 결근, 더 나아가 엄중한 감시의 눈을 피해 도망하는 경우가 속출했다.
노동자들을 더욱 힘들게 만든 것은 이와 같이 목숨 걸고 작업해서 받은 임금이 고스란히 자신의 주머니로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제련소 노동자들은 사무관리직, 직할직공, 임시직공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조선인들은 대부분 직할직공이거나 임시직공이었다. 그런데 이 중에서 특히 임시직공들은 청부업자에게 소속되어 일용 형식으로 고용되었기 때문에 얼마 되지 않은 임금조차 청부업자들에게 중간 단계에서 착취되어 실제로 손아귀에 들어오는 것은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정도의 금액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자본가들이 공황기에 입었던 손실을 일시에 만회하기 위해 노동강도를 더욱 높여가면서 더 심화되었고 결국 35년 여름 노동자들은 투쟁으로 이에 화답하게 된다. 35년 6월, 안전 설비라곤 찾아볼 수 없는 상태에서 굴뚝 청소 작업을 하던 20여 명의 노동자들이 모두 떨어져 희생되는 참극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련소 노동자들은 7월 13일, 드디어 '무산 대중은 단결하라'는 구호를 내걸고 파업에 돌입했다. 임금 인상, 1일 3교대를 통한 8시간 노동, 안전 설비 설치, 희생된 노동자들의 유가족들에 대한 보상이라는 요구조건에 대해 자본측은 일언지하에 거부했을 뿐 아니라 교섭하러 들어갔던 노동자 대표들을 체포하여 경찰에 넘겨주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분노하여 몽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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