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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反 노 동 선 언 >

< 反 노 동  선 언 >

                                                                                            KRISIS-Gruppe (1999)


1. 죽은 노동의 지배

  시체 하나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 노동이라는 시체가.  온 세상의 모든 권력이 바로 이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힘을 합쳤다 : 교황과 세계은행(Weltbank)이, 토니 블레어와 외르크 하이더가, 노동조합과 기업가가, 독일 생태주의자들과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이.  이들 모두는 오직 한가지 표어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 노동, 노동, 노동!


생각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이러한 주장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다.  왜냐하면 노동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는 결코 일시적인 위기를 겪는 게 아니라, 분명 절대적인 한계에 다다르기 때문이다.  극소전자혁명에 따라 富의 생산은 인간노동력을 적용하는 것으로부터 점점 더 분리되고 있다 - 불과 몇십년전까지만 해도 공상과학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을 정도로.  이 과정이 어느날 멈추어 버린다거나 혹은 심지어 지난날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이제는 그 누구도 감히 주장하지 못한다.  21세기 세상에서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판매하는 일은 마치 20세기에 우편마차를 판매하는 것 만큼이나 대단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그 사회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지 못하는 사람은 "쓸모없는", 말하자면 사회의 폐품인 양 버려질 뿐이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경멸에 가득한 이 명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  일하지 않는 자는 이제 아무런 희망도 없이 버려지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 더더욱이나.  정말이지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 노동이 쓸모없이 버려지고 있는 바로 이 시대만큼이나 인간사회가 곧 노동사회 그 자체였던 적은 지금껏 없었으니.  바로 자신의 죽음 속에서, 노동은 아무런 神도 감히 곁에 범접하지 못하게 하는 절대권력임을 비로소 드러내준다.   일상의 움직임과 느낌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노동은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좌우한다.  노동이라는 우상의 수명을 인공적으로 연장하기 위한 일에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다.  "일자리"를 향한 절규는 자연을 무참히 할켜대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진 그 행위마저 서슴없이 정당화시켜 준다.  모든 사회적 관계를 완전히 상품화시켜버리는 데 놓인 마지막 방해물마저 조금이라도 "일자리"가 보장된다면야 소리없이 치워진다.  "어떠한" 일자리일지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명제는 이제 모두의 생활신조가 되어버렸다.


노동사회가 절대적인 종착점에 도달했다는 사실이 더욱 뚜렷해질수록, 이같은 사실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의식속에서 오히려 더욱 무자비하게 내몰린다.  너무나도 명백한 이런 사실을 쫓아내는 방법이 설령 서로 다르다고 하더라도, 여기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 노동이라는 게 결국 자기 스스로를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린, 어리석은 자기목적(Selbstzweck)에 지나지 않는다는 엄연한 사실은, 끈질긴 망상의 사슬 속에서 오히려 한 개인의, 한 기업의 혹은 한 "산업입지"의 실패로 뒤틀려진다.  노동의 객관적 한계가 곧 밀려난 자들의 주체적인 문제로 둔갑하는 셈이다.  어떤 이들에게 실업이 지나치게 높은 기대수준으로부터, 부족한 능력 때문에 혹은 유연함의 결핍으로부터 찾아온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면, 또 다른 이들은 "그들의" 경영자들에게, 정치가들에게 무능력과 타락, 맹목적인 욕심을 질타해댄다.  하지만 이들 모두는 결국 전 대통령 로만 헤어초크와 뜻을 같이할 뿐이다 : 예컨대 마치 축구팀이나 정치집단에서 분위기가 중요하듯, 온 나라에 한 차례 "충격조치"가 있어야 할텐데.  더 이상 벨트가 존재하지 않는데도 우리 모두는 "어떤식으로든" 열심히 벨트를 돌려야 하며, 더 이상 꾸릴 게 남아 있지 않음에도 우리 모두는 "어떤식으로든" 힘차게 무장해야 하는 셈이다.  이 슬픈 문구의 메시지는 뻔하다 : 아무쪼록 노동우상의 자비를 구하지 않는 자는 스스로 잘못을 구해야 하며, 당연하게도 버려질 뿐이다.


인간을 제물로 삼는 이와 동일한 법칙은 세계무대에서도 그대로 통용된다.  모든 나라들이 차례차례 경제라는 이름을 내건 전체주의의 바퀴 아래 깔리고, 결국 언제나 한가지 사실만이 살아 남는다 : 이른바 시장법칙에 무너졌다는 사실이.  이 맹목적인 총력전에 군소리없이 "적응"하지 않는 사람은 수익성의 논리라는 형벌을 받게 될 뿐이다.  오늘의 기대주조차 내일은 쓰레기로 버려진다.  주류 경제평론가들조차 자신들의 해괴한 예측에 더 이상 놀라지 않는다.  세계인구의 3/4은 이미 사회의 쓰레기로 내몰린 지 오래다.  "산업입지"는 차례차례 몰락해 간다.

남반구의 처참한 "개도국"에 뒤이어, "동구"의 국가자본주의적 一家에 뒤이어, 이제 동아시아의 모범생들마저 몰락의 지옥으로 떨어졌다.  유럽에서도 패닉상태가 퍼진 지 이미 오래다.  다만 슬픈 몰골을 한 정계와 재계의 기사들은 여전히 노동우상의 이름 아래 십자군원정을 이어갈 뿐이다.

2. 신자유주의적 차별사회(Apartheidgesellschaft)  

노동이라는 비합리적인 추상물(Abstraktum)에 근거한 사회는 노동력 상품의 성공적인 판매가 일상적인 규칙에서 예외적인 것으로 바뀌는 순간, 어쩔 수 없이 사회적인 차별의 경향을 드러낸다.  정파를 초월한 노동진영(Arbeitslager)의 모든 분파들은 이 논리를 소리없이 받아들이는데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도 열심히 선전해댄다.  그들은 이제 보다 많은 인구계층이 주변으로 내몰리고 사회속에서 제몫을 잃어가는지에 대해 논쟁하는 게 아니라, 단지 이같은 선별과정을 어떻게 하면 북돋울 수 있을 것인가에 여념이 없다.


신자유주의 분파는 이처럼 얄팍한 사회다윈주의적 짓거리를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게 기꺼이 내맡긴다.  경쟁에서 더 이상 배겨날 수 없는 모든 사람들을 소리없이 내다 버리기 위해 복지 국가의 그물은 이제 걷어내진다.  입이 헤 벌어진 지구화의 승자 곁에 그럭저럭 얼쩡거릴 수 있는 무리만이 그나마 인간으로 인정받는다.  온 세상의 모든 자원은 자본주의라는 괴물기계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설령 그 곁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쓰러져 간다 하더라도, 더 이상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그 자원마저 가차없이 버려져야 한다.


귀찮은 "인간쓰레기"의 처리는 경찰이, 구원을 설파하는 종파가, 마피아가, 아니면 알량한 빵 몇 조각이 떠맡는다.  미국과 동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에서는 지금도 과거 군부독재정권시기의 나라들의 경우보다도 더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갇혀 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정치적 억압이 극에 달했던 시기의 정치적 반대자들보다도 더많은 수의 버려진 아이들과 굶주린 사람들이 시장경제라는 살인부대에 의해 매일 죽임을 당한다.  버려진 사람들에게는 오직 하나의 사회적 기능만이 주어질 뿐이다 :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본보기로서의  기능만이.  이들에게 맡겨진 임무란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꿈꾸며 여전히 노동사회의 허리끈을 졸라매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최후의 한 자리를 꿰차기 위한 싸움속으로 더욱 힘차게 뛰어들도록 북돋는 것이어야 하며, 설령 싸움에서 패배한 사람들일지라도 파렴치한 강제에 맞서 감히 반역을 꿈꾸지 못하도록 적당히 달래주는 것이어야 한다.


반면 온전한 시장경제라는 이 아름다운 신세계는 많은 사람들에게 "비공식인간"으로서의 한 자리를 비공식경제부문 속에 남겨주는 친절마저 베풀어준다.  이들 "비공식인간"들은 가장 헐값의 노동자로서, 또 "서비스사회"의 공정한 노예로서 자신들보다 훨씬 더 엄청나게 돈을 버는, 지구화의 수혜자들을 위해 다소곳이 봉사해야 한다.  이제 이들 새로운 "일하는 가난뱅이들"은 사라져가는 노동사회의 마지막 비즈니스맨들을 위하여 구두를 닦거나, 병균섞인 햅버거를 판매하거나, 아니면 백화점의 경비일을 떠맡아야 한다.  자신의 영혼을 물품보관소에 맡긴다면야 하긴 서비스 백만장자를 꿈꾸지 말라는 법도 없겠지.


앵글로색슨 나라들에서 이런 공포영화 시나리오는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이미 현실이며, 제3세계와 동유럽에서도 피차 마찬가지이다 ; 이른바 유로貨의 나라들마저도 저만치 달려가는 선두그룹을 한걸음에 따라잡으려 작심한 듯 보인다.  이런저런 경제서적들은 그들이 그리는 이상적인 노동의 미래란 게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이미 오래전부터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 : 병균이 득실대는 거리에서 자동차 유리를 닦아대는 제3세계의 어린이들이야말로 작열하는 "서비스 황무지"에서 수많은 실업자 무리들이 끝내 찾아가야 하는, "기업가型 마인드"라는 푯대이다.  "미래의 이상향은 개개인 스스로가 자신의 노동력의 경영자이자 동시에 스스로의 존재를 책임지는 것"이라고 <바이에른 및 작센 주 미래위원회>는 외치고 있다.  뿐만 아니다 : "인간노동력이 제공하는 단순한 對人서비스의 가격이 떨어질수록 서비스에 대한 수요는 늘어나며, 결국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 역시 돈을 벌 수 있다."  만일 스스로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조금이라도 지키며 살 수 있는 세상에서라면, 이런 주장은 대번에 폭동이라도 불러 일으킬 것이다.  하지만 순하게 길들여진 노동사회의 노동동물이 모여 사는 세상에서는 그저 무기력한 끄덕거림만이 눈에 띨 뿐이다.        


3. 네오복지국가적 차별

전체 노동진영 가운데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또다른 분파들이 이런 전망에 호의를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노동하지 않는 인간이 인간일 수 없다는 믿음만은 이들의 머릿속에도 여전히 굳건하게 박혀 있다.  전후 시기의 포드주의적 완전고용을 그리워 하는 이들의 머릿속에는 흘러가 버린 옛 시절을 되살리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다.  시장이 더 이상 할 수 없는 일은 국가가 또 다시 나서서 떠맡아야 한다고들 한다.  "고용촉진프로그램"에 의해, 사회부조금의 수혜자에 대한 지역차원의 의무노동부과에 의해, 산업입지에 대한 보조금을 통해, 적자재정을 통해, 그리고 이런 저런 정치적 조치들에 의해 이른바 노동사회의 정상적인 모습이 다시금 되찾아져야 한다고들 한다.  한껏 달아오른 이러한 노동-국가주의가 일말의 가능성조차 전혀 지니지 못한다는 사실에도 아랑곳 없이, 수많은 사람들, 추락의 위험 앞에서 벌벌 떠는 인구계층은 여전히 이 이데올로기에 굳게 사로잡혀 있을 뿐이다.  


"희소한 노동"이 가장 중요한 시민권으로 탈바꿈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전환과정은 당연하게도 모든 非국민을 배제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사회적인 선별논리는 이제 더 이상 문제시되지 않으며, 오히려 다른 방식으로 정의된다 : 개개인의 생존투쟁은 인종적-민족적인 기준에 의해 다소 완화되어야 한다.  "국내의 일자리는 반드시 내국인에게!"라고, 노동에 대한 지독한 사랑 속에서 민족공동체를 발견하는 영혼은 또다시 외쳐댄다.  우파성향의 포퓰리즘은 이런 결론을 공공연히 끌어낸다.  경쟁사회에 대한 이들의 비판이란 오로지 자본주의적 富가 줄어드는 지역에서 인종청소로 나타날 뿐이다.


반면 사회민주주의계열의, 혹은 녹색당 성향을 띤 "점잖은" 민족주의는 이미 오래전에 독일로 몰려든 이주노동자들에게 내국인이라는 딱지를 부여할 뿐 아니라, 만일 이들이 아무런 소란도 피우지 않고 충분히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들을 것이라는 보장만 있다면야 "독일국적"마저 안겨줄 의사를 갖고 있다.  이와는 달리 동유럽이나 남유럽으로부터 밀려온 난민에 대해 보다 철통같은 방어막을 치려는 조치는 이를 통해 더욱 대중적인 정당성을 꿰차게 되며, 따라서 더욱 교묘하게 추진되고 있다.   국내의 일자리를 넘보는 "불법존재"들에 대한 인간사냥이 적어도 독일 영토내에서는 가능한 한 피 한방울의 흔적도 남겨서는 안되는 셈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모든 일을 "法대로", 특히 텔레비젼 카메라로부터 멀치감치 떨어져 헤치우는 국경수비대가, 경찰병력이, 그리고 Schengen조약 가맹국을 지켜주는 완충국가들이 존재한다.


국가에 의한 노동강제는 원래부터 폭력적이며 억압적이다.  여기에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이미 죽음에 빠져버린 노동우상의 지배를 되살리려는 절대적인 의지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 이처럼 관료적 성격을 띤 노동광신주의(Fanatismus)는 버려진 사람들,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 그리고 나름대로의 이유에서 노동을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미 망가질대로 망가진 복지국가의 그 눈꼽만한 떡고물조차 고분고분 던져 주지는 않는다.  이들 모두는 복지담당관리나 취업담당관리가 떡 버티고 앉은, 국가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건 심문조사실 램프 불빛 아래 무릎을 꿇어야 하며, 이 사회를 지배하는 시체의 머리위에 쓰여진 왕관 앞에서 공개적으로 머리를 조아려야만 할 뿐이다.


"증거가 불충분할 경우에는 피고에게 유리하게끔 판결을 내리는" 원칙이 일반적으로 법정에서 지켜진다면, 여기에서는 정반대이다.  만일 앞으로 공기만을 먹고 살거나, 이웃사랑이라는 기독교 교리에 모든 걸 내맡길 마음이 없다면, 이들 버려진 인간들 모두는 기꺼이 일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그 어떠한 모욕스런 노예노동도, 그 어떠한 엉터리 "고용촉진조치"도 받아들여야 한다.  이들에게 던져진 작업이 눈꼽만치라도 의미가 있느냐 없는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떤 게임법칙에 따라 자신의 생존을 이어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이들이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된다는 단 한가지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다.


옛날에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했다.  수십만의 사람들이 별도의 "작업훈련소"나 "고용 작업장"에서 이미 사라져버린 노동을 되살리려 땀을 흘리도록, 또한 정상적인 - 하지만 그들은 결코 얻지 못할 - "일자리"에 걸맞게끔 스스로를 준비하도록 만들기 위해 오늘날 국가는 어떠한 비용도 마다하지 않는다.  단지 이미 멈춰서버린 벨트가 앞으로도 영원히 힘차게 돌아갈 수 있다는 허상 하나를 심어주기 위해 매번 새로운, 하지만 언제나 멍텅구리같은 "조치"들이 발견된다. 노동에 대한 강제가 점차 의미를 잃어가면 갈수록, 안 그러면 국물도 없을 줄 알라는 망치소리는 사람들의 뒷머리를 더욱 잔인하게 내리칠 뿐이다.


이렇게 볼 때, "새로운 노동(당)"과 그 모방꾼들이 신자유주의적인 선별모델과 완전히 한묶음이라는 사실은 세계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고용"을 북돋움으로써, 또한 희망에 찬 노동사회의 미래라는 속임수를 통해 도덕적인 정당화가 이루어진다 - 실업자와 노동거부자를 더욱 거칠게 다룰수록.  이와 동시에 국가에 의한 노동강제, 임금보조, 나아가 이른바 "자발적인 시민노동" 등은 노동비용을 점점 더 아래로 억누른다.  이렇게 해서 저임금과 빈곤노동이라는, 그야말로 군침이 절절 흐르는 부문은 더욱 촉진된다.


"새로운 노동(당)"을 모델로 한, 이른바 적극적인 노동정책은 예컨대 만성환자나, 유아를 양육하는 독신여성이라고 해서 편의를 봐주는 게 결코 아니다.  국가로부터 보조를 받는 사람이 만에 하나라도 방구석에 쳐박혀 있는 날이면, 그의 밥줄은 당장 날라간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국가에 대해 이런저런 요구를 감히 내세우지 못하도록 겁을 주며, 나아가 비록 비참할지라도 그나마 있는 일자리를 달게 받는게 차라리 더 낫다는 섬뜩한 형벌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만이 이같은 냉정함 속에 담긴 유일한 의미이다.

  
물론 공식적으로, 자애로운 국가는 언제나 사랑에 충만해서, 그리고 "노동을 두려워하는" 어린양들을 올바른 길로 이르게끔 단호히 깨우쳐주기 위한 의도에서 회초리를 치켜 든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교육적인" 조치들은 오로지 못된 녀석들을 집밖으로 내쫓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들판에서 풀뿌리를 캐도록 실업자들이 강제로 내몰린다고 할 때, 과연 여기서 다른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  그곳에서 그들은 계절에 따라 몰려드는 폴란드의 임시노동자들, 다시말해 환율차액에 따라 고국에 남은 가족들에게 그저 몇푼이나마 송금할 수 있기에 딱 굶어죽지 않을 만큼의 비참한 임금이나마 감수하는 바로 그 노동자들마저 몰아낸다.  강제적으로 동원된 이들 노동자들에게 이런 조치들은 그야말로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으며, 그 어떤 "직업전망"도 열어주지 않는다.  만일 하루 12시간 강제노동에 휘둘려 본 누군가가 이제부터 차라리 리어카라도 끌어야겠다고 기특하게 마음을 고쳐먹고 나서기라도 한다면, 이른바 "유연화를 위한 치료법"은 애초에 의도했던, "새로운 영국風"의 효과를 톡톡히 본 셈이다.    

4. 노동신앙의 극단과 자가당착

이 사회가 노동우상의 죽음에 맞서는 무기로 치켜든 새로운 노동광신주의는 사실 오랜 역사의 논리적 연속이자 동시에 그 마지막 단계이다.  종교개혁시기 이래 서구의 근대화를 이끌어온 모든 세력은 노동의 신성함을 찬미해 왔다.  특히 지난 150년 동안 모든 사회이론과 다양한 흐름의 정치적 조류는 노동이라는 이념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사회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 민주주의자들과 파시스트들은 처절하게 싸워왔지만, 철천지 원수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언제나 노동우상 앞에 나란히 무릎을 꿇었을 뿐이다.  "게으른 자들을 쓸어버려라"는 문구가 인터내셔날가 가락에 실려 울려퍼졌다면,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복음은 아우슈비츠 정문에 당당히 걸려있었다.  전후의 다원적 민주주의는 노동의 영원한 독재를 진정으로 맹세했다.  카톨릭이 지배하는 바이에른주의 헌법조차 루터로부터 출발한 바로 그 전통, 다시말해 "노동이란 행복의 근원이며 국가의 특별한 보호 아래 놓여 있다"는 전통의 의미 그대로 주민들을 인도하고 있다.  20세기의 마지막 고비에서 모든 이데올로기적 대립은 거의 사라졌다.   노동이란 인간을 규정하는 본질적인 요소라는 단 하나의 잔인한 교리만이 남겨졌을 뿐이다.


하지만 오늘날 노동사회의 현실 그 자체는 이 교리를 무너뜨리고 있다.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일하는 동물"이라고 노동신앙의 성직자들은 언제나 설파해 왔다.  인간이란 마치 저 옛날의 프로메테우스와도 같이 자연을 자신의 의지에 종속시켜 생산물로 탈바꿈시킬 경우에만 비로소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세계의 지배자, 창조자라는 이 신화가 현대 노동과정의 성격에 비추어 이미 웃음거리가 되긴 했지만, 지멘스나 에디슨 류의 발명자본가의 시대에는 그래도 현실적인 버팀목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다.  물론 이런 류의 표현은 이제 낡은 구닥다리일 뿐이다.  


오늘날 자신이 행하는 노동의 내용과 의미, 그리고 그 목적에 대해 끊임없이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단지 정신나간 사람이거나, 아니면 사회라는 기계가 쳇바퀴돌듯 돌아가는데 단지 방해요소가 될 뿐이다.  자신이 해놓은 일에 진정으로 뿌듯해하던, 한때나마 노동을 신성시했던 그 "도구적 인간"은 이제 마치 기계식 타자기만큼이나 낡아빠진 존재로 전락했다.  어쨌거나 벨트는 돌아가야 하고, 단지 그걸로 충분할 뿐.  의미 따위나 따지고 있는 건 이제 예컨대 홍보부서나, 일군의 레크리에이션 지도자들, 산업심리학자들, 기업이미지 연구자들, 혹은 마약판매자들의 몫이다.  만일 아직도 여전히 동기가 어떻다는 둥 창조성이 어떻다는 둥 떠드는 곳이 있다면, 아마도 틀림없이 아무것도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게 아니라면.  따라서 자기암시를 걸거나, 자기를 어떤 식으로든 프리젠테이션하는 능력은 이제 경영자나 전문노동자, 미디어스타나 회계담당자, 아니면 교사나 주차장경비직의 가장 중요한 덕목에 꼽힌다.


한편, 노동이란 자연이 인간을 옭아매는 하나의 영원한 필연성이라는 주장도 노동사회가 위기에 빠짐에 따라 근본적으로 비웃음만 살 뿐이다.  인간의 욕구는 오로지 인간의 피땀어린 노력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기에 노동우상 앞에 모두들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고 지난 몇백년 동안 거듭 설파되어 왔다.  전체 노동-시리즈의 목적이란 곧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라고들.  만일 이 말이 타당하다면, 노동에 대한 비판은 마치 중력을 비판하는 것만큼이나 대단한 것이리라.  하지만 그렇다면 도대체 왜 현실의 "자연법칙"은 위기에 빠져야 한단 말인가?  아니 심지어 사라져야 한단 말인가?  오로지 성과에 눈이 뒤집힌 신자유주의적 고급인간들로부터 배불룩한 노동귀족에 이르기까지 전체 사회 노동진영의 대변인들은 이제 노동의 가상(Pseudo)본성을 들먹거리는 것만으로는 말문이 막힐 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오늘날 노동사회 시스템이 더 이상 자신들의 노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3/4의 인류가 헐벗고 굶주려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하려는가?


버려진 사람들의 등짝을 또다시 내리찍는 건 이제 더 이상 "네 얼굴에 땀방울이 맺힐 경우에만 비로소 먹을 수 있을지니"라는 옛 예언서의 계명이 아니라, 새로운, 정말이지 더욱 견딜 수 없는 천벌일지도 모를 일이다 : "너의 땀방울은 쓸모없고 판매할 수 없는 것이기에 너는 먹을 수 없다"는.  지난 몇백년에 걸쳐 다른 형태를 띤 모든 사회관계를 무참히 파괴하고 그것들을 자신의 발밑에 종속시켰다는 이유만으로 마치 자연법칙인 양 비치는 존재는 결국 하나의 비합리적인 사회원리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 존재란 기껏해야 실제로는 단지 노동우상 - 그의 "강제" 앞에서라면 마지막 남은 인간적 가치마저 기꺼이 벗어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 - 의 목적합리성에 순종할 뿐이면서도 스스로를 "합리적"인 양 내세우는 한 사회만의 "자연법칙"일 뿐이다.

5. 노동이란 사회적인 강제원리이다.

노동이란 인간이 자연을 변형시키면서 서로간에 관계를 맺는 것 자체와 결코 동일시될 수 없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그들은 집을 짓고, 옷과 음식, 그밖의 여러 물건들을 만들어내며, 또한 아이들을 기르고, 책을 쓰고 토론하며, 정원을 꾸미고, 음악을 연주한다.  이런 일들은 틀에 박힌, 당연한 것들이다.  하지만 인간의 활동 자체, 곧 "노동력의 지출" 그 자체가 그 행위의 내용에 대한 아무런 고려도 없이, 또한 그 행위에 가담한 사람의 욕구나 의지와는 완전히 무관하게, 사회관계를 지배하는 하나의 추상적인 원리로 탈바꿈한다는 사실은 결코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옛 농경사회에서는 가능한 모든 지배형태와 인격적인 종속관계가 분명히 존재했지만, 그렇더라도 노동이라는 추상물(Abstraktum)의 독재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자연을 변형시키고 사회관계를 맺는 활동들이 비록 자율적인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결코 추상적인 "노동력 지출"에 종속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종교적 율법이나 사회문화적 전통 등과 같은 복잡한 규범체계 속에서 자리매김되어 있었을 뿐이다.  모든 활동들은 특별한 시간과 공간을 지녔다 ; 그 어떠한 추상적이고-보편적인 활동형태가 존재했던 게 아니다.


모든 관계로부터 "떨어져 나온" 영역, 다시말해 모든 내용규정으로부터 벗어난 이른바 노동이라는 하나의 특수한 영역 - 다른 모든 사회그물망로부터 벗어나서, 욕구를 넘어서는 "경영"이란 이름의 추상적인 목적합리성에 매몰된, 비자립적이고 맹목적이며 순수하고 마치 로봇과도 같은 활동의 영역 - 을 처음으로 등장시킨 것은 인간의 에너지를 화폐로 끊임없이 탈바꿈시키는 자기목적으로 무장된, 근대 상품생산체계에 이르러서이다.  삶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이 영역에서 시간은 이제 더 이상 삶 자체가 녹아든, 체험된 시간이기를 멈춘다 ; 그것은 이제 최적의 상태로 이용되어야 하는, 하나의 단순한 원료가 된다 : "시간은 곧 돈이다."  매 초 단위의 순간 순간이 계산되고, 화장실로 향하는 발걸음조차 욕먹을 짓거리가 되며, 최소한의 잡담 조차 범죄행위로 받아들여진다.  어디서 노동이 이루어지건간에 오로지 추상적인 에너지만이 지출될 뿐이다.  삶이란 다른 곳에서 이루어진다 - 아니 심지어 그 어느 곳에서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 노동이라는 이름의 박자소리가 모든 것을 뚫고 들어오기 때문에.  어린이들조차 "능력을 갖추기 위해" 이미 시간에 길들여진다.  휴가기간이란 단지 "노동력"의 재충전을 위한 시간일 뿐이다. 식사시간에도, 파티장에서도, 심지어 사랑을 나누는 순간에조차 머릿속에는 초바늘이 똑딱똑딱 움직인다.


노동의 영역에서는 무엇이 행해졌느냐가 아니라, 행위 그 자체가 이루어졌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화폐자본의 가치증식, 다시말해 화폐 그 자체를 향한 화폐의 끝없는 증가를 가져 온다는 점에서 볼 때, 노동이란 곧 하나의 자기목적이기 때문이다.  노동이란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자기목적이 활동하는 형태이다.  오로지 이 목적을 위해 모든 생산물은 상품으로 생산된다. 오로지 이런 형태속에서만 생산물은 노동이라는 추상물을 그 내용으로 하는 또 하나의 추상물, 곧 화폐를 표현하기 때문에.  뿐만 아니라 바로 이런 이유에서, 생산행위의 내용은 생산된 물건이 지니는 효용성, 혹은 사회와 자연에 대한 영향만큼이나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하게 된다.  집을 짓건, 踏車를 만들어내건, 책을 찍어내건, 혹은 유전자조작된 토마토를 길러내건간에, 혹은 사람이 병들건, 공기가 오염되건간에 - 이 모든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어떤 방식을 취하건간에 그저 상품은 화폐로, 화폐는 또다시 새로운 노동으로 자유로이 탈바꿈하기만 한다면야.  상품이 구체적인 사용가치를 지녀야 한다는 사실은 경영합리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완전히 관심밖이다.  왜냐하면 이들 경영주체들에게 생산물이란 단지 과거 노동, 곧 "죽은 노동"의 담지자로 나타날 뿐이기 때문에.


"죽은 노동"이 자본으로 차곡차곡 쌓여나가는 것 - 화폐형태속에서 표현되듯이 - 만이, 근대상품생산체제가 알고 있는 유일한 "의미"이다.  "죽은 노동"이라구?  정신나간 형이상학이구만!  그래, 하지만 이미 손에 잡힐 듯 뚜렷한 현실이 되어버린 형이상학이야!  바로 이 사회를 쇠사슬 처럼 옭아매고 있는, "사물화한"(versachlichte) 정신착란증세야!  사고 파는 영원한 쳇바퀴속에서 인간은 자의식을 지닌 사회적 존재로서 교환하는 게 아니라, 그저 마치 자동기계인 양 그들을 넘어선 자기목적을 집행할 뿐이다.                                

6. 노동과 자본은 동전의 앞뒷면이다.

좌파진영은 언제나 노동을 열렬히 찬양해 왔다.  이들은 노동을 인간의 본질로 끌어올렸을 뿐 아니라, 이른바 자본에 대한 대항원리로 신비화시켰다.  이들에게는 노동이 문제덩어리였던 게 아니라, 단지 자본에 의한 노동의 착취만이 중요했을 뿐이다.  따라서 모든 "노동자정당"의 강령은 언제나 "노동의 해방"이었을 뿐,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본과 노동 사이에 놓인 사회적인 적대관계는 자본주의적 자기목적 안에서 이해관계를 달리 하는 세력 사이의 적대일 뿐이다.  계급투쟁은 상품생산체계라는 동일한 사회적 지반 위에서 이들 적대적인 이해관계가 드러나는 형태이다.  계급투쟁은 자본의 가치증식이라는 내적 운동메카니즘의 일부가 되었다.  임금, 권리, 노동조건, 혹은 일자리 등 그 무엇을 둘러싸고 투쟁이 진행되었더라도.


설령 노동의 관점에 선다 하더라도 생산의 질적인 내용은 자본의 관점에 섰을 경우나 마찬가지로 중요한 게 아니다.  오로지 유일한 관심은 노동력을 적정하게 판매할 수 있는 가능성일 뿐이다.  자신의 행위에 담긴 의미나 목적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는 이미 관심 밖이다.   상품생산체계라는 형태를 띠고도 생산의 자기규정이라는 원리가 실현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한때나마 존재했었지만, "노동력"은 이런 환상을 일치감치 집어던졌다.  이제 "일자리"만이, "고용"만이 절대 명제이다.


무엇을, 왜,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생산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노동력상품의 판매자이건 구매자이건간에 눈꼽만큼의 관심도 끌지 못한다.  원자력발전소의 노동자들이건, 화학공장의 노동자들이건 그들 공장이 문을 닫아햐 할 경우에만 가장 격렬하게 저항한다.  폭스바겐, 포드, 그리고 토요타의 "고용인"들은 자멸의 길에 점차 다가가고 있는 광신도들일 뿐이다.  단지 그들이 살아갈 수 "있으려면" 무언가를 어쩔 수 없이 팔아야한다는 이유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들 스스로 이러한 현실을 내면화했다는 이유에서.  사회학자들, 노동조합원들, 성직자들, 그리고 "사회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많은 직업활동가에게는 이런 모습이 노동의 윤리적-도덕적 가치를 증명하는 예로서만 비친다.  노동은 人性을 형성한다고 그들은 떠든다.  맞는 말이지.  그들이 하루하루 애지중지하는 바로 그 일터 바깥의 삶에 대해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상품생산사회 포로들의 가련한 人性...


노동자계급이 자본에 대한 진정한 적대적 모순으로서, 인간해방의 주체로서 나서지 못했듯, 반대로 자본가들이나 경영자들 역시 착취자의 의지로 똘똘뭉친 주체로서 이 사회를 조종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상 그 어떠한 신분계층도 마이크로소프트, 다이믈러-크라이슬러, 혹은 소니의 저 분주한 경영자들만큼 부자유롭스럽고 가련한 삶을 살지는 못했다.  중세의 영주조차 이들을 한없이 조롱하리라.  왜냐하면 중세의 영주가 한가로이 노닐다가 때론 자신의 부를 방탕하게 날려버릴 수도 있었음에 반해, 노동사회의 엘리트들은 한순간의 짬도 꿈꿀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노동우상의 노예이며, 정신나간 사회를 지탱하는 단순한 기능엘리트일 뿐이다.


이 사회를 지배하는 우상은 자신의 의지가 경쟁이라는 "은밀한 강제"를 통해 어떻게 관철되는 지에 대해 너무 잘 꿰뚫고 있다 - 수백개의 공장을 관리하고 수십억의 돈뭉치를 지구상 이곳저곳으로 빙빙 돌리는 그 막강한 권력자들 조차 소리없이 머리를 조아리게 만드는 바로 그 강제.  만일 그들 권력자들이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들 역시 쓸모없는 "노동력"처럼 무참히 내버려질 것이다.  하지만 이 자본의 기능공들을 어쩔 수 없이 위험에 빠트리는 건 착취자로서의 주체적인 의지가 아니라, 바로 그들 자신의 무지몽매함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맹목적인 행위의 의미나 결과에 대해 조금도 의심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감정도 분별력도 결코 가져서는 안된다.  이 때문에 그들은 세상이 황폐화되고 도시가 지옥으로 변해가며 富의 한가운데서 사람들이 헐벗어 가더라도 그저 리얼리즘이라 흥얼거릴 뿐이다.    
  
7. 노동이란 곧 가부장적 지배이다.

설령 노동에 담겨진 논리가 스스로를 끊임없이 돈꾸러미로 탈바꿈하도록 내몬다 하더라도, 모든 사회부문과 활동들이 이처럼 추상시간의 영역으로 끌려들어 오지는 않는다.  따라서 노동이라는 "떨어져 나온" 영역과 나란하게 - 분명 그것의 감추어진 얼굴로서 -, 사적 家計, 가족, 그리고 애정의 영역 또한 생겨났다.  


화폐로 끝내 탈바꿈되지 않는, 혹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화폐의 얼굴을 띠게 되는 일상생활의 많은 활동들은 이처럼 "여성적"이라 정의된 영역에 남는다 : 청소와 요리, 자녀키우기와 노부모 모시기는 물론, 가정주부의 전형적인 "애정노동"까지도 - 녹초가 되어 돌아온 "일하는 남편"을 달래주고, 그들에게 "감정을 주입해주는" 바로 그 노동.  실제로 노동의 또다른 얼굴에 다름아닌 애정의 영역은 부르조아 가족이데올로기에 의해 "원초적인 삶"의 寶庫인 양 추켜 올려졌다. 하지만 이 영역은 보다 나은, 진정한 삶의 영역이 아니다.  이 영역은 노동으로부터 분리되었지만, 노동과의 관련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말하자면 그 자체가 노동의 산물이다.  이처럼 "여성적"인 활동형태라는, 분리된 사회공간이 없었다면, 노동사회는 결코 기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공간은 노동사회의 소리없는 전제조건이자, 동시에 노동사회의 특수한 산물이다.  상품생산체계의 전개과정에서 일반화를 경험하게 된, 性別 定型化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본능적이고 충동적인, 비합리적이고 감정에 좌우되는 것으로 그려진 여성상이, 창조적이고 이성적이며 절제할 줄 아는 노동하는 남성상과 나란히 집단적인 편견으로 굳어지게 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노동의 요구에 맞아떨어지게끔 백인남성 자체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실제로는 수백년에 걸쳐 폭악접으로 이루어진 "마녀사냥"과 동일한 발걸음을 취했다는 사실 또한 우연적이지 않다.  같은 시기에 시작된 자연과학적인 세계해석 또한 이미 그 뿌리는 노동사회의 자기목적과 성별 정형화 논리에 의해 더렵혀진 상태였다.  이런 방식으로 백인남성은 노동의 제국에서 단지 방해요소에 지나지 않는, 모든 감정과 욕구를 스스로 벗어 던져 버렸다.


20세기 동안, 특히 전후의 포드주의적 민주주의체제에서 여성은 점차 노동의 체계속에 편입되었다.  하지만 정신분열적인 의식만이 그 결과로 남겨졌을 뿐이다.  왜냐하면 노동의 영역속으로 여성이 밀고 들어온 것 자체가 한편으로는 결코 해방을 가져다 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단지 남성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들 여성도 노동우상 앞에 머리를 조아려야 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분리"의 구조는 여전히 파괴되지 않은 채로 남겨졌으며, 결국 "여성적"이라 정의된 활동 영역은 공식적인 노동 영역 저편에서 그대로 떡 버티고 있었다.  이에 따라 여성들은 이중부담 아래 허덕이게 되었으며, 동시에 완전히 서로 정반대되는 두 가지 사회적 강제 앞에 신음해야만 했다.  노동의 영역에서 그들은 오늘날까지도 주로 임금이 낮은, 보조적인 지위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여성할당제나 기회균등을 전면에 내건 체제순응적인 싸움은 그 어떠한 변화도 가져올 수 없다. "직장과 가정의 조화"라는, 저 가련한 부르조아적 전망은 상품생산체제의 영역구분을, 따라서 성별 "분리"구조를 눈꼽만큼도 건드리지 못한다.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이런 전망은 뜬구름같은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고소득을 누리는" 극소수의 여성들의 경우, 가사일이나 자녀키우기 등의 자질구레한 일거리를 형편없는 대우를 받는 - 물론 "당연히" 여성인 - 또다른 보조노동력에게 내맡길 수 있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그들 역시 기껏해야 사회적 차별체제 안에서 뭔가 찝찝한 수혜자일 뿐이다.  


사회 전체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른바 사생활이나 가족 등 부르조아적으로 신성시된 영역은 점점 더 무참히 파헤쳐지고 더렵혀진다.  무자비한 노동사회의 횡포는 한 개인 전체를, 완전한 희생과 유연성을, 그리고 시간적으로도 완전히 얽매일 것을 거듭 요구해댄다.  가부장제는 철폐되지 않는다.  노동사회의 위기 속에서 단지 더욱 난폭해질 뿐이다.  상품생산체제가 붕괴되는 발걸음에 때맞춰, 여성들은 삶의 모든 차원에서의 생존을 떠맡게 된다.  "남성"들의 세상이 노동사회의 범주들을 더욱 맹목적으로 밀어붙이는 것과는 달리.

8. 노동이란 미성숙한 자들의 활동이다.

노동과 미성숙의 동일성은 개념적으로나 사실적으로나 증명된다.  불과 몇 백년 전만 하더라도 노동과 사회적 강제 사이의 연관에 대해 모든 사람들은 깨닫고 있었다.  대부분의 유럽 언어들에서 "노동(Arbeit)"이라는 개념은 원래 오로지 미성숙한 인간, 종속된 인간, 하인 혹은 노예의 활동만을 의미한다.  게르만 언어권에서 이 말은 버려진, 따라서 농노로 전락한 어린이들의 勞役을 가리켰다.  라틴어의 "Laborare"란 가혹한 노역 아래 신음한다는 의미를 지녔는데, 일반적으로는 노예의 고통이나 혹사를 뜻했다.  "travail", "Travajo" 등의 단어들은 노예나 부자유한 자들에 대한 고문과 형벌, 곧 일종의 굴레를 뜻하는 라틴어의 "tripalium"에서 유래했다.  "노동의 굴레"라는 독일어 표현에서는 아직도 그 흔적이 발견된다.

따라서 그 어원에 따를 경우, "노동"이란 결코 자율적인 인간활동과 동의어가 될 수 없으며, 하나의 불행한 숙명을 가리킨다.  그 숙명이란 곧 자유를 잃어버린 자들의 활동을 뜻한다.  결국 모든 사회구성원에게로 노동이 확대된다는 것은 노예적인 종속상태가 일반화하는 것에 다름아니며, 또한 근대적인 노동숭배는 곧 이런 상황에 대한 종교적인 절대화를 의미할 뿐이다.


하지만 노동의 일반화가 근대 상품생산체제에 의한 노동의 "사물화" (Versachlichung)와 함께 나란히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같은 내적연관고리는 성공적으로 감추어졌으며 사회적 강제 역시 내면화의 길을 겪에 되었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주인의 채찍 아래 놓여 있는 게 아니다.  사회적 의존관계는 하나의 추상적인 체계연관성으로 탈바꿈했다.  이러한 사회적 의존관계는 도처에서 감지되지만, 동시에 바로 그런 이유에서 결코 이해될 없다.  누구나 노예가 되어버린 곳에서는 동시에 누구나 주인일 뿐이다.  모든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체제우상, 곧 자신들을 "tripalium"으로 내던져 버린, 자본가치증식의 바로 그 "위대한 형제"에게 순종한다.

9. 노동을 관철시키는 피로 얼룩진 역사

근대의 역사는 노동을 관철시키는 역사, 다시말해 전 지구상에 삭막함과 전율의 흔적만을 남겨준 역사이다.  왜냐하면 삶의 에너지 가운데 거의 모든 부분을 오로지 상품생산체제의 비합리한 자기목적을 위해 쏟아부어야 한다는 요구가 오늘날의 경우처럼 항상 내면화한 채 존재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노동우상을 절대적으로 섬기도록 그야말로 쳐박아넣기 위해서는 몇백년에 걸친 엄청난 폭력이 필요했다.


이 기나긴 세월의 맨 앞에는 이른바 "후생을 높혀주는" 시장관계의 확대가 고고하게 서 있었던 게 아니다.  근대초기의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던 절대주의적 국가장치의 굶주린 화폐욕구만이 존재했을 뿐이다.  오로지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전체를 관료제라는 이름의 밧줄로 옭아맸던 바로 이 국가장치의 이해(Interesse)를 통해서만 도시의 상인자본 및 금융자본은 전통적인 교역관계의 틀을 뛰어넘어 빠른 속도로 번성할 수 있었다.  바로 이런 방식을 통해 화폐는 비로소 하나의 중심적인 사회적 모티브로 변했으며, 노동이라는 추상물 역시 욕구와는 전혀 무관한, 하나의 중심적인 사회적 강제로 탈바꿈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시장을 위한 생산, 따라서 보편적인 화폐경제를 향해 발걸음을 옮겨 놓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 비밀은 절대주의적인 화폐욕구가 각종 세금을 점차 화폐의 모습로 바꿔버렸고,  게다가 엄청나게 높혀 버린데서 찾을 수 있다.  이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군사력으로 무장한 근대초기의 싸움꾼국가를 위해, 그 창고를 채워주기 위해, 또한 그 관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돈을 벌어야"만 했다.  정확히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자본의 가치증식과 노동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자기목적이 세상에 등장했다.


반면 모든 조세와 재정지출이 화폐라는 형태를 띠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는 무언가 불충분했다. 절대주의를 떠받드는 관료들과 화폐자본주의의 수호자들은 이제 인간 자체를 노동으로부터 화폐를 뽑아내는 사회기계의 원료로서 강제적으로 조직해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켜온 전통적인 삶의 방식과 생존방식은 파괴되었다 ; 이들 스스로가 자발적이고 자율적으로 "더 나아갔던" 게 아니라, 그들을 이제 막 가동된 가치증식기계의 인간원료로서 써 먹어야 했으므로.  사람들은 이제 모직매뉴팩쳐의 양치기 소년에게 자리를 넘겨주며, 총칼의 위협 아래 들판으로부터 하나둘씩 쫓겨났다.  자유로운 수렵, 어로, 벌목 등과 같은 옛 권리는 철폐되었다.  굶주림에 지친 무리들이 애처롭게 구걸하거나 남의 물건에 슬쩍 손을 대면서 이곳저곳을 쏘다닐 경우, 이제 그들은 강제노역장이나 매츄팩쳐에 쳐넣여졌다.  강제노동이라는 채찍을 휘둘러 대며, 그들의 머릿속에 온순한 노동동물의 노예의식이 쳐박히도록.


하지만 자신들의 종복들을 돈뽑아내는 노동우상의 원료로 척척 바꿔치기하는 것 또한 절대주의적인 괴물국가의 마음을 사로잡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그들은 이제 다른 대륙에까지 자신들의 야심을 넓혀 나갔다.  유럽대륙의 내적 식민화는 외부의 식민화, 특히 남북미대륙과 아프리카 일부를 집어 삼키는 것과 나란히 진행되었다.  노동이라는 채찍을 높이 치켜든 장본인들은 바로 여기에서 그나마 남아있던 망설임마저 아무런 흔적없이 내던졌다.  당시로서는 유례없는 약탈과 파괴,   절멸의 행군 속에서, 그들은 새로 "발견된" 세상으로 한발짝씩 나아갔다. - 그들의 제물이된 희생자들은 더 이상 인간일 수 조차 없었다.  밝아오는 노동사회를 일구는, 인간을 잡아먹는 유럽세력은 그들의 총칼 아래 무참히 짓밟힌, 낯선 문화를 일컬어 "야만적"이라 불렀다 - 식인종들이라고.


이로써 이들 "야만인"들을 뿌리채 도려내거나 혹은 수백만명에 이르는 노예로 끌어다 마음껏부려 먹을 수 있는 정당성이 마련되었다.  식민농장이나 광산에서 처참하게 쓰려져간, 문자그대로 노예는 - 그 잔인함에 있어서 고대노예제도를 훨씬 뛰어넘었는데 - 상품생산체제를 탄생시킨 끔찍한 죄악의 희생자들이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노동을 통한 말살!"이 거창하게 행해졌다.  그건 곧 노동사회를 꽃피운 두 번째 기초였다.  자기규율을 통해 "만들어진" 백인남성들은 바로 이들 "야만인"에게 내면 어딘가에 감추어진 자기학대와 콤플렉스의 감정을 마음껏 뱉어낼 수 있었다. "여성"들이 그러하듯, "야만인"들 역시 백인남성들에게는 동물과 인간 중간쯤에 놓인, 야만적이고 원시적인 열등존재일 뿐이었다.  임먀뉴엘 칸트는 아프리카 원숭이들도 그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언젠가 추측했다 ; 그들이 실제로 원하지 않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노동하는데 끌려갈까 두려워서라고.


이같은 논증과정은 이른바 계몽에 대해 다시 한 번 곱씹어보게끔 해준다.  신의 은총이라는 프로테스탄트版 버전에서 출발해 계몽 이후 자연법칙으로 자리잡은, 근대의 억압적인 노동윤리는 "문명을 일깨우는 사명"으로 치장되었다.  이런 의미를 따를 경우, 문화란 노동의 발밑에 자발적으로 엎드리는 걸 뜻한다 ; 노동은 남성적이고, 백인에 어울리며, "서양적"이다.  정반대쌍, 다시 말해 비인간적이고, 다듬어지지 않은 속성은 여성적이고, 유색인종에 어울리고, "이국적"이며, 따라서 어떤 강제 아래 놓여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 노동사회의 "보편주의"란 그 뿌리에서부터 지극히 인종적이다.  노동이라는 보편적인 추상물은 언제나 자신안에 포섭되지 않는 모든 것과의 경계지음을 통해서만 스스로 정의될 수 있다.


절대주의의 유산을 이어받은 근대 부르조아의 선조는 옛 무역로를 평화롭게 오가던 상인집단이 아니었다.  근대 "기업가"의 탄생을 예비한 사람들은 오히려 근대초기 용병무리를 이끌던 우두머리들, 강제노역소나 교화소의 관리들, 징세관리에 빌붙어먹던 인간들, 노예감독관들, 그리고 그 노예의 목을 자르던 인간백정들이었다.  18, 19세기의 부르조아혁명은 사회적 해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 이들 혁명은 단지 새로이 싹트기 시작한 강제시스템 내에서의 권력관계를 재편했을 뿐이며, 또한 노동사회의 여러 제도들을 낡아빠진 왕조의 이해관계로부터 끄집어 내어 사물화와 脫인격화라는 푯대를 향해 밀어붙였을 뿐이다.  특별한 열정을 가득 품고서 노동에 대한 의무를 거창하게 선언한 것도, 또한 "부랑아 소탕법"을 통해 노동교화소를 새로이 설치한 것도 바로 저 찬란한 프랑스혁명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혁명적인 사회운동이 찾고자했던 바의 정반대쌍이었다 - 부르조아혁명속으로 사그러들기 보다는 부르조아혁명의 변두리에서 오히려 보다 활활 타올랐던 그 혁명적인 사회운동의.  이미 이보다 훨씬 오래전에도 전혀 다른 형태의 - 노동사회나 근대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공식적인 역사서술가들이 도저히 건드릴 수 없는 - 저항과 거부운동은 분명히 존재했다.  결코 아무런 마찰없이 봉건적인 지배관계속으로 끌려들어갈 수만은 없었던, 옛 농경사회의 생산자들은 체제라는 이름의 낯선 강제 아래 다소곳이 "노동자계급"의 새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  15, 16세기의 농민전쟁으로부터 시작해 훗날 "기계파괴자"들이라 비난받은 영국의 운동들이나 1844년 슐레지안 직공들의 봉기에 이르기까지, 노동에 맞서는 격렬한 저항투쟁의 끈은 이어진다.  한편에서 노동사회가 관철되는 역사와, 다른 한편에서 때론 폭발적이고 때론 소리없는 내전이 이어지는 역사는 몇백년에 걸친, 하나의 동일한 과정이다.

물론 옛 농경사회는 천국으로부터 멀치감치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무자비하게 뚫고 들어오는 노동사회의 엄청난 강제는 대다수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지금 마치 나락을 향해 떨어지고 있는 것처럼, 또한 "혼돈의 시대"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주었다.   어려운 처지라는 건 어차피 마찬가지였지만, 실제로 사람들에게는 뭔가 잃을만한 것도 남아 있었다.  예컨대 근대세계의 그릇된 의식속에서 중세의 암흑인 양 혹은 재앙인 양 그려진 것은 사실 그들 당시대 역사의 고통이었을 뿐이다.  유럽대륙 안팎의 前자본주의적 및 非자본주의적 문화에서 생산활동을 위해 쓰여지던 하루 혹은 연간노동시간은 공장이나 사무실에서 일하는 오늘날의 현대적인 "고용인"의 경우보다도 훨씬 적었다.  더욱이 이들 사회에서의 생산과정은 노동사회에서처럼 물샐틈없이 쥐어짜지는 게 아니라, 여유로움과 "느림"의 문화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천재지변만을 떼어 놓고 본다면, 대다수의 구성원들을 위한 기본적인 물질적 욕구는 근대사회의 여러 변종들에서보다 훨씬 더 잘 보장되어 있었다 - 오늘날과 같은 위기세상의 超슬럼가에 비하면 말할 것도 없고. 지배관계를 놓고 보더라도, 지독하리만큼 관료화한 노동사회에서처럼 뼛속까지 파고드는 그런 게 아니었다.

따라서 노동에 대한 저항은 오로지 군사력을 통해서만 진압될 수 있었다.  전근대사회 생산자들의 문화는 "발전한" 게 아니라, 철철 흘러내리는 핏방울 속에서 질식해 버렸다는 사실에 대해 노동사회의 이데올로그들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오늘날의 세련된 노동-민주주의자들은 이 모든 참혹함을 가리켜 기껏해야 자신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민주주의 시대 이전의 상황"이라 일컬을 뿐이다.  근대의 폭력적인 前史가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노동사회의 본질을 고스란히 까발려 주고 있다는 역설을 그들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산업민주주의 사회의 관료제적인 노동행정과 국가에 의한 대중통제는 절대주의와식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자신의 출생비밀을 단 한 차례도 숨길 수 없었다.  노동우상의 이름 아래 자행된 억압적인 인간통제는 오히려 더욱 적나라해졌으며, 삶의 모든영역을 뚫고 들어왔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노동의 비극 속에서, 마치 쇠사슬과도 같은 관료주의적 손길은 노동사회 초기에서처럼 다시금 느껴진다.  언제나 그래왔듯, 노동행정이란 사회적 차별을 만들어내고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단 국가노예를 내세워 위기를 돌파하려는 강제체제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국제통화기금에 의해 이미 차례차례 파멸에 이른 주변부국가들의 경제시스템 속에서 오래전 식민시대의 망령은 또렷하게 되살아난다.  자신이 떠받들던 우상이 쓸쓸한 죽음을 맞은 지금, 노동사회는 태초의 범죄라는, 그 낯익은 방법을 떠올리고 있다.
          
10. 노동운동은 노동을 위한 운동이었다.

옛 사회혁명이 사그러든 자리에서 꽃을 피운 전통적인 노동운동은 더 이상 노동이라는 강제에 맞서는 싸움을 전개한 것이 아니라, 겉보기에 어쩔 수 없는 숙명처럼 보이는 것과의 자기동일시 속에서 발전했다.  노동사회가 안겨주는 강제를 이미 그들 스스로 내면화함으로써, 단지 노동사회안에서의 "권리"와 개선만이 문제가 되었을 뿐이다.  그들은 인간의 에너지가 화폐로 전환되는 사태를 비합리적인 자기목적이라는 이름 아래 근본적으로 비판하기 보다는, 스스로 "노동의 관점"을 받아들여 가치증식과정을 중립적인, 결국 긍정적인 사실로 이해했을 뿐이다.

이처럼 노동운동 역시 절대주의와 프로테스탄티즘, 부르조아 계몽사상의 후손으로 등장했다. 노동이라는 불행은 이제 근대우상의 종복으로 길들여지는 것에 대해 "인권"이라는 딱지를 갖다붙인, 노동에 대한 그릇된 자부심과 자리를 맞바꿨다.  순하게 길들여진 노동노예들은 창끝의 방향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되돌렸으며, "일할 권리"를 외치거나 "모든 사람들에게 노동의 의무"를 요구하는 열정적인 전도사로 변신했다.  부르조아는 "노동사회의 기눙공"으로서 투쟁의 대상이 되었던게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노동의 이름 아래 기생적인 존재라고 손가락질 당했다.  어떠한 예외도 없이 모든 사회구성원은 "노동군대"속으로 끌려들어와야 했던 셈이다.

노동운동 스스로가 자본주의적 노동사회의 개척자로 탈바꿈했다.  노동의 발전과정에서 볼 때,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완고한 부르조아 기능공들에 맞서 사물화의 마지막 단계를 뚫고나간 건 바로 노동운동의 몫이었다 ; 마치 한 세기 전 부르조아지가 절대주의를 계승했던 것처럼.  노동에 대한 신격화를 통해 노동자정당과 노동조합이 국가장치나 억압적인 노동통제제도들과 기꺼이 화해했다는 게 바로 이같은 사실을 가능케 한 열쇠이다.  이들은 국가장치나 노동통제제도들을 철폐하기 보다는, 말하자면 "제도속으로의 행진"을 위해 기꺼이 발걸음을 내디뎠을 뿐이다.  결국 이들은 이전에 부르조아가 밟았던 발자국을 뒤따르면서, 절대주의 이래 인간통제를 가능케 해 준노동사회의 관료제적 전통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물론 노동이 사회적으로 보편화한다는 이데올로기는 하나의 새로운 정치적 역관계를 요구했다. 마치 반쯤 생기다 만듯한 엉성한 노동사회의 - 다양한 정치적 "권리"를 인정하는 - 신분질서를 밀어내고, 이제 완성된 "노동국가"에 걸맞는, 보편민주주의적인 평등원리가 들어섰다.  뿐만 아니라, 가치증식기계가 본격적으로 작동함 따라 내뱉기 시작한 불평등은 "복지국가"에 의해 어루만져져야 했다.  노동운동은 이 과정을 위해서도 하나의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사회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노동운동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 하지만 그들 자신이 놓았던 덫에서 한걸음도 빠져 나갈 수 없었던 - "시민운동"으로 변신했다.   민주주의는 모든 것에 대해 협상을 가능하게 한다. 정언명령처럼 전제된 노동사회의 강제를 제외하고는.  이같은 강제가 어떤 모양새를 띨 것인가, 또한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라는 문제만이 논쟁대상이 될 수 있다.  이 물건이냐 저 물건이냐, 페스트냐 콜레라냐, 뻔뻔스러움이냐 어리석음이냐, 아니면 콜이냐 슈뢰더냐의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노동사회의 민주주의는 역사상 가장 비열한 지배체제이다 - 스스로를 억압하는 체제.  따라서 이러한 민주주의는 공동의 자원에 대해 사회구성원들이 자유롭고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단 한 차례도 내버려두지 않는다.  자신의 알몸마저도 노동시장에 경쟁적으로 갖다바치는, 사회적으로 서로 분리된 노동單子만이 전부이다.  민주주의란 자유의 정반대쌍이다.  민주주의사회의 노동인간은 필연적으로 관리하는 자와 관리되는 자, 경영하는 자와 경영당하는 자, 기능엘리트와 인간재료로 갈라진다.  모든 정당들, 특히 노동자정당 역시 이같은 명제를 자신의 구조 속에서 충실히 증명해 보인다.  이끄는 자와 이끌리는 자, 프로페셔날과 애송이, 길을 내는 자와 뒤따르는 자가 이루어내는 조화란 곧 활짝 열려진 논쟁과 결정과정과는 눈꼽만큼도 관련이 없는, 일그러진 몰골일 뿐이다.  엘리트 스스로가 단지 비자립적인, 노동우상의 기능공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 체체의 논리를 구성하는 주된 요소이다.

최소한 나치즘 이래로 모든 정당은 노동자정당이자 동시에 자본의 정당이다.  동유럽과 남유럽의 "개발도상사회"에서 노동운동은 후발근대화를 이끄는, 국가주의적 정당으로 변신했다 ; 물론 서유럽에서는 서로 바꿔치기해도 무방하리만큼 고만고만한 프로그램으로 무장한 "국민정당"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지만.  노동사회가 끝나면 계급투쟁도 끝을 맺는다.  계급이란 하나의 공통의 물신체제가 사회적으로 기능하는 범주이다.  사민당과 녹색당, 옛 공산주의자들이 위기관리를 위해 발벗고 나서 비열한 억압프로그램을 밀어붙인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노동운동의 정당한 상속자라는 사실을 증명해 줄 것이다 - 어떤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오로지 노동만을 애걸했던 그 노동운동의 후예임을.
                  
11. 노동의 위기

2차 대전이 끝난 후 매우 짧은 기간 동안, 포드주의적 산업체제에 기반한 노동사회는 마치 "영원히 번영할" 체제, 다시말해 자기목적의 강제가 할퀴고 간 상처를 대량소비와 복지국가를 통해 지속적으로 어루만져줄 수 있는 체제로 자리잡은 것처럼 비칠 수 있었다.  이같은 표상이 기껏해야 세계인구 가운데 극히 일부에만 타당한, 나아가 여전히 민주주의라는 외피를 쓴 노예-이데아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잠시 제쳐둔다 하더라도, 이같은 표상은 중심부에서조차 이미 웃음거리로 전락했다.  극소전자를 중심으로 한 3차산업혁명의 등장으로 노동사회는 결정적인 한계에 다다른다.

이같은 한계가 결국 언젠가 찾아올 수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논리적으로도 이미 충분히 예견 가능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상품생산체제는 그 출생순간부터 도저히 치유될 수 없는 자기모순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상품생산체제는 한편으로 노동력의 지출을 통해 인간에너지를 기계속에 더욱 많이 빨아넣을수록 잘 굴러간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경쟁법칙은 인간노동력을 지식화한 현물자본에 의해 대체시키는, 끊임없는 생산력 상승을 부추긴다.

이러한 자기모순이야말로 이전 시대에 나타났던 모든 위기, 그 가운데서도 단연 1929-33년의 참혹한 대공황을 가져온 근본원인이었다.  물론 이들 위기는 상쇄메카니즘을 통해 언제나 거듭 극복될 수 있었다 : 일정한 잠복기를 거친 시장은 보다 높은 생산력 수준에서 새로운 구매계층에 까지 확대됨으로써, 이전에 자신들이 내뱉았던 것 보다도 더 많은 노동을 다시금 빨아들였다.  생산물당 노동력투입량은 줄어들었지만, 이를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더 많은 생산물이 만들어졌다.  따라서 생산물-혁신이 공정-혁신을 넘어서는 한, 체제의 자기모순은 팽창운동으로 "번역"되어 나타났을 뿐이다.

이를 증명해주는 가장 탁월한 역사적 사례로는 자동차를 꼽을 수 있다 : "노동공학"적인 합리화를 가능케 해 준 컨베이어벨트나 그밖의 여러 기술체제 ( 예컨대 디트로이트의 헨리 포드 자동차공장을 보라 ) 덕분에 자동차 한 대당 소요되는 노동시간은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물론 이와 동시에 노동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말그대로 쥐어짜졌으며, 따라서 동일한 시간 동안 인간재료는 몇 배나 더 빨려들어간 셈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를 통해 자동차 판매가격이 급속히 떨어짐으로써, 당시만 해도 몇 만명의 최상위계층을 위한 사치품에 머물렀던 자동차가 이제는 대중 소비의 영역으로 옮겨질 수 있었다.

인간에너지를 빨아먹는 노동우상의 -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 식욕은 바로 이런 방식을 통해 보다 높은 수준에서 충족될 수 있었다 - "포드주의"라는 2차 산업혁명의 와중에서 수많은 노동력이 내뱉어졌음에도.   뿐만 아니라 자동차는 선진노동사회의 생산양식 및 소비양식을 특징지어주는 중요한 소품이다.  자동차의 대량생산과, 그에 뒤따르는 개인교통의 홍수 속에서 세상은 끔찍하리만큼 온통 콘크리트더미에 파뭍혀 버렸고, 환경은 독극물을 뒤집어 쓴 양 색이 바랬으며, 이제 우리는 수백만의 시체나 부상자가 나뒹구는 바로 이 거리 위에서 3차대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 앞에 움찔하게 된다.

지금까지 용케도 버텨온, 팽창을 통한 상쇄메카니즘은 이제 3차 산업혁명에 이르러 드디어 운명을 고한다.  물론 극소전자기술에 의해 많은 생산물의 가격이 떨어지거나 새로운 제품이 출현하는 건 틀림없다.  하지만 이제 역사상 처음으로 공정-혁신의 속도는 생산물-혁신의 속도를 뛰어넘는다.  역사상 처음으로 시장의 확대를 통해 다시 빨려 들어갈 수 있는 것보다도 더많은 노동이 내팽겨쳐진다.    전자로보트가 인간에너지를 몰아내며, 새로운 통신기술은 노동을 쓸모없게 만들어 버린다.  건설, 생산, 마케팅, 유통, 영엽, 심지어 경영까지도 포함한 전 부문은 이제 서서히 사라진다.  역사상 처음으로 이제 노동우상은 굶어죽을 정도로 보잘 것 없는 끼니에 만족해야 한다.  비로소 그에게도 죽음의 순간이 찾아오는 셈이다.

민주주의적인 노동사회에서는 인간노동력을 빨아먹는, 숙성한 자기목적체제만이 처음이자 곧 마지막이기 때문에, 노동사회라는 형태안에서 보편적인 노동시간 단축으로 키를 옮겨잡는 건 불가능하다.  경영합리성이라는 괴물은 한편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실업"상태에 머물러 있고, 따라서 자신들의 삶을 체제내적으로 재생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빼앗겨 버렸음에도, 또 다른 한편에서는 끊임없이 수가 줄어들고 있는 그 "고용인"들마저 더욱 가혹한 노동채찍과 성과의 압력 아래 허덕이도록 거듭 휘몰아치고 있다.  철철 넘쳐흐르는 富의 한가운데서 가난과 굶주림이 이제 자본주의 중심부로 되돌아 오고 있다.  쓸모없는 생산시설과 들판은 버려진 채 녹슬고 썩어간다.  한켠에서는 집을 잃은 자들의 절규가 하늘에 닿지만, 다른 한켠에서는 버려진 집들과 공공건물이 텅 빈 상태로 나뒹군다.

자본주의는 이제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소수만의 잔치가 되고 있다.  천천히 죽음에 빠져드는 노동우상은 이제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미쳐 날뛰고 있다.  노동먹이를 찾아나선 자본은 국민경제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 마치 유목민의 경주라도 벌이듯 온세상을 휘젖고 있다.  온 세상의 모든 지역이 지구를 노니는 자본과 상품의 물결 앞에 무너졌다.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합병과 "적대적 인수"의 물결속에서 기업들은 이제 최후의 결전을 위해 떠날 채비를 한다.  통합력을 상실한 국가와 민족은 이제 공중분해되고, 참혹한 생존투쟁속에 제정신을 잃어버린 민족들은 인종간의 패싸움속으로 빠져든다.      

12. 정치의 종말

노동의 위기는 국가의 위기, 따라서 정치의 위기를 필연적으로 불러온다.  근대국가란 근본적으로 자신의 존재근거를 상품생산체제가 경쟁의 틀과 보편적인 법률토대, 나아가 가치증식의 전제 조건을 보장해주는 상위심급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 기대고 있다 - 만일 인간재료들이 체제에 순종하지 않을 경우에 써먹을 수 있는 억압장치를 무기로 해서.  20세기의 국가는 대중민주주의라는 보다 성숙된 형태속에서, 점차 더 많은 사회경제적 과제들을 떠맡을 수밖에 없었다 : 일반적인 복지망 뿐만 아니라, 선진 산업노동사회가 기능하는데 없어서는 안되면서도 그 자체가 가치증식과정으로 조직될 수는 없는 영역들, 다시말해 교육제도, 의료제도, 교통망과 통신망 등 온갖 종류의 인프라구조가 여기에 속한다.  왜냐하면 이들 인프라구조는 사회전체의 관점에서 지속적이고 광범위하게 마련되어야 하며, 따라서 수요공급에 따른 시장변동상황에 죄우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 자체는 하나의 자립적인 가치증식단위가 아니며, 따라서 스스로 노동을 화폐로 전환시킬 수는 없기 때문에, 국가는 자신에게 맡겨진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 화폐를 현실의 가치 증식과정으로부터 퍼내야 한다.  가치증식과정의 샘이 마르면 국가재정 역시 말라 비틀어진다. 이른바 신성불가침의 절대주권이라는 것도 노동사회의 맹목적이고 물신화한 경제에 대하여 완전히 비자립적일 뿐이라는 사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국가는 가능한 한 많은 법률을 제정하려 들지도 모른다 ; 하지만 만일 생산력이 노동의 체제를 넘어서 발전한다면, 언제나 오로지 노동의 주체와 관련을 맺는, 국가의 실정법 역시 무의미해질 뿐이다.

끊임없이 증가하는 대량실업 때문에, 노동수입에 대한 과세로부터 나오는 국가수입은 말라 비틀어진다.  다른 형태를 띤 화폐수입으로부터의 재분배를 통해서만 자본주의적으로 먹고 살 수 있는 "쓸모없는 무리"의 수가 어느 수준을 넘어서자마자, 사회적 복지망은 찢어진다.  국민경제의 경계를 뛰어넘는 자본의 급속한 집중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기업이득에 대한 과세로부터 나오는 국가수입 역시 사라진다.  초국적기업들은 투자유치경쟁에 혈안이 된 국가들에게 세금덤핑, 복지 덤핑, 그리고 환경덤핑을 강요한다.

민주주의국가를 순수한 위기관리자로 탈바꿈시키는 건 바로 이러한 전개과정이다.  재정파탄 상태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국가는 자신의 억압적인 알맹이만을 남긴다.  인프라구조는 이제 기껏해야 초국적자본의 욕구를 뒤쫓아 다닐 뿐이다.  지난날 식민지역에서 그러했듯, 사회의 寶庫는 극소수의 경제적 중심지에 한정될 뿐 나머지 지역들은 황폐해 간다.  한켠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가장 기본적인 삶의 필요조건을 누리는데서조차 내몰리는 현실은 아랑곳 없이, 민명화되는 건 그저 민영화될 뿐이다.   점점 더 줄어만 들고 있는 세계시장의 틈새를 찾아 자본이 쉬지않고 이리저리 돌진하는 이 세상에서, 인간의 보편적인 생활보장은 더 이상 관심사가 아니다.

경제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분야는 예컨대 기차가 들판을 달리건, 편지가 도착하건 그저 아무래도 좋다.  교육은 지구화의 수혜자들이 누리는 특권으로 변해간다.  정신적이고 예술적인, 그리고 이론적인 문화영역은 시장법칙의 잣대에 따라 재단될 뿐이며, 따라서 점차 시들어간다. 개개인이 더 이상 비용부담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변해버린 의료체계는 이제 계급체계로 탈바꿈한다.  사회적인 안락사의 법칙은 처음에는 소곤소곤 비밀리에, 하지만 곧 공개적으로 세상을 지배한다 : 너는 가난하고 "쓸모없기" 때문에 일찍 죽어 없어져야 한다.

의료체계, 교육, 문화, 그리고 보편적인 인프라구조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식과 능력, 수단은 분명히 철철 넘쳐 흐르고 있지만, 위기에 빠진 노동사회가 보내는 사인 - "이런 방식으로는 더 이상의 재정부담이 곤란하다" - 에 따라 곳곳에서 자물쇠가 채워지고, 이들 지식과 능력, 수단은 몽땅 폐기처분된다 - 마치 더 이상 "수익성"이 없다고 판정받은 전통적인 산업부문이나 농업부문의 운명과도 같이.  차별체제로 변해버린 민주주의국가는 자신의 옛 노동시민에게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던져줄 게 없다 - 의무노동과 저임금노동의 형태를 띤 억압적인 노동강제, 곧 일종의 "노동-시뮬레이션"을 제외하고는.  국가행정이란 말그대로 끝장난다.  국가장치는 썩어빠진 도적떼로, 군부는 마치 마피아와도 같은 싸움패거리로, 경찰력은 청소부로 썰렁하게 변해갈 뿐이다.

이제 정치를 통해서 이러한 전개과정을 정지시키거나 혹은 심지어 지난날로 되돌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정치란 본질적으로 脫국가화의 조건속에서는 의미를 잃어버리는, 국가중심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개조하자"는 좌파민주주의적 슬로건은 날이 갈수록 비웃음만 사고 있다.  끝없는 억압, 문명의 붕괴, 그리고 "경제적 테러"를 위한 봉사말고는 더 이상 "개조"될 게 없다.  정치적 민주주의에는 이미 노동사회의 자기목적이 하나의 公理로서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노동의 위기에 대처하는 그 어떠한 정치적-민주주의적 조절도 존재할 수 없다.  노동의 종말이란 곧 정치의 종말이 된다.
          
13. 카지노자본주의적인 노동사회 시뮬레이션

지배적인 사회의식은 노동사회의 진정한 상태에 대해 체계적으로 눈가림을 꾀한다.  몰락해버린 지역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멀치감치 배제되고, 노동시장의 통계는 주저없이 왜곡되며, 여러 형태의 빈곤상은 미디어를 통해 적당히 얼버무려진다.  시뮬레이션이란 곧 위기자본주의를 나타내는 중심적인 기호이다.  경제 자체만을 놓고보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최소한 서구주요국가들에서 오늘날까지도 마치 자본이 노동없이도 축적할 수 있으며 순수한 형태의 화폐란 그 실체없이도 스스로 계속적인 가치증식을 보장할 수 있는 듯 비친다면, 이러한 가상은 전적으로 금융시장의 시뮬레이션과정에서 비롯된다.  민주주의적 노동행정이라는 강제조치를 통해 노동의 시뮬레이션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뒤집어 놓은 듯, 이번에는 자본가치증식의 시뮬레이션이 신용 체계와 주식시장이 실물경제로부터 가상적으로 분리된다는 사실에 힘입어 등장한다.

현재의 노동을 사용하는 것은 미래의 - 하지만 전혀 일어나지 않을 - 노동사용을 끌어들이는 것에 의해 대체된다.   가상의 "미래 II"에서 자본축적이 일어나는 셈이다.  실물경제에서 더 이상 수익성있는 투자처를 발견하지 못하는, 따라서 노동을  더 이상 빨아들일 수 없는 화폐자본은 금융시장으로 급속히 탈출한다.


2차대전 이후 "경제기적" 시기 동안에 이루어졌던 포드주의적인 가치증식도 사실 완전한 의미에서 자립적인 과정은 아니었다.  노동사회의 근본틀을 유지하기 위해 더 이상 다른 방식으로서는 재원을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국가는 조세수입을 훨씬 넘어서 당시만해도 알려지지 않은 정도의 엄청난 신용을 발행했다.  다시말해 국가는 자신의 미래수입을 저당잡힌 셈이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 "남아도는" 화폐자본에게 금융자본주의적인 투자가능성이 열릴 수 있었다 - 다시말해 화폐자본은 국가에게 이자를 받고 대출되었다.  국가는 새로운 신용발행을 통해 이자를 지불했고, 빌린 돈을 주저없이 경제순환과정 속에 투입했다.  다른 한편으로 국가는 이를 통해 복지지출과 인프라구조에 대한 투자를 뒷받침했고, 결국 자본주의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인위적인 - 생산적인 노동력지출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은 - 수요를 창출했다.  노동사회가 자신의 미래를 쥐어 뜯어냄으로써, 포드주의적 호황은 원래의 폭을 훨씬 넘어 연장되었다.

겉보기에 전혀 흠집하나없는 이러한 시뮬레이션 과정은 국가부채문제가 전면에 등장함에 따라 그 한계를 깨닫게 되었다.  제3세계는 물론, 중심부에까지 몰아닥친 국가의 "채무위기"는 지금까지의 방식에 입각한 팽창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국민총생산 대비 재정지출의 몫을 가혹하리만큼 떨어뜨려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와 함께 세상에 등장한, 바로 그 신자유주의적 탈규제가 승리할 수 있었던 객관적 토대였다.   물론 현실적으로 脫규제의 흐름은 위기의 비용이라 이름붙일 수 있는 것에 의해 어느 정도 상쇄된다 - 설령 국가에 의한 억압비용 및 시뮬레이션비용의 형태를 띠기는 하지만.  이러한 방식을 통해 많은 나라들에서 국가지출의 몫은 심지어 증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국가채무를 통해서는 이제 계속적인 자본축적을 더 이상 북돋을 수 없다.  따라서 80년대 이래 擬制資本의 추가적인 창출은 주식시장의 몫으로 넘겨진다.  이제 더 이상 배당액, 다시말해 실물생산에 따른 수익몫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환시세차액에 따른 수익이나 자산 가치의 폭발적인 상승만이 이 바닥을 지배할 뿐이다.  실물경제와 투기적인 금융시장운동 사이의 관계는 이제 거꾸로 뒤집혔다.  주가상승이 실물경제 팽창의 뒤를 밟는 게 아니라, 정반대로 의제적인 가치창출의 성공이 실물축적을 이끌고 나간다 - 물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실물축적을.

노동우상은 의학적으로 사망판정을 받았지만, 마치 자립화한 것처럼 보이는 금융시장의 팽창에 의해 인공적으로 수명을 연장해 나간다.  산업분야의 기업들은 더 이상 이미 오래전에 밑지는 장사로 변해버린 생산이나 실물재화의 판매를 통해서 이익을 남기는 게 아니라, "능력있는" 자금 부서 직원들을 주식 및 채권시장에 몰아넣음으로써 생명을 이어간다.  재정회계예산은 이제 더 이상 조세수입이나 신용창출이라는 방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 군침도는 시장에 재정담당 행정부서가 덩달아 뛰어듬으로써 얻는 수입으로 메꿔진다.  가계소득에서 임금이나 여타 급료로부터 얻는 실물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은 급속히 떨어지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주식투자를 통해 꽤 재미를 보고 있는 한, 높은 수준의 소비를 이어나간다.  다시 말해 실물생산이나 국가의 조세수입을 "허공에 뜬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하나의 새로운 형태의 인위적인 수요가 생겨나는 셈이다.

바로 이러한 방식을 통해 세계경제위기는 조금씩 뒤로 미뤄진다.  하지만 예컨대 자산가치의 의제적인 가치상승이란 달리 말하자면 더 이상 찾아오지 않을 미래의 실질적인 노동사용의 몫을 미리 챙겨먹는 것이기 때문에, 일정한 부화기를 지난 이후에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현기증이 반드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및 동유럽  "신생시장"의 붕괴는 최초의 맛보기 음식만을 선뵈였다.  미국과 유럽연합, 일본 등 자본주의 중심부의 금융시장마저도 폭삭 주저앉는 건 이제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이러한 전후맥락은 노동사회의 물신의식속에서는, 무엇보다도 좌파와 우파를 아우르는 지금까지의 모든 "자본주의 비판가"들에게서는 완전히 뒤집혀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들은 노동이라는 幻影, 다시말해 초역사적이며 실증적인 생존조건이라 치켜 올려진 바로 그 幻影에 사로잡혀 원인과 결과를 체계적으로 바꿔치기한다.  금융시장의 투기적 팽장에서 비롯되는 위기의 일시적인 유예가 이들에게서는 정확히 정반대로 마치 이른바 위기의 원인인 양 나타날 뿐이다.  "사악한 투기꾼"들이 아름다운 노동사회 전체를 몽땅 망가뜨리고 있다고.  그 이유는 이들 투기꾼들이 "도처에 널려 있는" "건전한 화폐"를 노동에 미쳐버린 노예인간들로 하여금 계속 "완전고용"될 수 있도록 "일자리"에 투자하는 게 아니라, 그저 심심풀이로 갖고 놀고 있기 때문이라고.

투기행위가 실물투자를 멈춰 세운 게 아니라, 정반대로 이미 3차 산업혁명에 의해 실물투자만로는 더 이상 수지타산을 맞출 수 없게끔 되었다는 사실,  따라서 투기적인 탈출이란 곧 이러한 비밀을 드러내주는 하나의 징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들 "자본주의 비판가"들의 머릿속으로 파고들어가기란 쉽지 않다.  겉보기에 결코 마르지 않을 샘처럼 흘러넘치는 화폐는 그 자체가 이미 오래전부터 자본주의적인 의미에서 "건전함"을 상살했으며, 단지 투기적인 거품을 부풀리는 "뜨거운 공기"로 남아 있을 뿐이다.  다시금 화폐자본을 그야말로 "올바른" 그리고 현실적인 노동 사회의 쳇바퀴에 쏟아붓기 위한 일념으로 똘똘 뭉친 채, 예컨대 과세조치 ("토빈세" 등등 )를 통해 이 거품을 콕콕 찔러보려는 시도는 단지 이 거품이 순식간에 터져버림으로써 쓸쓸히 막을 내릴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제 어쩔 수 없이 더 이상 수지타산을 맞춰주지 못하는 존재로 굴러떨어졌다는 사실, 따라서 수익성이라는 원칙 자체가 노동사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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