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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활동가를 기다리며 - 서준식

P교수님.

얼마 전, 길에서 우연히 한 후배를 만났습니다. 91년 어지럽던 명동성당 에서 머리띠를 맨 그를 본 것이 마지막이었으니 6년 만의 만남이었던 셈 입니다. 근황을 묻는 나에게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기어드는 목소리로 사법시험 준비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괜한 질문을 했다 싶어 화제를 돌 리려는 데 그는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었습니다. “선배님, 이제 활동가 생활에는 전망이 없잖습니까?”



활동가가 ‘기능’ 속에 갇힐 때…


90년대 들어 우리 사회에서 활동가(사회운동가)의 설 땅은 갑자기 좁아졌 습니다. 이것은 물론 세계적 규모로 진행된 진보운동의 퇴조와 관계가 있 겠지요. 즉 우리나라에서도 운동의 화두가 ‘변혁’에서 ‘개혁’으로 바 뀌면서 사회운동은 (우리 사회의 구조 자체가 아닌) 개별 사안들을 ‘시 민’의 상식 수준에 맞게 ‘개혁’하기 위한 운동이라는 성격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점점 더 전문 지식과 기술을 필요로 하는 운동이 되어왔던 것입니다. 가장 비참한 소외의 현장에 헌신적으로 몸담으면서 이 사회의 구조를 바로 인식하기 위한 학습에 밤을 지새우던 젊은이들은 이런 변화의 물결 속에서 ‘용도폐기’ 돼갔습니다. 그리고 운동판에는 남았지만 전문지식을 갖지 못하는 활동가들은, 때로 전문 지식인들 그늘 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고민합니다.

P교수님.

전문 지식인과 활동가의 결합이 ‘힘있는 운동’을 만든다고 믿는 당신은 그 나름의 관점에서 활동가가 우리 사회에서 귀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지식인이 내는 이론과 아이디어만으로는 ‘개혁’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 으며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 위하여 홍보물을 만들고 거리에서 피켓을 들 거나 퍼포먼스를 벌이고 집회나 행사를 준비하는 활동가의 동력은 귀중하 다는, 일종의 분업론인 셈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저에게 불평등 분업체계처럼 느껴집니다. 이런 분업체계 속에서 활동가들은 결코 활동가로서의 ‘전망’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기능’(機能)을 활동가의 진정한 역할이라고 파악하는 것은 실은 활동 가의 본분에 대한 위험한 오해입니다. 더더구나 그것이 ‘힘있는 운동’ 을 낳으리라는 발상만큼 엄청난 오해는 없을 것입니다.

저는 활동가의 존재 가치는 무엇보다도 그들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소외 된 부분과 닿아 있다는(혹은 닿아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활동가는 억눌린 대중과 헌신적으로 접촉하는 일을 통해 자 기 내부에 변혁을 겪게 마련이며, 그런 활동가와 늘 함께 하는 대중 역시 각성과 내부변혁을 겪게 될 것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 런 과정을 여기저기서 수없이 거치면서 운동은 대중의 각성을 모아 드디 어 잘못된 사회구조의 변화까지도 바라보는 ‘힘있는 운동’이 되는 것입 니다. 대중과의 접점을 잃어버린 활동가가 아무리 일을 잘해도 그 일은 자기만족의 범위를 멀리 벗어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활동가가 ‘기능 ’ 속에 갇혀버릴 때 운동은 결국 쇠락의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소외된 대중과 함께 짓밟힘으로써 활동가는 비로소 활동가가 됩니다. 그 러기에 그들 가슴에는 깊은 슬픔과 그리고 이 현실을 넘으려는 간절한 희 망이 깃들게 마련입니다. 폭력과 악덕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이 다소 변했 다 한들 이 슬픔의 원인이 남아 있는 이상 그들이 ‘변화된 상황’에 쉽 게 길들여질 리가 없습니다. 변혁에의 희망은 결코 비난받아야 할 ‘시대 착오’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 망각과 변절의 시대에 그들만이 간 직할 수 있는 보물에 다름이 아닙니다.

‘변혁’을 외칠 수 없게 된 이 시대에, 저 역시 그들이 더욱 높은 전문 능력을 몸에 지녀야 한다고 믿지만, 그러나 지식이나 기술은 결국 그들만 이 가진 가능성과 희망에 비하면 왜소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불법과 위험’ 속에서 싸우는 사람들


P교수님.

저는 활동가란 원래 합법과 불법, 안전과 위험의 경계선 위를 넘나들지 않을 수가 없는 운명의 소유자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이든 옳다고 힘있게 주장되기 위해서는 그 옳음을 육체로 고수하고 육체로 외치는 물리적 근 거가 우리 사회에 존재해야 하는 법입니다. 이렇게 ‘옳음'의 물리적 근 거로 기능하는 것이야말로 활동가의 큰몫이지만 ‘실정법’은 때로 우리 에게 이런 물리적 근거로 기능하는 일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럴 때 활 동가는 어쩔 수 없이 불법과 위험의 영역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 다. 이 일을 하지 못하는 활동가는 엄밀한 의미에서 ‘실무자’지 활동가 라고 부를 수가 없습니다.


활동가의 직분은 단순한 ‘기능’도 아니고 ‘실무’도 아닙니다. 그들은 현실과 이상과의 경계에서 늘 좌절과 희망 사이를 오가면서 우리의 건강 한 미래를 위하여 맥진하는 기관차와도 같은, 그런 존재인 것입니다. 저 는 이런 활동가들의 ‘전망’을 빼앗아버린 우리 시대의 무기력 속에서 이런 활동가들의 복권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8월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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