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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희망 - 강수돌

자본은 인간의 산 노동이 없으면 재생산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의 산 노동은 나름의 의식과 주관, 주의, 주장을 가지고 행위, 저항을 할 수가 있기 때문에 자본 입장에서는 노동을 효과적으로 '관리'(차별과 위계를 통한 분할 통치)해야만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 즉 자본은 산 노동에 의존하면서도 산 노동을 지배해야지만 무한한 몸불리기가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노동은 원래 자기증식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이 없어도 잘 살 수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현재는 자본이 산 노도에 기초해야 증식이 가능하다는 것, 바로 이러한 사실이 노동으로 하여금 저항할 수 잇는 토대를 제공한다. 즉 노동측의 단결과 연대가 충분하다면 자본은 전혀 힘을 쓸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노동측이 자본이 의도하는대로 분열과 경쟁의 패러다임에 머무느냐 아니면 이를 의식적으로 지양하여 연대와 협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 수 있느냐에 있는 것이다.



[사례1: 에틸사의 캐나다 정부 제소사건] 미국계 기업인 에틸사는 망간이 함유된 유독성 가솔린 첨가제를 생산했는데 이것은 옥탄가를 높이고 엔진과열을 방지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연소될 때 나오는 물질이 사람들의 건강에 치명적임을 안 캐나다 의회는 캐나다 환경보호법에 근거하여 97년 4월에 이 가솔린 첨가제(MMT)의 수입과 운반을 금지시켰다. 이에 에틸사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의 투자자 보호조항에 근거하여 캐나다 정부를 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에 제소하였는데, 그 내용은 MMT 생산단지와 그 명성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2억5천만 달러의 손해배상을 요구한 것이다. 결국 캐나다 정부는 수입 금지를 취소했고 1천3백만 달러의 손해배상과 소송비용을 에틸사에게 지급하고 말았다.
[사례2: 메타클라드 사의 맥시코 주지사 제소 사건] 메타클라드라는 미국회사는 쓰레기 처리가 주업무인데, 멕시코 어떤 주의 낙후된 쓰레기 처리시설을 인수하여 재정비해서 다시 개장하려 했다. 그런데 환경영향평가 결과 쓰레기 처리장 바로 밑에는 생태학적으로 아주 민감한 지하수 강이 흐르고 있었다. 이에 주민들은 이 시설의 재개장을 결사 반대했다. 주지사는 결국 그 구역을 생태계 보호지역으로 지정했다. 이에 메클라드사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근거하여 주지사가 '미래의 소득'을 빼앗았다고 주장하며 중재기관에 9천만 달러의 손배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이 사안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으나 공익 목적을 위한 국가 활동이 이윤만을 추구하는 기업 앞에 얼마나 취약한가를 증명하고 있다.



지구 전체적으로 3백58명의 부자들이 가진 재산이 지구의 절반에 가까운 25억 명의 재산보다 많다는 보고는 가히 충격적이다.



다섯째의 의미는 진정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구조조정으로, 이것은 인간의 사회적 필요와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경제 분야나 경영 방식은 계속 살려 나가고 적극 장려하되, 그렇지 않은 것은 과감하게 잘라낸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군수산업이나 공해 산업, 사치품산업, 퇴폐·향락업, 열악한 노동환경을 강요하는 분야, 중복투자된 분야, 사람들의 민주적 의견에 반하는 투자 등은 과감하게 척결해야 하며, 인간적 필요를 충족시키고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하는 분야는 적극적으로 촉진해야 한다. 그리고 경제과정이나 노동과정을 일하는 사람들의 소망과 욕구에 부합하도록 고쳐나갈 수 있는 생산조직은 계속 살리고 그렇지 못한 조직은 과감하게 제거해야 한다. 비로 이것이 풀뿌리 민중이 원하는 구조조정이다.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대안'에 대한 고민을 한다면 외적인 측면에서도 종속성과 타율성을 극복하야 하겠지만, 우리의 내면에서도 자율적이지 못한 측면, 즉 종속성과 타율성을 철저히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내·외적 종속성의 탈피란 '3중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할 때, 즉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다시 형성하고(*주: 지배와 착취가 아니라 연대와 협동의 관계를 맺는 것), 또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다시 형성하며(*주: 인간이 개발의 주체가 되고 자연이 객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인식하면서 둘 다 삶의 주체가 되는 것), 나아가 인간이 자신의 내면과 맺는 관계를 다시 형성할 수 있을 때(*주: 자신을 자기의 소유물로 보아 처분가능한 대상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 세계로 가까이 다가가 정직하고 솔직하게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비로소 현실화될 것이다.



[사례1 : 한국은행 노조와 프랑스 간호사 투쟁]
지금은 노동운동이 경향적으로 '제도화'의 단계로 넘어가고 있는 시기이다. 그리고 몇몇 위험한 조짐이 나타나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항황은 정치적 '개념'을 통해서 새로운 운동(양식)을 모색하려 했던 시도들에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가따리의 힁단성이라는 문제의식(*주 : 기존의 제한된 틀과 역할 분담을 근본적으로 뛰어넘어 완전히 다른 입장과 시각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것)을 현실적 사례를 통해 살려보자.
예컨대 한국은행 노조는 1988년에 탄생했는데 임금인상, 행내 민주화, 중앙은행 독립 등 세 가지 쟁점을 투쟁 목표로 설정했다. 앞의 두 가지는 통상적인 것이나 세 번째는 '사회적인' 쟁점으로서 매우 중요하게 부각된다. 나아가 이를 위한 투쟁 방식도 통상적인 집회, 태업, 파업, 선전물 배포 등 외에도 담장 밖으로 나가 여론 환기를 위해 여러 가지 다른 방법들을 사용하였으며, 특히 여러 사회단체들과의 연대를 강력히 추진하였다. 한국은행 노조의 경우와 같이 노조의 시야를 노조원들에게만 고정시키지 않고 사회로 확장한다는 것은 자신을 닫아 놓지 않고 열어 놓음을 뜻하기에 이것은 가따리의 횡단성이라는 문제의식과 부분적으로 겹친다. 그런데 한은 노조의 투쟁이 한 걸음 더 나아가 진정으로 횡단성을 추구하는 운동이기 위해서는 권력이 설정해 놓은 벽과 덫을 인정한 상태에서 개선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비판하고 넘어서야만 한다.
두 가지 예를 들어보자, 첫째, 프랑스의 간호사들은 자신들의 노동조건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하고 있는 '노동의 질'에 대한 문제제지를 했다. 즉 이들은 자신들이 매일 접하는 환자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질병과 죽음에 직면한 인간 즉 환자들을 보살핀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물었던 것이다. 나아가 지신들이 그 일원인 근대 의료체계가 어떤 성격인지를 파고들었고 이 과정에서 사회라는 영역으로까지 시야를 확대했다. 이들은 호나자들에 대한 서비스를 강화하자는 차원에서 환자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 아니다. 이들은 환자가 진료나 치료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 혹시 의사에게 지시받고 간호가로부터 단순 서비스를 제공받는 피실험자로 전락한 것은 아닌지를 되묻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들은 의료보험 제도의 개선과 부담의 형평성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 의료체계가 환자-간호사-의사의 분한과 위계를 어떻게 유지하고 이용하고 있는지를 되묻는다. 즉 근대 의료체계의 근본적 맹점을 지적하고 궁극적으로 그러한 체계를 가능케 하는 사회는 도대체 어떤 성격의 사회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둘째, 에이즈 운동에 참가하고 있는 사람들은 외부로부터 압력을 가함으로써 과학을 개량하려 할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을 과학내부에 위치지움으로써 과학을 '실행'하려 하고 있다. 그들은 과학의 용도나 과학에 대한 통제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심지어 과학의 내용과 그것이 생산되는 과정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도한 이들은 에이즈라는 질병과 싸우는 과정에서 과학적-의학적 쟁점들과 절차들에 대해서 전문적 지식을 갖게 된다. 만약 에이즈 환자, 환자의 갖혹, 활동가들이 약품, 치료 절차, 질병을 측정하고 예방하는 조치 등에 대해서 전문적인 지식을 갖게 된다면 이들은 더 이상 흔히 볼 수 있는 환자나 활동가가 아니다. 이들은 치료를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에이즈 환자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전투적인 활동가가 아니라 질병의 진단과 치료, 더 나아가 에이즈 환자에 대한 정책이 사회통제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서까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새로운 활동가, 새로운 주체로 발전하는 것이다.

[사례2 : 한마음 공동체와 백화점 진출 문제]
95년 2월, 광주시에 신설될 예정이었던 송원백화점이라는 대형유통업체가 한마음 공동체에게 백화점 진출을 권유한 적이 있었다. 한마음 공동체는 유기농업을 통해 농산물을 생산, 도시의 소비자들과 직거래를 하는 생활협동조합 운동을 하고 있는 조직이었다. 송원백화점은 향후 한마음 공동체에서 나온 생산물의 홍보를 맡아서 경제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해줄 터이니 생산물을 백화점으로 출하해 달라고 했다. 송원은 광주의 자본가가 호남지역 각 곳에서 운영하는 대형백화점으로 95년 광주에 본점이 세워졌다. 이 제의는 한마음 공동체 사람들에게 경영난을 해소할 수 있는 돌파구로 비쳐졌다. 잘만 이용하면 판매 신잔을 충분히 도모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사안에 대한 결정은 쉽지 않았다. 그 동안 지켜온 생협 등 자율적 유통기구와 상충되는 부분이 많았고 한마음의 활동방향에 큰 영향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운영자들의 모임인 '일꾼정책회의'에서 진지한 논의가 펼쳐졌다. 건강한 농민으로서 가난하더라도 자율성을 견지하려는 쪽과 자율성이 침해되지 않으면서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쪽으로 갈라졌다. 전자는 한마음이 상업 자본에 종속되어 자율성으 잃을 것이라는 근거로, 상업자본의 속성상 판매 상황에 따라 생산에 대한 요구도가 높아질 것이고 판매고가 높은 품목은 유기농을 포기하면서 납품해야 할 것이라 하였다. 또 백화점을 통한 회원제가 기존 회원제보다 부유한 소비자의 창출면에서도 훨씬 유리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과연 고급소비자의 창출이 한마음의 취지인가 되물었다. 백화점 직판장을 통해 '돈 있는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장치'로 전락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이었다. 결국 이들이 내린 결론은 '지금까지 어려움을 견뎌왔으니 좀더 견뎌보자'는 것이었다. 즉 백화점 진출은 않기로 하는 대신, 생산의 구조를 다품목 소량 생산에서 소품목 대량생산으로 전환함으로써 주력 상품을 보다 전문적으로 투자하여 경제적 효율도 꾀하고 운동의 자율성도 견지하자는 것이었다.

[사례3 : 철거민 운동의 논리]
99년 5~6월, 언론에서는 수원시 권선4지구 철거민들의 사제총 제작을 보도했다. 사제총기 제작은 사실이나 그 배경을 살피는 일이 더 중요하다. 철거민들이 사제총기를 만들게 된 데는 철거폭력이 선행한다. 언론은 '살상용 무기'라든지 '군요새식 망루'라든지, 아니면 '도시의 게릴라'라는 무시무시한 말들을 늘어놓았지만 철거 폭력배들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평생을 치욕으로 살아가는 부녀자의 현실에 대해서는 침묵하였다. 또 두 시간에 걸쳐 뼈 마디마디가 모조리 어스러진 61세 노인이 당한 살인적 고문은 왜 피하는가? 철거 폭력을 피해 골리앗(망루)을 세워 올라가 '죽기살기'로 투쟁하는 사람의 몸에 불을 지른 살인행위는 왜 말하지 않는가?
철거민은 생활공간에서 자본과 권력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노동자계급이다. 사실 노동자와 빈민은 별개일 수 없다. 양자가 하나로 연대하여 싸울 때만이 노동자 민중이 온갖 억압에서 해방될 수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노동현장에서는 쉽게 '주택수당 쟁취'라는 요구를 들을 수 있었다. 노동자들이 10년, 20년을 뼈빠지게 일해도 발뻗고 편히 쉴 내 집 한 칸 마련하기가 어려운 새상, 얇은 월급봉투에서 빠져나가는 주거비용은 20~30%를 차지하고 있다. 직장에서 쫓겨나면 가장 막막한 것이 실상 주거문제이다. 이제 주거권 쟁취는 철거민만의 구호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노동자들의 연대가 있을 때, 현 시기 철거민 탄압을 과감히 깨쳐 나갈 수 있으며 철거 폭력으로부터 해방되고 주거해방을 쟁취할 수 있다. 또한 철거민의 투쟁 역시 주거문제만을 해결하려는 근시안적 사고에서 벗어나 노동계급운동으로 거듭날 때 노동해방을 앞당길 수 있다.

[사례4 : 서울지하철 노조 파업에서의 노학연대]
99년 4월 서울지하철노조 파업이 4일째 되던 날 오후에 서울대 학생들 30여 명이 노동자의 목소리를 듣겠다고 우리 지회를 찾아왔다. 나는 다른 세 사삶의 간부와 함께 버들골 잔디밭에 앉아 많은 대화를 주고 받았다. 이때 가장 인상깊게 들려운 학우 동지의 대답이 있었다. 이야기 마당의 끝무렵에 학우 동지들이 가지들의 조그마한 정성인데 노동자투쟁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며 약간의 투쟁기금과 담배 20여 갑을 내밀었다. 이에 우리가, 노동자들의 투쟁을 사수하기 위해 밤낮으로 고생하는 학우동지들에게 당연히 우리가 성의 표시를 해야되지 않겠느냐 하자, 이때 어떤 학생의 대답이, 학생인 자신들이 노동자 형님드로부터 단 돈 10원이라도 받으면 그 순간부터 순수한 노학연대가 개지고 자신들은 용병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었다. 자신들을 자본의 상징인 용병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서울지하철노조 차량지부 조합원)



5. '발상의 전환'을 통한 조직문화 혁신이 절실하다 - 관습과 매너리즘의 타파

근대 자본주의의 산물인, 선각자에 의한 계몽주의 문화가 조직운동, 사회운동에까지 확산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활동가들의 권위주의는 여전하다. 어쩌면 한편으로는 권위주의, 다른 편으로 계몽주의가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는지도 모른다. 앞으로 민주노조운동이 그 고유의 생명력, 생동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권위주의 및 계몽주의적 조직문화를 혁신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아래의 다양한 주장들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주장1 : 계몽적 운동 문화 혁신 - "대상에서 주체로"]
주입식 교육이나 주시와 명령에 의한 경제 역시 사람들의 창의와 자발성, 밑으로부터의 통제의 길을 억압했다. 진보와 역사 발전과 계몽은 인민 자신의 것이 아니라 특권적 소수가 할 일이 되고, 인민 자신은 그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선전과 선동에서도 주체는 혁명적 지식인으로 설정되고 인민과 대중은 선전되고 선동되는 객체에 불과했다. 물론 모순과 문제를 폭로하고 전면에 드러내기 위해서 선전은 필요하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가기 위해서는 대중 스스로가 자신의 실생활과 투쟁과정에서 자신의 이익과 충돌하는 부르주아 국가의 본질에 대해 '직접 부딪쳐' 스스로 경험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이래야만 노동 대중은 단순히 선전의 대상이 아니라 투쟁하는 주체가 되고 스스로 '선전가'가 되어 자신의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과정이야말로 계몽과 주체화를 유기적으로 결합시키는 과정이 될 것이다. 따라서 비록 부족하고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시간이 걸릴지라도 주요한 것은 자신이 움직이고 운동을 자기 스스로의 문제로 간주하면서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다. 여기서 전위 엘리트의 임무는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초보적 활동가들을 1) 도와주고 2) 같이 의논하며 3) 옳은 길을 함께 모색하는 것에 있다. 비록 부족하게 보이지만 '한 번 책임을 맡아서 해로라'고 신뢰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들이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고 스스로 문제해결을 위해 '자기 조직'할 수 있도록 협력하는 것이 옳다.

[주장2 : 실업자와 공공근로 노조 - 불러모으는 조직화가 아닌 "달려가는 조직화"]
실업자의 조직화와 관련하여 99년 3월 창원에서 결성된 공공근로 노조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간의 '불러모으는 조직화'가 가진 한계를 절실히 느끼기 때문이다 금속산업연맹의 실업자를 위한 '쌀 나누어주기' 사업이 애초에 설정한 후속사업으로 연결되지 못한 것은 연맹의 게으름 탓이 아니라 '불러모으기 방식' 자체가 갖는 한계 때문이다. 대부분의 노숙자·실직자들을 위함 '쉼터'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일정한 공간을 차지하고 여기로 실업자들을 불러모으는 방식은 실업자들의 조건과 처지에 합당한 조직화를 하는 데 한계가 뻔하다는 것이다 다라서 실업자들을 불러모으는 방식아 아니라 실업자들이 처해 있는 조건을 알고 그들의 공간으로 '들어가서 조직하는' 방식을 채택해야만 한다. 이것은 비단 창원이 공공근로 노조 사례에서만 아니라, 6개월 이상 대구 지역 실업대책본부 활동의 경험과 개인적인 공공근로의 경험, 그리고 이에 대한 개인적 고민의 소산이다.(신강)
이와 같이 '들어가서 조직하는'방시과 더불어 시·공간적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는 '열린' 조직화 방식을 개발해야 한다. 즉 문제의식을 느끼는 당사자들이 노조의 닫힌 문을 열고 들어와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란 매우 어렵다. 따라서 통신망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현장과 지역, 개인들의 접촉 공간을 최대한 활용, 질의, 상담, 토론 등 참여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아야 한다. 요컨대 불러모으는 조직화가 아니라 뛰어다니는 조직화, 닫힌 조직화가 아니라 열린 조직화가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주장3 : 이른바 '대중적 정서'에 기대는 변명을 그만 두자]
임영일 교수는 노조 간부들이나 활동가들이 너무나 자주 쓰는 '대중적 정서'라는 말이 귀에 거슬린다고 한탄한다. 예컨대 토론회 등 각종 모임에서 아무리 좋은 생각들을 내놓고 의견을 나누었다 하더라도 막판에 현장을 대표한다는 사람들이 '다 좋은 얘긴데 그러나 지금 대중들의 정서는 어쩌고저쩌고' 해버리면 '말짱 도로묵'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임교수는 물론 활동가들의 오랜 경험에 따른 본능적 직감과 통찰력, '소주'를 마시면서 파악되는 일상적 정서 등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참고사항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나가 '대중적 정서'를 빌어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고자 하는 경향은 "대중의 이름을 빌어 자기의 주관적 생각을, 자기 그룹의 생각만을 주장"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작은 사안뿐만 아니라 전국적, 총노동적 과제와 결부된 주제들을 토론할 적에도 이런 식의 토론 분위기가 나타나는 것은 대단히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내부의 운동 체계와 조직시스템, 나아가 운동 지도부부터 '마인드'를 바꾸지 않으면, 그래서 새로운 전기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대중운동에는 변명이 있을 수 없다. 실천과 그 실천에 대한 책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 노동운동 내부에는 너무도 변명이 많고, '현실적 조건'이 많고, 좀 심하게 이야기하자면 거짓말도 너무 많은 듯하다... 밑으로부터, 위로부터, 바꾸고 새로 자고 과감하게 밀고 나가는 내부의 혁신 작업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주장4 : 집회는 왜 하는가?]
98년 11월 민중대회에 참여한 천창수 씨는 예전의 노동자대회가 아닌 '민중대회'라는 이름짓기 과정부터 문제를 느끼긴 했으나, 전야제가 열리던 보라매공원에 도착하자마자 '이것이 아닌데'하는 기분을 느꼇다. 무대 위에서는 노래와 율동, 연설이 이어졌고 무대 아래에는 5천 명 이상이 박수를 치며 호응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주위의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전야제는 술 마시는 전야제가 되어버린 것 같다.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는 사람들을 만나 술 한잔하며 문화공연을 관람하는 전야제! 어떤 동지들은 전야제에서 이 의미를 빼버린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하지만, 우리는 집회를 왜 하는 것일까? 노동자와 민중의 요구, 대로는 노동법 개정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국가보안법 철폐라든가 정치적 요구를 하기도 하고 올해는 사회개혁을 위한 민중의 10대 요구를 제시하고 있듯이, 집회의 요구를 분명히 제시하고 (정부와 자본에게) 노동자의 민중의 (거대한) 힘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그런 성격의 집회에 집회 참석자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술 마시는 데 열중하거나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닌다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천창수)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크게 두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첫째는 전국 집회이든 작은 소모임이든 '술 마시기'가 그 집회나 모임을 압도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술 마시기는 원래 솔직하고 원만한 교룽화 대호, 자유로운 토론과 소통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 술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개인적이든 사회적인든, 작은 모임이든 큰 모임이든 술 마시기 그 자체의 동력 속으로 은연중에 빨려 들어가는 경우를 흔히 본다. 마치 모두가 술 마시기 게임이라도 하는 듯. 여기서는 잘 마시지 못하는 사람도 억지로 마셔야 하며, 만약 빠지게 된다면 '이상한' 사람으로 치부된다. 그래서 대부분 1박2일의 모임 같은데서 다음날 새벽까지 '거나하게' 술 마시다가 정작 중요한 이야기나 현안에 대한 진지하고 다각적인 토론은 놓쳐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가 막상 중요한 결정은 모두가 헤어지기 직전에 대단히 즉흥적으로 이루어지거나 (무책임하게도) 소수의 대표들에게 위힘(혹은 유보)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전형적인 중독 조직, 또는 역기능적인 조직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조직과정이 건강하지 못하다는 말이다.
둘째는 특히 대형 집회의 경우, 유명 인사 중심의 의례적 연설보다는 현장 활동가나 '이름 없는' 풀뿌리들이 자유롭게 말하고 성토하고 주장하고 속마음가지 자유롭게 토해낼 수 있는 집회문화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대개는 소수의 대표자들과 명망가들이 선언적인 이야기를 하거나 지시적인 이야기를 함으로써 대중들은 소극적 상태에서 박수 치고 맞장구를 치며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는 식으로 집회가 진행된다. 그러다보니 그러한 집회 방식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포장마차'로 빠지거나 '자기들끼리' 술판을 벌이기가 일쑤인 것이다 무관심한 듯 술 마시기에 빠지는 사람들은 집단적 기강이 '해이'해서라기보다는 사실상 의례화되고 관습화된 집회 방식에 '저항'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힘겹게 전국에서 모여든 민중들이 '주인'임을 느기는 장이 아니라 '손님'으로 느끼는 경우, 흥미와 관심은 딴데로 쏠릴 수밖에 없게 된다. 다라서 다양한 조직과 집단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다양하고 풍성한 사례와 경험, 주장과 고백을 할 수 있는, 집회 문화의 대혁신이 필요하다. 술자리나 노래, 율동은 그러한 풀뿌리들의 연설 중간 중간에 배치함으로써 윤활유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집회 자체가 토론과 잔치, 진지함과 즐거움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그런 생산적 공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첫째, '고용 위기'의 해소는 실업 보험이나 일자리 소개와 같은 사후 대책이 아니라 새로운 일자리 만들기나 노동시간 단축 등 사전 대책을 통해 이루어낸다. 특히 '하루 4시간' 정도로의 과감한 노동시간 단축은 모두가 일자리를 고루 나누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모두가 삶의 여유와 '시간 주권'을 되찾아 보다 수준 높은 생활을 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이것이 가능해지려면 대도시의 분산화 정책과 풀뿌리 민족주의 차원의 주민 자치제가 새롭게 추진되어야 한다.
둘째, 노동시간 단축과 더불어 어느 정도 명목임금 수입의 감소가 불가피하다면 이를 두려어하지 말자. 가장 돈이 많이 드는 주택, 육아 및 교육, 의료 제도만이라도 획기적으로 바꾸어 개인적인 지출 부분을 더 크게 줄이면 될 것이다. 그래서 실질임금은 오히려 늘도록 만들자. 다라서 주거 공개념, 육아 및 교육 공개념, 그리고 의료 공개념 다위를 도입하여 삶의 문제드을 더 이상 개인이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저그로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 그 재원은 정부 지출의 20%에 이르는 방이 예산의 축소, 탈세 또는 누세 포착, 고소득자에 대한 상후하박식 직접세 추진, 비자금이나 뇌물 등의 생산직 전환, 정부 투자 재원의 지혜로운 활용 등이 될 수 있다. 동시에 더 이상 중앙집권 국가가 아니라 지방자치체를 올바로 개혁하여 방방곡곡에 자율적이고 생태적인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앞서 말한 바, 현재 2백 개 정도의 국가들을 2백만 개 이상의 건강하고 다양한 공동체로 재편성하는 것은 일국 차원뿐만 아니라 세계 차원의 '삶의 질 구조조정'에 반드시 필요한 밑그림이라 본다.
셋째, 일자리 자체의 유지나 확대도 중요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의 내용'이다. 과연 일의 내용이 사회적 필요 충족이나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 지혜롭게 따져봐야 한다. 그래서 그에 도움되는 것이면 더욱 장려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씩 척결해야 한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전체 경제의 '구조조정'도 이뤄져야 한다. 즉 우리 모두의 건강과 인격의 발전, 그리고 공동체나 생태계의 건전한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경영·경제 분야는 계속 살려나가고, 그렇지 못하면 과감하게 줄여나가야 한다. 특히 먹거리와 관계된 1차 산업이 건강하고 탄탄하게 중심을 잡고, 2차 산업이나 3차 산업은 삶의 질 향상 차원에서 조심스럽게 보완적으로 발전되어야 할 것이다. 자율과 자치, 연대와 협동, 공생과 생명을 핵으로 하는 올바른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위하여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풀뿌리 차원의 생동하는 연대, 그리고 주어진 경계선과 한계를 과감히 뛰어 넘으려는 풍부한 상상력과 창의성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을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분리하는 모든 시도를 극복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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