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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가 '동화'를 쓴다?

 
'혁명가'가 '동화'를 쓴다?
박정훈 역 <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

홍성식 기자 hss@ohmynews.com    

아이들이 읽는 '동화'는 권선징악의 단순한 구조이기 십상이다. 그 단순구조는 '혁명'이란 단어가 가지는 복합다단성과 별반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이 선입견은 멕시코 '사파티스타 민족 해방군(EZLN)'의 부사령관 마르코스가 쓴 동화 <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다빈치 발간)를 읽는 순간 깨어진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이며 '한겨레 21'의 남미 통신원이기도 한 박정훈 씨가 번역한 <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총칼'이 아닌 '펜'이 혁명에 어떻게 합목적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기록될 만하다.

마프코스가 세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은 지난 2월24일부터 3월11일까지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에서 수도 멕시코시티까지 벌인 3000Km의 '비무장 평화행진'을 통해서다.

당시 사파티스타 민족 해방군의 멕시코시티 입성장면을 접한 <순이삼촌>의 작가 현기영(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은 장정을 주도한 마르코스에게 이런 헌사를 보냈다.

"그(마르코스)는 총, 칼이 아니라 언어의 힘, 문학의 힘으로 승리를 이끌었다. 그의 성명서가 전세계 지식인들의 관심을 끌게 한 것은 다름 아닌, 탁월한 문학적 수사 덕분이었다."

마르코스의 문학적 식견은 각국의 매체와 행한 인터뷰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멕시코 작가 카를로스 푸엔테스와 마르케스의 작품을 읽으며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게 됐다"라 고백한 바 있으며, 그 자신이 가진 정치적 입장도 "세르반테스와 세익스피어의 <돈키호테> <햄릿> <멕베스> 등을 읽으며 정리해왔다"라고 밝힌 바 있다.

전설적인 멕시코의 혁명가 에밀리오 사파타(1879~1919)처럼 "내 목표는 권력장악이 아니다"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마르코스가 치아파스의 정글로 들어가 게릴라가 된 것은 지난 1984년. 이후 그는 컴퓨터와 인터넷 공간을 통해 성명서, 연설문, 편지, 에세이 등을 꾸준히 발표해왔다.

그가 써온 일련의 글들은 '다채로운 스페인어 문학과 마야 문명의 문화유산에 영향받아 독특한 문체를 형성했고, 문장에는 기지가 넘친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사파티스타 민족 해방군을 비롯한 게릴라들에게 마르코스의 집필활동은 단순한 '글쓰기'의 차원을 넘어 치아파스의 정글을 '사회적 연대의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해주었다.

이번에 출간된 <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총대신 노트북으로 무장(?)하고 원주민들의 신화와 민담을 채록해온 마르코스의 눈물어린 노력의 산물이다. 이 작품에서 마르코스는 '우화(寓話)'라는 방식을 통해 우회적인 방법으로 멕시코 농민혁명의 과정과 의의를 설명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인간과 땅의 섭리를 체득한 '안토니오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우화'의 효용성은 비단 멕시코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 '혁명이 어떻게 발원되고, 진행되고, 완성되는지'에 대한 함의에 다름 아닌 것으로 읽힌다.

시인 정기복은 <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를 두고 "이 재미있는 이야기의 밑바닥에는 철학의 지하수가 도도히 흐르고 있다"라 평했다. 정씨의 이런 평가는 고대 멕시코의 전설과 민담, 설화를 바탕 위에 더해진 마르코스의 빛나는 '작가적 상상력'에 경의를 표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기자가 '동화'와 '혁명'은 별반 어울리지 않는 언어의 조합이라고 했던가? 말을 바꾸자. '선한 인간은 복을 받고, 악행을 저지른 인간은 벌을 받는다'는 '권선징악'. 그 자명한 명제. 그렇다면 결국 '혁명'이란 단어도 '권선징악'의 자식말이 아닐까?

한편,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공식적인 대외창구격인 '치아파스 정보분석센터'에서는 <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를 펴낸 다빈치 출판사에 '우리는 당신들에게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이 책을 어디에서 얻게 되었고, 이 책이 저작권을 갖고 있다는 사실만을 명기해 주십시오. 그리고 출간되었을 때 몇 권의 책을 저희들에게 보내주실 수 있겠지요?'라는 요지의 소박한 편지를 전해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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