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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 빨치산 무장투쟁의 역사

해방후 빨치산 무장투쟁의 역사


김무용

들어가는 말

1945년 8월 15일, 조선이 일제로부터 해방되자 민중들은 사회변혁의 전면에 나서 즉각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해방은 민중들에게 새로운 국가건설의 희망을 안겨주었다. 민중들은 일제시기 비타협적으로 투쟁해 왔던 사회주의자들과 결합하면서 건국준비위원회, 인민위원회를 비롯한 자신들의 정권기관을 세워 나갔다.
그러나 해방은 민중운동세력이 주체적인 힘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란 점에서 불완전한 것이었다. 일제는 비록 타도되었지만, 곧 이어 전개된 미국의 점령정책은 험란한 길을 예고해 주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변혁 세력은 국제관계의 현실을 고려하여 2차 세계대전의 산물인 미소 협조에 의한 임시정부 수립을 기본방침으로 설정했다.
모스크바 3상결정은 연합국의 합의와 원조를 바탕으로 조선의 독립을 보장함으로써 조선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었다. 미소공위는 평화적 방법으로 정권수립이 가능한 가장 확실한 길로 전망되었다. 좌익을 비롯한 민중운동 세력은 이에 따라 당분간 미소공위 활동을 통한 임시정부 수립에 노력하는 미군정과 일정하게 협력하였다. 따라서 좌익은 47년 2차 미소공위가 결국 미국에 의해 일방적으로 무기 휴회되자, 미소공위 성공에 의한 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기대하던 좌익은 지금까지의 전술을 전면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되었다. 특히 48년 들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 기정 사실화되면서 이러한 필요성은 더욱 증대되었다.
민중운동세력은 이에 지금까지의 합법 투쟁에 비합법, 폭력투쟁을 결합시켜 나갔으며, 이러한 투쟁은 점차 미군정, 지배세력과의 직접적이고 최종적 투쟁형태인 무장투쟁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무장투쟁은 미소공위 결렬 이후 통일정부 수립이 어려워진 조건에서 민중들이 최종적으로 선택한 길이었다.

1. 해방 후 무장투쟁의 전개과정
1) 야산대의 조직과 활동
해방 후 무장투쟁의 초보적인 형태는 46년 10월 인민항쟁에서 비롯된다. 10월 인민항쟁에 참여했던 민중운동 세력은 미군정의 탄압 때문에 합법적인 공간에서 활동할 수 없어 산악지대로 들어가 생활했는데, 이들은 당시 산사람으로 불려졌다.
남로당의 무장투쟁전술은 48년 2.7구국투쟁과 50선거 반대투쟁을 계기로 발전하였다.
특히 47년 제2차 미소공위 결렬후 남로당을 비롯한 좌익세력에 대한 탄압은 남로당의 전술을 무장투쟁으로 바뀌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남로당의 모든 정치활동 등이 불법으로 탄압받고 지하에서 비합법활동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서 투쟁전술을 무장투쟁으로 전환해야 했다. 특히 유엔결의에 의한 sksa한 단독정부 수립을 분쇄하는 일은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투쟁만으로는 어려운 것이었다. 단독 정부 수립은 적극 저지 해야하는 남로당으로서는 무장투쟁을 채택할 수 밖에 없었다. 2차 미소공위 결렬 후 평화적 정권획득의 전망이나 가능성이 점점 어려워지는 조건으로 이러한 필요성이 높아졌다.
이리하여 48년 2.7구국투쟁을 계기로 야산대가 조직되면서 무장투쟁이 부분적으로 채택되기 시작하였다. 남한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남로당이 주도한 2.7구국투쟁은 전국적 규모로 전개되었다. 2.7구국투쟁에서 서울에서는 행동대, 지방당에서는 무장부대로서 야산대가 본격적으로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주로 당원가운데서 군사경험이 있거나 10우러 인민항쟁때 지하에 들어가 활동하던 사람들이 중심이 되었는데, 대개 한 개 군의 50-100명 정도 였다. 야산대는 38소총, 장도, 칼 또는 군경으로부터 탈취한 무기로 무장하였다.
야산대는 당의 무장부대로서 당조직 체계에 따라 조직되었다. 당싱 지방당의 조직은 비합법 체제로 전환되었으므로 도당 위원회의 규모를 줄이고 도내를 2,3개 지역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지구블럭을 만들어 한 개 블록이 몇 개 군을 지도하도록 운영되었다. 때문에 도당에는 야산대를 조직운영하는 기구로서 도 사령부를 설치하고 도당부위원장이 겸했다. 각 지구 블록에는 야산지구 사령부, 가 시구군당에는 00야산대를 두는 3단계 조직으로 편성되었다. 야산대는 2.7구국투쟁 이후 3.1절 기념투쟁, 5.10선거반대투쟁, 8.28 지하서명 투표투쟁, 인공기 계양투쟁 등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5.10 선거 반대투쟁 때에는 선거반대 선전운동을 위주로 하는 선전성행대와는 별도로 각 지방당에서는 백골대, 유격대, 인민청년군 등의 소규모 무장부대가 조직되어 운영되었다. 이들의 공격대상은 경찰서를 비롯한 관공서, 언론기관, 우익진영 인사, 선거위원등이었다.
야산대는 아직 당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보조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당시 부분적이나마 합법적인 활동공간이 남아 있었다. 야산대가 부분적으로 폭력투쟁 단계로 이행하지는 않았다. 조익의 투쟁전술이 무장투쟁으로전환되는 계기는 제주도에서는 4.3민중항쟁, 육지에서는 여순봉기가 계기가 되었다.


2) 여순민중봉기와 유격전구의 형성
육지에서는 48년 10월, 여수 봉기를 계기로 무장투쟁이 조직되었다. 여순봉기를 일으킨 세력들이 순천·광양 등 산악지대로 들어가 무장투쟁을 전개, 유격전구가 형성되기 시작하엿다. 당시 여수 봉기세력들은 봉기에 참여한 병사들이나 무장한 인민들을 중심으로 장기적이고 조직적인 항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광범한 유격전구의 형성을 계획하고 있었다. 봉기군 일부는 순천을 장악하고 계속 벌교, 고흥, 보성 방면으로 진격하였고, 다른 부대는 구례, 곡성, 남원 드응로 북상하면서 2천명 규모의 무장세력을 형성하여 백운산과 지리산 등에 거점을 확보하였다. 무장투쟁의 근거지를 구축한 지리산 중심의 빨치산 부대는 점차 인근지역으로 활동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지리산 유격전구 안에서는 인민위원회가 부활되어 부분적으로 토지개혁이 일시나마 실시되었다. 전남일대 유겨댇들은 당시 민중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는데 이 점이 계속적인 무장투쟁을 가능하게 되었다.
경북을 중심으로 한 산악지대에서도 48년 12월 2일 대구 국방군 제6연대의 병사들이 봉기하여 산으로 들어가면서 무장투쟁이 전개되었다. 강원도 산악지대의 빨치산 활동은 5월 초 강릉군 사천면 지서 급격과 강릉 용연사 주둔 형사부대의 습격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대표적 유격전구는 다음과 같다.
1. 호남 유격지구는 나주, 영광, 함평, 장흥 등 주로 동남지역이였다. 대부분 형야지대고 산도 800미터 정도로 지리적으로 불리한 곳이었다. 그러나 지리산 유격대와 협동작전을 할 수 있었다.
2. 지리산 유격지구는 후에 남한 유격대의 총본산으로 남으로 백운산 북으로 덕유산을 연결하는 전남, 경남, 전북의 산악지대에 걸쳐있는 지역이었다. 경남의 산청, 함양, 거창, 합천, 창녕, 하동, 진주, 함안, 사천, 남해, 전남북의 무주, 장수, 임실, 남원등 중소도시까지 영향이 미쳤다.
3. 태백산 유격지구는 북으로 태백산과 소백산 국망봉을 중심으로, 남으로 안동, 청승에 이르는지역이다.
4. 영남 유격전구는 경북 경주, 영천, 영일, 청도 등 대구 주변과 경남의 양산, 울산, 동래, 부산 주위의 산악지역에 형성되었다.
5. 이밖에 제주도 유격전구가 있었다.
단정수립을 반대에 온 힘을 쏟았던 남로당은 5.10선거를 통해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자 이를 적극 부정하는 투쟁을 벌여 나갔다. 이와함께 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된 뒤에는 이를 지지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여나갔다.
특히 남로당에서는 49년에 들어와 남한에서 미군철수와 인공 수립을 목표로 하는 투쟁을 벌여 나갔다. 이러한 투쟁은 남한에서 이승만 정권에 대한 공격을 더욱 강화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49년 6월에는 '조국통일 민주주의 전선'이 결성되고, 남로당과 북로당이 합당하여 '조선노동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조국통일 민주주의 전선 결성대회가 49년 6월 25일에서 28일까지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남북의 71개 정당, 사회단체 대표 704명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이 대회에서 조국전선의 강령이 결정되었으며, 남북조선의 제정당, 사회단체들과 전체 인민들에게 보내는 선언서가 채택었다. 주요내용은 미군의 철퇴, 유엔한국위원단의 철퇴, 남북선거의 동시 실시 등이었다.
이 선언서에서 중요한 내용이 담겨져 있는 것은 마지막 부문이였다.
"만일 반동이 고집하고 평화적 통일사업을 방해하는 때에는 그는 조선인민의 처단을 면치 못할 것이다. 조선인민은 조국의 통일과 민주화와 독립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장애를 주는 모든 놈들을 자기의 길에서 능히 소탕할 것이다."
즉 한반도의 통일과 독립을 위해서는 폭력투쟁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조국전선 결성대회 둘째날인 6월 27일에는 지리산 유격전구 유격대 지휘자 및 전사 일동으로부터 온 메시지가 소개되었다.
" 미국제 카빈과 엠완에서는 탄환이 빗발치듯 쏟아지고 있습니다. 미국제 박겨포의 포탄들은 머리 위에 작렬하고 있습니다. 미국제 비행기는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화국 남반부 살진 지역을 원쑤의 손에서 해방하고 우리의 사랑하는 부모형제들을 도살, 학살의 ckarud에서 구출할 것은 맹서하고 일어서 sdnfl들은 이르는 곳은 원쑤를 뭇찌르면서 용감하게 나아가고 있습니다. 동무들의 시체를 넘어 우리들은전진에 전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활동구역은 나날이 장성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방력은 나날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들은 1천메터의 험준한 산악에서 백설과 싸워 이겨냈습니다. 주림도 피곤도 우리들에게는 아무런타격도 줄수 없습니다."

3) 9월 공세와 아성공격
49년 6월 말 조국전선이 결성된 뒤 무장투쟁이 보다 새로운 단계로 접어 들었다. 49년 7월부터는 무장투쟁을 보다 조직저이며, 대규모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인민유격대가 편성되었다. 49년 7월부터는 인민유격대를 각 지구별 3개병단으로 편성했는데 오대산 지구를 제1병단, 지리산 지구를 제2병단, 태백산 지구를 제3병단으로 하였다. 제2병단의 조직 체계는 총사령부 (사령관 이현상) 밑에 4개 연대로 편성되었고 각 연대는 몇 개 군을 대상으로 하는 활동지역을 갖고 있었다. 제3병단의 경우 49년 8월 초에 김달삼을 사령관, 남도부를 부사령관으로 3백여명이 경북 안동, 영덕 경계선에 상륙하여 경북 동해안 일대에서 활동했다. 제1병단(이호제부대 또는 제1군단)은 49년 9월 6일 이승엽의 지시에 따라 강동정치학원의 학생 약 360여명으로 편성되어 남파되었다.
인민유격대의 편성과 함께 남한의 각 지방 당조직에서는 무장투쟁은 본격적으로전개하기 위한조직개편이 이루어졋다. 49년 7월 조국전선이 결성된 남한의 당조직을 지도하던 서울 지도부에서는 지방당에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결정적 시기가 불원간 도래한다. 결정적 시기를 맞이하기 위하여 각 지방당은 정권접수를 위한 준비를 할. 또한 인민군이 진격하게 되므로 각 도당은 해방지구를 1,2개 확보하라. 모든 당조직은 군사조직으로 개편하고 결정적 투쟁을 전개하라. 돈있는 사람은 돈을 바치고 집 있는 사람은 집을 바쳐 무기를 준비하라.'
7월 8일 조국전선의 선언서가 전달되자 서울지도부와 시당이ㅔ서는 8월 20일에 대한민국정권 접수 9월 1일 박헌영이 선거위원장으로 서울에 도착 9.20 총선실시 9월 21일에 서울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중앙정부가 수립되는 날 등의 선전선동을 했다.
9월 공세라는 구호는 조국전선에서 발표한 평화통일 선언서에 9월에 입법기관 선거를 실시하자는 내용 때문에 나온 것이다.
지리산과 태백산 지구의 인민유격대가 3개 병단으로 편성되고 각 도당 지방당 조직이 군사체제로 개편된 뒤 무장투쟁은 보다 강화되었다. 모든 당조직은 지도부의 일부를 자기 지역의 산악지대로 이동시켜 무장투쟁을 지휘케 했다. 현지에서 직접 지휘하여 '00현지당부'라 불리기도 했다. 지방당에서는 서울 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멀지않아 해방된다. 북으로부터 인민군이 넘어온다."는 등의 선전으로 당원들을 입산시켜 야산대와 인민유격대를 확대했다.
무장유격대는 처음에는 낫과 칼과 같은 원시적인 무기로 활동했는데 점차 카빈, M1, 경기관총, 중기관총, 박격포로 무장하게 되었다. 지리산 지구에서는 무기를 수리하고 폭탄을 만드는 철공장도 운영했고 무전대와 촬영기대가 제2병단 사령부에 배속되어 있었다.
그밖에 유격대 옷을 만들고 수선하는 재봉틀과 오락용 악기들도 마련되었다. 또 해방지구에서는 등사판을 이용하여 신문과 각종 인쇄물을 발행하여 빨치산과 부락 인민에게 배포하는 선전, 선동활동도 벌였다.
남로당 서울 지도부에서는 지리산 지구에 문화공작대로 남로당 문화부장 김태준과 시부 유진오, 음악부 유호진, 영화부 홍순학 등 작가, 예술인으로 구성된 문화 공작대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빨치산이 이처럼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유격지구 인근에 사는 민중들의 지원과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빨치산들이 민중들의 일정한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적인 무장투쟁이 가능했다. 여기에는 무장유격대가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에서 실시한 토지개력도 어느정도 작용했다. 당시 노동당 기관지는 이런한 사정을 공개적으로 선전하기도 하였다.
지리산 유격대를 비롯한 빨치산들은 9월 공세를 계기로 보다 직접적이 공격을 전개하였다. 빨치산들은 강동정치학원 출신 유격대들과 합류하여 이른바 '아성공격'을 전개하였다. '아성공격'이나 관공서, 공공기관이 밀집되어 있는 도시 또는 경찰서, 군사사령부 등에 대한 정면공격을 의미한다. 49년 7월 이후 전개된 '아성공격'은 주로 경남북, 전남북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겨울철에 들어서면서 추위가 닥치고 유격대의 기점인 산악지대와 민간부락과의 연계가 원활히 되지 않자 빨치산들은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반면 유격대에게 불리한 계절을 이용하여 군과 경찰은 강력한 동계 토벌작전을 실시했다. 동계토벌작전은 무장유격대에게는 큰 타격을 주었다. 호남 유격전구에서는 군경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게 되자 산에서 마을로 침투하고 큰 부대를 소부대로 분산시켜 피해를 줄이는 방법을 썼다.

4) 유격대 남파
무장투쟁이 9월 공세를 계기로 확대 '강화되는 것은 북에서 내려온 강동정치학원 출신 유격대들이 활동하는 것과도 관계된다. 48년 10월 여순봉기가 일어나자 군경병력들이 호남지구에 집중되어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강동정치학원 출신 유격대 180명이 11월 17일 오대산 지구로 침투했다. 그 뒤 '조국전선'선언문이 발표된 뒤 9월 공세를 전후하여 50년초까지 10차례에 걸쳐 모두 2,400여명이 남파되었다. 그러나 남파된 무장 유격대들은 대부분 군경의 강력한 대응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남한 각지에서 활동하던 무장세력들도 50년 초를 기점으로 크게 약화되었다. 비록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었지만, 50년에 들어서면서 지리산을 비롯한 경북, 전남 산악지대에서 무장투쟁이 부분적으로 다시 시작되었다. 지리산 빨치산은 50년 1월 1일에 산청군 화개면에서 국군 70여 명을 기습. 30분만에 소탕하고 기세를 몰아 3일에는 화개, 지곡, 산청, 오곡 4면을 공격 군경특수부대 70여 명을 격멸하였다. 경북 부대는 1월 2일에 영주, 영천 합동부대를 편성하여 경주 어림산에서 군경 6개 중대를 격파하고 210명을 사살하였으며, 21일에는 태백산 부대가 공동작전을 세우고 경북 영덕군, 영해, 창수, 병곡, 축산, 지품 5개면을 한꺼번에 농민들과 더불어 주둔 국군 및 경찰 시설, 우익인사, 가옥 등을 파괴하고 양곡을 인민들에게 분배한 다음 군경의 응원부대와 전투를 벌였다.
50년 5월에 들어서는 제 2대 국회의원 선거인 '5.30'선거를 저지하기 위한 무장투쟁이 경남 산청을 비롯한 각 지방에서 일어났다. 5월 10일 충남 대덕을 중심으로 한 중부 지구 유격대, 12일은 옹진유격대, 15일은 경북 청도부대, 16일에는 지리산 부대(함양지구), 정읍지구의 전북부대, 경북 봉화지구의 태백산부대, 18일에는 전남 장흥지구의 전남 서남부대, 19일에는 경북부대, 20일엔 충북 괴산부대, 23일엔 강릉지구의 오대산부대 등 소부대 규모의 유격대가 5월 30일까지 선거를 파탄시키기 위한 투쟁을 벌였다. 이들은 일부 지방에서 면 사무소와 선거 사무소를 파괴하기도 했다.

2. 한국전쟁과 무장투쟁
1) 인민군 진격과 당 재건
1950 6월 25일 남조선 해방을 목표로 하여 한국전쟁을 개시한 노동당은 다음 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 전시체제의 최고권력기관으로 군사위원회(위원장 김일성)를 조직하였다. 김일성은 이날 밤 평양방송을 통해 해방전쟁의 승리를 위해 남북한 인민들이 총궐기해야 한다고 호소하면서 빨치산등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반부 남녀 빨치산에게! 유격운동을 한층 맹렬히 더욱 용감히 전개하며, 해방구를 확대하며 또는 창설하며 적은 후방에서 적들의 공격, 소탕하고 적의 작전 계획을 파탄시키며......각종 수단을 다하여 적은 전선과 후방연락을 차단하고 도처에서 반역자들을 처단하며 인민위원회를 복구하고 인민군대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
이에 따라 산악지대에 활동하고 있던 빨치산들은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계속 내려가 낙동강까지 진격하는 과정에서 인민군과 협동작전을 벌이거나 무장투쟁을 벌였다. 대표적으로 지리산의 이현상부대, 경북도당 책임자인 배철이 지휘하는 유격대, 강정수가 지휘하는 동해안 유격대를 비롯하여 경남 산청지구의 지리산 유격대, 함양지구 유격대, 전남 영광군 서해안 유격대, 전남 화순일대의 유격대, 경남지구의 백운산 유격대, 산청, 하동, 김해 일대에서 활동하던 남해안 지리산 유격대, 제주도 인민유격대 등이 활동하였다. 곧이어 50년 6월 28일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군사위원회 위원장 김일성은 평양방송을 통해 『우리 조국 수도 서울 해방에 제하여』라는 제목으로 인민군과 서울 인민들에게 보내는 축하연설을 하였다. 김일성은 연설에서 6월 28일 상오 11시 30분 서울이 '해방되었다고 말하면서 '미해방지구 인민'은 빨치산 활동을 전개하여 후방을 교란시키고 도내에서 인민폭동을 일으켜 군수물자수송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고 강조했다.
김일성은 또한 서울시 임시 인민위원회 위원장에 이승엽을 임명했다는 것을 밝혔다. 이승엽은 박헌영의 지시를 받으면서 인민군 점령지역에서 당재건을 비롯한 모든 사업을 총지휘했다. 점령지역에서의 당재건은 행정구역에 따라 중앙, 도, 시, 군, 면의 순위로 하향식 방법에 의해 당위원회를 먼저 조직했다. 중앙에는 남한의 당사를 총체적으로 지도하는 중아당 지부격인 '서울지도부'를 두었다. '점령지역'이 확대되자 서울지도부의 일부를 대전에 파견하여 '대전지도부'를 꾸렸다. 이때 중앙당에서 서울시당을 비롯한 8개 도당 위원장을 임명하였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8월 15일을 '제2해방의 날'로 정하고 계속 남진하여 낙동강까지 전선을 확장시켰다. 그러나 국군의 강력한 저항과 유엔군의 대거참전으로 전세가 인민군에게 불리해진 상황에서 노동당은 점령지역에서 병력을 후퇴시켜야 했다. 노동당은 인민군 전선사령부에 후퇴명령을 내리는 한편 9월 중순 지방당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1. 전세가 불리하여 후퇴한다. 2. 당을 비합법적인 지하당으로 개편할 것. 3. 유엔군 상륙때 지주가 되는 모든 요소를 제거시킬 것. 4. 군사시설로 이용될 수 있는 것은 파괴할 것. 5. 산간지대 부락을 접수하여 식량을 비축할 것. 6. 입산경험자 및 입산활동이 가능한 자는 입산시키고 기타 간부들은 이시 남강원도까지 후퇴케 할 것"
이에 따라 각 도당위원회에서는 각 군당에 같은 지시를 내리고 9.28을 전후하여 모든 조직들을 자기 도내의 산악지대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입산한 사람들을 규합, 여러 개 유격대를 조직했다. 유격대 편성은 지방민청원과 자위대원, 북에서 파견된 내무서원, 보위부원, 정치공작대원 또는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으로 이루어졌다. 인민군의 경우 남지구에 들어갔던 제 4,6,7,9,10사단의 주력부대는 퇴각로가 막히자 소백산과 태백산을 이용하여 북상했으나 약 1만명은 지방 유격대에 합류하였다.

2) 6개도당회의와 남부군 조직
남한지역에서 활동하던 빨치산들은 인민군의 후퇴에 따라 산악지대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당의 지휘를 받아가면 무장투쟁을 벌였다. 49년 하반기에 인민유격대 2병단을 편성하여 무장투쟁을 벌여오던 이현상부대는 인민군의 남진과 함께 광범한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현상부대는 유엔군의 9.15 총반격으로 지리산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북상하여 49년 11월 중순 가우언도 세포군 후평리에 도착하였다.
당시 후평리에서 인민군과 유격대를 편성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이승엽은 이현상, 여운철 등과 함께 남한지역의 당사업과 무장투쟁을 협의했다. 이 자리에서 여운철에는 6개도당의 지도권이 위임되었고, 이현상에게는 유격대의 통일적 짇권한이 부여되었다. 이승엽은 후평리에 모인 유격대와 인민군 후퇴, 민간인들로 구성된 유격대에 독립4개, '남조선 인민 유격대'(통칭 남부군)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이현상의 지휘아래 남하한 인민유격대는 승리사단 인민여단 혁명지대와 그 직속부태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50년 12월 태백산맥을 타고 충북 단양지구로 내려와 문경경찰서를 습격하였다. 유엔의 공격을 받고 제천지구로 이동했다가 52년 2월 초 속리산까지 내려와 활동하다가 덕유산을 들어갔다. 덕유산에 들어간 이현상은 여운철과 함께 51년 5월 중순 송치골에서 6개도당회의를 열어 병단을 통합하여 사단제로 개편하고 군사적 유일체제를 보장하기 위해 지리산에 통일적인 지휘 본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6개도당회의 이후 남한의 유격투쟁은 이현상이 총지휘하게 되었다. 당의 경우 6개도당을 통일적으 지휘하는 남부지도부를 구성, 여운철이 책임을 맡았다.
6개도당회의가 있기 전까지 각 도당은 독자적으로 당사업과 무장투쟁을 벌여왔는데, 그 조직은 다음과 같다.
충남도당: 위원장 남충렬은 대둔산을 중심으로 사령부 밑에 백두산부대(320), 대덕부대(130), 대전부대(100), 함둔산부대(100), 가야산 부대(130), 압록강부대(100), 청천강부대와 사령부 직속의 공병부대, 통신정찰중대를 편성하였다. 충남 빠맃산은 12월 7일 대둔산에서 전북 완주군의 운주면 피동리로 거점을 이동하였다. 남충렬은 중공군이 계속 남진할 것이라고 판단, 가야산 부대 80명을 천안방면을 침투시켜 중공과 합동작전을 벌일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전북도당: 도위원장 방준표는 도당지휘부를 화문산으로 이동시켜 전북 유격대를 조직했다. 사령관 방준표, 부사령관 조병하였고, 직속부대로는 이택부대(60), 보위부대(150), 익산군당 유격대(100), 금산군당 유격대(300), 진안군당 유격대(260), 무주군당 유격대(130), 장수군당 유격대(470), 남원군당 유격대(150)를 지휘했다. 제2정치사령은 정읍군당 유격대(60), 고창군당 유격대(590), 부안군당 유격대(160)를 맡고 있었다.
경남도당: 지리산에 들어가서 인민군 후퇴병들로 '303부대', '102'부대를 만들었는데 후에 불꽃사단을 편성했다. 사단장은 6.25때 북에서 경남 인민위언회 부위원장으로 파견된 김의장이고 참모장은 노영호였다.
전남도당: 백아산에서 전남인민유격대를 조직하고 도당 부위원장 김선우가 사령관이 되었다. 그밖에 경북에서는 6.25때 내려온 남도부 부대가 활동하고 있었고 경북도당 위원장 박종근이 따로 유격대를 조직했었다.

3) 제2 전선과 유격지대로 개편
51년 5월 중순 덕유산에서 6개도당회의의 결정에 따라 각 도당유격대는 이현상의 남부군 지휘 아래 들어가고 빨치산 부대의 개편도 이루어졌다. 남부군은 사령관 이현상, 부사령관 이영회를 중심으로 제1전구(전북북부와 충남)와 제2전구(전북 남부)로 나뉘어졌다. 제1전구는 충남빨치산 5백 70명을 68사단(사단장 고판수), 전북 북부지방의 빨치산 700명을 45사단으로 개편했다. 제2전구는 전북 남부에 있는 각 유격대를 46사단, 53사단으로 개편했다. 제1전구 사령관은 김명곤이며, 정치주임은 이희영이었다. 남부군 직속부대는 81사단(정치위원 김삼홍), 92사단, 602사단이었다. 그리고 경남지구에서 조직된 불꽃사단과 각 지방 무장부대를 조직하여 57사단을 편성, 남부군에 소속시켰다.
남부군은 국군과 유엔공세에 대항하여 각 도당 빨치산을 통일된 지도체제에 묶어 무장 투쟁을 벌이려 하였다. 그러나 전남 도당의 경우는 남부군 통제에 들어갈 것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행동을 벌였다. 남부군은 경남 산청군 삼장면 조개골에 거점을 두고 무장부대를 지휘했다.
남한지역에서 빨치산 부대들이 남부군 중심으로 조직을 개편하고 있을 때 북한은 인민군의 재침입과 발을 맞춰, 남한의 유격대가 제2전선의 역할을 수행하는 지령을 내렸다. 즉, 각 도당 조직들을 군사 활동을 위주로 한 지대로 개편하도록 했다. 도당위원장이 지대장 또는 정치부지대장이 되어 인민군의 진격에 호응하는 유격투쟁을 벌이게하였다.
그리하여 50년 12월, 51년 1월과 3월 등 몇 차례에 걸쳐 유격지대로의 개편에 관한 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총참모장 나일, 작전국장 유성철 등의 지령문이 각 유격대에 보내졌다. 이때의 지령에서는 유격지대를 다음과 같이 편성하도록 했다.
제1지대 : 소백산 지구에서 활동하는 유격대로 편성한다.
제2지대 : 충남 유격대와 충북 유격대, 그리고 원주지방의 홍사민연대로 편성하고 제1거점을 속리산, 제2거점을 영동, 제3거점을 운장산에 두고 활동범위는 곡성, 구례, 하동, 산청, 진주, 마산지구로 한다.
제5지대 : 지대장에는 길원팔, 정치부지대장은 남경우를 임명하며 경남유격대와 청도동부지구 유격대로 편성한다. 거점은 운둔산, 지리산, 관용산에 두고 청도, 울산, 동래, 밀양, 마산, 김해, 부산, 산청 등 지구를 활동구역으로 한다.
제6지대 : 무주, 옥천, 영동, 금산, 보은 등을 활동구역으로 한다.
그러나 당시 형편상 지령과는 달리 충남도당이 6지대, 경남도당이 8지대, 전북도당이 7지대, 경북도당이 3지대, 지리산의 이현상이 4지대로 편성되고, 2지대는 조직되지 못하였다.
제1지대는 50년 11월초 이승엽이 직접 조직한 유격 제1, 제2, 제3 여단을 주축으로 김응빈을 지대장, 박승원을 정치부 지대장으로 하여 51년 1월 하순 강원도 오대산지구로 들어와 활동했다. 그 뒤 국군의 공격을 받아 타격을 입고 일부는 북으로 올라갔다. 제1지대는 약 1천 명으로 서울, 경기도 출신들이었다.
제6지대는 50년 9월 29일 춘천에서 약 3백명으로 조직된 제929부대가 11월 중순 제6지대로 개편되었다. 51년 1월 중순 남하, 3월 말에 월북했다가 다시 5월 인민군 남진을 이용, 충북 일대로 침투했다. 7월에 속리산에 입산했으나 지대장 이하 간부급이 전사함으로써 부대는 흩어지고 말았다. 일부가 충남도당 유격대와 합류하여 대둔산 지구에서 제6지대를 다시 편성하였다. (지대장은 충남 도당위원장 남충렬)
그러나 이러한 지대개편의 지시는 당시 열악한 통신수단 때문에 전달되지 못했다. 51년 4월 23일 지대개편 지령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423부대를 조직하여 내려보냈으나, 충북 속리산에서 충북도당 부위원장인 송명현에게 전달하고 지리산에 도착한 것은 거의 10월이 되어서였다. 따라서 이현상이 남부군을 해체하고 4지대로 개편한 것은 이때였다.

4) 휴전논의와 유격대 체제 개편
전선은 51년 중반에 접어들어 38선에서 방어에 주력하는 장기전 태세로 넘어갔으며 7월 7일부터는 휴전회담도 시작되었다. 이에 노동당은 남한 지역에서 제2전선 역할을 수행하던 빨치산 유격대 체제를 당 사업을 주로 하는 지구당 체제로 개편하기로 결정했다. 노동당은 51년 8월 31일, 중앙정치위원회를 열고 『미해방지구에 있어서의 우리 당사업과 조직에 대하여』라는 94호 결정서를 채택하였다.
94호 결정서에서는 지금까지의 빨치산 투쟁을 평가하고 지구당으로서의 개편을 지시했다.
"조국해방전쟁 과정에 있어 당 단체는 영용한 투쟁을 전개했으나, 자기 임무를 당이 요구하는 수준에서 수행하지 못했다. 전쟁시작후 1년이 지났으나, 빨치산의 투쟁은 결정적인 성과를 얻어내지 못했으며, 대중을 조직하여 폭동을 일으키지 못했고, 인민군의 공격이 있었음에도 국방군 내부에 의거운동과 와해를 일으키지 못했다. 이것은 당 정치노선과 정책은 옳았는데 남한 안의 단체들이 잘못해서 그러한 것이다. 특히 당역량을 보존해서 닥쳐오는 정세에 적합하도록 강력한 투쟁을 지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당사업 강화를 위해 종래의 행정지역에 따른 조직체를 일단 보류하고 잠정적으로 5개지역을 설정하여 각각 지구조직 위원회를 조직하여 일체 당사업을 지도한다. 제1지구는 서울, 경기도 전지역, 제2지구는 남강원도, 제3지구는 충청남북도, 제4지구는 경상북도와 울진군 및 낙동강 이동의 경남 밀양, 창년, 양산, 울산, 동래, 부산지역, 제5지구는 낙동강 이서의 경남도, 전남북도 전지역 및 제주도와 충남의 논산군 지구 등을 설정한다."
이러한 중앙당 정치위원회의 결정서는 당시 별다른 연락 수단이나 북과의 효과적 통신 유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남한의 재산 현지당들에 즉시 전달되지 못했다.
그래서 52년 중반에 가서야 조직개편이 이루어졌다.
94호 결정이 가장 늦게 전달된 곳은 전북(지리산)이어서 제5지구당은 1년 뒤인 52년 10월에 조직됐다. 제5지구당은 52년 10월 지리산에서 이현상, 박영발, 방준표, 김삼홍 등이 모여 제5지구당 구성을 위한 회의를 열게 된 것이다. 회의에서 이현상, 김삼홍과 박영발, 방준표 사이에 심한 의견대립이 있었다. 이현상과 김삼용은 중앙당의 결정대로 제5지구당을 만들어 각 도당을 해체하고 소 지구당을 조직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반해 박영발과 방준표는 중앙당의 지시가 정식 문건이 아니며, 도당을 해체하라는 것은 중앙당이 남한실정을 모르고 결정한 것이라 반대했다.
결국 의경통일을 보지 못하고 중앙당의 지시와는 달리 도당해체 없이 제5지구당을 구성하게 되었다. 위원장은 이현상, 부위원장에는 박영발이 뽑히고 그 아래에 조직부(부장 조병하), 선전부, 유격지도부(부장 박찬봉) 기요과, 통신과, 경리과 그리고 김지회부대등 직속부대를 두었다. 조직위원회는 이현상, 박영발, 김삼홍, 김선우, 조병하, 방준표, 박찬봉으로 구성했다.
이처럼 노동당은 남한지역의 지하당과 유격대를 제2전선 역할을 하도록 당사업보다는 군사활동 위주의 지대로 바꾸었다가 다시 휴전을 대비하여 당 위주의 지구당으로 개편하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중앙당의 기대와는 달리 점차 어려운 처지에 빠졌다.
특히 51년 11월 배선엽 전투사령부가 남원에 설치되고 12월부터 52년 3월가지 본격적인 동계 '토벌'작전을 벌이자 호남 일대 유격대는 큰 타격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노동당 중앙연락부(부장 배철)는 52년부터 남한의 빨치산을 지원하기 위해 금강정치학원 출신과 무장부대들을 내려보냈다. 그러나 대부분 기대만큼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노동당 정치위원회에서는 당조직과 무장투쟁 문제를 토의하고 111호 결정을 채택하였다. 여기에서는 남한 정세와 휴전회담을 전망한 장기대책으로 지금까지 지구당 사업과 무장투쟁을 평가하고 새로운 결정을 제시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각 지구당이 중앙과의 연락사업을 진행시키지 못해 중앙당의 결정이 제 때 전달되지 못했다.
무장투쟁에만 편중하고 당조직사업에 소홀했다.
각 유격부대가 대부대로 집결하여 참호를 파고 수일간에 걸친 정규적 진지전을 전개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경찰과 헌병 조직이 널리 분포된 불리한 조건에서 당과 유격대에 불리한 결과를 준다.
노동당은 이러한 평가에 따라 유격투쟁, 지하당 사업에 대해 다음과 같은 대책을 제시했다.
유격투쟁: 유격대는 인민과 연결되고 당의 지도를 받아야 하며 불필요한 모험적 전투는 피하되 그렇다고 너무 소극화되고 위축되어 자진 소멸되어서는 안 된다.
지하당 사업: 각급당 지도부는 산으로 올라가지 말고 중요산업부분과 노동자, 농민, 군부 속에 당 조직을 강화하고 그 토대 위에서 지구당 지도부를 도시로 진출시키도록 한다.
이러한 결정은 지금가지의 지구당 사업과 무장투쟁 전술에서 새로운 전환을 의미했다. 즉 산에서 도시와 농촌으로 진출하여 활동하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당신 전선이 38선에서 완전히 교착상태에 들어가고 전방에 배치된 국군병력이 후방으로 배치되어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이는 상황에서 이러한 결정이 제대로 추진되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일부는 이러한 결정에 따라 도시로 침투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무장투쟁 세력은 111호 결정을 전달받고도 주로 산악지역을 거점으로 있을 수밖엔 없었다.

5) 휴전 후의 빨치산
52년 중반기 이후에도 비록 약화되기는 했지만 빨치산들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대표적으로 지리산 지구(5지구당 산하 김지희 부대, 이영희 부대), 회문산 지구(전북도당 산하 무장부대), 속리산 지구(3지구당 빨치산), 운장산 지구(전북도당 빨치산), 백운산 지구(전북도당 유격대), 덕유산 지구(경남도당 유격대), 신불산 지구(제4지구당 남도부 지대)등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었다.
53년 휴전 후 빨치산 부대들은 장기적인 활동을 고려하여 사상무장을 강화하고 부대를 소규모로 편성하여 운영하였다. 53년 9월에 들어 지구당은 소규모로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에 빨치산은 주로 지리산 지구, 덕유산 지구, 회문산 지구, 형제봉 지구, 모후산 지구, 전남동부 지구, 영광, 장흔지구, 운장산 지구에서 활동하였다. 이에 따라 군의 작전도 지리산, 덕유산, 회문산 등 빨치산의 근거지를 공략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54년 2월에는 지리산지구에는 조국출판사, 지리산주재당, 경남도당, 중부소지구당, 남원 임실군당, 995부대, 727부대, 야지공작대, 이영회부대가, 덕유산 지구에는 전북도당남부지도부, 순천군당, 김제군당, 정읍군당, 고창, 부안군당이 백아산 지구에는 전남서부도당, 백아산 지구당, 광주시당, 곡성군당, 곽용철부대가, 화학산 지구에는 전남남부주재당, 두봉산소지구당, 중부지구기동대가, 운장산지구에는 복수연대가 있었다.
54년 2월부터 3월말까지 박전투사령부의 작전이 실시되었는데 여기서 빨치산의 부대장, 위원장 등의 많은 지휘관들이 전사하였다. 이로 인하여 빨치산은 다시 조직적 편재를 시도하게 되었고 54년 4월 경에 이르면 지리산에는 925, 727부대, 남원군당 등 8개 부대가 백운산에는 전남도당, 향미연대가 덕유산에는 전북도당등 5개 부대가 있었고, 그 외에는 운양산, 자작산, 회문산, 모후산, 화학산 등에 두 개 내지 3∼4개의 부대가 존재하였다. 54년 4월부터 5월에 이르기까지 군의 작전으로 이하여 많은 수의 빨치산 전투부대들이 사라졌다. 54년 5월 군의 작전이 끝났을 때 빨치산의 남아있던 부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리산 지구에는 조국출판사, 삼승부대, 남원군당이, 덕유산에는 향미연대 노영호부대, 임신 진안군당이, 회문산에는 남부지도부, 변산주재당, 부안, 정읍, 순창, 고령군당이, 백운산에는 남태준부대, 삼승부대가, 화학산에는 남부주재당, 서부도당이 있었다.
55년 초 남한지역의 빨치산은 남한 전체를 5개 지구당으로 운영하는 조직체계를 갖추고 있었으나 경기지역의 제1지구당과 충청지역의 제3지구당은 세력이 거의 약화되었다. 강원지역의 제2지구당, 영남지역의 제4지구당, 호남지역 제5지구당 빨치산 부대들이 활동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호남지역의 제5지구당 빨치산 부대들이 활동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호나지역의 제5지구당의 빨치산들이 가장 끈질긴 투쟁을 전개했다. 이들은 주로 지리산, 덕유산, 회문산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55년 2월에 이르러 빨치산의 세력은 약화되었으나 7월 이후 분산해 있던 빨치산들은 다시 집결하여 조직을 복구하고 점차로 활동을 강화하였다. 경찰의 작전이 55년 후반기부터 시작되어 56년까지 실시되었는데, 이 작전으로 55년 조국출판사, 전북도당, 전북의 남원, 정읍군당, 전남 남부 지도부 등의 부대가 없어졌다. 군경의 자료에 따르면 56년 12월 31일 현재, 43명의 빨치산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맺음말
해방후 무장투쟁을 바라보던 시각은 여러 갈래로 나뉘고 있다. 극좌 모험적 투쟁이라는 주장에서부터 북과 남, 빨치산과 토벌군 모두 잘못했다는 허무주의적 경향에 이르기까지 평가가 다양하다.
그러나 빨치산 무장투쟁을 바라보는 관점은 왜 빨치산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싸웠고 또 투쟁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점이 전제되어야 한다. 해방후 빨치산 무장투쟁으로부터 무엇을 배우고 계승할 것인가 하는 현재적 관점도 바로 여기서 출발하여야 한다. 무장투쟁은 무엇보다도 해방후 지배세력과 민중사이에 벌어진 기나긴 대결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무장투쟁은 해방후 계급적, 민족적 모순의 해결을 둘러싸고 외세, 지배세력과 민중과의 대립이 최고수준에서 가장 적대적 형태로 폭발된 형태이다. 따라서 무장투쟁에서 나타난 엄청난 피해와 희생만을 중시하여 문제의 본질을 도덕적 윤리적 차원에 한정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무장투쟁은 민중들이 거대한 외세와 지배세력의 물리력에 정면으로 대결하면서 새로운 국가건설과 조국의 통일을 쟁취하려고 한 투쟁이였다. 무장투쟁은 외세와 지배세력에 의해 민족독립과 민중권력의 건설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달성하기에는 어려운 조건에서 나온 최후의 선택이였다. 무장투쟁은 이런 점에서 외세와 지배세력을 폭력적으로 타도하고 새로운 국가건설과 민족독립을 바랬던 최고의 투쟁형태였다. 우리 현대사에서 무장투쟁이 차지하는 위치와 또 그것이 제시하는 현재적 의미도 바로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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