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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대중과 지도자에 관하여 - 로자 룩셈부르크

(독일제국주의의) 대외정책과 모로코정책에 맞서 우리 당이 조직한 집회와 시위에 관한 소식이 각 방면으로부터 들어오고 있다. 인민대중들이 모든 곳에서 열광적으로 우리의 호소에 응답하고 있는 바, 이는 우리가 제시한 정치적 입장과 해결책, 방침 등이 대중들의 감성과 분위기에 어느 정도 부응하는 지를 입증하는 것이다. 모로코사태에 맞선 대중투쟁과 대외정책에 관한 활발한 선동활동은 이제 사민당의 회피할 수 없는 임무이며 매우 시급한 요구라는 단 하나의 견해만이 당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즉각 제기된다. 한두 달 전에 이런 캠페인을 시작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7월 2일 독일군함이 아가디르로 파병되었다. 이로써 독일은 공식적으로 모로코사태에 개입하게 되었다. 이미 7월 첫 주에 프랑스와 스페인 사회주의자들의 항의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우리는 그때 즉각 힘껏 선동하지 못하고, 후위로 처졌으며, 그 결과, 사건의 뒤꽁무니만을 쫓아다니며 질질 끌려 다녔다. 그러면서 최소 한 달 또는 한 달 반가량 뒤쳐졌다. 이런 중대한 상황에서 우리의 정치적 대처능력은 요구에 훨씬 못 미쳤다. 왜 그랬던 것인가?
혹자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당 집행부는 불행하게도 주도력 부족을 드러냈다. 8월 9일까지 투쟁을 위한 회의소집 요구는 없었다. 그래서 8월 중순 이후에나 집회가 열릴 수 있었다.” 과연 당은 당 집행부의 공식적인 회의소집을 기다려야만 하는가? 오늘날 모든 당원들이 빠짐없이 (독일제국주의의) 세계정책에 반대하는 투쟁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면, 슈투트가르트 동지들이 그랬던 것처럼, 지역 당 조직들이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 없었다는 말인가? 실제로 결단력과 능력부족에도 불구하고 활동해왔을 수도 있는 당 집행부를 비난하는 것은 대단히 쉬운 일이다. 하지만 항상 하늘의 구원을 기대하며, 심지어 명백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경우에도 약간의 자발성과 개인적 창의조차 보여주지 않으면서 꽁무니를 빼는 사람들은 그 비난의 적지 않은 부분을 감수해야 한다. 물론 이런 규모의 당 캠페인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서는 일치와 단합이 필요한 바, 이는 당 중앙에서 가장 잘 해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특히 나머지 지역조직 모두의 각성을 촉구하려한 몇몇 구 중앙위원들의 사례는 절대 그 명성을 잃지 않을 것이다. 확실히 중앙지도기구로서 당 집행부 또한, 거대하고 강력한 당 조직들을 지금처럼 당 집행부의 명령을 수행하는 단순한 도구로 바라보는 대신, 당 집행부 스스로가 당 의지의 대변자로, 지렛대로 기능함으로써 모든 대중적 자발성을 일반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현재와 같은 비정상적 관계가 역전되어야만 당내 기풍이 바로 설 수 있다는 사실 또한 공공연히 얘기되어야 한다.
[공산당선언]은 “노동계급의 해방은 오직 노동계급 자신의 과업”이라고 천명한 바, 이는 7~12명의 당 집행부가 아니라 본인이 노동계급대중임을 깨우친 노동계급이 깨달아야할 말이다. 노동계급해방투쟁의 발전은 동시에 노동계급대중의 지적 독립의 성장, 자발성과 결단력, 창의력의 성장을 의미한다. 대중의 전위 즉, 사민당 조직에 결합된 가장 잘 계발(啓發)된 부위가 항상 위로부터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거총자세를 유지하며 창의력과 독립성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광범위한 인민대중들이 어떻게 투쟁능력과 정치적 재능을 발전시킬 수 있겠는가? 규율과 행동통일은 우리와 같은 대중운동에서는 사활적인 문제이다.
하지만, 사민주의적 의미에서의 ‘규율’은 부르조아 군대의 규율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부르조아 군대의 규율은 외부의 의지(부르조아계급의 의지)를 표현하는 상관의 명령에 대다수 군인들이 아무런 생각 없이 고분고분하게 복종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회주의적 규율은 모든 사람들이 거대 다수의 생각과 의지에 따르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사민주의적 규율은 80만 당원들이 당 집행부의 의지와 규정에 복종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모든 당 중앙기관들이 80만 사민당원들의 의지를 수행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당의 정치적 활력을 정상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사민당에게 사활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당원 대중들의 정치적 사고와 의지가 항상 깨어 있고 능동적일 수 있도록 만들고, 더 많은 조치를 취해 능동성을 고취시키는 것에 있다.
물론 우리는 매년 당 전체의 의지를 정기적으로 결정하는 당대회라는 최고의 실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당대회는 사민주의 투쟁전술의 개요(槪要)를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지침을 실천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견실하고 끈기 있는 사고방식, 재치, 창의성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일상생활 자체는 결코 멈추어있지 않으며, 한번의 당대회로부터 다음 당대회까지 여러 곳에서 당이 대응해야 하는 온갖 문제들이 발생하기 때문에 당대회에서는 정치투쟁의 일상적 과제에 대해서는 세세하게 논의하지 않는다. 거의 100만의 당원이 수동적으로 명령을 기다리면서 당 집행부가 일상적인 정치적 파수꾼으로서 창의력을 발휘하여 거대한 전체임무를 책임지기를 바라는 것은 노동계급투쟁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당 전체의 결정이라면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무조건적으로 따라야한다고 생각하는 기회주의자들의 비난받을만한 ‘맹종’일 뿐이다.
사람들은 종종 평당원들에게서 당의 최상층 권력기관의 관료주의가 살아있는 정치적 에너지를 죽이고 있다는 불평을 듣곤 한다. 이런 불평은 물론 전적으로 정당한 것이다. (그러나 평당원들이 크게 애석해하는 이 같은 상황인식은 관료주의의 핵심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매일같이 공식적 사무를 다루어야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관료주의와 관성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그런 고위기구들은 자연스럽게 책임감을 강하게 느껴 창의성과 결단력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이런 심각한 사태에 대한 실질적인 치유책은 오직 당 전체의 살아있는 정치적 활력이다. 사민당과 같은 당의 가장 이상적인 집행부는 당 전체의 의지를 가장 충실하게, 그리고 가장 신속하고 정확하게 수행하는 도구이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이상적인 당 집행부일지라도 만약 당력의 본질적 원천인 당의 의지를 당원들에게 인식시키지 못하면, 또 비판적 사고와 당원대중들의 창의성이 잠들어 있다면, 무엇하나도 이룰 수 없으며, 부지불식간에 관료적 무능에 빠져들게 된다. 사실이 이렇다면 그 이상의 결과를 낳을 것이다. 당의 힘, 즉 당원대중들의 독립적인 지적 활동이 충분히 능동적이지 못하다면, 중앙기구들은 관료적으로 녹슬 뿐만 아니라 당내 지위와 공식적 권한에 대해 완전히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된다.
최근 당기관지의 편집방침에 영향을 끼치려고 당 집행부가 당 편집국에 보낸 소위 ‘비밀명령’은 이에 대한 생생한 증거인데, 단호하게 거부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노동운동의 중앙기구에 만연한 무능력과 과대망상에 맞서기 위해서는 광범한 당원대중들의 창의성과 사고방식, 그리고 생생하게 고동치는 정치적 활력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언급한 문제는 현 상황에서는 이론적 이해를 넘어서는 (실천적) 문제이다. 현 당 집행부가 개선될 필요가 있으며, 당 최고기구의 확대와 혁신이 필요하다는 점이 당내에서 폭넓게 인식되고 있다. 최근에 엘버펠트조직도 모로코사태와 관련한 당내 논쟁에 즈음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적어도 당 집행부가 캠페인의 주도권을 장악해야 한다는 <라이프찌히 인민신문>의 주장에 동의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또한 사실들을 면밀히 조사한 다음 당 집행부가 무언가를 하지 않은 잘못에 대해 심판해야 한다는 확신을 얻었다. 당의 행정기구가 너무 많이 확대되어 현재의 당 지도부 숫자로는 더 이상 현실적으로 필요한 요구들을 모두 충족시킬 수 없게 되었다. 징거 동지로 인한 공백은 아직도 채워지지 않은 채 그대로이다; 만약 당 집행부의 1~12인이 당 업무 또는 선동을 수행하기 위해 베를린을 벗어나 있는 경우에, 4~15인이 휴가 중이라거나 사람이 아프거나 하는 돌발 상황이 추가된다면-확실히 어느 누구도 당 집행부원들이 매우 바쁘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남아있는 소수가 갑작스럽게 발생한 중요문제들을 해결해야만 하고, 가끔은 집행부 전체가 모였을 때와는 다르게 결정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모순적인 사실은 당 집행부의 편지는 편지작성자의 사견이 실린 것이지만 외부에는 당연히 당 집행부의 편지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예나 당대회는 당 집행부의 강화를 결정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제의는 이미 두 지지자 즉, 테트로우-비스코우와 베를린 그룹에 의해 제출되었다.

여기에 제시된, 당 집행부의 강화가 필요하다는 견해는 완전히 옳으며, 당대회는 이 부분에 관련한 중요 과제를 회피해서는 안 된다. 만약 당이 당 집행부를 강화시키는 것에 스스로 만족하고, 모로코사태에 맞선 항의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당 집행부의 명령을 한 달 반이나 기다렸던 것처럼 또다시 수동적으로 ‘새로운 인물들’에게서 구원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관료주의의 해악에 대해 순전히 관료적 방식으로 대처하려는 의미일 뿐이다. 세상의 어떤 당 집행부도 중대시기에 막중한 임무에 직면하여 그 자신의 결점을 인정할 정직한 지도자가 없다고 불평하는 100만 당원의 힘과 조직을 대신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는 노동계급투쟁의 역사적 본질 자체 즉, 부르조아적 의미의 ‘지도자들’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대중들 속에서 스스로 지도자가 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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