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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 같은 삶을 살다 간 동학의 지도자, 김개남 - 신정일

동학농민혁명은 전봉준과 손화중, 김개남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진행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무명의 동학농민혁명군이나 동학농민혁명의 주력이었던 손화중 포(包, 동학의 교구) 그리고 남접(南接) 중심의 동하군 전체 전투력 가운데에서 가장 날카로운 힘을 가진 최정예 부대로 알려진 김개남 포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있다. 임진왜란하면 이순신, 3.1운동하면 유관순이라는 공식이 성립되는, 한 사람을 영운시하는 그 풍조에 물이 들어 버린 것은 아닐까?
전봉준, 손화중과 더불어 동학농민혁명의 3대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동학농민혁명에서 중요한 몫을 담당했지만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던 김개남(1853~1894년)이 살았던 19세기는 본질적으로 비극의 시대였다. 민란의 시대라고 일컬을 만큼 도처에서 민란이 끊임없이 일어났고, 나라는 삼정 문란으로 어지러울 대로 어지러웠는데, 세계 각국은 호시탐탐 이러한 조선을 넘보고 있었다.
김개남은 1853년(철종 4년) 태인 산외면(현재는 전라북도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에서 김대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토반인 도강 김씨의 중농 가정에서 자란 김개남의 본명은 영주, 자는 기선이었다. 동학에 입도하여 활동을 벌이던 30대 후반에는 신분의 노출을 막기 위하여 이름을 기범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동학농민혁명운동에 뛰어들면서 ‘남조선을 연다’, 즉 이상 사회를 건설한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개남(開南)으로 이름을 고쳤다. 김개남은 키는 작지만 총명하였고 마을 소년들과 함께 어울리기를 좋아했으며 말썽꾸러기로 인근에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특히 어린 시절 대다수의 어린아이들이 수박서리, 닭서리를 하던 것과는 달리 돼지서리까지 했다고 하니 그것만 보아도 김개남의 통이 얼마나 컸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김개남은 어려서부터 병서를 많이 탐독하였고, 현실 개혁의 의지가 충만한 인물이었다. 그의 집안은 벼슬살이는 못했으나 인근에서는 글깨나 읽는 선비 집안으로 대접을 받으며 살았다.
스무 살 무렵까지 농촌에서 실질적 학문에 전념하던 김개남은 20대 후반에 생사를 같이하게 되는 동지인 전봉준을 만나게 된다.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살았던 전봉준이 아랫지금실로 이사를 왔기 때문이다. 30세 이후에 김개남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여러 사람들과 친분관계를 맺었다. 당시의 조선은 봉건 체제의 구조적 모순과 제국주의 침탈에 의해 자주성과 방향성을 상실한 표류하는 난파선과 같았다. 이때 서양 문물을 배격하고 자주성을 회복하자는 뜻을 지닌 사람들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가던 동학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김개남이 동학에 입도한 때가 언제였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1880년대 말이나 1890년쯤으로 추정된다. 1891년 동학 교주 최시형이 전라도 일대의 포덕을 위해 부안을 거쳐 정읍 지금실로 들어갔고, 그때 김개남이 여름옷 다섯 벌을 지어 최시형에게 올렸다고 한다. 김개남은 접주의 신분으로 호남 지방 접주들과 교류하면서 뜻이 통하던 고부 접주 전봉준, 무장 접주 손화중, 금구 접주 김덕명, 태인 접주 최경선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고부와 태인을 비롯한 전라도 일대에서 동학이 퍼져 가던 그때의 상황을 매천 황현은 [오하기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적[동학군]이 지난날 고부에서 처음 일어났을 때 그 우두머리들은 태인 사람이 많았다. 이런 까닭에 전라좌.우도에서 태인접은 접주들 가운데서도 가장 우대를 받았으며, 다른 지역의 접주들은 모두 태인이라는 호칭을 부러워하였다. [......] 전봉준과 김기범의 나이는 모두 마흔 살쯤 되었다. 기범의 집안은 태인 지방에서 몇 대에 걸친 토호였던 까닭에 그 지방 사람들은 이들 집안을 ‘도강 김씨’라고 불렀다. 시풍 또한 이들과 한 집안 사람이다. 기범의 사람됨은 음험하면서도 의지가 굳은 면이 있어 자못 무력으로 사람들에게 군림하였다. 그리하여 난이 일어났던 초기에 그 집안 사람들은 대부분 그를 따라 난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도강 김씨 중에 접주가 스물 네 명이나 되었다. 기범은 자기 스스로 꿈에 신령이 나타나 손바닥에 ‘개남’ 두 자를 서 주었다고 말하면서 ‘개남’으로 호를 삼았다. 이렇게 되어 태인은 적의 소굴이 되어 재물이 산처럼 쌓이고, 집집마다 4~5마리의 말을 길렀으며 [......] 집집이 총을 쌓아 두었는데 적은 경우라도 10여 자루가 되었다.”
김개남은 1892년 전국에 있는 동학교도들이 전라도 삼례에서 탐관오리의 제거와 교조 신원 운동을 벌였을 때 호남 지역의 접주들과 함께 수많은 교도들을 동원하여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김개남은 1893년 3월 보은 장내리에서 보국안민과 척왜양의 깃발을 내걸고 보은집회가 열렸을 때 호남 교도를 동원하여 태인포라는 포명을 받았고 동시에 대접주의 임첩(任帖)을 받았다. 보은집회가 열리고 있는 도중 전봉준의 주도로 호남에선 원평집회가 열렸고 전봉준과 남접들의 연계 아래 밀양집회가 경상도에서 열렸지만 성과 없이 끝나고 말자 각지에서 동학교도들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었다. 전봉준을 비롯한 남접의 지도자들은 특단의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이른 것이었다.

경주 사람 수운 최제우가 1860년 창도한 동학이 제2대 교주였던 해월 최시형에 의해 급속도로 번져 가고 있던 시절인 1892년 5월 전라고 고부에 조병갑이 군수로 부임했다. 그 무렵 전라도 일대의 농민들은 3년 동안에 걸친 가뭄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있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그의 부친 조규순이 태인현감을 지냈다는 이유를 들어 송덕비를 세우기 위해 돈을 거두었고, 관내의 부자들에게 부모에게 불효하고 동기간에 화목하지 못한다거나 간음을 했다며 죄를 뒤집어씌운 다음 재산을 빼앗기 일쑤였다.
무고한 농민들을 잡아들였다가 돈을 받고 풀어 조기를 일삼던 그는 정읍천 상류에 원래의 구보가 있었음에도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곳 부근에 새로 만석보를 쌓았다.
농민들을 위해 보를 쌓는다며 농민들을 징발하고 인근의 남의 산에서 나무를 베어다 보를 쌓은 후 첫해에는 수세를 받지 않겠다던 약속을 어기고 좋은 논에서는 한 마지기당 두 말, 나쁜 논에서는 한 말씩 수세를 걷었다. 또한 황무지를 개간하면 세금을 면제해 주겠다고 하고서 추수 때가 되면 강제로 세금을 거두어 갔다. 그 당시 농민들로부터 고혈을 짜내는 것은 조병갑뿐만이 아니었다. 균전사 김창석과 전운사 조필영까지 가세하여 도둑질을 일삼았다. 황현의 [오하기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기록되어 있다. “호남은 재물이 풍부하여 관리들의 욕심을 채워 줄 만하였다. 무릇 호남에서 벼슬을 하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양이나 돼지처럼 여기면서 마음대로 묶고 빼앗았다. 그리하여 서울에서는 ‘아들을 낳아 호남에서 벼슬하여 살게 하는 것이 소원이다’라는 말들이 떠돌았다.”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보세를 감면해 달라고 진정했으나 난민으로 취급당해 붙잡혀서 곤욕을 치르거나 쫓겨날 뿐이었다.
1893년 11월 초순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 지도자들은 송시 집성촌이었던 죽산마을에서 봉기의 당위성을 말하는 격문과 행동 목표와 사발통문을 작성하였다.
사발통문을 바라본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낫네 낫서 난리가 낫서 에이 참 잘 되얏지 그냥 그래도 지나서야 백성이 한 사람이나 어데 남아 있것나” 하면서 하루속히 봉기가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농민 지도자들은 아래와 같이 4개 항의 결의 사항을 발표했다.

1. 고부성을 부수고 조병갑을 목 벨 것
2.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3. 군수에게 아부하여 인민을 침해한 탐학한 구실아치를 정치할 것
4. 전주 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바로 올라갈 것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군 지도자들이 구체적으로 봉기를 준비하여 날짜를 정하고 이는 중에 조병갑은 1893년 11월 30일 익산군수로 발령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익산군수로 가지 않았다. 이은용이 고부군수로 발령받았으나, 이은용은 부임하지 않고 있다가 안악군수로 갔고, 계속 신재묵, 이규백, 하긍일 등이 고부군수로 발령을 받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를 내세워 부임을 기피한 것이다.
이렇게 발령을 받은 고부군수들이 부임을 하지 않은 까닭은 조대비의 조카이며 이조판서 심상훈과 사돈 관계에 있는 조병갑이 고부 고을을 떠나지 않으려고 유임 공작을 이면에서 치열하게 벌였기 때문이다.
이때 전라감사 김문현이 장계를 올렸다. “전 고부군수 조병갑은 포흠(逋欠, 관청의 물건을 사사로이 소비하는 것)이 많았지만 점차 청산하고 있으며, 때마침 세를 받아들이려는 중인데 타읍으로 옮기게 되면 착오가 생길 우려가 있습니다.”
조병갑이 다시 고부군수에 부임하였고, 그 과정을 지켜본 농민군들은 감정이 폭발하였다. 1894년 1월 10일 드디어 말목장터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말목장터 감나무에 등을 기댄 전봉준은 “아녀자와 노약자를 제외하고는 이곳을 떠나지 말라.” 전봉준은 군중들을 두 패로 나누었다. 한 패는 천치재를 넘어 고부 관아로 들어갔고, 한 패는 영원의 운학동을 거쳐 고부로 들어갔다. 동학농민군들이 고부 관아를 들이쳤지만 조병갑은 미리 연락을 받고 벌서 정읍, 순창을 거쳐 전주로 도망을 치고 없었다.

고부 봉기가 발발하자 조정에서는 조병갑을 어쩔 수 없이 파면시키고는 임금이 다음과 같은 전교(傳敎)를 내렸다.

고부에서 민란이 일어난 것은 실로 오랫동안 백성들의 원망이 쌓이고 정치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 까닭이지 그 연유가 일조일석에 일어난 것은 아니다. 이런 사태를 불러 온 해당 관리가 직책을 망각하고 일을 그르친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만하다. 그런데 지난번에 유임을 상신한 관리가 끝내 파직을 당하니, 앞뒤의 일이 어찌 이렇게 다를 수 있는가. 전라감사 김문현은 먼저 봉급 삼등을 감하는 조치를 시행하고, 전 군수 조병갑은 난을 불러일으키고 뇌물을 받은 죄를 범하였으니 의정부에서 잡아들여 죄를 다스리도록 하라. 그리고 장흥부사 이용태를 고부안핵사로 임명하여 그로 하여금 하루빨리 부임하여 엄중히 사실 조사를 하여 보고토록 하고, 또 용안현감 박원명을 고부군수에 임명하니 난민을 수습토로 하라.

동학농민군은 정부의 발표를 믿고 해산하였으나 800여 명의 역졸을 데리고 고부에 온 안핵사 이용태는 농민들을 역적으로 몰기 시작했다. 고부 봉기의 참가자와 주모자를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고부 일대를 휘젓고 다니며 부녀자를 겁탈하고 남자들을 굴비 엮듯이 묶어 잡아들였다. 그때 최시형을 비롯한 북접은 비폭력 타협적 노선을 견지하고 있었지만 남접의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은 그러한 현실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드디어 원평집회 때부터 친분이 있었던 김덕명과 손화중, 김개남, 최경선 등이 손을 잡고 1차 기병을 준비하여 무장의 서남쪽 2.5km 지점에 있는 유정마을 뒷동산 여시뫼에서 창의문(倡義文)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동학농민혁명은 막이 올랐다.

세상에서 사람을 가장 귀하다고 여기는 것은 인류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군신 부자는 인륜의 가장 큰 것이다. [.....] 그러나 오늘의 신하된 자들은 보국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한갓 녹위만 도적질하여 총명을 가리고 아부와 아첨만을 일삼아 충성으로 간하는 말을 요언이라 이르고 정직한 사람을 비도라 하니 안으로는 보국의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백성을 탐학 하는 관리가 많도다. [.....] 8도가 마음을 합하고 수많은 백성이 뜻을 모아 의로운 깃발을 들어 보국안민으로써 사생의 맹세를 하노니, 금일의 관경은 비록 놀랄 만한 일이기는 하나 경동(輕動)하지 말고 각자 그 생업을 편안히 하여 함께 태평세월을 빌고 임금님의 덕화(德化)를 누리게 되면 천만다행이겠노라.
갑오년 3월 20일 호남창의대장소(湖南倡義大將所)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무장을 출발한 농민군은 그날 밤으로 고부성을 점령했으나 이용태는 이미 달아난 뒤였다. 옥문을 열고 무기를 쟁탈한 농민군은 3월 25일 본진을 백산으로 옮겼다. 고부 관내의 농민들을 비롯 인근의 무주, 장수, 고장, 영광, 흥덕, 정읍, 태인, 금구, 김제 등에서도 동학 접주들이 농민군을 이끌고 구름처럼 몰려왔다.
뒤를 이어 흰옷 입은 8천여 명의 농민군들이 모여 ‘앉으면 죽산, 서면 배산’이라는 말을 낳은 부안 백산에서 조직을 재정비한다. 대장에 전봉준, 총관령에 손화중, 김개남, 총참모에 김덕명과 오시영, 영솔장에 최경선, 비서에는 송희옥과 정백현을 임명한 뒤 이어서 ‘호남창의대장소’를 설치하고 ‘보국안민(輔國安民)’ 네 자를 크게 써 놓은 다음 그 유명한 격문을 발표한다.

우리의 의(義)를 들어 이에 이름은 그 본의가 결코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세상의 모든 사람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다 두고자 함이다.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구축(驅逐, 몰아서 쫓아냄)코자 함이라, 양반과 부호 앞에 고통을 받는 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이니,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하라리.
갑오년 3월 27일 호남창의대장소 재백산

그리고 동학 4대 강령을 발표하였다.

1. 사람을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먹지 말라.
2. 충효를 다하고 제세안민하라.
3. 일본 오랑캐를 섬멸하고 성도를 깨끗이 하라.
4. 군대를 몰고 서울로 올라가 권귀(權貴, 벼슬이 높고 권세가 있는 사람)를 몰아내라.

동학농민군들이 백산에서 기포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전라감사 김문현은 곧바로 조정에 보고하였다. 전라감사 김문현은 별장 이경호가 거느린 감영군과 송봉희의 보수상패로 이루어진 연합군을 고부로 출동시켰다. 조정에서는 정령관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여 고부로 파견하였다. 4월 6일과 7일 새벽 사이 황토현에서 운명을 건 한판 싸움 끝에 동학농민군이 관군 연합군을 대파한다. 2000여 명에 이르는 감영군과 보수상패 연합군 중 불과 몇 사람만이 살아 돌아갈 정도로 큰 승리를 거둔 것이다. 농민군은 황룡강 싸움에서 다시 이긴 뒤 정읍, 금구, 삼천을 거쳐 4월 27일 전주성에 무혈 입성한다. 곧바로 서울 공격을 주장한 김개남의 의견과는 달리 전봉준은 청.일군의 개입, 농사철 그리고 전쟁에 지친 농민군을 이유로 들어 전주에 머물 것을 주장한다. 이때부터 김개남과 전봉준 간에 견해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결국 농민군은 청.일 양국군의 상륙에 대처하기 위하여 서울 진격을 미루고 5월 7일 27개의 폐정 개혁안의 수용에 합의하여 조정에서 내려온 홍계훈과 ‘전주 화약’을 맺게 된다. 전주 화약을 맺고 전라도 지역에 집강소를 설치한 후 농민군들은 두 갈래고 나뉜다. 전봉준의 주력 부대는 원평, 태인, 홍덕 쪽으로 내려갔고, 김개남 부대는 ‘이제부터 결단코 저런 책상물림들과는 상종을 안 할 것이다’라고 다짐하며 지리산 자락인 남원으로 내려갔다.
전주 화약이 체결된 이후, 집강소(執綱所) 설치와 더불어 호남 지방의 통제력은 농민군의 손에 있게 된다. 농민군은 지방 수령의 협조를 얻어 내고 농민 세력에 반대하는 양반, 부호층의 반발에 대비하여 접(接)을 만들고 조직 강화를 하게 된다. 증강되는 농민군의 구성은 주로 농민들이었고 신분적으로는 천민들이 많았다. 드디어 전라도 내 53개 군현에서 농민군의 집강소 활동이 실시되었다. 전주에서 물러난 전봉준은 금구, 김제, 태인 그리고 장성, 담양, 순창, 옥과, 남원, 창평, 순천, 운봉을 다니며 집강소 설치를 독려했고, 한편 손화중도 별도로 광주, 장성 등지를 다니며 전라우도의 집강소 설치를 독려하였다. 황현은 [오하기문]에서 집강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읍마다 통치를 할 때는 접을 설치하여 대도소(大都所)라 부르고 한 사람의 접주를 뽑아 태수(太守)의 일을 맡기면서 집강이라 하였다. 관이 있고 없고를 다지지 않았다. 도소를 또 대의소(大義所)라고도 하였고, 길가에 있는 것은 행군의소(行軍義所)라고 하였다.” 김개남은 5월 8일 전주성에서 철수한 이후 태인, 순창, 옥고, 담양, 창평, 동복, 보성, 낙안, 순천, 곡성을 거쳐 6월 25일 남원에 도착하여 전라좌도를 호령하게 된다. 하지만 나주와 운봉은 동학군의 지시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집강소가 설치되지 않았다.
김개남은 농민군 3천여 명을 모아 남원성을 들이쳤고 소년 장수 김봉득을 시켜 그때까지 집강소가 설치되지 않은 운봉을 쳤다. 운봉에는 전라도에서 고창의 은대정과 함께 악질 토호로 첫째, 둘째를 다투던 아전 출신 만석꾼 박봉양이 민보군을 모아 여원재에서 버티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 챈 김봉득은 북쪽 장수를 돌아 바람같이 운봉을 점령했다. 박봉양은 재빠르게 민보군을 해산했고 어디론가 숨어들었다.

김개남 포는 우도(右道)의 금산, 무주, 진안을 비롯하여 용담, 장수, 곡성, 순천, 담양, 고흥 등지를 모두 장악하였다. 실제 동학농민군은 수령들을 잡아다 곤장을 때리고 양반들을 잡아다 족치기도 하고 또 군기고에서 무기를 꺼내 들고 다니며 부잣집을 털기도 하는 등 양반을 가혹하게 징치했다. 훗날 밝혀진 바로는 특히 남원의 집강소와 보성의 집강소가 가장 극렬했다고 한다. 그래서 떠도는 말로는 좌상도는 남원접이 제일 세력이 크고 좌하도는 보성접이 크다는 말이 있기도 하였다.
대체로 농민전쟁의 중심적인 조직인 남접은 금구.원평의 김덕명 포, 태인.무장의 손화중 포, 그리고 남원의 김개남 포, 장흥.고흥의 이방언 포를 들 수 있다. 그중 김개남 포는 농민군의 가장 날카로운 힘을 가진 최정예 부대로 알려져 있었다.
김개남의 조직이 가장 철저하게 반봉건 투쟁에 나섰던 이유는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불꽃같이 활활 타올랐던 김개남의 성격과 진보적인 그의 열정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김개남은 다산의 [경세유표]를 읽을 정도로 실학의 사상적 흐름을 수용하고 있었다. 둘째, 그를 둘러싼 소두목들의 주축이 대개 무당, 화전민, 산포수, 지리산에 은거했던 범법자, 떠돌이 중, 도붓장수, 땡추, 백정, 고리장이 등의 출신들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남원이 가지는 사회 경제적인 강력한 힘이 김개남 포의 활동에 반영된 점이다. 남원은 물산이 풍부한 교역 도시이며 국방상으로 중요한 요새 도시, 그리고 양반과 기층 생산 계급 간의 활발한 변동이 있었던 활기 넘치고 풍성한 도시, 즉 새로운 역사적 세력이 성장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가 이루어진 지역이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운봉을 공략할 때 김개남은 만여 명에 이르는 전 부대원에게 전투복을 입혀서 진군시켰다고 한다. 또한 남원은 1862년 경주에서 온 수운 최제우가 남접의 시초를 연 곳이었고, 남원 선국사 은적암은 최제우가 고향을 두고 온 서러움을 달래며 ‘칼노래’와 ‘논학문’ 등을 지은 곳이다.
이후 계속되는 활동에서 김개남은 급진 강경 입장을 취한 반면 전봉준은 여러 현실을 복합적으로 인식 수용해 가는 현실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1894년 7월 15일 전주 화약 후에 일어난 여러 가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농민군 대집회 남원대회가 열린다. 7만여 명의 전라도 농민군들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세 지도자의 의견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때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이 중점적으로 나누었던 대화를 살펴보면 전봉준은 외부의 사정에 말려들기보다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자는 입장이었고, 김개남은 대중이 한번 흩어지면 모으기가 어려우니 물리적 대응을 하자는 강경론을 폈으며, 손화중은 대체적으로 회의적이어서 흩어져 후일을 도모하자는 쪽이었다. 우려했던 대로 일본군은 경복궁을 침입했고,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전라가사 김학진과 전봉준이 제휴하여 집강소 통치를 공고히 하는 사이 김개남은 피서를 핑계로 임실 성수산에 있는 상이암으로 들어갔다.
상이암은 어떤 의미가 있는 곳인가? 임실군 성수면과 진안군 백운면 사이에 성수산이 솟아 있는데, 그 성수산의 상이암에서 고려 태조 왕건과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103일 동안 기도를 올렸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그 사이 농민군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대원군이 농민군의 봉기를 진정시키겠다고 한 일본군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김개남에게 정석모를 통하여 농민군들을 해산하도록 하는 효유문(曉諭文)을 보냈다. 그와 동시에 곧바로 이건영에게는 농민군을 북상시키라는 밀지를 보냈다. 그때 김개남은 정석모에게 ‘너는 나이도 어리면서 어찌 공명을 쫓아 개화당에 붙어 국태공을 유롱(誘弄)하여 이런 효유문을 들고 왔느냐, 이것이 어지 국태공의 본뜻이겠느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봉준에게서 “우리의 재봉기는 진격만 있고 후퇴는 없다. 만약 대원군의 효유문을 따르게 되면 만사는 끝장이다. 장석모 일행을 죽임으로써 대원군의 바람을 거절해야 한다”는 편지를 받은 김개남은 전봉준이 모든 화근을 자기에게 떠넘기려는 줄 알고 꽁꽁 묶어 놓고 죽이려 했던 정석모를 풀어 준다. 집강소를 설치한 뒤 3개월이 흘렀지만 동학농민군들의 의도와는 달리 조선의 운명은 앞날을 전혀 예측할 수가 없는 바람 앞의 촛불 같았다. 김개남이 상이암에서 남원으로 돌아온 것은 8월 25일이었는데 오자마자 김개남은 남원성과 교룡산성 보수를 시작하였다. 그때까지 남원부사는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그 무렵 일본은 경부 경인 철도 부설권을 빼앗아 갔고 한일공수동맹으로 조선의 군사력을 일본에 속박시켰다.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금구 원평에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던 전봉준은 9월 12일 삼례에 4천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집결시켰다. 2차 봉기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서울로 진격하기 위해 모인 동학농민군은 농민혁명을 원하지 않았던 북접과 남접의 갈등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때의 상황을 오지영은 [동학사]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갑오난(1894년)을 당하여 전라도를 남접이라 이름하고 충청도를 북접이라 이름하여 서로 배척하게 되었고, 또 우스운 일은 전라도에 있어도 북접파가 있고 충청도에 있어도 남접파가 있어 그것이 거의(擧義)하는 데 큰 문제가 되었다. 처음은 언쟁으로 하다가 차차 육박전으로, 끝내는 살육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서로를 짓밟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갑오 봄 여름 이래로 남북접 문제가 말성거리가 되어 오다가 이번 재기병 하는 때를 맞아서는 더욱 큰 말성이 되어, 남접의 총과 창 때문에 북접 사람들은 모두 다 죽을 지경에 들어갔다.

남북접 간의 불화로 인하여 동학농민군들은 삼례에서 한 달 남짓 머물게 된다. 그 뒤 논산을 거쳐 남접의 전봉준, 북접의 손병희 등이 연합 전선을 펼치며 공주 공격을 감행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김개남의 부대는 그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남원을 거점으로 무력을 강화하고 지역적 기반을 확대해 나가던 김개남은 10월 14일 남원을 출발, 전주로 향하였다. 김개남이 전봉준의 요청이 있었음에도 이렇듯 늦게 떠난 이유 중의 하나는 49일을 머물러 있어야 혁명을 성사시킬 수 있다고 하는 동학의 참서 때문이었다. 즉, 10월 14일은 남원에 진을 치고 머문 지 49일이 되는데다, 남원과 그 인근 지역의 물산이 모두 떨어져 더 이상 막대한 군대를 머무르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때 출발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전주로 향하는 김개남 부대의 행군 대열은 총통을 맨 자가 8천여 명이었고 그 길이 역시 백여 리나 걸쳐 있을 정도로 세력이 컸다.
10월 16일에 전주에 도착한 김개남은 그동안 농민군에게 협조를 잘 안 했거나 농민군 탄압에 앞장선 고부군수 양필환, 남원부사 이용헌, 순천부사 이수홍 등을 처단하였다. [오하기문]에서는 김개남이 그때 이용헌에게 “네가 왜놈이 임명한 관원으로 내려와 나를 죽이려 한 일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이용헌은 부인하였다고 한다. 또한 김개남이 전라감사 김학진을 만나 “내가 전주감영에 겨울에 입을 옷 천 벌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는데 왜 이에 응하지 않느냐”고 다그쳤는데 김학진은 그런 편지를 받은 적이 없다고 변명하였다. 이어서 김개남 부대는 10월 23일 금산을 점령, 군수를 비롯한 반농민군 세력을 철저히 징치한 다음, 동학접주 차도주, 강시원과 더불어 청주를 거쳐 서울로 진격할 전략을 세우고 11월 10일에는 금산 진잠을 들이쳤다. 11일에는 회덕 신탄진을 점령하였고, 11월 13일 새벽에는 회덕과 문의 쪽에서 청주성을 공격하였다. 당시 신탄진 방향에서 공격에 나섰던 김개남 부대는 만 오천 명쯤 되었고 문의 방향에서는 만여 명쯤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백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김개남의 청주 병영 공격은 실패하였으나 청주 병영의 관군이 공주 전투에 투입되지 못하게 하는 데 한몫을 한 것은 사실이다. 전하는 말로는 청주성 싸움에서 북접의 도인들은 총칼을 들고 싸움에 임하지 않고 부적을 가슴에 붙인 채 외기만 하면 총알도 피해 간다는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라는 동학의 본주문만 외웠다고 한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부적이나 주문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서울까지 치고 올라가 일본군과 씩어 빠진 벼슬아치들을 몰아낸 뒤 새로운 세상을 세우려던 김개남의 희망과 노력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 것이다.

청주에서 패한 김개남 부대는 이후 진잠, 연산을 거쳐 남하하였고 우금치 싸움에서 크게 진 전봉준은 논산의 황화대를 거쳐 전주로 남하했다.
원평전투에서 크게 진 후, 뒤이어 마지막 싸움터였던 태인에서도 패배한 전봉준은 동학군을 공식적으로 해산한 뒤 입암산을 거쳐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로 갔다. 그러나 어느 지점에서 그를 따르던 세력들을 해산했는지조차 알려지지 않은 김개남은 회문산 종송리의 매부 서영기의 집으로 몸을 숨긴다. 그때 김개남은 아랫마을에 살고 있던 임병찬(후일 면암 최익현과 태인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임병찬은 “자네가 숨어 있는 곳보다 이곳이 안전할 테니 우리 집으로 오라”고 안심을 시킨 후 전주 감영에 그 사실을 알렸다. 전라감사 이도재는 강화도 수비병의 중군인 황헌주와 포교를 보냈다. 황헌주가 거느린 관군들이 김개남이 숨어 있는 집을 포위하고 “어서 나와 포승줄을 받아라” 하고 소리치자 그는 측간에서 대변을 보고 있다가 껄껄껄 웃으며 “내 올 줄 알았다. 똥이나 다 누고 가겠다”라고 말한 후 붙잡혔다. 12월 1일 새벽이었다. 김개남이 붙잡힌 바로 그 다음 날 전봉준 또한 부하 접주였던 김경천의 밀고에 의해 다리가 부러진 채 체포되고 말았다. 전봉준과 김개남이 불잡힌 지점이 8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므로 그들이 재기를 위해 만남을 준비하던 중 붙잡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어두운 시대에 태어나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김개남은 그렇게 잡혔다. 그가 잡혀 전주 감영에 끌려갈 때 백성들은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수천 군사 어디다 두고 짚둥우리에 묶여 가다니 그게 웬 말이냐”라는 참요를 불러 그가 붙잡혀 가는 것을 애달파 했다고 한다.
전라감사 이도재는 김개남을 전주로 압송한 뒤, 아직 농민군이 곳곳에 모여 있기 때문에 중도에 빼앗길 염려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12월 3일 전주 서교장에서 김개남을 즉결 처형시켰다. 김개남이 붙잡혀 처형당하기까지의 과정을 황헌은 [오하기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심영의 중군 황헌주가 개남을 포박하여 전주에 도착하자 감사 이도재가 개남을 신문하였다. 개남은 큰 소리로 ‘우리들이 한 일은 모두 대원군의 은밀한 지시에 의한 것이다. 지금 일이 실패한 것은 또한 하늘의 뜻일 뿐인데 어지 국문한다고 야단이냐’고 하였다. 도재는 마침내 난을 불어오게 될까 두려워 감히 묶어서 서울로 보내지 못하고 즉시 목을 베어 죽이고 배를 갈라 내장을 끄집어냈는데 큰 동이에 가득하여 보통 사람보다 훨씬 크고 많았다. 그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다투어 내장을 씹었고, 그의 고기를 나누어 제상에 올려놓고 제사를 지냈으며 그의 머리를 상자에 넣어서 대궐로 보냈다.
개남의 미친 듯한 행동과 포악하고 잔인함은 여러 적들 가운데 가장 심하여 사람들이 마치 호랑이를 본 것처럼 두려워하였다.

김개남을 전격적으로 즉결 처분한 것은 김개남에게 당한 보수 기득권 세력의 거센 압력 때문이기도 했다.
서울로 보내진 김개남의 머리를 서소문 밖에 여러 날 동안 효시된 뒤, 다시 전주로 보내져 재차 효시되었다. 흥선대원군과의 관계를 밝히기 위해 동학의 주모자들을 가급적으로 생포하여 심문하고자 했던 일본측 관계자는 해당 지방관이 왜 김개남을 죽였는지 그리고 누구의 명령으로 죽였는지 밝혀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도재는 “중도에 탈취 당할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고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날 무렵 조선을 방문했던 영국왕립지리학회의 최초 영성 회원이었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는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이라는 저서에서 김개남과 성제식의 최후를 이렇게 적고 있다.
“외세에 좌지우죄되고 있는 임금과의 충성 관계를 공손하게 끊고, 그와 다른 주권을 약속했던 동학은 1월 초 전멸하여 교주의 머리가 충성스러운 관리에 의해 서울로 압송되었다. 나는 그것을 베이징으로 가는 길에 가장 부산한 거리인 서소문 밖의 어느 시장 거리에서 보았다. 마치 야영장에서 쓰는 주전자 대처럼 나무 기둥 세 개로 얼기설기 받쳐 놓은 구조물에, 머리 두 개가 그 아래로 늘어 뜨러져 매달려 있었다. 그 두 얼굴 모두 고요하고 엄숙해 보였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도 같은 구조물들이 많이 세워져 있었다. 그것들이 무게를 지탱할 수가 없어 무너지게 되면 먼지 수북한 길바닥에 그냥 나뒹굴도록 내버려져 개들이 몰려와 물어뜯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곳에 고장난 회중시계가 떨어져 있었는데 어린아이들이 그것을 조각조각 분해하여 개에게 물어뜯긴 시체의 입 속에 장난으로 처넣었다. 이런 끔찍한 광경이 1주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비숍 여사는 그 뒤 그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동학군은 너무나 확고하고 이성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어서 나는 그들의 지도자들을 ‘반란자들’이라기보다 차라리 ‘무장한 개혁자들’이라고 부르고 싶다.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했던 김개남이 서울과 전주에서 두 번씩이나 효시되었을 때 그것을 지켜본 수많은 인민들의 가슴 속에는 뜨거운 눈물과 함께 회한이 스쳐갔으리라. 한편 김개남 포의 중심지였던 남원의 사정도 좋지 않았다. 김개남은 남원을 떠나면서 남원의 회산단 접주 이문경과 담양 접주 남웅삼, 임실의 김홍기, 남원에 사라 진악 백운 오정리로 이사를 갔던 이사명 이하 34명의 접주들에게 대신 남원을 지키도록 하였다. 남원에 남아 있던 농민군은 운봉을 넘어 경남 서부 지역으로 나가려고 시도하였으나, 함양과 대구 감영군의 지원을 토대로 민보군을 만들어 이에 강력히 맞선 운봉의 박봉양 세력에게 가로막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남원의 농민군이 여러 차례 패배하였고, 마침내 박봉양이 이끄는 민보군에게 11월 28일 남원성을 빼앗기고 수천 명의 농민군이 무참한 죽음을 당하였다. 이어 12월 3일에는 일본군과 관군이 남원에 들어왔다. 이로서 남원을 교두보로 하여 경상도 지역으로 진출하려던 동학농민군의 투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해 12월 최경선, 김덕명, 손화중, 성두한 들이 서울로 압송된 후 좌선봉장 이규태와 우선봉장 이두황이 거느린 관군과 일본군에 의한 소탕 작전이 이어졌다. 오지영은 그때의 상황을 [동학사]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갑오 12월부터는 조선 남방은 관병과 일병의 천지가 되고 말았다. 동리마다 살기가 충천하고 유혈이 가득하였다. [......] 동학군들이 관병, 일병, 수성군, 민포군에게 당한 참살 광경은 이루 말할 수조차 없었다. 그중에서 가장 참혹한 곳이 호남이었고, 충청도가 그 다음이며, 또한 경상, 강원, 경기, 황해 등 여러 도에서도 살해가 많았다. 전후 피해자를 계산하면 무릇 30~40만에 달하였다. 동학군의 재산은 모두 관리의 것이 되었고 가옥 등 물건은 죄다 불 속에 들어갔으며 기타 부녀자 강탈, 능욕 등은 차마 다 말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동학농민혁명 당시 김개남이 이루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를 정확하게 그려 본다는 것은 쉽지 않다. 전봉준이 지향했던 것처럼 김개남 역시 대원군과의 합작 정권을 구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정세를 관망하면서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전봉준과는 달리 김개남은 농민군이 무력을 갖추었을 때 물리적으로 대응을 할 계획이었다.
개혁주의자였던 전봉준이나 손화중과는 달리 김개남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뒤엎고 새로운 왕조를 창시하고자 했다는 기록들이 여러 편 남아 있다.
강진의 유생이었던 박기현이 쓴 일기인 [일사]에는 “김개남이 남원에 나라를 세우고자 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그 무렵의 상황을 기록한 [피난록]을 보면, “6조 장관과 방백수령을 미리 계산하여 우두머리들에게 분정했다. 이들은 스스로 대장, 모 판서라 칭했는데, 이는 난역(亂逆)이 아닌가?”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 당시 주한 일본 공사였던 이노우에 카우로는 일본 외무대신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지난 가을 9~10월경부터 전라, 충청 및 황해 각도에서 봉기한 동학당은 겉모양은 농민 봉기와 유사할지라도 그 종류는 각양각색입니다. 원래 동학도 중에는 일종의 종교와 유사한 유도(儒道)와 불법(佛法)을 혼합한 천도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또 동학교도의 수령 이하 접주라고 칭하는 각 지역의 우두머리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키웠으며, 김개남 같은 자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개남국왕(開南國王)이라고 칭하기도 하고 [.....] 그들 집단은 능히 세상의 인심을 단결시켜 죽을힘을 다하게 하는 데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꿈꾸었던 세상은 오기도 전에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전봉준, 손화중, 손병희로 이어지는 동학은 농민혁명이 끝나면서 막을 내렸지만 김개남 포에서는 동학 정신이 온전하게 살아남았다고 볼 수 있다. 가는 곳마다 파죽지세로 점령하고 무서운 혁명적 열기로 사방을 제패했던 김개남과 그의 휘하였던 영호대접주 김인배 부대는 지리산을 넘어 하동, 진주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인배 역시 광양에서 처형되고 그 뒤 김개남의 잔존 세력들은 농민혁명이 끝난 후, 지리산으로 숨어들었다. 그들은 뒤에 1차, 2차, 3차 지리산 의병전쟁의 주역이 되었다. 진주 형평사운동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그들은 고료공산당을 만든 김단야로 이어졌으며, 민족민중운동의 중심 세력으로 오늘날가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뒤 남원 운봉면 서천리 선두 숲에는 농민군을 격퇴한 것을 기리는 운봉 토호 박봉양의 기념비가 세워졌지만 남원을 비롯한 전라좌도를 호령했던 김개남의 흔적은 백 년의 세월 동안 지워져 버리고 말았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빼어난 활약을 펼쳤던 김개남이 역사 속에 묻혀 있었던 것은 첫째 공초 기록과 죽음에 이르는 전과정이 제대로 남아 있는 전봉준과 달리 그가 즉결 처분되었기 때문이며, 둘째는 한 사람을 영웅시하는 시대적 상황 때문이고, 셋째는 전봉준의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여러 자료들이 김개남을 급진주의자 또는 강경파로 몰아붙였기 때문이다.
그의 가족들은 도강 김씨 족보에서도 지워지고 성마저 박시로 바꾼 채 어렵게 살아남았다. “비단 할아버지에 거적 자손”이라고 김개남의 손자 고 김환옥 씨가 자조했던 것처럼 온갖 환란과 고통 속에서 살아남은 그의 후손들은 1950년대에야 성을 되찾았지만 현재까지도 어렵게 생활하고 있다. 그 한 맺힌 세월이 백 년이 흐르고 나서야 김개남을 기리는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라는 이름의 김개남 장군을 기리는 추모비가 1993년 5월 30일 전주 덕진공원에 세워졌다. 그리고 박봉양의 비는 수풀 속에 쓰러져 있다가 1994년에야 다시 세워졌고 1995년에는 그의 고향인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윗지금실에 가묘가 만들어졌으며, 2000년 말에 그가 죽은 전주 서문교회 옆 서교장터에는 ‘김개남 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백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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