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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데이 : 투쟁의 역사, 투쟁으로 기억하기

메이데이 : 투쟁의 역사, 투쟁으로 기억하기

유경순 노동자의 힘 회원, 역사학 연구소  


<목차>

1. 메이데이는 '세계 노동자들의 투쟁의 역사'로 이어져 왔다.

2. 일제식민지기, 메이데이 기념투쟁
우리나라 최초의 메이데이 투쟁
1920년대 메이데이
1930년대 메이데이

3. 해방 공간기, 메이데이 기념투쟁

4. 빼앗긴 메이데이, 단절의 역사
비틀린 노동절
빼앗긴 메이데이
'근로자의 날 '
자본가와 나란히 표창 받는 근로자
메이데이ㅡ다시 찾으려는 시도들

5. 다시 찾은 메이데이, 다시 찾은 투쟁의 역사
1989년, 다시 쟁취한 메이데이
전노협시기- 노동절 기념 대회
: 1990년 노동절 대회-' 해체! 민자당, 퇴진! 노태우', '사수! 전노협, 해체! 경단협'
: 1991년 세계노동절 102주년 기념대회- '폭력정권 살인정권 타도하자'
: 1992년 노동절 대회 - '민주노조 총단결로 노동해방 앞당기자!'
: 1993년 노동절 대회- '임금억제 정책 철회하라'
: 1994년 노동절대회 - '어용노총 해체하고 민주노총 건설하자'
: 1995년 민주노총 원년 노동절 기념대회

6. 민주노총의 노동절 기념대회
1996∼1997년 노동절 대회
1998년∼2003년 노동절 대회 - '구조조정· 정리해고 반대투쟁'

7. 메이데이, 투쟁의 역사- 투쟁으로 기억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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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동지들! 메이데이가 다가왔다. 만국의 노동자가 자신들이 자각하게 된 것을 경축하고, 인간에 대한 인간의 모든 폭력과 억압을 반대하는 투쟁, 기아와 빈곤과 굴욕으로부터 수백만의 노동자를 해방하기 위한 투쟁에서 자신들의 단결을 축하하는 메이데 이가 다가왔다. 이 위대한 투쟁 속에서 자본의 세계와 노동의 세계, 착취와 예속의 세 계와 우애와 자유의 세계-두 개의 세계가 대립하고 있다...노동자 동지들! 열 배의 노력을 기울여 눈앞에 다가온 결정적 전투를 준비하자! (1904년 4월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1. 메이 데이는 '세계 노동자들의 투쟁의 역사'로 이어져 왔다.

언제부터인가 5월1일 메이데이 기념식이 문화행사, 질서 유지 속의 거리행진으로 자리잡혀 가는 것 같다. 세상이 바뀐 것일까. 노동자가 주인되는 평등세상이 온 것인가. 그래서 싸울 필요가 없는 걸까. 올해의 노동절 기념대회는 어찌 되는지, 민주노총 홈페이지를 들어가 봐도 어떤 소식도 볼 수가 없다. 온통 4·15총선과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 관련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메이데이는 1889년 8시간 노동제 확립투쟁에서 출발되어, 1890년 5월 제1회 메이데이부터, 매년 5월1일은 여러 국가의 노동자들이 자기 나라의 형편에 맞게 집회, 시위를 통해 국제적 단결과 혁명적 역량을 과시하는 '노동자 투쟁의 날'이며 축제의 날이다. 노동자들은 메이데이 투쟁에서, 개별 공장 사장들과 일상적인 경제 투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총자본과 국가권력에 대항하여 노동자의 공통된 요구를 관철해 나간다. 물론 노동자들 앞에 놓여 있는 절실한 요구와 노동자들의 투쟁이 메이데이 하루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나라마다 메이데이 행사도 같지 않다. 그러나 많은 나라에서는 메이데이에, 노동자들이 자신을 옥죄고 있는 쇠사슬을 끊기 위해 모든 종류의 억압과 착취에 대해 투쟁할 결의를 다지고 비타협적으로 투쟁해 왔다. 이 날은 노동자뿐만 아니라 농민, 빈민 형제들과도 굳건히 연대하여 당면한 가장 절실한 과제를 함께 해결해 왔다. 국경을 뛰어넘어 세계 노동자들이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노동자는 하나다!'라고 소리 높여 외치며 모두 하나로 뭉쳐 노동자계급의 엄청난 위력을 과시하고 투쟁과 해방의 결의를 다져왔다. '노동자는 하나' 라는 노동자 계급의식을 다져온 메이데이는 세계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만들어, 투쟁으로 지켜온, 피 어린 역사'를 안아왔다.
우리나라 메이데이의 역사도 1923년 최초의 전국적인 메이데이 기념투쟁을 시작으로 일제의 탄압 속에도 지속적인 기념투쟁을 전개해 왔으며, 이는 해방공간의 기념투쟁을 통해 투쟁의 역사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승만 독재정권에게 1958년 3월10일로 그 날짜를 빼앗기고, 1963년 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해 그 이름마저 빼앗겨 '근로자의 날'로 불리어지면서 노동자의 기억에서 지워지도록 강요당해왔다. 1989년 '세계 노동절 100주년'을 맞아, 투쟁을 통해 되찾아 매 년 기념투쟁을 전개해 오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역사는 '몸으로 기억하는 자의 것'이다. 2004년 노동절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 우리나라 메이데이, 그 투쟁의 역사를 돌아보며 다시 한 번 메이데이 그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본다

2. 일제식민지기, 메이데이 기념투쟁

우리나라 최초의 메이데이 투쟁

1920년대는 조선의 노동자 수가 100만에 이를 정도가 되었으며 노동자의 전국적인 조직이 결성되었던 시기이다. 1920년대 들어 메이데이를 맞이한 투쟁이 산발적으로 시작되었다. 최초로 조직된 메이데이 기념행사는 1923년 조선노동연맹회가 주도했다. 일제는 메이데이 집회를 사전에 금하고, 당일에는 행사장인 장충단에 정·사복 경관을 파견해 모여드는 노동자들을 일일이 검속하여 기념행사를 봉쇄했다. 집회가 이루어지지 않자, 2,000여 명의 노동자들은 기독교 청년회관에 모여 '노동제 기념에 대하여'라는 기념강연을 들었다. 노동절 하루 총파업도 일제의 탄압으로 실현되지 못했지만, 양화 직공조합, 세창양화점, 신생활사의 인쇄직공, 반도고무 제조소 그리고 서울양말 노동자들은 탄압을 뚫고 파업을 했다. 마산 노동자들도 '8시간 노동제 쟁취'와 노동자의 단결을 외치며 시가행진을 했고, 진주 노동공제회는 기념식과 강연회를 강행했으며, 대구 역시 노동공제회가 근로대중 기념행사를 벌였다. 무안군 지도면에서는 노동자와 근로대중이 기념행사를 벌였다. 그밖에도 전국 곳곳에서 노동자들은 일제의 탄압을 뚫고 산발적으로 기념행사를 치렀다.

1920년대 메이데이

1924년 4월 초순부터, 다가오는 5월1일 메이데이를 앞두고 일제는 강경 단속을 하였다. 한 신문은 당시의 살벌한 서울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시가에는 기마 순사의 말자취 소리가 요란하고 사상 단체의 사무소 앞에는 사복 형사가 지켜 서서 무엇인지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면, 무산자는 소리없이 압박에 묻혀 있고 그 대신에 경관대가 메이데이를 축하하는 듯하더라.(『조선일보』1924년5월2일자)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노동자들은 이날 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메이데이 기념 행사를 과감히 전개했다. 노농총동맹의 시천교당에서 열려던 강연회는 일제의 금지조치로 무산되었으나, 신생활사의 인쇄직공, 서울시내의 9개 양말공장 노동자들이 1일 동맹파업을 했다. 마산, 함흥 등에는 옥외집회가 봉쇄되자 기념강연회를 행사로 대신했다.
1925년 노동자와 소작농민의 전국조직인 조선노농총동맹이 만들어지자, 노동자들은 이 해의 메이데이를 더욱 크게 전개했다. 조선노농총동맹은 "①8시간 노동과 최저임금 확정 ②4할 소작료와 지세의 지주부담 ③일제의 식민지 착취기관인 동척에 의한 일본 농민의 조선 이주반대, ④언론집회의 자유 ⑤노·농 민중의 문맹퇴치"등을 요구했다. 이에 힘입어 인천, 대구, 강경, 진주, 광주, 군산, 나주, 함흥 등 전국 곳곳에서 기념행사가 열렸다.
1920년대 후반은 노동운동이 한층 고양되는 가운데 메이데이 투쟁이 힘차게 전개됐다. 1926년에도 일제는 메이데이 기념행사를 봉쇄하려고 강한 탄압을 했다. 일제는 4월 27일 비상경계를 펴고 무장경관 1,600여 명을 동원했고, 메이데이와 관련해 단속한 건수는 무려 1만 2,000여 건에 달했다. 일제의 탄압이 더해질수록 노동자와 민중의 가슴에는 메이데이는 빼앗길 수 없는 날로 자리잡아 갔다. 민족주의 신문인『조선일보』조차 사설에서 '메이데이, 온 세상 노동 계급과 동일한 의식을 가지고 압박으로부터 해방을 위하여 노력하는 날'이라고 규정할 정도였다. 5월1일 총동맹은 계획대로 메이데이 행사를 하지 못했지만, 전국 각지의 노동자들은 연설회, 표어부착, 전단살포 등 여러 방식으로 기념행사를 했다. 해주에서는 기념행사가 무산되자, 노동자들이 1일 동맹파업으로 맞서기도 했다.
1927년 메이데이를 기념하기 위한 준비 모임조차 일제의 탄압을 받지만, 각 지역의 노동자들은 사회단체와 연합하여 매우 치열하게 기념 행사를 벌였다. 평양의 대동선운 노동조합은 4월22일부터 메이데이 행사를 준비했다. 전주에서는 청년동맹, 배달인 조합, 양화직공조합, 철공조합, 인쇄 직공조합이 연합하여 동맹파업을 결행했다. 기념 집회에서 군중은 '일제와 자본에 반대하는 투쟁에 앞장 설 것'을 결의했다. 공주와 보성에서는 메이데이 행사장에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의 주적인 일제를 몰아내자'는 격문이 뿌려졌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제를 축출해야 함을 자각하기에 이르렀다. 해가 갈수록 메이데이 기념 행사는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성장과 함께 단지 노동자만의 행사가 아니라 민족해방운동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아 갔다.
1928년 메이데이가 다가오자 일제는 4월30일, 모든 집회와 행사를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해 조선 노동자의 메이데이 투쟁은 곳곳에서 일어났다. 김제에서는 2,200여 명의 노동자가 동맹파업을 단행하고 기념행사를 거행했고, 전남의 법성포에서는 청년 동맹 지부와 노동조합이 연합해 기념행사를 주도했다. 이 날 행사에서는 고기 잡는 어부들이 전부 상륙해 '노동자에게 밥과 일을 주라!' '농민에게 토지를 보장하라!'고 쓴 붉은 깃발을 휘날리면서 가두시위를 벌였다. 성진, 청진, 해주, 원산, 괴산, 웅진 등지에서 기념 행사를 했다. 그 가운데 원산 노동자들의 투쟁은 이 날 전국에서 치러진 행사 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졌다. 원산노동연합회 산하 42개 가맹단체의 2,000여 노동자들은 5월 1일 총파업을 단행하고 투쟁에 나섰다. 노동자들의 시위가 시작될 무렵, 일제의 경관대가 쳐들어와 참석자들이 경관대를 몸으로 몰아내고, '8시간 노동쟁취' '만국의 노동자는 단결하라'는 구호를 소리 높여 외쳤다. 노동자 계급의 단결과 연대를 천명한 이날의 행사는 모든 조선 노동자대중에게 커다란 힘이 되었으며, 바로 다음해인 1929년 원산노동자 총파업을 일으킬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 준 계기가 되었다.
1920년대 조선 노동자들은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메이데이 기념투쟁을 줄기차게 전개해 왔다. 그 과정에서 메이데이는 노동자만이 아니라 농민을 비롯한 조선 민중 전체의 행사로 자리잡아갔다. 노동운동 역시 민족 해방 운동의 주요한 흐름으로 자리잡아 갔다.

1930년대 메이데이

1930∼45년 간의 메이데이 기념행사는 일제의 파쇼적 폭압 아래서 진행됐다. 파업이나 언론집회를 할 수 없는 암흑기에 노동자들의 메이데이 기념 투쟁은 곧바로 일제를 부정하고 민족해방운동을 수행하는 정치투쟁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메이데이는 만국 노동자의 날이면서 민족 해방을 염원하는 조선 민족 모두의 날이기도 했다
1930년 노동자들은 메이데이 투쟁을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치열하게 전개했다. 1929년 원산 총파업을 겪은 바로 뒤였다.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주요 도시와 농촌에서 일제의 탄압을 뚫고 기념투쟁이 벌어졌다. 전주 합동노동조합 산하 500여명의 노동자들은 붉은 깃발을 펄럭이며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구호를 내걸고 기념집회와 시위를 단행했다. 일제 경관이 해산을 명령하자, 노동자들은 격렬히 항의하며 주재소로 달려가서 유리창을 부수는 등 투쟁을 전개했다. 노동자만이 아니라 농민들도 이 날을 기념했다. 경남 김해 농민조합 농민 조합원, 청년 회원 수천 명은 날이 저물자 경찰의 눈을 피해 풍물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시가 행진을 벌였다. 더욱이 이 해에는 선진노동자들이나 운동가들이 혁명적 격문을 공장지대와 거리, 그리고 농촌지역에 광범하게 뿌렸다.
1930년 말부터 일제는 전시라는 미명으로 모든 활동을 묶어두어, 노동조합 활동조차 탄압했다. 탄압에 대응하여 비공개 노동자조직으로 '혁명적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 이 시기 메이데이 투쟁방식도 기념대회 이외에 '격문'을 배포해 일제의 탄압을 폭로하고 노동자들의 요구를 제시하며,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사상을 선전하기도 했다.
1931∼1935년의 메이데이 기념투쟁은 전국에 격문이 다량으로 뿌려지는 가운데 전개됐다. 이 때 뿌려진 격문은 '붉은 5·1절', '제국주의를 타도하자' 등의 제목이 시사하듯이 제국주의와 이들의 침략전쟁에 반대한 반제반전 내용을 선전하였다. 나아가 부산에 뿌려진 격문은 '혁명적 노동조합의 건설과 메이데이 기념시위'를 선동하기도 했다. 1935년 5월1일에는 가정집에 배달되는 것에서부터 가두에서 직접 나누어주기까지 하는 과감한 투쟁이 전개되었다. 심지어 감옥에서도 노동절 투쟁을 했다. 강병철이라는 사람이 일제시대 감옥에서 벌인 노동절 투쟁을 뒤돌아보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1932년 즉 지금부터 16년 전 메-데-를 나는 수백의 동지들과 함께 서대문 형무소에서 맞이하게 되었다. 이날을 마지하기 한달 전부터 우리는 이날을 기념하기 위한 준비공작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 뒤 약속한 5월 1일에 "메이데이 만세 ! 조선 민족해방 만세 ! 무산계급 해방 만세 !"하는 소리를 '인왕산 꼭대기가 울리도록' 힘있게 되풀이했다. 놀란 일제 간수 놈들이 갇힌 사람들을 마구 때려 투쟁을 짓뭉개고 벌로 밥까지 주지 않았다. 나아가 "이놈들. 메이데이란 소리가 다시는 입으로 나오지 않고 똥구멍으로 나가게 하리라"는 말을 해대며 혹독하게 고문도 했다.({해방일보} 1946년 5월 7일자 )

1936년 메이데이는 서울 자동차 회사 운전사들의 파업으로 시작되어, 뒤이어 흥남 질소 비료공장의 노동자파업과 함흥 철강노동자의 파업이 진행됐다. 또한 4월30일 함흥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노동자 370여명이 일제히 만세삼창을 하고 메이데이 노래를 부르면서 기념하는 일도 있었다.
중·일 전쟁이 일어나던 1937년부터 일본군의 대륙 침략 병참기지로 변한 조선은 실질적인 계엄상태에 들어갔다. 국내에서는 노동운동을 비롯한 어떠한 표면적 운동도 할 수 없는 암흑시대로 운동은 침체되었다. 그러나 만주와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해외 민족해방운동은 더욱 강력히 전개되었다. 메이데이 기념행사도 이들에 의해 여전히 계속되었다. 조선인민이 가장 많이 살고 있던 만주의 간도지방에서는 동포들을 기반으로 한 항일유격대가 1932년 봄부터 결성되어 간도 각지에 해방구를 건설하고 일본군과 치열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이들 항일무장 유격대원들은 기념식과 강연회를 통해 지역 노동자들과 모든 근로 대중에게 승리에 대한 신념을 심어 주었다. 지방 민중도 참가하는 메이데이 기념대회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조선과 중국민중의 연대를 강조하고 항일무장 투쟁의 성과를 점검하며 당면한 임무의 수행을 결의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관내의 조선의용대원들도 매년 5월1일이면 중국공산당이 주최하는 메이데이 기념식에 참가해 조·중 민중의 단결과 항일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다짐했다.
이처럼 1930∼1945년 간의 메이데이 기념행사는 일제 파쇼 폭압 아래서 치러졌다. 노동자들은 이 기념행사를 '일제 축출과 민족해방의 완수'를 결의하는 계기로 삼았다. 또 이 기념 행사를 일제의 대륙침략을 규탄하고 공동의 적인 일제를 타도하는데 조·중·일·소 민중이 서로 연대하고 단결할 것을 호소하는 계기로도 삼았다. 파업이나 언론집회를 할 수 없는 암흑기에, 노동자들의 메이데이 투쟁은 일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민족해방운동을 수행하는 정치투쟁이었다. 때문에 메이데이는 '만국 노동자의 날이면서 민족해방을 염원하는 조선민중 모두의 날'이기도 했다.
식민지 기간 동안, 일제의 혹독한 탄압으로 메이데이 행사가 전국적이고 공개적으로 수 많은 대중이 참여하지 못했다. 그러나 탄압을 뚫고 해마다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조선 노동자와 민중의 일제와 자본에 대한 비타협적 투쟁의 맥은 줄기차게 살아남아 해방공간에서 다시 타올랐다.

3. 해방 공간기, 메이데이 기념투쟁

해방과 함께 노동자들의 요구가 터져 나왔다. 해방 후 노동자들은 조합원 50만, 16개의 산업별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이하 전평)'를 결성했다.
1946년의 메이데이는 전평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다. 메이데이 노래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서울운동장 야구장에 20만 노동자가 참여해 메이데이를 공개적으로 거행했다. 노동자들은 기념식, 시위행진을 하면서 노동자의 단결된 힘을 과시했다. 특히 인천에서의 메이데이 행사는 40여 공장, 노동자 3만여 명이 공설운동장에서 각 조합기와 표어를 쓴 플랜카드를 앞세우고 진행됐다. 식이 끝난 후 노동자들은 메이데이의 노래를 부르며 수십 대의 화물 자동차를 앞세우고 수많은 깃발이 뒤따르는 시가 행진을 벌였다.
메이데이를 통해 노동자들은 "쌀과 직업을 다오, 공장 폐쇄·해고 절대반대, 휴지 공장을 즉시 재개하라, 실업자에게 직업을 다오, 저물가 정책실시, 8시간 노동제 실시, 최저 임금제 실시, 친일파·민족반역자·모리배를 숙청, 실업보험 실시,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요구를 목청껏 외쳤다. 당시 노동자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며,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한다는 당면 과제에 노동자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할 것을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메이데이 투쟁은 노동자들의 단결과 계급의식을 더욱 고취시켰으며, 바로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투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서울의 경우만 보더라도 당일 결성된 영등포 종연방직 노동조합을 비롯하여 5월8일까지 새로이 결성된 곳이 14개, 준비중인 곳이 5개, 재건된 곳이 1개, 모두 합쳐 21개의 분회가 결성됐다,
이 날의 메이데이 행사는 일제 하 노동운동의 전통이 해방공간에서 활짝 피어나 전국적 노동자 대중 조직으로서 결성된 전평의 치밀한 사전조직에 의해 마련된 것이었다. 1946년 메이데이 투쟁 이후 남한 정세는 급변하기 시작했다.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1946년5월7일)이후 미군정은 전평과 변혁세력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했다.
1947년 메이데이를 맞은 전평은 '해고.폭압.테러 반대, 민주주의적 개혁법령 실시, 임시민주정부수립'을 그 해 메이데이 기본 투쟁목표로 삼았다. 기념대회는 남산에 30만 군중이 모여 성대히 거행하였다. 정세가 급격히 변화된 상황에서 진행된 메이데이 기념행사는 또 다시 일제 식민지기에 전개된 메이데이 투쟁을 재현했다. 청주에서는 노동자, 농민, 학생등 수만 명이 참여하여 15회에 걸친 기습시위를 벌였고, 밤에는 산 위에서 일제히 봉화를 올리며 '메이데이 만세'를 불렀다. 경주, 광양, 장홍, 순천, 담양, 광산 등에서는 메이데이 기념식 참가자와 경찰이 충돌하여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1948년 5월 1일의 메이데이는 남한 단독 선거를 불과 열흘 앞둔 날로서, 전평은 이를 저지하는 투쟁에 총력을 기울이는 가운데, 미군정이 전평 주최의 메이데이 집회를 불허한 것에 대해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 날 대한노총은 단독선거를 다짐하는 메이데이 기념식을 벌였다. 바로 그 날 대한노총은 단독선거지지를 다짐하는 메이데이 기념식을 서울 운동장에서 벌이고 있었다.
1946년, 1947년의 메이데이에 20만, 30만의 노동자들이 모여 단결된 힘을 과시하고 그 위력으로 투쟁할 수 있었던 것은 전국적 노동자 대중 조직인 전평의 조직적 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전평은 메이데이 투쟁을 통해 조직·미조직 대중의 모든 노동자가 '노동자가 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노동해방의 사상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그리고 공통된 요구를 내걸고서 함께 투쟁할 수 있도록 사전 투쟁과 당일의 기념식을 조직함으로써 노동자의 단결을 북돋우고 당면 투쟁을 힘차게 벌여 나갔던 것이다.

4. 빼앗긴 메이데이, 단절의 역사

비틀린 노동절 해방 공간에서 '새나라 건설과 노동해방'을 위해 격렬하게 싸워온 남한의 노동자들은 그 뒤 침묵과 굴종을 강요받게 된다. 1948년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메이데이를 노동절로 바뀌치기 할 때까지 메이데이는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을 계승한 대한노동총연맹(대한노총)이 주관했다. 대한노총은 노동자들의 경축일을 그들끼리의 기념행사로 전락시켰다. 심지어 1956년의 메이데이 기념행사에서는 '노동총본부에서는 이번 선거에서 이승만 박사와 이기붕 선생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노동자의 은인인 이박사를 절대 지지하자'고 하며 이승만을 위한 선거 유세장을 방불케 하는 모습을 연출하였다.
빼앗긴 메이데이 1957년 5월 22일 이승만 대통령은 "메이데이는 공산 괴뢰 도당들이 선전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으니만치 반공하는 우리 대한의 노동자들이 경축할 수 있는 참된 명절이 제정되도록 하라"고 하면서 메이데이 날짜를 변경하도록 대한노총에 지시하였다. 대한노총은 정부와 의논하여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의 결성일인 3월 10일을 기념일로 정하고 이름도 메이데이가 아니라 노동절로 바꾸어 불렀다. 1959년 3월 10일, 변경된 날짜로 처음 치르는 노동절 기념대회가 시작되자 노총은 '이 대통령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하여 이승만에게 절절한 충성을 맹세했다.
'근로자의 날 '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의 구호를 내세우고 노동자를 저임금과 장시간노동에 얽어매어 갔다. 그들에게는 자본가와 대립되는 의미를 지닌 '노동자'라는 용어마저 거슬렸다. 이들은 노동자를 아무 생각 없이 일 잘하는 근로자로 만들어내기 위해 이제 노동자의 경축일도 투쟁 일도 아무 것도 아닌 '노동절'에서 그나마 있던 노동자라는 이름마저 지워버리고 '근로자의 날'로 만들어버렸다. 근로자의 날은 노동자들 자신이 노동자라는 최소한의 자각마저도 허용되지 않는 조건에 놓여 있었음을 웅변해준다.
자본가와 나란히 표창 받는 근로자 정부와 한국노총이 주관하는 '근로자의 날'인 매년 3월 10일이 되면, 일년 365일 가운데 유독 이날 하루만은 노동자들을 '산업역군'이니 '수출전사'니 하며 치켜세우고 '모범 근로자'들을 뽑아 상도 주고 산업시찰도 시킨다. 그리고 같은 자리에서 자본가들에게는 금탑 산업훈장이니 은탑산업훈장을 준다. 이제 근로자의 날은 노동자가 그 동안 정부와 자본가를 위해 군소리 없이 열심히 일했다고 표창 받는 날이고 정부와 자본가와의 협조주의를 고취하는 날이 된 것이다.
메이데이ㅡ다시 찾으려는 시도들 빼앗긴 메이데이를 되찾으려는 노력은 1980년대 중반부터 선진노동자들에 의해 산발적이나마 시도됐다. 1985년 대우자동차투쟁과 구로동맹파업을 중심으로 불붙기 시작한 임금인상투쟁이 마무리되어 갈 무렵인 5월1일, '노동운동탄압 저지투쟁위원회' 주최로 노동자와 학생 500여명이 서울 영등포시장 로터리에 모여 '노동운동탄압중지', '8시간 노동제 확보' 등의 구호를 외치며 메이데이 기념행사를 치렀다. 이어 다음해 5월1일에는 '서울노동운동연합' 주도로, 출근시간에 맞춰 구로공단에서 가두시위를 했으며, 저녁에는 독산동에서 '전국노동자 임금투쟁위원회'주도로 400여 노동자가 메이데이를 기념하는 가두시위를 벌였다. 1988년 5월1일 남한 단독정부수립 이후 처음으로 민주노조의 노동자들이 '세계 노동자의 날 기념 노동삼권쟁취 수도권 노동자대회'를 공개적으로 열었다. 이러한 메이데이 기념투쟁은 노동자들에게 메이데이를 상기시키고 그 의미를 각인시켰지만 성과는 제한적이었다. 투쟁지역과 참여 노동자가 매우 제한된 가운데 치러진 메이데이 투쟁은 그것만으로 빼앗긴 메이데이를 되찾기는 역부족이었다.

5. 다시 찾은 메이데이, 다시 찾은 투쟁의 역사

1989년, 다시 쟁취한 메이데이
- 메이데이, 일천만 노동형제들의 강력한 연대와 전투적 투쟁으로 쟁취하자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성장한 민주노조운동은 단위노조에서 지역업종을 넘어 전국으로 들불처럼 확산되어 '노동법개정 및 임금인상투쟁본부'(이하 투쟁본부)를 결성했다. 1989년, 투쟁본부는 제100회 메이데이를 앞두고 근로자의 날을 '노동자 불명예의 날'로 규정하고 노동운동의 전통을 회복하기 위한 메이데이 쟁취 투쟁을 선언, 5월 1일 총파업도 불사할 것임을 선언했다. 정권은 '5월 총파업위기설'을 관제 언론의 지면에 연일 대서 특필하게 했다. 자본가 단체들도 집단 명의로 '자유 민주 복지 사회의 구현을 위한 우리의 제언'을 발표, 당장 우리 경제가 무너질 듯 엄살과 협박을 늘어놓았다. 이는 1987년 노동자 대파업 투쟁 이후 일시적이나마 노동자에게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독점자본의 공세였다. 이에 더해 정부는 3월 '문익환목사 방북사건'을 구실로 공안정국을 조성, 노동운동 및 민중운동에 대한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5월1일 메이데이를 둘러싸고 총노동과 총자본 사이의 전선이 점차 뚜렷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1980년 메이데이 행사는 1970년대와 1980년대 노동자 투쟁의 성과를 바탕으로 노동자의 정치적 권리를 되찾기 위한 노동운동세력과 이를 저지하여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자본과 권력의 첨예한 계급적 대립을 통해 메이데이의 역사적 의의는 물론 노동운동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5월 1일이 가까워올수록 노동과 자본.정권의 대립이 명백해졌다. 4월29일 메이데이 전야제는 정부의 원천봉쇄 방침에도 불구하고 각 지노협 소속 노동자들이 대회장인 연세대로 몰려왔다. 경찰은 신촌로터리와 신촌역, 연세대에 이르는 모든 도로와 교통을 통제하고 검문검색을 했으며, 미리 들어와 있던 노동자와 학생들은 교문 앞 투쟁을 전개했다. 일부 노동자들은 산을 통해 연세대로 들어왔지만, 그렇지 못한 노동자들은 서강대(약 600명), 동국대(약 2,000명), 한양대(약 300명)로 흩어져 결합하여, 투쟁은 서울 전역으로 확산됐다. 메이데이 전야제는 경찰의 원천봉쇄로 동국대, 서강대, 연세대 등 3개 대학으로 분산되어 진행했다. 전체 참가 인원은 1만여 명이 넘었다. 노동자들이 전야제를 진행하는 동안에도 각 대학 앞에는 경찰부대가 철저히 봉쇄하고 있었다.
4월 30일 본 대회는 각 학교로 흩어진 노동자, 학생들의 '교문돌파투쟁'으로 시작됐다. 연세대에서는 낮 12시부터 오후 5시까지, 서강대에서는 낮 12시부터 오후 2시 30분까지 교문돌파 투쟁이 이어졌다. 한양대, 동국대 등지에 흩어져 있던 노동자, 학생들은 아현동과 서울역, 신세계백화점 앞에서 연세대 봉쇄가 풀린 오후 7시 30분까지 가두시위 투쟁을 계속하다가, 오후 10시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풀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 약 2,500여 명이 연행되어, 전날 3,000여 명의 연행에 이어 총 5,500여 명이 연행됐다. 부상자도 많았다. 연세대에서는 104명이 다쳤으며, 부상자 중 봉합수술을 한 사람이 30명에 이르렀다. 아현동 투쟁에서는 2명이 머리에 직격탄을 맞았고, 그 중 한 명은 머리를 다쳤다. 연세대 뒷산으로 들어가려던 노동자는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머리와 이마를 맞고 중상을 입었으며, 서강대에서도 서울대생이 뇌 손상을 입었다. 파악하지 못한 부상자도 많았다.
1989년 메이데이 투쟁은 역대 독재정권에게 빼앗긴 메이데이를 42년 만에 투쟁을 통해 대중적이고 공개적인 '노동자 투쟁의 날'을 되찾았다. 이 날의 투쟁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등장한 새로운 자주적 노동조합운동과 1988년 노동악법 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 연대투쟁의 성과를 이어받아 민주적 노동조합운동의 전국적인 구심을 건설하고, 노동자가 세상의 주인임을 선언하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노태우 정권의 노동운동탄압에 맞서 1989년 상반기 투쟁을 집약하여 노동자들이 사회의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였음을 보여 주었다. 노동자 계급을 중심으로 각계각층 민중들이 연대하여 '전 세계 노동자의 연대, 민주와 평등, 불굴의 투쟁'이라는 메이데이의 투쟁의 역사를 되찾은 것이다.

전노협시기- 노동절 기념 대회

투쟁으로 되찾은 메이데이를 지속시키려는 노동자투쟁은 계속 이어졌다. 1989년 대회 이후 전노협 시기에도 해마다 세계 메이데이 기념대회를 개최하여, 그 정신을 계승하고 노동자의 생활과 권리를 개선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했다. 1990년에는 경찰의 원천봉쇄 속에서도 서울대에서 메이데이 행사를 진행했으며, 이 날의 투쟁은 34만 명이 참여하는 5월 총파업투쟁으로 발전하였다. 노동자들의 계속되는 투쟁 속에 마침내 정부는 1994년 '근로자의 날에 관한 법률'을 확정 공포하여 5월 1일을 '근로자의 날'로 정하였다. 이제 5월 1일은 공식적으로 유급휴일로 지정되고 노동자의 축제의 날이 되었다. 물론 정부와 자본은 날짜만 바꾸어 5월 1일을 '근로자의 날'로 정하고, 메이데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았다. 여기에는 단순히 5월 1일을 합법화하여 노동자들의 투쟁열기를 잠재우려는 의도가 있다. 그럼에도 5월 1일의 합법화는 지금까지 빼앗긴 메이데이를 되찾기 위해 노력해온 노동자들의 투쟁의 결과였다. 다음에 매 년 진행된 노동절 기념대회에 대해 살펴본다.
1990년 노동절 대회-' 해체! 민자당, 퇴진! 노태우', '사수! 전노협, 해체! 경단협" 자본과 정권의 전노협 와해와 민주노조 말살정책에 맞서 투쟁해온 전노협은 1990년 노동절대회를, 상반기 임금인상 투쟁과 노동운동탄압 분쇄투쟁을 총결집 시켜 노동운동탄압 국면을 대중적으로 돌파해나가는 계기로 삼으며, 전노협을 중심으로 업종, 대공장 노조 등 민주노조 진영의 광범한 동참을 만들기 위해 메이데이 공동주최를 제안하여 노동자의 단결된 힘을 보이려했다. 또한 전노협은 정부에 의{{제1절 세계노동절 101주년 기념대회
}}{{ 제4장 1990년 주요 대회와 행사
}}해 강제되어온 3월 10일 '근로자의 날을 폐기'하고 5월 1일을 '노동절'로 공식 발표하였으며, 7개 대공장 노동조합에서도 전노협의 방침을 전적으로 지지하며 이날 작업거부 방침을 밝혔다. 이처럼 전노협 소속 조합원과 더불어 업종, 대공장 노조, 더 나아가 각계각층의 민중들이 노동절 투쟁에 적극 동참할 것을 밝혀, 전노협건설 이후 계속된 탄압을 저지하고 분위기를 반전시키려 하였다.
5월1일, 경찰의 원천 봉쇄에도 불구하고 서울대에서 3000여 노동자가 참가한 가운데 노동절 대회가 개최된 것을 비롯하여, 전국 15개 지역, 250여 노조, 10여만 명의 노동자가 참여하여 노동절 기념식이 열렸다. 전국70여 개 대학에서 이날 오후 '노동절 기념식 및 민중운동탄압분쇄 5월 투쟁선포식'을 갖고 현대중공업노조와 전노협에 대한 적극 지원을 선언, 노학연대투쟁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노동자들은 집회이후 거리로 나오는 것을 제지하는 경찰에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 날 경기도 부천에서는 부천경찰서 춘의 파출소에 돌을 던지는 2백여 명의 노동자들에게 경찰관 2명이 카빈소총탄 5발과 권총탄 1발을 발사, 시위대의 격렬한 투쟁을 총으로 위협하기도 했다. 1990년의 노동절 투쟁은 KBS 노조의 파업, 현대 중공업 골리앗 투쟁과 맞물려 5월 1일부터 4일까지 292개 사업장에서 연인원 34만 명이 참여하는 5월 총파업 투쟁으로 발전해 갔다.
1991년 세계노동절 102주년 기념대회- '폭력정권 살인정권 타도하자' 1991년 노동절대회는 '임금인상과 물가폭등저지 및 노동기본권 수호를 위한 전국노조 공동투쟁본부'가 중심이 되어 추진되었다. 노동절 기념대회는 정권의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사건'을 계기로 전국 14개 지역에서 노동자, 학생, 시민 등 10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격렬한 투쟁 속에서 진행되었다. 수도권 대회는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노동자, 학생 등 3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원진레이온 직업병 살인 및 고 강경대열사 폭력 살인 규탄대회'와 노동절 기념대회를 잇달아 갖고 '노태우정권 퇴진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집회 참석 노동자들은 오후 7시경 대회를 마친 뒤 '폭력정권 살인정권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서울시청까지 행진을 벌이려 했으나, 경찰이 물대포와 다연발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자,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교문을 사이에 두고 전투를 벌였다. 노동자 4천여 명은 신촌로터리의 5개 도로를 점거해 밤 9시까지 격렬한 화염병시위를 벌였다. 10시경 명동성당 일대와 종로2가에서 수백 명이 산발적인 기습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1991년 노동절 투쟁은 '5월9일 총파업'과 강경대 열사, 박창수 열사의 죽음을 계기로 촉발된 5·6월 대투쟁으로 발전해 갔다.
1992년 노동절 대회 - '민주노조 총단결로 노동해방 앞당기자!' 전노협은 1992년 세계노동절 제103주년 기념대회를 맞아 '전국노동자의 총단결 투쟁을 통해 총액임금제를 분쇄하고 임금인상투쟁을 승리로 이끈다'고 선언했다. 이는 정권과 자본의 민주노조에 대한 법·제도적 탄압을 투쟁으로 돌파하려는 노동자의 의지표현이었다. 특히 정권과 자본이 ILO 등 국제기구로부터 압력을 받는 상황을 활용하여 민주노조 진영은 국제수준에 맞는 노동법의 개정을 전면적으로 요구했다. 또한 투쟁의 대중적 성과를 수렴하고 제조업과 사무직 노동자간의 연대를 강화하며 지역공대위구성을 통해 민주노조진영의 조직적 단결을 강화하려 했다. 이 해 노동절 대회는 한양대에서 2만 여 노동자가 참가한 가운데 개최되었고, 전국의 13개 지역에서 기념 대회가 개최됐다. 노동자들은 '전국노동자 총단결로 총액임금제 분쇄하자!', '노동악법 철폐하고 자주적 단결권 쟁취하자!','ILO기본조약 비준하고 노동악법 철폐하라!', '민주노조 총단결로 노동해방 앞당기자!'를 소리 높여 외쳤다. 1992년 노동절대회는 노동자에게 자신감을 주고, ILO공대위를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1993년 노동절 대회- '임금억제 정책 철회하라' 1993년 연세대에서 3만여 명의 노동자가 참가하여 기념대회를 개최하고,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까지 가두행진을 벌였다. 전국적으로 5만여 명의 노동자가 참가한 가운데 노동절 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해의 노동절 대회는 전노협, 업종회, 현총련등 대기업과 공동으로 준비했다. 수도권 세계노동절 기념대회는 전노협, 업종회의, 대노협, 현총련 경인지부를 중심으로 개최하였고, 전노협 산하 각 지노협은 지역별로 사전행사를 갖고 조직적으로 대회에 참여하였다. 서노협, 경기남부, 인노협 등은 각 지역별로 스티커, 피켓, 머리띠를 준비하고 단위노조까지 깃발을 들고 참여하였고 서울과 경기를 중심으로 선전·선동조를 구성하여 운영하였다. 영남지역은 착실한 사전준비로 계속된 악천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5,000여 명의 노동자가 참여하여 결의를 다졌으며 중부호남권도 각 지역별로 기념식을 가졌다. 특히 천안지역은 지역 최초로 노동절 기념집회를 개최하는 등 전국적으로 노동절 기념대회를 통해 투쟁결의를 다졌다.
1994년 노동절대회 - '어용노총 해체하고 민주노총 건설하자' 1994년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공동대표 양규헌씨등 4명)가 주최한 「노동절」 기념대회에는 전국적으로 노동자, 학생 등 2만여 명이 참가, 민주노조운동의 지속적 전개를 결의한 뒤 가두행진을 벌였다. 서울대회 참가자들은 오후 4시경 대회를 마치고 동국대를 떠나 퇴계로와 명동 종로를 거쳐 동숭동 대학로에 집결, '노총경총 합의 분쇄 94임투 승리하자!', '어용노총 해체하고 민주노총 건설하자'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밤 8시경까지 집회를 가졌다.
1994년 제104주년 세계노동절 기념대회는 36년 만에 합법적으로 치르는 노동절 대회로서 민주노조 진영이 전체 노동자의 대표성과 정통성을 확인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 날은 민주노조 진영은 노동절의 역사적 전통을 잇는 한국의 유일한 노동조합 조직임을 확인하였으며, 이의 연장선상에서 '민주노총 건설'의 과제를 대중적으로 확인했다는 점에서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1994년 임금인상 투쟁에 대한 구체적이고 대중적인 결의를 모아내고, 민주노총 건설의 구체상을 정립하는 과제를 남겼다.
1995년 민주노총 원년 노동절 기념대회 1995년 5월1일 민주노총 준비위원회는 서울대 운동장에서 노동자 2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민주노총 원년 노동절 기념대회'를 갖고 '지방선거 적극참여, 노동악법 어기기 운동 전개, 6월 중순 쟁의돌입 시기 집중' 등을 결의했다. 이 날 집회를 마친 노동자, 학생들은 오후 4시께 부터 3시간 동안 보라매 공원까지 3㎞ 구간에서 평화행진을 벌였다

6. 민주노총의 노동절 기념대회

1996∼1997년 노동절 대회 1996년 5월 1일 세계노동절 106주년을 맞아 서울, 부산, 대전, 광주, 전주, 청주 등 전국 6개 도시에서 동시에 노동절 기념대회를 열고 ' 96년 임단투 승리와 노동법개정, 민주노총 합법성 쟁취, 사회개혁을 위한 투쟁'을 선포하였다. 서울은 보라매 공원에서 수도권 중앙대회를 마친 뒤 여의도 광장까지 행진을 벌이며 선전물을 배포했다.
1997년 노동절 기념대회는 서울을 비롯한 13개 도시에서 10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97 임단투승리, 재벌경제타파 부정부패 척결, 사회개혁 쟁취, 교사·공무원 단결권쟁취'를 다짐하였다. 장충공원에서 2만여 명의 조합원이 서울중앙대회를 마치고, 종묘로 행진하려 했으나 경찰은 페퍼포그와 체류탄을 쏘아대며 참가자들을 구타하고 연행하기도 했다.
1998년∼2003년 노동절 대회 - '구조조정· 정리해고 반대투쟁' 1998년 5월1일, 민주노총은 '제108주년 세계노동절 기념대회'를 종묘공원에서 열었다. 경찰 34개 중대, 4천여 명의 병력이 행사장 주변을 에워 싼 속에서, 노동자 3만여 명과 1만여 명에 이르는 학생, 시민들은 '고용안정과 민중생존권 사수'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노동절 집회가 채 끝나기도 전에 금속노동자들이 모여있던 종로3가에 최류탄이 터지고 싸움이 시작되었다. 가슴에 분노를 담아 집회에 참석했던 노동자들은 이날 최류탄 가스에도 물러서지 않고 '정리해고·파견제 철폐, 고용유지 보장, 부당노동행위 척결, 공공부문 일방적 구조조정 중단, 실업자 생활보장, 재벌개혁, IMF재협상'을 요구하였다. 1998년 들어 최대 규모의 집회로서, 참석자들은 돌을 던지고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등 신정부 출범 후 가장 과격한 시위를 벌였다. 집회를 마친 뒤 명동성당까지 도보행진을 벌이려던 노조원들은 경찰과의 대치로 행진이 무산되자 광화문으로 진출을 시도, 종로부터 동대문까지 차도를 완전 점거한 채 오후 늦게까지 경찰과 투석전을 계속했다. 이 과정에서 참석자 10여명 등이 부상, 병원으로 옮겨졌다.
1999년 5월 1일 '세계노동절 109주년 총력투쟁 승리를 위한 전국노동자대회'가 민주노총 소속 5만여 명의 노동자, 시민, 학생이 참여한 속에서 열렸다. 노동자들은 '구조조정·정리해고 중단'을 외치며 서울역에서 대회를 치뤘다. 대회가 끝난 후 명동성당으로 이어진 행진에서 자리가 없어 성당에 들어오지 못한 대오들이 신세계백화점, 퇴계로 등 곳곳에서 마무리집회를 가졌다.
2000년 4월29일 서울역의 노동자 2만 여명의 참여를 비롯해 전국 9개 도시에서 6만여 명의 조합원이 모인 가운데 '세계 노동절 110주년 기념 대정부 교섭 촉구 및 총파업 투쟁 결의 노동자대회'가 열렸다. 민주노총은 대회에서 '주5일 근무제 실시, 자동차산업 해외매각 중단과 협동조합 강제 통합 중단, 임금 15.2% 인상과 외환위기 동안 후퇴시킨 단체협약 원상회복, 비정규직 노동자 차별 철폐와 정규직 전환, 조세개혁과 사회보장 예산 GDP 기준 10% 확보'를 촉구하고 이를 쟁취하기 위해 '5월31일 총파업에 돌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집회에 이어 1만 5천여 명의 노동자, 학생 등 대회 참가자들은 명동을 거쳐 종로2가까지 행진한 뒤 보신각 앞 도로를 점거하고 '대정부 교섭 촉구 결의대회'를 열었다.
이와 별도로 5월1일 종묘공원에서는 '110주년 노동절 민중연대 투쟁연대' 집회가 열렸다. 이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고려대에 모였던 대학생과 노동자 1300여 명은 오후 7시40분경 고대 앞에서 대치하고 있던 경찰을 향해 화염병 600여 개를 던지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는 고려대에서 출발한 800여명 외에 종묘공원에서 집회 중이던 500여 명의 학생과 노동자까지 가담하면서 숫자가 불어나 밤 9시까지 시위대가 고대앞 도로 곳곳에서 경찰과 대치했다. 시위현장에서 화염병이 등장한 것은 지난해 4월26일 서울대에서 열린 서울지하철파업 농성이래 1년여 만이다.
2001∼2003년 문화행사, 평화 행진의 노동절 기념대회 2001년 5월1일 '노동절 기념 노동자대회'가 대학로에서 3만여 명의 노동자, 학생이 모여 진행됐다. 이날의 행사는 여성노동자, 장애인노동자, 비정규직노동자, 외국인노동자 대표자들의 투쟁선언식으로 이어졌다. 이 날 대회는 "신자유주의 반대, 김대중 퇴진"투쟁방침을 선언했다. 대회 뒤에 노동자들은 휠체어 장애인과 레미콘차량을 앞세운 채 종로에서 가두행진을 벌였다.
2002년 5월1일 '세계 노동절 112돌'을 맞아 민주노총은 여의도에서 1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한 속에서 행사를 했다. 참석자들은 '중소 영세 비정규 노동자의 희생 없는 주 5일 근무 쟁취, 공무원노조 인정, 국가기간산업 매각저지, 비정규직 차별철폐 및 정규직화' 등을 요구하며 서울 도심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고 영등포역 광장까지 행진하였다. 전국 10개 지역에서 5만여 명이 참여하는 기념행사를 가졌다.
2003년5월1일 1시40분 서울 동숭동 대학로에 노동자 2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민주노총의 노동절 본 대회가 풍물패의 공연을 시작으로 열렸다. 이 행사에도 과격한 구호 대신 노래공연 등 문화적인 요소가 많았다. 기념식이 끝난 뒤 시청 앞까지 거리 행진이 시작됐다. 이날 집회에는 집회 신고를 한 주최측에 자율적으로 질서 유지를 맡긴다는 경찰의 방침이 처음으로 적용됐다. '허락된 자율' 속에 평화로운 행진이었다.

7. 메이데이, 투쟁의 역사- 투쟁으로 기억하기

우리나라 메이데이의 역사는 폭압적 탄압 속에서도 선배 노동자들의 피 어린 투쟁의 과정이었다. 매 해 기념되는 노동절 기념대회의 여러 모습은 그 당시 운동 상황을 보여주기도 한다. 일제 파쇼적 탄압 속에서 진행된 메이데이는 강연회, 격문배포, 파업, 시위 등으로 전개되면서 민족해방운동으로 위치하기도 하고, 해방공간기 분출하는 노동자 투쟁의 열기를 보듬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으로 모아지기도 했다. 또한, 근 40여 년 넘게 메이데이 기념일을 빼앗기기도 했다. 역사 속에서 메이데이를 빼앗기는 일은 노동운동의 전통과 노동자 계급의식을 빼앗기는 일임을 경험하였다. 거꾸로 메이데이를 되찾으려는 투쟁의 전개는 노동자가 스스로 노동자임을 자각하고 계급적 연대를 만들어 가는 과정임도 알 수 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민주노조운동이 일반화되고 전국적 조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되찾은 1989년 메이데이 기념대회가, 1990년대 전반기 정권의 온갖 탄압에서 투쟁으로 사수해온 '메이데이, 그 투쟁의 역사'가, 2000년대 들어 점차 문화행사로, 평화집회로, 일회성 집회로 변해가고 있다. 역사는 기억하고 투쟁으로 만들어 가는 자의 것이라고. 2004년 노동절 기념대회는 투쟁의 역사를 투쟁으로 기억하여, '새로운 투쟁의 기억'으로 만들어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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