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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안에 길들여진 ‘보수성’과 ‘노예근성’을 타파하자! (조돈희)

제목을 [내안에 길들여진 ‘보수성’과 ‘노예근성’을 타파하자!] 라고 붙인 것은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울산노동뉴스 김성민 기자가 ‘기획/특집’에 [연말특집]으로 쓴 <2006년, 자발적 연대운동의 가능성을 확인하다.>는 글에서 평가하고 있듯이 2006년에는 자발적 연대운동의 맹아들이 곳곳에서 형성되었다. 사실 이러한 운동을 위해 헌신한 동지가 김성민 기자임을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올 한해 울산지역에서는 그 ‘자발성’이란 말을 화두로 그동안 운동의 후퇴와 침체에 대한 이유를 평론하는 동지들을 유독히 많이 보기도 했다.

그 결과 울산에서 그나마 여러 형태의 자발적 연대운동들이 형성된 성과일 것이다.

2002년 9월에, 1990년대 중반까지 ‘잘나가던’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이 자본의 손아귀로 넘어갔다. 가뜩이나 조직력이 와해된 상황에서 민주노조 집행간부의 비리사건은 자본의 공격에 결정적 빌미가 되었던 것이다.

위와 같은 2002년 현대중공업 노조간부의 비리사건의 전후로 최근 몇 년간 노조내부 비리사건으로 유난히 몸살을 많이 앓으면서 각 노조들은 제각각이 혁신적 대안을 제시하기도 하고 내부로부터의 혁신선언과 실천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 더 넓게는 ‘노동운동의 위기’에 대한 논의와 대안을 모색하는 활동들이 여기저기서 활발히 전개되기도 했다.

‘자발성’이란 말이 화두가 되어 활동가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도 그러한 흐름을 타게 된 것 이기도 하다.

나 또한 수년전부터 노동조합의 조직력이 초기에 비해 바닥을 치고 있는 이유에 대해 여러 각도로 생각해 보면서 나는 그것의 결론을 ‘운동성’과 ‘조직운영원리’에서 가장 큰 문제가 있었음을 발견하기에 이르럿다. 그것은 다름 아닌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노동운동의 위기’를 진단하고 그 대안을 제출하는 수많은 견해들에서 이 민주주의 문제는 빠지질 않았다.

‘자발성’은 곧 민주주의 문제이며, ‘간접’과 ‘형식’ ‘절차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직접’민주주의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김성민 기자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2006년 울산에서는 자발적 연대운동들이 다양한 형태로 진행되면서 관료적 조합주의운동에 대한 대안적 모색들이 이뤄졌다. 문화행사의 형태를 띄기도 하고, 연대투쟁의 형태를 띄기도 하고, 모금운동의 형태를 띄기도 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된 이런 시도들은 ‘대중의 직접적인 자기운동’이라는 점에서 평의회운동이나 코뮌운동에 대한 구체적 상을 만들기도 했다.(울산노동뉴스 김성민 글)

여기서 ‘대중의 직접적인 자기운동’이라고 표현한 이 말을 다시하면 ‘대중의 직접정치’라는점에서 ‘대중이 자기의 결정권을 대의제도에 따라 위임받은 자에게 위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자신의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해나가는 과정’ 아니겠는가?

그렇다! 우리는 ‘새로운 모색’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나는 그 ‘새로운 모색’이 ‘새로운 것이 아님’을 알았다. 왜냐하면 흘러간 역사에서 나타났던 행동과 실천들을 다시 갈무리하여 현재에 도입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안에 길들여진 ‘보수성’과 ‘노예근성’을 타파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안에 있는 보수성이란, ‘별로 좋지 않은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또는 ‘좋지 않은 굳어져 진보 변화하지 못하는 관성’이며 나의 굳어진 입과 머리와 몸이다.

특히, 나는 조직운영원리에서도 우리들의 구태의연한 엄숙주의와 보수주의를 깨야한다고 생각한다.

별도의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그러한 보수적 ‘운동성’과 ‘조직운영원리’는 대중을 대상화 시켜온 동시 그들을 잘 길들여진 또 다른 노예로 만들었거나 간부 활동가 층을 수동적으로 길들여왔으며 스스로 길들여져 왔다. 그 결과 시키는 것이나 하고, 알아서 하는 일들이 없는 ‘자발성’이 거세된 조직, 대중, 활동가들로 가득하게 되었다. 이제 아래로부터의 투쟁과 실천 행동은 없다. 결정기관에서 결정이 되어도 아래에서 집행이 되질 않는다. 아래위가 분리되어 따로 놀거나 우리가 그렇게 구태의연해 하는 동안 모든 조직력이 자본에 의해 와해되어 그 힘 있던 대중조직들 대부분이 힘을 잃게 되었다.

민주노조운동이 지키고자하는 것은 바로 의결과 집행이 통일되는 수평적 조직운영원리이다!

중앙집권주의와 다소 논란의 소지가 있겠으나 이 조직운영원리는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기본 정신이다. 가장 아래로부터의 견해를 존중하는 총회와 대중들에 의해 직접선출 되는 대의원들과 대의원대회는 의결과 집행을 통일시키고자 했던 민주노조운동의 가장 핵심기관이며 정신이다. 그러나 이 정신과 의미가 형식적 민주주의로 왜곡되어왔다. 총회는 민주를 위장하기위해서 선거, 임단협 합의안 찬반투표, 쟁의행위 찬반투표 하는 기구로만 머물게 하고, 대의원대회는 마치 자본주의 국가의 국회처럼 대의제 기관으로만 축소되는 등 조직의 실질적 주체를 대상화하고 그들을 비주체로 전락시키는 오류를 범해왔다.

소위 간접 민주주의(대의제)와 절차적 형식적 민주주의에만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민주노조운동 초기를 기억해 보라! 그때도 과연 그러했는가? 형식과 절차에만 치중하기보다는 대중과 직접토론하면서 집행의 근거를 대중적 토론속에서 찾아냈다. 대안이 안보일 때 “현장조합원들과 대화를 해라” 라는 우리들이 자주했던 이야기들을 기억해 보자.

그때 내가 과연 대상화 되어있었던가? 내가 간부 활동가가 아니었던 시절 나는 대상화되지 않았었고 나는 말 하고 살았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직접 행동에 앞장서고 모든 일들에 ‘자발적’으로 함께 했다.

부끄러워서 나서지 못하거나 말하지 못하거나 자본의 통제로 탄압이 두려워서 나서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세월이 흘러 민주노조운동과 노동운동의 경험도 많이 쌓이고 간부 활동가들도 많이 생겼음에도 우리 노동자들의 힘은 과거(대략 1987년 이후 10여 년간)보다 더 약해졌다. 자본과 정권의 공세에 밀리고 있기 때문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아직도 노조가 마음만 먹으면 파업이 가능한 사업장의 노조들을 보면 왜 그런지 알 수 있다. 그것은 그나마 아직 초기 민주노조운동의 정신과 기풍이 유지되는 측면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모색은 진정 새로움이 아니라 후퇴가 아닌 ‘과거로의 회귀’, 곧 ‘처음처럼’ 하기 위한 반성과 실천일 뿐이다.

현중노연 소개


현대중공업노동자운동연대(현중노연)은 지난 5월에 준비모임을 거쳐 8월29에 창립총회를 거친 ‘현대중공업 노동운동 살리기’를 중심에 둔 운동단체이다.

현중노연은 ‘노동운동의 위기’라는 미명하에 제출되는 사회적 연대기금, 사회적노동운동등 사회적합의주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면서 ‘전진하던 과거로의 회귀’를 위하여 ‘현장 중심성’의 근거한 노동운동과 ‘의결과 집행이 통일되는 수평적 조직운영원리’를 도입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총회-운영위원회-대표 체계로 조직골간을 구성하되, 운영위원회는 자발적 참여의사에 의해 회원이면 누구나 참여가 가능하도록 하며, 정회원과 후원회원의 자격과 권한의 차별을 두지 않는다. 활동의 목적달성을 위해 획일화된 규율보다는 자율성에 바탕을 두어 의결되는 사업에 따라 실행위원회가 구성되며, 별도의 상설적 위원회들을 자발적으로 구성하도록 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는 편집위원회와 상근자회의가 구성되어 있다.

회원의 구성은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을 전체구성에서 비율을 높이도록 목표하고 있으며, 전국과 지역에서도 많은 동지들이 정회원과 후원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참여의사에 따라 회원가입이 가능하며, 형편에 따라 회비를 납부하며, 납부 실적에 따라 자격과 권한이 차별받지 않는다. 회비를 못내도 동등한 자격을 부여한다는 얘기다.

현재 회원들의 구성은 다양하다. 현중 정규직 비정규직 해고자 지역과 전국에서 애정과 관심을 기울여 참여하고 있는 다양한 동지들이 함께 하고 있다.

따라서 조직구성은 새롭지만 조직운영원리는 최대한 자발성에 기초하며 권위적이고 관료적 요소와 기풍은 제거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잘 안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무너진 현장의 희망을 여기서 싹틔우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내안에 길들여진 ‘보수성’과 시키면 그것만 하는 ‘노예근성’을 버리면서 출발하고자 하는 이 운동의 성패의 책임은 순전히 이를 시도하는 우리에게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울산에서 올 한해 화두로 올라왔고, 이를 다양한 공간과 부문과 지역에서 실천하면서 그 성공의 가능성을 확인했듯이 우리의 운동은 성공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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