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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가수 우창수 이야기

활동가들은 아직도 배고픔과 활동 전망 등으로 힘겨움 속에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다. 더군다나 노래를 부르며 문화운동을 하는 경우는 배고픔은 더 심각하고, 민중운동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 등의 문제로 더 고민스럽다.

그런 속에서도 우직한 체구만큼이나 우직하게 20년 동안 노동자의 삶을 노래하고 있는 우창수 동지를 만났다. 끝임 없이 노동자와 함께 호흡하며 삶의 희망을 노래하는 우창수 동지는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대안적 운동흐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어릴 적 교사생활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을 돌아다녀야 했던 우창수에게 고향이라는 것과 어릴 적 추억이라는 것은 특별히 없었다. 3~4년 마다 옮겨 다녀야 했던 어릴 적 생활은 외로움의 연속이었다. 17살 때 아버지가 퇴직을 하시면서 부산에 정착하게 된 것이 부산을 삶의 터전으로 삼기 시작한 출발이었다.

 

86년 부산외대에 입학한 우창수는 통기타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음악과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기 시작한다. 대학에 통기타와 젊음의 낭만이 있었을 시절 우창수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형에게 악기를 배우기 시작한 실력으로 100여 명이 몰려 4:1의 경쟁 속에 통기타동아리에 들어간다. 그러나 통기타의 낭만은 광주항쟁를 알게 되면서 새로운 열정으로 변하게 된다.

 

“광주항쟁 사진이나 이런 것을 보면서 ‘내 옆에 있는 친구나 가족이 죽었다면’ ‘남녀간의 사랑노래만 부르고 있는 것이 도대체’ 이런 생각을 했어요. 술 먹고 대중가용책 태우기도 하면서 운동권이 됐죠.”

 

그 이후 87년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의 한복판에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학업과는 멀어지고 노래와 학생운동에 전념하면서 대학기간을 보내게 된다. 정상적인 졸업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졸업을 하게 된 것은 학교측의 적극적 배려(?)였다.

 

“그 당시의 가치로는 학교 졸업이 아무 상관이 없었는데, 졸업하는 순간에 영장이 나오잖아요. 그래서 5학년 1학기까지 졸업을 하지 않고 있으면서 학자특위 위원을 하면서 싸웠어요. 그런데 학교에서 나를 졸업 시키려고 수업도 안 들어가고 시험도 안 봤는데 학점을 다 줘버린 거예요. 나는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았는데 학교한테 기습을 당해버린 거죠...

그래서 내가 생전 처음 보는 교사를 찾아가서 ‘교수님, 왜 제가 교수님 수업도 한 번도 안 들어가고 시험도 안쳤는데 학점을 주십니까? 이건 잘못된 거 아닙니까? F 주십시오’ 그러면 교수들이 막 당황하는 거죠. 그렇게 세 군데를 교수들 찾아다니까 학생과 직원들이 ‘우창수 잡아라’ 그러면서 풀린 거예요. 그래서 숙직실에서 커피를 주면서 ‘도대체 너의 요구가 뭐냐’ ‘니가 학점을 다 받아라. 그래야 5학년을 다니더라도 기성회비만 내고 다닐 수 있다’ ‘우리가 잘못했다. 니네과 교수 얼굴 한번 봐줘라. 니가 이러고 다니면 뭐가 되냐’ 그랬어요. 그래서 1년을 학교에 적을 두고 일터에 들어가서 활동을 하고 그랬어요. 가끔씩 학교에서 ‘너 졸업할래?’라고 전화가 오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졸업하겠다고 해서 평일날 조용히 학과 사무실에 와서 졸업장만 받아서 엄마한테 줬죠.”

 

당시 학생운동 시절 선배들은 학생운동 이후 조직운동을 요구했지만 우창수는 완강하게 문화운동을 하겠다며 놀이패 일터를 찾게 된다.

 

“그때는 내가 가수를 하겠다, 곡을 쓰겠다 이런 거 보다는... 민중가요를 노동조합 막 생긴 곳이나 사람들에게 노래를 가르쳐주고 하는 것을 해보고 싶었어요.”

 

노동자대투쟁 속에서 87년에 창단된 일터는 지금까지도 부산에서 극단활동을 하면서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줬던 문화단체이다. 현장문화패 강습과 투쟁현장에서의 공연 등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면서 노동자의 삶을 새롭게 이해하게 됐다.

 

“책으로 알고 있었던 노동자와 현장의 노동자는 많이 틀리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생활을 보면 저따위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다시 공부한 거죠.”

 

91년 군입대를 하고 기무대 감시를 받는 속에서도 오히려 군대생활을 더 열심히 했기 때문에 큰 고생 없이 군생활을 마치게 됐다. 제대하자마자 다시 일터로 복귀해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에 결합하게 되지만 90년대 중반으로 접어드는 상황에서 일터는 논쟁 속에 빠져든다.

 

“일터에서 ‘우리가 노동운동가냐, 문화운동가냐’하는 논쟁이 생겼어요. 그 당시 일터는 초반에는 굉장히 건강했어요. 노동자들이 연극수업을 받았거나 그런 사람들이 아닌데, 그냥 사장 욕만 해도 사람들이 좋아했어요. 그냥 현장에서 이런 얘기를 하면 좋겠다 싶어서 없는 머리 짜내서 만들었어요. ‘흩어지면 죽는다’ 이런 것은 현장공연이 100회가 넘었으니까... 서울의 유사한 극단들은 극단활동을 접고 현장으로 들어가는 극단들도 있었어요. 이런 현장지향에 대한 문제들도 있었어요. 그러면서 우리는 예술운동 하는 사람들이다라고 정리가 됐어요.

그런데 그 지점에서 방향에 대해서 의견들이 달라요. 현장을 지향하면서 대중문예운동과 전업운동이 같이 가야하는 것과 예술운동으로서 여러 가지 열려진 공간에 서야한다는 것이 방향이 달랐어요.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고 그래서 나는 나왔죠.

문예운동의 궁극적 목표가 대중의 문화예술활동을 스스로 하게 만드는 것이어서 문예교육이나 이런 것이 굉장히 중요한 문젠데, 이런 고민으로 가야하는데... 먹고 살아야 하는 문제를 가령 문예진흥기금이나 권력 있는 단체에 대한 기획 등에 의존하는 것이 싫었어요.”

 

당시 민중운동진영 전체적으로 노선논쟁이 매우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었고, 문화운동진영 역시 그와 맞물려 논쟁에 치열하던 시기였다. 그나마 부산에서 현장과 결합된 활동에 치중하던 일터는 논쟁이 덜한 편이기는 하지만 전국적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여러 가지 현실적 문제에 대한 접근방식 등으로 갈등이 깊어진 것이다.

그런 논쟁에 지치고 사람들에게 치이면서 우창수는 ‘집단이 갖고 있는 개인에 대한 폭력’을 몸서리치게 느끼게 된다. 그래서 97년 일터를 나오게 된다.

 

“일터를 나오고 2년이 힘들었어요. 나이도 서른쯤 이었고, 단체도 나와서 혼자로 남겨지고... 그래서 하루에도 열 번씩 노래를 때려치울 생각을 했어요. 취직도 해볼까 생각도 해보고... 내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했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서른 고비에서 이러다가 서른세 살 되서 ‘그냥 이렇게 살자’고 정리를 하니까 마음이 편해졌어요.”

 

그럴수록 더욱 노래를 매개로 현장과 노동자의 삶에 호흡하려고 하면서 본인은 점점 좌파가 됐고 소수가 됐다고 평가한다. 역시 현장공연과 풍물패 노래패 강습 등을 하는 한편 노래를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혼자서 작곡공부를 하기도 했다. 판소리 공부까지 할 정도로 나름대로 치열한 모색의 기간이었다.

그런 치열한 모색의 결과로 지역문예운동을 확대하기 위한 방안으로 ‘노래창작모임’을 만들고, 또 한편으로는 현장문예운동과 지역연대투쟁을 결합하기 위해 ‘부산노동문화위원회’를 구성해 활발한 활동을 벌이게 된다. 노래창작모임은 노래에 관심 있는 학생이나 직장인들을 중심으로 창작활동을 하기 위해 만든 것이고, 노동문화위원회는 현장 문화활동가들이 자연스럽게 모인 연대조직이었다.

 

“노래창작모임은 노래하고 품평회를 하죠. 곡을 써온 것을 갖고 품평회를 하는데, 처음에는 어설퍼요. 곡 쓰는 것도 숙달되고 넘어서는 게 있어요. 몇 곡 중에 잘 짓는 거는 한 번은 할 수 있는데, 계속 그렇게는 못하거든요. 그럴라면은 자기 재주가 있어야 되요. 솜씨가 있을라면은 공부도 하고 노래도 많이 지어보면서 쌓여야 되거든요. 고만고만한 노래는 나오는데 어설프죠. 이런 것에 대한 토론을 하면서 서로 얘기를 해요. 그렇다고 운동만 갖고 얘기한 것이 아니었어요. 그것을 2년 정도하니까 작품들이 나오데요.

골방샌님처럼 앉아서 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한 게, 내가 조금 과도했는데, 문화꼬문 소금꽃으로 전환을 했어요. 노래도 하고 영상도 하고 지역의 문화연대체라는 개념으로 전환했어요. 창작은 일상적으로 하고, 문예실천단을 꾸려서 1년을 거리공연을 했죠.

데더라고요(힘들더라고요). 사람들이 직장 다니면서 연습도 하고, 한 달에 한 번씩 하자고 지역에 제안도 하고... 이번 달에는 최저임금 가지고 하자고 그러면, 단체에 제안을 해서 단체를 끼워서 선전물이나 이런 것들을 들고 열두 번을 했죠.

내가 다할 수 없는 기라. 그런데 맞기면 잘 안돼요. 곡도 쓰고 하는 애들이 있는데, 아파서 쓰러진 애도 있고, 직장 다니느라 바쁘기도 하고, 지금은 활동이 거의 없죠.”

 

“과거에는 노풍연(노동자풍물패연합)이나 지역현장문예운동모임이 지역연대를 형성했었는데, 이게 다 무너졌어요. 군대 갔다 오니까 거의 없는 거예요. 그래서 1주일 7일 중에 6일은 거의 강습을 다녔다니까요. 이렇게 하면서 지역에서 다르게 형성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지역문예운동의 2세대 정도 되는데... 사회보험노조, 병원이나 이런데서 서로서로 보시수준에 ‘우리 조합에 뭐 하는데 너희 공연 좀 해주라’하면서... 술 한 잔 먹고 하면서 친분 있게 지내고...

지역노동자문예운동 지역연대를 표방하면서 단체든 개인이든 가입할 수 있다고 해서 만들어서 메이데이 문화제도 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여기에 민주노총의 하부단위로 생각하면서 접근하는 경향이 생겼어요. 우리는 ‘민주노총의 하부단위가 아니다. 노동자 스스로 만든 위원회다’ 그러니까 민주노총이 마음에 안든 거죠. 그러면서 독자활동을 했던 거죠.

문예학교도 하고, 수련회도 하고... 제일 중요한 것은 연대투쟁이죠. 연대투쟁 할 때 노문위 이름으로 서로 가고...

그런데 스스로 프로그램을 가지지 못했어요. 내가 안에 들어가서 이러쿵 저러쿵 얘기하는 게 맞지 않다고 생각해서 안했고... 프로그램 잡는 게 잘 안되더라고요. 그런데 내부 프로그램을 안 돌리니까 계속 정체죠.

공연만 하고 그러려고 하니까 ‘그건 아니지 않느냐’고 그랬죠. 스스로 강습도 해요. 축척된 기량이 있으니까 새롭게 만들어진 데가 있으면 가르쳐주기도 하고, 그래서 노동문화위원회 회원이 되기도 하고... 프로그램이나 그런 게 안 서니까 공연행위만 하는 기라요. 그래서 내가 그렇게 하면 오래 못 간다고 그랬어요. 역시나 그걸 극복하지 못했어요.

전체가 그런 건 아니고 그런 생각도 있는데, 서로가 그런 얘기가 잘 안되고... 몸 바쳐 문예운동 해야겠다는 생각도 잘 안 들고... 공연하고 술 한 잔 먹고 그러면 재미는 있는데, 그런 고민하기 시작하면 힘들어 하잖아요.”

 

2000년쯤부터 진행하기 시작한 노래창작모임과 노동문화위원회는 이런 과정과 고민들 속에서 노동자 문예운동에 대한 고민은 깊어간다.

 

“애시 당초 노동자 문예운동을 바라보는 관점이 문젠데... 파업현장에서 봐서 ‘멋있다!’ 이러 게 아니고... 일상적 노동자 문예교육이 안 돼 있어서 그래요. 일상적 노동자 문예교육이 기량도 문제가 있지만, 자본주의 문화를 바로 보게 만들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 문화를 만들 수 있는 프로그램이 지속될 수 있어야 가능한 건데...

첫째는 그렇게 부여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의 하중이 너무 많아요. 현장이든 뭐든 간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지쳐요.

다음에 일상적 노동자문예학교 같은 게 없어요. 노동조합 간부라 하더라도 노동자문예교육 받아야한다니까요. 이게 상설적인 게 필요해요.

다음에 내가 노래를 부르는데, 내가 재미있고 내가 절실해야 되는데, 운동에서 떠밀려서 하는 거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거죠. ‘내가 하다가 엿 같아서 내가 한 것 갖고 내가 노래한다’ 이렇게 돼야 되는데...

예를 들어 홈에버를 보면 계기는 돼요. 투쟁이 되니까 보여 지는 것만 하잖아요. 이 사람들이 30년~40년 자본주의 문화방식에서 살아왔는데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거든요. 그런 지속적인 교육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그래서 어떤 면에서도 보면 센터나 문화학교나 이런 게 굉장히 중요해져요.”

 

이런 여러 가지 경험과 고민들 속에서 2005년 부산지하철 매표소노동자들의 해고에 맞선 투쟁은 투쟁하는 노동자대중과 호흡하는 새로운 시도를 하는 계기가 됐다.

 

“부지매는 부산지역에서 비정규직투쟁으로서 굉장히 중요한 투쟁인데... 지침에 의해서 조직되고 협상테이블에서 진행되는 투쟁이 아니라 연대의 기풍이 아래로부터 복원돼야 하겠다. 그런 공간으로서 어떤 게 필요한가. 그러면 문화제를 해야 되겠다. 그래서 부지매 동지들을 만나서 ‘시청 앞 광장에서 촛불문화제 합시다. 일단은 1주일에 두 번을 합시다. 엠프나 이런 거는 제가 구해오겠습니다. 처음에 사회도 제가 보겠습니다’ 그랬어요. 그래서 노문위, 소금꽃, 학생 등에 제안을 하고...

그때 내가 왜 처음에 사회를 맞았냐 하면... 소위 말하는 촛불문화제 하면 짜여진 극본 안에서 끕들만 발언하고 그런 거는 하지 말아야겠다. 대중적으로 선전하는데 연대하고 싶으면 누가나 그날 오면 대중적으로 함께 참여하는 것을 해봐야겠다. 그래서 순서도 없고 발언자도 없는 거예요. 내가 노래를 처음 한 곡 하고,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가 느끼는 데로 얘기하고... 처음에는 내가 계속 노래했죠. 문화패들이 가끔 오면 노래하고 얘기하고... 두 달쯤 지나니까 부지매에서 사회도 보고... 그래서 잘 됐어요.

광장정치, 그게 강의가 필요한 게 아니라, 교육시간이 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연대하면서 선배노동자가 와서 하는 얘기 듣고 경험하고 이런 게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그 역할도 했어요.

이게 4~5개월 넘어가니까 이벤트화 되데요. 민주노총이 들어오고 그러면서 부산시장 선거할 때 하남식(부산지하철 매표소 무인화를 추진했던 당시 부산시장 후보)이 있는 데로 농성장을 옮겼단 말이예요. 그러면서 날짜도 바뀌고 지역본부에서 하는 문화제로 바뀐 거죠. 끕들 나오고, 순서가 정해지고 이런 거예요.

그렇게 1년을 했는데... 내가 그게 불만이라서 얘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러다가 다시 시청 앞으로 왔는데 민주노총이 ‘(중재)안 받아라’ 그러고, 부지매도 고립되고... 그때 내가 가서 또 하고 그랬는데, 결국에는 애들이 떨어져 나갔어요. 6명이 끝까지 하고 그러다가 정리됐죠.

이게 뭐냐 하면, 문화패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고 활동가들이 와야 하는데... 더 안 좋은 거는 뭐냐 하면... 이 부지매에 각 조직 활동가들이 붙어요. 그런데 이들이 지역의 성과로 남기는 것이 아니고 회원 확보하는 거라요. 그러면서 갈라치기하면서 개판이 돼요.”

 

부산지하철 매표소 해고노동자들의 투쟁이 이렇게 마무리된 후 2007년 울산에서 벌어진 울산과학대 청소용역노동자들의 투쟁은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줬다.

 

“과학대는 전술과 전략이 아주 공개적인 거예요. 내가 농성장에 참여하는데, 할 수 있는 게 그대로 전력과 전술이 되고 집행이 되는 거예요. 이게 제대로 되니까 문화패가 시너지 효과를 낸 거예요.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화요일 와서 농성장에서 노래배우기 하면서 즐겁게 놀고, 수요일 집회에 와서 대중적 공간에서 노래 부르는 거였거든요.

그런데 차이가 있는 거는 전략과 전술이 공개되면서 모여 있는 연대단위들에 의해서 공동으로 집행되고 실천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거예요. 그것이 부지매하고 엄청난 차이예요.”

 

우창수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운동을 시도하기 위해 ‘노래나무심기’라는 네트워크를 모색하고 있다.

 

“노래나무심기는 딱히 운동보다는 음악과 관련이 있는 거예요. 현장문예가 있는데 사람들이 좀 업그레이드 됐으면 좋겠다는 거죠. 이거는 굉장히 큰 프로그램인데, 조직이 아니라는 거죠. 스스로 만든 열린 공간에서 창작하고, 창작자든 현장노래패든 아마추어로 노래하는 사람이든 네트워크로 연결이 돼서, 공연을 하든가 어디 가서 뭘 하든가 어떤 테마든지 해봤으면 좋겠다는 거죠. 노동자의 삶에 천착된 노래들이 창작곡이든 뭐든 불려지고 소통됐으면 좋겠다는 거죠. 이런 게 꾸준히 해야 되겠다 해서 조심스럽게 준비하고 있는데...

노래 부르는 친구들이 있는데, 전혀 현장과 관련 없는 친구들이 자신들이 살아가는 세상과 삶에 대해서 노래 부르면서 살아갔으면 좋겠고... 이렇게 모여가지고 정기적으로 프로그램을 가져봤으면 좋겠다는 거죠. 어떤 때는 소극장에서 할 수도 있고, 어떨 때는 장투사업장에서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죠. 반자본문화에 대한 것만 공유된다면 반전노래든 노동자의 얘기든 내 삶의 얘기든 편하게 얘기하는 거죠. 생산, 유통, 향유, 흐름이 있어야 돼요.

노동조합 노래패 강습하는데 관성화 된 게 너무 많거든요. 그래서 거기서 조직되지 않는다 생각해요. 거기서 올라온 거는 다른 방식이 있을텐데... 노동조합 바깥에서 노래운동이 조직되고 가야되겠다. 그럴라면은 사실은 품이 넓어야 돼요. 노동가 투쟁가 이런 걸로 담을 수 있느냐 하면 아니거든요. 통기타 두드리면서 포크도 좋고, 친구가 그립다 그러면 그런 노래도 부르자라는 거예요.”

 

노래를 중심으로 문화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대중적 향유, 활동가의 위상, 생계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는 고민이다. 최근 첫 음반을 내고 copyleft정신에 따라 자신의 홈페이지에 모든 노래를 mp3파일로 공개했지만 그 문제는 여전히 고민스럽다.

 

“예술가가 갖고 있는 비판정신은 시대가 바뀌더라도 존재할거라고 보고, 우리 같은 사람을 어떻게 규정 짖느냐 하는 문제가 있어요. 아직도 우리 같은 사람을 운동가라고는 생각하는데 노동자라고 보지 않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아직도 인식이 성숙돼 있지 않다는 거죠.

어떻게 생활할 것인가... 팔려다닐라면 들리는 노래들 해야 되거든요. 집회 때 팔려가서 그런 노래하면 생활은 되겠죠. 그러면 불려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생기거든요. 그런 취사선택의 문제가 있는데... 그것을 기획하는 기획단이나 집행권력에 지속적으로 그런 문제를 가능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 다음에 자본주의는 저작권이라는 것으로 그들의 생명력을 연장해요. 어차피 자본주의이기 때문에 공연을 하게 되면 티켓을 팔아야하고, 음반을 팔아야 하거든요. mp3를 다운 받으려면 스스로 카피레프트가 있어야 하는데 무조건 카피레프트가 아니예요. 그 사람의 창작권과 연주자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무책임하게 ‘나도 듣는다’ 이런 문제가 아니라 그런 것을 고민 하는가?

저 사람이 노래하는 사람이고 노동자라고 생각하다면 노래할 수 있을 정도의 시스템이 주어져야 해요. 이거 누구도 얘기 잘 못한다고요.”

 

우창수는 10년 전부터 생각해왔던 음반잔업을 2007년에야 시작했다. 그동안 생각은 계속 있었지만 지역과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이런 저런 활동다보니 10년이 지나서야 결실을 맺게 됐다.

 

“너무 짐 같았고, 여러 사람들에게 만든다고 얘기해 놓은 것도 있고... 그동안 내가 만들어 놓은 노래들을 모아놓은 거 거든요. 그동안의 내 삶을 되돌아보면서 곱씹어 보고 내가 어떤 음악과 어떤 삶과 어떤 계획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정리해보고 싶었어요.

여기 세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운동하고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인데 부산에서 알아주는 연주자들이예요. 음악하면서 알고 있었던 사람들인데, ‘세상에 이렇게 노래하는 사람도 하나쯤 있어야 되지 않겠냐. 작업 좀 같이 하자’ 그랬어요. 부산에는 아직도 ‘이 사람 힘들게 음악하고 있는데 도와주자’ 하는 그런 게 있거든요. 이 사람들 참 고마운 사람들이예요. 차비 정도만 주고 했어요.

녹음실도 그 사람들이 ‘편한데 가서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부산에 트로트 가수들의 메카인 녹음실이 있어요. 그 분도 음악 하는 사람이니까 ‘제가 주로 집회나 공장에서 노래 부릅니다. 그래서 많이 거칠기도 하지만, 음반 하나 낼라고 하는데 제가 가진 돈이 없습니다’ 그래서 싸게 했어요. 대신 다른 사람들 할 때는 비켜주고, 없는 날에 가서 작업을 하는 거죠.

그런데 이 사람들이 저녁에 학원도 해야 하고 연주도 해야 돼요. 보통 녹음을 할려면 목 풀려야 하니까 밤에 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오후에 녹음을 하고, 어떤 때는 오전 11시에도 했는데, 아침에 노래가 잘 안 나오거든요. 그게 좀 힘들었어요.

천만 원 조금 더 들었는데, 이런 세션하고 그런 것에 비하면 작게 든 거예요. 3천장 찍고 반은 나눠주고 할 생각이었으니까.

내가 목돈이 없으니까 제작후원을 받았어요. 부산 같은 경우는 10년 전에 받은 사람도 있고, 죽은 사람도 있고, 울산에서는 백 명 가까이 했고, 한 5백 명 정도 되더라고요. 만원씩 내서 이런 식의 방식이 되니까 제작에 큰 도움이 됐죠.

콘서트에도 이 사람들 다 초대할 거예요. 내가 콘서트 해서 억만금 벌 거도 아니고... 우창수가 언제까지 노래할지 모르겠지만, 노래하는 동안에 내가 변하지 않는다면 쭉 바라봐주고 음악 같이 듣고... 수용자와 창작자로 만나는 관계라면 그런 것도 나름대로 대안이지 않은가... 그게 연대의 대안적 흐름이 될 수 있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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