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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무원 박엄선 이야기

노동조합 기반이 취약한 강원도 춘천에서 100여 명의 크지 않은 사업장인 풀무원 춘천공장은 2000년 노동조합이 만들어진 후 활발한 투쟁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극심한 노조파괴공작 속에서 노동조합 조직력은 힘없이 무너지기 시작해 엄청난 시련의 기간을 보내고 있다. 그 희망과 고통을 경험한 7년의 세월은 노동조합과 현장에 대한 믿음을 키워오는 과정이었다. 풀무원 춘천공장 박엄선 동지를 만나 그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춘성군(지금의 춘천시)에서 태어나서 자란 박엄선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던 가운데 87년 다니던 한 공장에서 당시 시대분위기와 함께 일어나 노동자들의 자연스러운 쟁의에 결합하게 된다.

 

“김포 방화동 쪽에 서강물산을 다녔는데, 1주일 정도 회사를 세웠을걸요. 3월 10일이 월급날인데, 3월 10일이 근로자의 날이라서 쉬기 때문에 3월 9일날 월급을 줬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거짓말을 했던 거예요. 그전에 내부적으로 불만이 많았었는데, 그때 폭발을 한 거였죠. 그게 계기가 돼서 바로 1주일 동안 기계를 다 세웠죠.

그 이후에 어느 정도 노사협의회 형식으로 합의문을 작성하고, 임금도 25% 정도 올렸고, 수당과 휴가도 만들어내고 했었는데... 그 다음해에 내가 해외를 갔어요. 그런데 갔다 오니까 그런 것들이 다 없어져 버렸어요. 노동조합은 아니지만 노사협의회 형식으로 해서 움직였었는데 그것도 싹 없어지고 회사쪽으로 편재돼 버렸더라고요.”

 

그 이후 나름대로 꿈을 갖고 창원기능대에 입학하게 된다. 박정희 정권 시절 정책적으로 세워진 창원기능대는 전문 현장역량을 키워낸다는 차원에서 정부 전폭적 지원이 많았고, 많은 이들이 찾기도 했다. 91년 입학을 하고 용접기술을 배우며 학교를 다니던 중 92년 정부정책이 변하면서 기능대 위상이 급격히 떨어지게 되는 상황에 접하게 된다.

 

“그때 아주 골치 아팠죠. 70여일 동안 학교를 세우고... 그래도 교도소는 안 보내더라고요. 검찰 조사만 받고...

그 이유는 기술기능문제에 대한 정책문제 때문에... 대단한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있었어요. 4년제 졸업한 사람들도 있었고... 뭔가 야망을 갖고 들어왔는데... 그런 것들이 수포로 돌아가는 실정이었기 때문에 학내사태가 안 벌어질 수 없었고...

그렇게 승승장구하면서 정책을 내놨지만 실패로 돌아갔어요. 그대가 최병렬 장관이 있을 땐데... 고집에 쎄서 그런지, 우리가 70여일 동안 학교를 세우고 그런데도 이기질 못했죠. 그 뒤에 있는 창원대, 경남대, 경상대 그런 대학들이 같이 연계해서 투쟁도 하고 그랬는데 쉽지만은 않았어요.”

 

당시 우연치 않게 학생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투쟁을 벌였지만 싸움에서 지고 나서 졸업과 함께 일자리를 구해보았지만 전력 때문인지 취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1년에 43번이나 취업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떨어지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친구를 따라 알루미늄 샤시공장에도 다니고 과일장사도 하면서 살아가다가 춘천으로 돌아와 산림조합에 들어가게 되지만 그곳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고 쫓겨나게 된다. 그런 기간을 몇 년 보내다가 95년 선배의 소개로 풀무원에 입사하게 된다.

풀무원은 70년대 말 풀목원을 전신으로 80년대 초 풀무원식품으로 출발한다. 그 이후 90년대 들어서면서 기업이미지가 성공하면서 공장이 확대되기 시작해 91년 춘천공장이 세워지면서 급속히 확대되기 시작한다. 현재 풀무원은 춘천, 의령, 음성, 도안 등에 공장이 세워져 있고, 몇 개 식품회사도 인수해 300여 개 제품을 생산하는 회사로 커져있다. 그러나 기업의 청정이미지와 달리 극심한 노동강도와 저임금 속에 노동자들은 고통 받고 있었다.

 

“면접 볼 때 ‘공무일을 하는 게 좋겠다’ 그랬어요. 공무일이라는 게 기계 수리도 하고 보전도 하고 점검도 하는 작업들인데, 그때 당시에 두부라인에 사람이 없었나 봐요. 노동강도가 너무 쎄서 사람들이 견뎌 내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때 ‘풀무원 들어가면 여름에 런닝을 짜서 입어야 된다’ 그런 말이 있었는데, 정말 그런 거예요. 여름에는 40도가 넘는데 소금 먹어가면서 일했어요. 4호기 라인에 배치돼 있었는데 8개월을 일 했어요. 8개월 동안 생산하면서 많이 힘들었어요. 왜냐하면 휴식시간이라고 하는 것들이 거의 화장실 갔다 오는 수준일 정도로 노동강도가 쎘고, 그때는 잔업에 자유롭지 못해서 무조건 다 해야 되는 상황이었어요. 잔업에 빠지면 찍히는 상황이었어요.”

 

당시 150여 명이 일을 하고 있던 춘천공장은 40대~50대의 여성노동자들과 30대의 남성노동자들이 많았다. 극심한 노동강도 속에서도 임금수준은 잔업과 특근을 해서 100만원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그런 가운데 97년 소위 IMF사태가 터졌는데, 풀무원은 생산이 늘어나면서도 그 나마의 임금수준은 떨어지고 비정규직이 늘기 시작했다.

 

“IMF때는 상여금을 600% 주던 거를 400%로 내리고 임금동결 했어요. 비정규직도 많이 들어왔어요. 다른 회사들은 일거리가 없고 부도가 나는데, 풀무원은 일거리가 더 많았어요. 반면에 인건비는 올라가지 않는 상황이었죠.”

 

“현장에 내려와서 휴식시간에 보니까 비정규직이 점점 늘어나더라고요. 한 달 단위로 계약했다가, 세 달 단위로 계약했다가, 지들 멋대로 하고... 그때 당시만 해도 취업을 하면 1인당 50만원씩 정부보조금이 나왔단 말이죠. 그거 받아오는데, 풀무원은 공자로 일 부려먹는 거예요. 그런데다가 잔업수당이나 이런 것들도 거의 않주죠. 특근을 하게 되면 특근 수당 150%를 주는 게 아니라 그냥 일당을 줘요. 공민권 행사하는 것도 다 짤라 먹어요. 예비군훈련, 민방위훈련, 선거 이런 거를 유급으로 해줘야 되는데 다 까버려요. 그렇게 고통을 받으면서도 노동조합에 대한 얘기는 나왔지만, 누가 선뜻 나서서 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 박엄선은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에 노조결성 시도를 하지만 흐지부지 돼버리고 98년부터 노사협의회 대표로 나서면서 현장활동을 시작한다.

 

“노사협의회 대표를 하면서 체불임금에 대한 얘기를 했더니 ‘그거 안 줘도 된다. 법적으로 해라. 근로기준법에 그렇게 안돼 있다’ 그래서 ‘근로기준법은 하위법인데 하위법의 내용을 안지키겠다는 거냐’ 그러면서 싸우기 시작했죠. 꽤 오랫동안 싸웠어요. 왜냐하면, 당장이라도 서명 받고 진정을 내면 어떤 반응이 일어났겠지만, 자칫 잘못해버리면 아예 노동조합 자체를 못 만들어버리는 그런 일도 생기기 때문에... 그걸 갖고 3년을 끌면서 면담을 했어요. 내놔라. 근로시간 단축해라. 만약에 시키면 수당 줘라. 심지어는 정규직 수당도 띄어 쳐 먹은 게 있으니까.... 그래서 2000년 4월에 진정을 넣었어요. 그래서 2000년 8월에 2,800만원을 받아냈죠.”

 

2000년 의령공장과 함께 노조결성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양주공장에 한국노총 소속의 노조가 만들어져 있었는데 복수노조문제로 실랑이가 벌어진 것이다. 그래서 별도 노조를 설립하기 위해 소집권자지명 절차를 받고 총회도 소집하고, 지노위에 진정도 하면서 대응한 결과 지노위 판정을 통해 별도 노조가 만들어지고 춘천공장과 의령공장은 별도 노조를 설립하고 민주노총에 가입하게 된다.

 

“노조설립하면서 체불임금을 받아내면서 조합원들이 그동안에 움추려 있던 부분들이 확 어깨를 피게 생겼고... 그래서 ‘아, 이게 하면 되는구나’ 하는 자신감들을 불어넣어 준거죠.

2000년 8월에 노동조합이 생기면서 두 달 정도 단체협상을 한 거 같아요. 단체협약을 하면서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시켰죠. 그때 파업을 이틀 정도 했을까... 시작하려고 하는데 사장이 내려와서 바로 단협이 체결됐죠.

초기에 노조를 설립하면서 문제가 생겼던 거는 ‘비정규직까지 우리가 껴안아야 될 게 뭐냐’라는 것이 크게 대두가 됐었고, 그걸 이해시키는데 굉장히 어려웠어요.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죽을래? 이렇게 되면 똑같이 죽는다’ 그러면서 상황들을 설명하면서 비정규직 정규직화 문제를 같이 가져갔죠.”

 

노조설립과 함께 벌인 첫 투쟁에서 62명이던 정규직 조합원만이 아니라 50여 명에 이르던 비정규직까지 정규직화시키면서 조합원은 104명으로 전체를 조직하게 된다. 임금인상도 이뤄내고 단협도 체결하게 되는 성과를 속에 노동조합은 조합원 속에 강하게 자리를 잡게 된다. 하지만 간부층이 단련되지 못한 상태에서 만들어진 노동조합은 자생력에 문제를 나타내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미련스럽게 했던 것 같고... 열정이 있었던 거 같아요. 몸이 부서져라하고... 민원에 대한 부분들이 엄청나게 쏫아져 나왔어요. 복지문제, 개인문제, 임금 등 1년에 해결한 것만 200건 가까이 될 정도로... 거기다가 교통사고가 나도 위원장을 찾을 정도였는데... 그게 세월이 가면서는 별로 바람직한 게 못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초기에 노동조합이 만들어져서 신바람은 나고, 어깨에 힘은 주고, 자신감은 있었지만, 막상 그런 것을 쳐나갈려고 하니 쳐나가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었어요. 간부들 선동교육 시키려면 얼굴이 하얘졌다 노래졌다 이런 상황이어서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러다보니까 자판기 노조처럼 된 현실이었고, 날이 가면 갈수록 부하가 커지고...

그 대신에 잘 따라주기는 했어요. 강원도 바닥에 연대도 많이 다녔고, 짧은 단기간에 풀무원이라는 데를 많이 알려냈죠. 그렇게 투쟁을 벌여나가면서 관심들을 끌게 했는데, 내부적인 부분에 대해서 미흡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이 들죠. 파업 때도 전조직을 가동해서 하는 부분이 훈련이 됐었는데, 역시 현장으로 돌아가니까 또 마찬가지가 되더라고요. 대규모 사업장 같은 경우는 전임으로 빼서 활동도 하고, 각자 분야에 연구도 하고 그러는데, 우리는 인원이 그래서 전임이 한 명 밖에 없고 그러니까... 그런 부분들이 아쉽더라고요.”

 

2001년 임금협상에서 임금인상을 이뤄내고 노조 내부적으로는 교육에 집중하고, 대외적으로는 지역연대활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한다. 이런 상황에 위기의식을 느낀 회사는 2002년 태광산업과 흥국생명 등에서 노조파괴활동으로 악명을 높였던 노무관리자를 영입해 노동조합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을 시작한다. 단협을 위반하면서 노동조합과 대립이 높아지면서 노동조합이 파업을 결의하자 용역경비 50여 명을 현장에 상주시키면서 현장을 공포분위기로 몰아갔다. 그러나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조직력으로 탄압을 이겨내며 임단협을 마무리 한다.

그런 가운데 조합원들이 극심한 노동강도 속에 근골격계 직업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실을 알고 그에 대한 투쟁이 시작된다.

 

“감기 때문에 가평에 있는 한 의원을 갔는데, 우리 조합원이 거기 있더라고요. 그래서 ‘왜 오셨습니까’ 그랬더니 ‘어깨가 아파서 왔다’, ‘언제부터 이러셨습니까’ 그랬더니 ‘입사한 지 2년 밖에 안되는데, 언제부터 병원을 매일 다닌다’ 그래서 ‘아, 이게 근골격계인가 보다’ 생각했어요. 그 다음에 노동조합은 긴급회의를 소집해서 현장조사를 결의하고 조사를 하였더니 굉장히 많은 수가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대표이사를 만나서 ‘이건 근골격계다. 병원에 가서라도 치료를 해야 된다’ 그랬더니 회사에서는 ‘오십견이다’ 그러는 거예요.

노동강도가 올라가니까 점점 많아지는 거예요. 아픈 정도도 점점 심해지고... 노동조합으로서는 그냥 방치할 수 없고 그래서 이거는 전문연구기관에 의뢰를 해서 조사를 하고 투쟁으로 돌파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하는 판단들을 한 거죠. 그래서 민주노총 강원지역본부하고 얘기를 하던 중에 한노보연(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을 알게 됐죠. 그래서 한노보연이랑 같이 교육하고 자료 만들면서 투쟁이 시작 됐어요. 2003년 3월에 근골격계를 시작하고 2003년 12월에 합의를 봤어요. 1년 동안 어렵게 싸웠어요. 그 와중에 손배, 가압류, 고소고발은 무진장 많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합원들이 전혀 흔들리지 않고 열정적으로 투쟁 했어요. 우리가 미는 만큼 회사가 밀렸으니까.”

 

2003년 당시 전국적으로 근골격계투쟁이 매우 활발히 전개된 해이다. 하지만 몸이 아픈 환자들과 함께 벌이는 투쟁은 회사와 근로복지공단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힘겨운 투쟁이다. 그런 속에 2003년 4월 9명에 대한 집단요양을 받아내면서 투쟁에 활력이 붙었지만 회사는 완강한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회사에서 매일 중식집회를 벌이고 노동부를 상대로도 특별근로감독을 실시하라면서 강하게 압박투쟁을 벌였다. 투쟁이 길어지면서 힘들기도 했지만 강한 조직력으로 12월말에 합의를 이끌어내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렇게 힘들게 얻어낸 합의사항도 현장에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으면서 회사와의 마찰은 끊이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진행된 2004년 투쟁은 장기파업으로 이어졌지만 무너지고 만다.

 

“2004년에 들어오면서 단체협약을 의령하고 같이 하죠. 단일교섭을 했죠. 이게 똑같은 두부공장인데 법인을 개별 법인화시켰어요. 의령공장, 음성공장, 춘천공장 이렇게... 그거는 주5일제 관련해서 개별화시키면서 주5일제를 회피해보고자 하는 부분이었죠. 당시 풀무원은 경영의 투명성 그러는데 개수작 부린 거고요. 주5일제 끝나니까 다시 합쳤어요. 경영의 투명성이 목적이 아니었다는 것이 여실히 나타나는 것이죠. 의령과 합동교섭을 하는 것은 효과적인 교섭을 하기 위한 것이고, ‘힘을 모으기 위한 효과적인 교섭을 하자. 조금 발전하면 통합노조를 만들자’ 그런 목적을 두고 했죠. 그런데 파업이 120일 정도쯤에 의령이 먼저 복귀를 해버렸어요. 춘천공장은 그 보다 40일을 더 싸웠고...

2004년 파업에 대한 부분은 (화섬)연맹에서도 조정을 잘 못했고, 그쪽에서 먼저 들어가고 이쪽은 계속 하고 그래서 불협화음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파업하는 과정에서 한 명도 이탈자는 없었어요. 힘 있게 싸웠고...”

 

2004년 파업투쟁 패배 이후 2005년 들어 회사는 더욱 강하게 노동조합을 몰아붙이기 시작한다. 노골적으로 단체협약을 무력화시키는 회사에 맞서 싸우던 중 수석부위원장과 부위원장이 해고되는 사태가 발생했고, 회사는 조합원들에 대한 노골적인 회유와 협박으로 노조탈퇴공작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런 일련의 과정들 속에서 굳건하던 노동조합의 조직력은 급속히 무너지기 시작했고, 100명이 넘던 조합원은 30여 명으로 줄어들게 된다.

 

“2005년에도 근골격계 환자들은 계속 발생했어요. 2006년에도 나왔고... 2005년에 요양했던 사람이 2006년에 들어왔더니 여름 뙤약볕 아래서 ‘돌 주워라. 풀 뽑아라’ 그런 게 겨울까지 갔어요. 여름에 더위, 겨울에 추위... 비 왔을 때는 우산 쓰고 풀 뽑고 그랬어요. 그래서 그걸 인권위 제소를 하자고 여러 가지 얘기가 모아지기는 했는데, 조합원들이 회사의 탄압 속에서 떨쳐 일어나지 못했던 거 같아요. 모이지가 않았어요. 그런 횡포들이 12월까지 왔죠. 그래서 현장으로 들어간 사람도 있고 그랬는데, 들어간 사람 중에도 탈퇴를 한 사람이 있어요.”

 

회사의 극심한 탄압 속에 노동조합을 지켜내려 고군분투 했지만 한번 무너지기 시작한 조직력은 쉽게 복구되지 않았다. 최악의 상황에서 여러 가지 고민을 하던 박엄선은 회사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현장조직력을 세워낼 필요가 있다는 판단 속에 2006년 9월 임원선거에 출마하지 않고 현장으로 내려가게 되고, 새로운 집행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새롭게 올라온 집행부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추진력을 갖지 못한 상황에서 계속 회사에 휘둘리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현장은 더욱 위축돼 가기만 했다. 그런 속에 박엄선은 공무과로 복귀하기 위한 현장적응훈련을 받던 중 회사가 갑작스럽게 공무과를 폐지하면서 마찰이 발생했고, 이에 맞서 단협을 근거로 싸웠지만 결국 2007년 4월 해고통보가 이어진다. 또 임원시절 조직부장을 지냈던 장태식은 사외에서 비조합원에게 폭력을 당해 앞니가 세대나 부러지는 피해를 당했으면서도 해고통보를 받는 등 활동가에 대한 탄압은 극을 달했다.

해고자들의 투쟁과 현장조직력 복구를 위한 작업이 진행되는 속에 회사측의 공세는 더욱 심해지고 노동조합 집행부는 우왕좌왕하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결국 임원이 사퇴하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임원사퇴 후 보궐선거를 위한 후보등록 공고가 붙었지만 입후보자가 없어 세 번에 걸쳐 유보된 끝에 박엄선이 다시 출마하게 된다. 다시 임원으로 당선된 후 조직력을 높여내기 위한 노력을 힘겹게 진행하고 있다.

 

“조합원들이 비조합원들하고 갈등이 초기에 많았죠. 되도록 트러블 벌어지지 않게 했으면 좋겠다고 주문했던 거고... 지금은 선이 분명해졌기 때문에 크게 갈등관계는 없어요.

잔업 특근 안 시키고 하니까 경제적인 것들이 어렵잖아요. 이제는 오히려 ‘충분히 쉴 수 있어서 잔업 안 하는 게 좋다’ 그러면서 적응해 나가는 거 같아요. 금전적으로 어려운 것도 어떻게 적응해 나가는 거 같아요. 특근을 네 번 하면 20만원 정도 차이나고, 잔업이야 매일하는 게 아니니까 별로 차이가 안 난다 말이요. 한 가정에 15만원~20만원이면 적은 돈은 아니지만, 크게 차이나지는 않는다 말이예요.

조금씩 옛날 모습 찾아가면서, 서로 의지해가면서 조금씩 살아나는 거 같아요. 중식집회 때 더러 안 나오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제는 전원이 다 나와요. 시내 선전전을 할 때도 조합원들이 잘 안 나왔었는데, 요즘에는 거의 다 나오는 것 같아요. 상경해서 선전전 하는 거는 상상도 못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토요일날 다들 올라가서 해요.”

 

완전히 무너져 내린 조직력을 복구시켜내는 것만이 아니라 4명으로 늘어난 해고자들에 대한 생계비 지원문제도 힘겹기는 마찬가지다. 힘겹게 버티고 있는 30명의 조합원이 내는 조합비로는 노동조합의 운영도 어려운 상황이다. 그래서 재정사업이나 조합원 각출 등으로 재정문제를 근근이 해결하면서 어려움들을 이겨내고 있다. 하지만 박엄선은 현장의 고통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다시 투쟁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에 노동조합을 굳건히 부여잡고 있다 힘주어 얘기한다. 오히려 춘천공장만이 아니라 의령공장을 비롯해 전공장을 통합시켜내고, 하청공장과 영업 및 물류부분까지 조직을 확대하는 것만이 역관계의 균형을 잡아 나갈 수 있는데....

 

“지금 비조합원들이 노동강도에 굉장히 시달리고 있어요. 근골격계로 고통 받고 있는 비조합원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주도하는 몇몇 비조합원 때문에 그런 것이지 전체가 다 탈퇴하려고 한 것은 아니란 말이예요. 그들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다 껴안아야 돼요. 내년 정도면 계기 마련이 되지 않겠냐고 보는 거고... 풀무원이 서서히 본색을 들어내기 시작하는데... 한 사람만 터지면 봇물처럼 터질 가능성도 있다고 보는 거고...”

 

“비정규직법안은 풀무원도 그것을 활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요. 2년 내지 3년 안에는 그 악법들이 활개를 칠거예요. 구조조정 들어온다고 보는 거거든요.

지금 몇 공장이 비어 있어요. 파업 이후에 음성으로 내려갔단 말이예요. 그러면서 계속 적자났다고 한다고요. 그런데 적자가 아니야. 적자라고 한다는 것은 시장에 풀무원 국수가 나오지 않거나 누적재고가 생겨야 적자를 보는 거예요. 그런데 여전히 많이 팔리고 있단 말이예요. 이거는 공장이전을 통해서 우리에게 고통만 줬다는 거죠. 공장이 놀고 있단 말이예요. 놀고 있는 공장을 여러 가지 비용을 들이면서 계속 놀릴거냐? 안 놀린다는 거죠. 조합에 대해서 자기들이 완전히 제어할 수 있는 부분까지 오면 다른 비정규직으로 채울 거예요. 그러면 다른 두부공장에서 도퇴 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정년퇴직 하는 사람들이 나와요. 그리고 이러저런 이유로 두부공장에도 비정규직이 올라오게 되면 임금이 많은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도퇴가 된다는 거죠. 그게 얼마 남지 않았다고 보는 거죠. 그래서 노동조합을 부여잡고 조직하고 투쟁하면서 노동조합을 사수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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