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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소 노동자 김정곤 이야기

10년에 이르는 노조 상근 간부와 대공장 노조 위원장 출신이라고 하면 쉽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별로 좋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만큼 민주노조운동 20년 속에서 많은 변화가 부정적인 면에서도 있어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노조 상근 간부를 ‘조합원 피 빨아먹는 자리’라고 얘기하고, “대공장 위원장 출신들이 제일 문제야”라고 누워서 침 뱉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다.

김정곤 동지를 만나서 그 굴곡 많은 20년의 활동 얘기를 들었다.

 

경북 경주 시골에서 귀한 집에 늦둥이로 태어난 김정곤은 부산에서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현대중공업에 입사하게 된다. 20대 초반의 김정곤에게 장발이 유행이던 시기에 정문에서 두발단속을 하던 현대중공업의 군대식 문화는 적응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러던 중 84년 대우조선에서 사람을 뽑는다는 소리를 듣고 미련 없이 거제도에 있는 대우조선으로 옮겨가게 된다.

 

“대우조선이 그때 막 가동되면서 경력사원을 1주일 간격으로 모집했어. 현대중공업에 있는 사람들 빼내는 거지. 그래서 84년 5월 21일 대우조선에 경력사원으로 입사했지. 대우조선에 와서 일만 한거지 일만... 여기 들어와 보니까 경력사원이 별로 없더라고... 회시가 좋아하는 종업원으로서 일만 했지...”

 

그렇게 열심히 일만 하던 86년 작업 중 전기에 감전되는 사고를 당하게 된다. 병원에 실려가 귀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지만 결국 장애등급을 받고 재해노동자로 살아가는 멍에를 쓰게 된다.

그때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어떻게 해야 될지 몰랐던 김정곤은 친한 친구에게 산재법에 대한 책을 하나 사달라고 부탁했고, 산재에 대한 책이 없었던 시절 그 동료가 사온 책은 산재보상법이 부록으로 실린 ‘노동법 해설’이었다.

당시로서는 꽤 거금이었던 370만원을 보상금으로 받아든 김정곤은 그 돈을 들고 노동부와 회사를 찾아가 “아무 것도 필요 없다. 이 돈으로 귀 수술 제대로 할 수 있는 병원에 소개 좀 시켜줘라”고 부탁했지만, 노동부와 회사는 간단하게 외면해 버렸다. 실의에 빠진 김정곤은 동료들과 함께 연일 술을 마시면서 거액의 돈을 한 달 만에 다 탕진해 버린다.

 

‘노동법 해설’이라는 책을 통해 노동자의 권리라는 것에 대해 알게 될 즈음 친한 친구가 비공개 학습모임에 참여를 권유하게 된다. 논의되는 내용들을 거의 이해하지 못한 채 사람들과 만나고 있던 중 ‘상고문’이라는 유인물이 현장에 비밀리에 뿌려졌고, 87년 노동자대투쟁이 벌어진다.

87년 8월 8일 노조결성 시도가 일어나면서 거대한 흐름을 만들었지만 곧바로 어용노조와 대결해야 하는 혼란에 휩싸인다. 대우조선 투쟁이 최고조로 올라가던 8월 22일 김정곤은 사장체포조로 편성되어 옥포관광호텔에 사장을 체포하기 위해 들어가 격렬한 싸움을 벌이다 연행돼 구속됐다. 우연치 않게 그날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며 대우조선 투쟁은 전국적으로 큰 관심으로 떠올랐다.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첫 구속을 겪은 김정곤은 풀려난 이후 현장으로 복귀해 88년부터 소위원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재해노동자들을 조직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산재보우회를 만들고 재해노동자들을 만나기 시작한다.

 

“만드는 게 쉽지 않았어. 물어 물어 사람을 찾아가. 어느 부서에 누가 심하게 다쳤다 그래서 찾아가면 ‘나는 교통사고로 다친 거다’ 그래. 남에게 다친 얘기를 잘 안 해주잖아. 그래서 8명이 발기인을 해서 만들어서 조직하는데 상당히 시간이 많이 걸렸어. 8명에서 30명까지 조직된 상태에 최대한 300명은 조직을 해야 하니까... 대우조선에 노동재해를 당한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고 엄청나게 많잖아. 경미하게 다친 사람들은 제외시키고, 최소한 14급 이상 장애등급을 받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자 이래 된 거야.”

 

어렵게 재해노동자 명단을 입수해 1년여를 조직해 회원이 350여 명으로 이를 정도가 됐다. 그 조직력을 바탕으로 89년 노사협의회에 재해노동자들의 요구를 반영시키기 위한 투쟁이 시작된다. 산재보우회 회원들의 의견을 모은 결과 ‘위로금 100% 지급’ ‘성형수술 시 비용지급’ ‘보조기 보철 지급’ ‘휴업급여 100% 지급’ ‘장애에 지장 없는 부서로 전환배치’ 등의 요구를 제기하게 된다.

 

“노동조합에 노사협의회 안건으로 올렸어. 올리니까 회순정리를 하는데 우리 요구안이 기타안건으로 들어가 있어. 기타안건이라는 것은 별 볼일 없는 거잖아. 그래서 노사협의회 하는 날 350명이 근무시간에 본관 점거를 들어가. 로비를 점거하니까 기타안건이 1번으로 올라가요.

점거하기 전에 이미 5명을 정했어. 어렵게 선정했지... 팔이 제일 심하게 잘린 사람, 발이 제일 심하게 잘린 사람, 하반신 화상이 심한 사람, 상반신 화상이 심한 사람, 의안을 박은 사람 해서 5명을 뽑은 거야. 뽑는데 그중에서 똑같이 다친 사람이 있으면 나이 많은 형님을 설득을 했고... 그게 쉽지 않거든.

로비에서 검거하고 있는데 정회시간에 교섭위원들이 화장실을 가는 거야. 교섭위원들이 나오니까 위원장을 잡고 ‘위원장님, 여기 산재보우회 회원들인데 다친 부위별로 다섯 명이 회의장 들어가서 회사사람들에게 다친 부위를 보여주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거부를 안 하더라고. ‘좋다’고, ‘나중에 부르겠다’고 그러더라고. 들어가서 조금 있다가 문 열고 ‘다섯 명 들여보내라’ 그러더라고. 막상 사람들이 들어오라니까 못 들어가는 거야. 그래서 사람들이 울면서 ‘형님 들어가이소’라고 애원을 하는 거야.

그래서 들어갔어. 상반신 화상, 하반신 화상, 팔, 다리, 안구 이렇게 선 거지. 들어가면 교섭테이블이 있으면 우리는 조합 간부들 뒤에 선 거고 사측이 정면에 바로 보이는 거지. 위원장이 중간에서 모두 발언을 하더라고. ‘사장님, 여기 회사의 산업역군으로 열심히 일하다가 다친 조합원들입니다. 부위별로 얼마나 심한 지 보신 적이 없을 테니까 한번 보시죠’ 그랬어. 그러니까 회사에서 ‘좋다’ 그러는 거야. 그래서 내가 신호를 줬지. 내가 신호를 주는데도 머뭇머뭇거려.

그렇게 한참 있다가 상반신 회상을 입은 형님이 옷을 벗으면서.. 그냥 옷을 벗는 게 아니라 울부짖더라고. ‘야, 이 개새끼들아’ 소리를 지르면서... 나도 놀랬어. 그건 원래 계획에 없었던 건데... 옷을 벗으니까 소나무껍질처럼 짓이겨져 갖고 흉해. 그러고 나서 그 다음 사람이 교섭테이블 위로 뛰어 올라간 거야. 팬티만 입고 하반신 화상이 벗어 버린 거야. 그러니까 분위기가 완전히 험해. 그 다음에 팔 빼갖고 보조기를 집어던져 버리고, 다리 빼갖고 던지고, 마지막에 나이 든 형님이 있는데 안구를 빼고 굴린 거야. 그러니까 회사 애들이 토할 것처럼 그러고... 얼굴이 하예가 고개 다 처박고 있는 거야. 안 볼라고...

그래서 내가 그랬지. 그때는 나이가 어려도 분노의 살기가 있어서 사장으로 안 보이는 거지. 어느 놈이 한 소리하면 그건 죽는 거야. ‘봐라, 우리 이 형님들은 평생을 이렇게 불구로 살아가야 되는데, 이 순간도 안 볼라고 고개를 숙이냐. 전부 고개를 들어라’ 그러니까 일제히 고개를 다 드는 거야. 그러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는 거야. 나도 완전히 흥분돼 있었으니까.”

 

이런 투쟁을 통해 산재보우회의 요구 조건은 100% 쟁취하게 되면서 이후 민주노조의 노동안전관련 모범안으로 자리 잡히게 된다.

 

민주노조운동 초기 대공장들이 대부분 그랬던 것처럼 대우조선도 초기에는 노조민주화투쟁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된다. 97년 노동조합이 만들어졌지만 어용노조로 출발하게 되면서 민주파 활동가들은 해고자대책협의회(88년)와 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89년)을 중심으로 꾸준히 활동을 벌이게 된다. 결국 90년 노민추 후보가 임원선거에서 당선되면서 대우조선에 민주노조가 들어서게 된다.

90년 민주노조가 들어선 이후 임원들의 적극적 권유로 김정곤은 안전생산대책부장(이후 안전대책부, 산업안전부, 노동안전실로 명칭이 계속 변한다)으로 상집에 들어간다. 그리고는 98년까지 한해도 거르지 않고 계속 상집활동을 하게 된다.

 

“우리가 ‘푸른등’이라고 노안 학습조를 만들었어. 9명까지 해서 매주 목요일 학습을 했어. 부장은 내가 하고, 차장은 돌아가면서 전임을 하고... 내려가더라도 현장에 있는 거를 모니터링해서 올려주고, 같이 고민하고... 이러니까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거야. 전임자가 많아지는 거지. 그리고 현장성이 부족했던 것이 현장성이 많아지는 거고...

‘노안 관련해서 홍보를 하면 조합원들이 홍보물을 잘 안보다. 어떻게 하면 볼 수 있게 할까’ 이게 주제야. 토론을 하는데 한 동지가 안을 내는데 ‘화장실을 이용하자’ 그러는 거야. 화장실 그러면 지저분하다고 그래서 처음에는 안이 채택이 안 되고... 토론을 하다가 다시 돌아와서 ‘화장실?’ 하면서 만들어진 게 화장실 소자보야.

그래서 ‘푸른등’ 해갖고 비닐봉지에 꼽도록 깔끔하게 만들었어. A4지에 쓰는데, 예를 들면 ‘산재라는 것은 어떤 것이다’ ‘과로사라는 것은 뭐다’ 이렇게... 간단하고 쉽게... 한 달에 한 번씩 발행을 했어. 전 야드에 화장실이 엄청 많은데 우리가 다 그걸 못 붙이잖아. 그래서 대의원들에게 나눠져서 붙이는데 대의원들의 평가가 들리는 거야. 조합원들이 ‘화장실 소자보 안 바꾸냐’고 그런다고... 그러면 안 할 수가 없는 거야. 그리고 늦어지면 빨리 하라고 그러고... 그래서 성공한 거야.”

 

노동안전 관련한 활동은 처리해야 할 일들이 크고 작게 많지만 노동조합에서도 크게 주목을 받지도 못하는 활동이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다치고 죽어간 노동자들을 직접 손으로 수습하고 사후처리를 하는 과정에서 김정곤은 “느슨해지는 긴장의 끈을 다시 조였다”고 얘기한다.

93년 하반기에 조합원 건강검진에 대한 기록을 살피다 이상한 점들이 발견되면서 힘겨운 투쟁이 시작된다.

 

“건강검진을 보니까 이상해. 회사가 형식적으로 한다는 거는 알고 있지만... 검진결과 서류를 보니까 진폐로 판정 났던 조합원인데 그 다음해는 정상으로 나와 있고 뒤죽박죽이야. 이걸 알아내고 93년 11월에 대의원대회에서 예산을 받아. 그래서 노동조합이 의뢰를 해서 그 조합원들 가슴사진도 찍어도 보고 귀도 검사도 해보고... 조합원들 제일 심한 게 진폐, 소음성 난청이니까... 그렇게 해보니까 70% 이상이 엉터리야.

그래서 엉터리 검진을 거부하고 94년에 우리가 안을 잡은 거지. 회사에 요구를 하게 되는데, 회사는 안 받아. 계속 논쟁을 하다가 94년 연말까지 건강검진이 이뤄지질 못해. 연말 되니까 회사에서 일방적으로 검진을 밀어붙여. 검진을 회사 내 건물에서 받고, 관리자들은 대우병원에 가서 받아. 첫 날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데 부서장들부터 하게 되는 거지. 그렇게 일방적으로 강행하는 날 전 집행간부들이 아침에 ‘일방적인 엉터리 검진을 우린 받을 수 없다’ 유인물을 뿌리고, 두 군데 검진장으로 가서 입구에 쇠사슬을 매고 검진장을 봉쇄 해.

그때 임원들도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냐. 95년 큰 투쟁을 놔놓고’ 이런 기조야. 그런데 우리가 밀어붙였지. 실무부서가 밀어붙인 거야.

전날 거제도 시내를 뒤져서 바나나우유를 구해 와서 그 속에 신나를 채웠어. 조그만 하잖아. 그래서 두 개씩을 다 줬어. 안주머니 속에 총알 차듯이. 급할 때는 진짜 목숨 걸고 부어야 되니까. 쇠사슬을 목에 다 걸고 열쇠 빼서 회수해버리고.

그래서 관리자들이 꽉 몰려오는데, 관리자들이 뚫지를 못하는 거야. 몸싸움 붙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동요를 하는 거지. 캇트기 갖고 와서 쇠사슬 자르라 하는 거 손가락 집어넣고... 난리가 났지.

점심시간에 대의원들 보고는 ‘일방적 건강검진을 거부한다’는 서명을 식당에서 받는데 몇 천 명이 서명을 해버렸어. 회사가 놀래버린 거야. 그래서 주춤해진 거고. 여론을 파악해보니까 ‘이건 아니다. 우리가 졌다’ 이렇게 된 거야.

점심시간 끝나고 나서 사내방송에서 ‘건강검진을 해서 조합원들의 건강을 지키려 했는데, 노조측의 일방적인 검진장 봉쇄로 인해 무기한 연기합니다’ 하는 거야. 이긴 거잖아. 그후로 여러 현장에서 쇠사슬투쟁방식이 확산됐지.”

 

96년에는 금속연맹 공동요구안으로 작업중지권(산재가 발생할 긴박한 상황이나 중대재해가 발생했을 때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할 수 있는 권한) 쟁취를 위한 투쟁이 벌어져 대우조선에서 쟁취하게 된다. 이에 경총과 전경련 등에게 강하게 반발하며 ‘인사경영권 침해다’라고 성명서가 발표되기도 하는 등 사회적 파장이 크게 일었다.

 

“노동자를 죽이고 병들고 다치게 하는 것이 인사 경영권 침해라면 우리 노동자들은 당당하게 인사경영권을 침해해야 하는 게 아니가.”

 

이런 치열한 투쟁을 통해 권리들이 하나 하나씩 쌓여가는 동안 연속집권을 해오던 노민추 내에서 이견그룹이 생기기 시작한다. 김정곤을 비롯한 비주류 세력들은 노동조합이 관성화되고 타협적 자세를 보이는 것에 문제의식을 갖고 96년 임원선거를 앞두고 노민추 내부에서 경선을 벌이게 된다. 노민추 개혁파 후보로 나선 김정곤은 3표 차이로 내부경선에서 떨어진다. 상급조직인 금속연맹 초대 산안국장으로 파견됐던 98년에도 다시 내부경선에 나서지만 역시 실패하고, 그 이후 다시 당선된 노민추 집행부에 의해 상급조직 파견를 인정하지 않음으로 8년의 상근활동을 마치고 현장에 복귀하게 된다.

 

두 번에 걸친 내부경선과 노민추 내에서의 개혁의 한계를 느낀 김정곤은 노민추를 탈퇴해 뜻을 같이하는 젊은 활동가들과 함께 ‘현장중심의 노조민주화 추진위원회’(약칭 현민추, 이후 현민투로 개편해 계속 활동을 벌이게 된다)를 조직하게 된다.

98년 대우그룹 부도로 대우조선은 워크아웃 상태가 되면서 현장은 급속히 위축되기 시작한다. 그 이후 ‘워크아웃을 조기에 졸업해야 한다’는 사측의 논리가 강하게 작용하면서 현장은 비정규직의 증가와 노동강도 강화로 이어진다.

그러던 중 2000년 사내하청업체 노동자 두 명이 시급문제로 업체와 싸움을 벌이다 해고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대공장 사내하청노동자들의 투쟁이 막 일어나기 시작한 초기에 발생한 이 투쟁에 현민투가 결합하게 되면서 전국적 관심이 집중한다. 그렇게 정규직 활동가들이 비정규직 노동자와 공동투쟁을 벌이던 도중 린치사건이 발생하면서 양상은 급격하게 변한다.

 

“현민투 의장이 내가 전화를 해서 ‘형님, 있다 잠깐 봅시다’ 그래서 ‘알았다’ 하고 갔어. 갔는데 의장이 없어. 그래서 못 만나고 왔지. 작업을 하고 있는데 부서 현장관리자인 직장이 온 거야. ‘거기 좀 오라고 한다. 가 봐라’ 그래. 그래서 가 보니까 구사대들이 있어. 컨테이너 박스에 들어갔더니 처음에는 이야기 좀 하다가 나 보고 ‘하청노동자 손 때라’ 이거야. ‘뭔 소리냐’고 그러는데 이 새끼가 협박을 하는 거야. ‘하청노동자와 같이하는 활동을 안하겠다’는 각서를 쓰래. ‘내가 왜 쓰냐’고 그러니까 불이 딱 꺼지는데 문이 닫히면서 밖에서 잠기고, 여기서 우르르 저기서 우르르 나와. 그래서 여러 대 맞았지. 그러면서 ‘각서 써라’ 그러니까 또 ‘못 쓴다’ 그랬지. 그러니까 ‘현민투 회원들 하나하나씩 불러다가 조진다. 그러면 너희 조직 다 작살난다’ 그러는 거야. 미치겠더라고. 시간이 한참 지나니까 얘들이 도저히 안 되겠는지 몸을 막 수색을 해. 녹음기 있는지 보려고. 핸드폰도 빼앗고... 끝까지 버티는데 정말 죽겠더라고... 사람이 비굴해지고 미치겠는 거야. 안 쓴 거에 대해 안도의 한숨도 나오지만...”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87년 첫 구속과 88년 첫 테러를 경험하고, 그 이후 구사대나 경찰들과 크고 작은 충돌을 무수히 겪었던 김정곤이지만 이날 린치사건은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정말로 대우조선을 떠나고 싶더라”고 얘기할 정도로 모멸감이 컸지만 현민투 회원들과 솔직하게 얘기하면서 투쟁을 계속 이어가기로 결의를 한다.

그러나 사측은 현민투 회원들의 부모들에게 연락을 해 부모들이 자식들을 찾아와 만류하는 등 집요한 탄압을 이어간다. 아침 출근투쟁에 참여하는 인원이 7명으로 떨어지기도 하는 등 힘겨움은 컸다.

그러던 중 다시 임원선거가 다가오기 시작했고, 현민투 역시 임원선거 참여여부를 놓고 논의를 벌이게 된다. 현민투라는 조직을 만든 지 1년을 조금 넘기고 극심한 탄압으로 힘겨운 상태에서 선거에 나서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있었지만, 선거에 참여하지 않으면 사내하청 투쟁에 대해 공개적으로 주장하기 어렵다는 점 등을 들어 선거참여를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위원장 후보로 김정곤이 결정된다.

 

“선거운동을 하면서 전 야들에 현장순회를 했지. 그러면서 우리는 직영 하청 구분 없이 일일이 다 만났어. 현장에 가면 ‘나는 조합원 아닌데요’ 이래. ‘같은 노동잔데 어떠시냐’고 그렇게 얘기하니까 이 사람들 의안해 해. 이상한 거잖아. 손을 잡는데 얼마나 잡는지 손아귀가 아파. 퉁퉁 부었어. 그리고 악수를 하는데 놀랬어. 종이가 손에 들어오는 거야. 땀에 저린 2만원 3만원 꼭꼭 접어서... 탈의실에서 작업복 갈아입을 때 돈 안 갖고 가는데, 오면 줄 거라고 악수하면서 관리자들 못 보게 주는 거야. 와~ 그게 한두 건이 아니고 계속 나와. 미치겠더라고....”

 

결국 네 팀이 후보로 나선 선거에서 김정곤 후보조는 75%에 가까운 압도적 지지로 당선된다. 당시 상집조차 제대로 꾸리기 어려운 조건에서 당선된 김정곤 집행부는 산업안전부를 노동안전실로 확대 개편하면서 노동안전에 대한 사업을 강화하기 시작한다. 또 회사측과도 그동안의 관성화 된 사업들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관행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만 대의원을 비롯한 현장조직 등 현장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위원장에 당선된 후 적극적으로 벌이기 시작한 것이 근골격계 직업병에 대한 대응사업이었다. 조합원 실태를 조사하고, 자체 검진을 통해 유소견자들을 조직해서 2002년 집단요양투쟁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이에 사측에서도 ‘나중에 불이익이 있을 수 있다’는 등 온갖 방법으로 회유와 협박을 하게 되지만 1차로 72명이 집단요양신청을 하면서 본격적인 투쟁을 벌인다. 산재승인을 받아내는 과정에서도 사측의 눈치를 보면서 시간을 끄는 근로복지공단에 신나를 들고 점거를 하면서 전원 승인을 받아내게 된다.

이렇게 산재노동자들이 빠져나가면서 현장에서 새로운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한 반에 10명이 있다고 치면, 옛날에는 조금 여유가 있었어요, 10명이서 검사 스케줄이 딱 잡혀 있는 거야. 심지어는 개인 작업량이 떨어진다고. 정신없어. 그런 판에 10명에서 2명이 집단요양을 해버렸으니까 8명이서 도저히 일을 해낼 수 없는 거야. 부서별로 탑재1부가 좀 많이 했는데... 얘네들이 2명을 어디서 채우냐 하면 하청업체에서 파견을 와. 그것이 불법파견이잖아. 이것을 부서 집행위에서 얘기를 해서 소위원 하고 대의원들이 투쟁을 한 거야. 그 부서부터 해갖고 전 야드에 확산시키려고 했던 거라고... 이 투쟁을 하면서 출투를 마치고 들어가는데 구사대들이 동원돼서 줘 패는 거야. 그게 4.4사태라고 그러는데...”

 

갑작스러운 폭력사태에 상집들은 그를 항의하기 위해 회사 인력관리부 사무실을 점거하게 된다. 그러나 사측은 지체 없이 진압을 단행한다.

 

“그게 4월 4일이고, 5일이 식목일이야. 그리고 토요일 일요일이 이어져서 3일간 연휴야. 그래서 그날 친 거야. 밤에 벽 뚫고 들어오데... 들어오길래 신나를 몸에 부었지. 라이터로 불을 붙였는데, 소방호수로 쏴 버린 거야. 소방호수 두 대 맞으니까 10m 정도 밀려가 벽에 부딪히더라고. 그때부터 아수라장이 되는 거야. 소화기 터트려지고... 의자 집어던지고... 바닥에 넘어져 있는데 의자로 찍더라고...

그래서 끌려 나오니까 이 새끼들이 ‘위원장이다. 손 대지마라’ 그러더라고. 그래서 진압이 다 끝난 모양이야. 내 혼자 격리돼 있었거든. 뒤에서는 비명소리 밖에 안 들리고... 건물에는 불도 나고... 내러가니까 다 병원 가고 난리가 났어. 나도 그때 갈비뼈가 부러졌지...”

 

임원과 상집들이 부상을 입어 병원에 누워있는 상태에서도 환자복을 입고 규탄집회를 열고 기자회견을 여는 등 긴장감 있는 대응이 이어졌다. 그러나 사측의 고소고발에 이어 검찰이 전격적으로 김정곤 위원장 등 다수의 임원과 상집을 구속시키면서 사태는 악화된다.

당시 수석부위원장이 검거를 피해 성당에서 농성을 하며 사측과 협상을 이어가지만 이미 현장을 장악한 사측은 단협 개악안을 내놓으면서 노동조합을 압박해 갔다. 결국 사측 개악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노동조합은 단협을 마무리 하지 못한 채 임원선거가 이어진다.

그 동안 구속돼 있던 김정곤에게는 또 다른 힘겨움이 닥쳐왔다.

 

“공안검사 새끼가 ‘이거 별거 아닌데, 앞으로 폭력적인 거를 안 한다는 반성문만 쓰면 집행유예로 다 나간다’ 그러는 거야. 그러면서 구속돼 있는 동지들 가족들이 내 면회를 하는 거야. 내만 준법서약서를 쓰면 다 나온다고 분위기가 만들어졌어. 안에 있는 구속자들도 내게 쪽지가 막 와. 잠을 못 잤어.

수많은 결단 결단을 해야 하는 과정이 있거든. 밑에 실무 때는 한 번 결단 잘못해도 위에서 잡아 줄 수 있지만, 최고 결정권자는 한 번 잘못 결정하는 순간 끝나는 거잖아.

그런 고통 속에서 버텼는데, 선고가 어떻게 떨어졌냐 하면... 내가 실형 3년이고, 부위원장과 사무국장은 실형 2년 6개월이고, 나머지는 다 집행유예야. 이긴 거잖아. 그러니까 다 뒤집어진 거지.”

 

항소심까지 진행한 결과 마지막 구속자들까지 집행유예로 모두 풀려나게 되지만 이미 현장은 더욱 어려워진 상태였다. 새롭게 들어선 집행부는 김정곤 집행부의 투쟁에 대해 입장을 달리하고 있었고, 대의원들 역시 다수가 친사측 성향을 보이는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서 회사에서는 당시 구속됐던 임원과 상집 등 16명에 대해 해고하겠다는 입장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2003년 노조 대의원대회에서 이들에 대한 신분보장 심의가 부결되면서 회사에서 해고될 경우 노동조합의 지원을 받을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김정곤 개인적으로는 당시 노동조합에서 손상된 조합비품에 대한 변제를 요구하기도 했고, 회사에서는 가압류가 들어와 있는 등 여러 가지 힘겨움이 겹쳐지고 있었는데, 이혼까지 겹치면서 매우 고통스러운 기간이었다.

이런 와중에 회사에서 ‘당신만 회사를 떠나면 나머지 15명은 해고하지 않겠다’는 압력과 회유가 강하게 들어왔다. 이런 저런 고민을 한 끝에 결국 김정곤은 대우조선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대우조선을 떠난 후 당시 소속돼 있던 정치조직인 ‘노동자의 힘’ 중앙 상근활동을 2년 6개월 동안 하면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노힘은 정치조직이다 보니까 다르지. 현장하고 층이 이뤄져 있어서 현장에서 치고 올라오려고 해도 못 치고 올라오는 거야. 학출들이니까 현장성이 부족한 거지. 현장의 경험이 없는 거고. 여기는 레닌이니 마르크스는 이런 얘기 해버리니까 모르는 거지. 글도 어렵게 쓰고... 이런 부분 발란스를 못 맞췄고... 현장성이 좀 결연된 게 중앙이고... 그 대신 중앙에 있으면 좋은 게 모든 돌아가는 정보는 한 눈에 다 볼 수 있고... 지역에 있으면 그거는 전혀 안되고...”

 

정치조직 상근 활동을 정리하고 2006년 다시 거제도로 내려와 이후 활동을 모색하던 중 2007년 인근에 새롭게 만들어진 성동조선에서 사람들을 뽑는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미 40대 중반을 넘어선 나이와 과거 전력 때문에 입사가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원서를 넣었는데 뜻하지 않게 합격 통보를 받게 된다. 막 지어져서 새로운 인력이 필요했던 회사 입장에서 경력사원이라는 점이 주요하게 작용한 듯 보였다.

 

“한 달에 한 번씩 뽑은 모양이더라고. 건조1부에 용접반이 한 반밖에 없었어요. 25명이 되버리니까, 반장이 다 정리를 못하니까, 반장을 한 명 더 만들어야 하는 기라. 그래서 나이 많은 내를 뽑은 기라. 그래서 반장을 시킨 거라. 그래서 김반장이 졸지에 됐지. 현장의 4대 장성이 된 거 아이가. 사장, 부장, 팀장, 반장이 4대 장성이거든.

25명 중에서 두 개 반으로 나누니까 실력이고 이런 거 떠나갔고, 말 안 듣고, 즈그가 얘기하는 꼴통들은 내 반으로 보낸 거야. 그게 내하고 궁합이 맞은 거야.

처음에 내가 반원들 하고 만나서 ‘내가 조선소를 세 번짼데, 좋은 인연이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인사를 했어. 그때 8월에 들어갔으니까 덥고 비도 많이 오고 그래서 물청소 하고 그랬어. 비오면 작업이 안 되니까 탈의실에서 반장이 교육을 시켜. 교육을 시키면서 내가 ‘노동자는 몸뚱아리 하나가 전 재산이니까 다치지 마라’ 그러니까 반원들이 놀래. 서른 일곱이 우리반에 제일 나이 많고 스물 아홉이 제일 적고, 애들이 30대 초반 중반이야. 내가 13명을 관리하고 있었거든. 내가 인간적으로 대해주고, 말도 안 놓고 그러니까 반원들이 완전히 놀래는 거야.”

 

하지만 작업자들 중에 대우조선 출신들이 종종 있어서 김정곤의 신분은 16일만에 드러나 갑작스럽게 해고통보를 받게 된다. 첫 구속이 됐던 87년 8월 22일에서 정확히 20년이 지난 2007년 8월 22일 김정곤은 다시 해고를 당한 것이다.

이후 지방노동위원회에서 부당해고 판정을 받았지만 회사의 입장은 단호하다. 그래서 오늘도 회사 정문 앞에서 외로운 복직투쟁을 벌이고 있다.

 

이곳 저곳 교육들을 많이 다니고 20년에 이르는 활동 속에서 그 변화를 몸으로 겪어왔던 김정곤은 현장활동의 기본과 중요성을 무수히 강조한다.

 

“옛날에 ‘내가 낸데’ 하던 사람들이 개량주의 투항주의로 다 바뀌면서... 처음에는 어용들이 함부로 못 했어요. 어용이라도 표시 못 내고 부끄러워했는데, 요즘은 당당하게 ‘내가 어용인데 와?’ 이래. 자기 논리 만들어갔고 하는 게 너무 안타깝고... 패죽이고 싶어.

그리고 조합원 탓을 많이 하는데, 조합원 탓하면 안 돼. 조합원 탓하면 그거는 맛이 가는 첫징조인거야. 내가 그 조합원들을 얼만큼 조직하고 대화를 했냐는 거거든...

나는 현장에서 간부 생활 많이 하면서 뭘 느꼈냐 하면은... 예를 들면, 작업환경측정 하러 현장에 들어간다 말야. 측정장비 차라고 그러면 조합원들이 그런다 말야 ‘안 그래도 정신없이 많이 차고 귀찮은데 또 장비까지 차라고 한다’고... 그런데 채워주면 채워주는데로 가만히 있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들은 발전이 없어. 그런 사람들은 회사편이지... 채우면 ‘김부장, 이거 하면 뭐하는데? 발전도 없이 현장에 변화도 없는데 이거 뭐 할라꼬 자꾸 하노?’ 이런 사람이 일반사람은 딱 들을 때 ‘저 새끼 우리편 아니구나’ 이렇게 할지 몰라도 그런 사람을 꾸준히 대하라고... ‘형님 맞습니다. 맞는데, 현실이 이래이래 돼서 노동조합이 한계점이 이렇고 이런 겁니다. 이랬을 때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몇 번을 만나서 현장에 가서 인사하고 ‘이거는 여기 있는 노동자가 아니라고 그러면 아닌 겁니다. 그런 건 가르쳐 주셔야 됩니다. 나는 부서가 여기가 아니기 때문에 여기 잘 모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현장모니터 요원이 되는 거야.

또 노동재해를 당해갖고 상담을 하러왔어. 해결사 역할을 해버리면, 그 사람은 고맙다는 것은 느끼지만 노동조합을 자판기로 생각해버리는 거야. 신세진 거로 끝나버려. 이 사람들한테 거만해서도 안 돼. ‘형님, 모르는 거는 죄가 아닙니다. 요거는 부서에 가서 이렇게 하십시오’하고... 2단계까지 가르쳐 주면 이 사람들이 헷갈려서 몰라요. 그렇게 자꾸 다니면 조합이 함께 한다는 것을 알고 자신감을 갖고 이 사람이 쭉쭉쭉 해 봐요. 해보다 보면 맞아 들어가거든. 노동부나, 회사지정 병원이나, 회사나, 근로복지공단이나 똑같이 한편이라는 거를 느끼고 분노를 느껴. 그렇게 되면 이 사람이 투사가 되는 거야. 집회에 안 나오던 사람이 집회에 나와서 끝나고 나면 내한테 와서 눈사진 찍으러 와. 거기서 활동가를 키워나가는 거거든.

그게 일상활동 강환데... 말로만 신자유주의 박살내자 그러는데, 거대한 자본에서 어떻게 박살낼 건데? 일상활동 조금씩 조금씩 해나가면서 현장조직력이 강화되는 거잖아.

지금 ‘조합원이 안 따라주고, 조합원이 영악하다’고 그러는데... 당연히 영악하지. 벌써 20년 역사를 다 함께 지냈는데... 가만히 있으면 피해보지 않고, 적당히 있어서 때 되면 임금 올려주고 하는데... 우리가 그렇게 만든 거야. 그래놓고는 조합원 탓 해 버린다는 거야.”

 

대공장 정규직노조 위원장 출신이고 아직도 정규직 활동을 하고 있는 김정곤은 단호하게 ‘정규직 운동이 끝났다’고 얘기한다.

 

“나는 정규직 운동은 끝났다고 보거든. 미조직 노동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영세 노동자들이 진짜 세상을 엎는 그게 올 거라고. 모든 거 앞에 거대한 장벽이 자본이 아니고 정권이 아니고 정규직이 있다는 거야. 그거를 뚫어야 되는 거라고. 이 거 한 번 뒤집어 진다고 보거든. 그 희망을 갖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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