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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이란...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아간다. 그들에게는 다 나름대로 살아가는 이유가 있다. 그들이 살아가는 이유를 듣다보면 서로 다르면서 같기도 한다. 그게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동질성이다.

여기저기에서 힘들게 투쟁하는 이들이 참 많다. 그들은 세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서로 비슷하면서 다른 경험들을 갖고 있다.

 

2001년 유미희는 효성노조 파업투쟁에 함께 하면서 그의 모든 에너지를 발산했다. 그는 그곳에서 대중과 함께 하는 호흡과 그 힘을 만끽했다. 그의 삶에서 가장 격렬하고 힘찼던 투쟁이었다.

 

“내가 효성에 들어가서 하지 못했던 투쟁들을 거기서 다 했다고 보면 되고, 내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에너지를 다 짜냈다고 보면 되고, 그리고 투쟁하는 사람들과의 사랑이라는 걸 느끼게 되는 계기가 됐어요. 아주 강력한 소통이 오고가는 현장이었어요. 말 한마디를 해도 신뢰와 애정과 걱정을 가지고 하고 있음을 느끼죠. 오늘 밤 함께 넘겨야 되는... 세상에 보지 못했던 온갖 험한 꼴을 다보고, 두렵고 무서웠던 거는 마찬가지였어요. 지나고 나면 ‘우리가 어떻게 이런 상황을 견뎠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투쟁하는 과정에서 봐왔던 사람들에 대한 신뢰와 같이 그 고비를 넘어가는 과정에서 삶에서 쉽게 느낄 수 없는 것을 느꼈죠. 날마다 초초해 하면서도 날마다 함께 느끼고... 그때 18시간씩 집회를 해도 목이 안 쉬는 거야. 프로그램들을 계속해서 생성해내고... 그때 문화패 단위들이 많이 붙어서 했었고... 13년만의 파업이었는데, 이들한테는 파업 자체가 정말 희망이었던 거였어요. 불법이든 뭐든 이런 게 중요하지 않았고... 굴종된 삶이 너무 차있어서 터지는 순간들이었다고 보거든요. 거기에 전적으로 호응하고, 그거를 최대화시켜내고...”

- 문화활동가 유미희

 

중학교를 졸업하고 여기 저기 돈을 벌기 위해 다니던 조돈희는 81년 현대중공업에 들어가고, 예상치 못했던 87년 노동자대투쟁의 한복판을 경험하면서 노동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20대의 열정과 함께 시작한 노동자대투쟁의 열기가 조금씩 사그라지기 시작할 즈음 나이 사십을 앞두고 있던 조돈희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세 번째 구속을 경험한다.

 

“어떤 사람이나 그런 걸 경험한다는데... 조직사건 터지고 나면 절망에 휩싸이지... 일반 노동사건 하고는 차원이 다르지. 조사받는 과정도 제네들 압박에 의해서 되게 패배적으로 받고... 조사 끝나고 징역에 살면서 ‘제네들 손바닥 위에서 우리가 놀았다. 이래 갖고 무슨 혁명을 하냐?’ 그런 생각 들고... 조직 활동하기가 두렵고... 그래서 힘들었는데...

그때 궁금한 게 하나 있었어. 조직 사건 중에 주사파 조직인 구국전위 사건으로 들어오신 어르신들... 징역을 20년을 살고 나와서 또 다시 20년을 받고도 꿋꿋한 어르신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경험도 짧지... 나이도 많다고 하나 저 양반들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 ‘무슨 신념이 있어서 그럴 건데, 그 신념은 어디서 오는 건가?’ 이게 굉장히 궁금했어.

그 해답을 찾지 못하고 빵에서 1년을 보내고 나와서 나는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거든... 나중에 보니까 우리들의 조건이 변한 게 하나도 없더라. 여전히 싸움박질이고, 탄압 당하고, 자본의 통제 속에 갇혀 있고... 또 다시 활동할 수밖에 없어서 활동하고 있는 것이라는 거지.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 한...”

- 현대중공업 조돈희

 

민주노조 기반이 척박한 양산에서 한국노총 사업장 민주화를 위해 10년을 활동해왔던 이들이 있다.

 

"누가 알아주기를 하나... 활동가로 보입니까? 뭐라고 내놓고 하면 하는 것 같기라도 한데... 성취감 자족감 이런 거 별로 없잖아요.

......

민주노총 잘 나갈 때는 ‘뭐 하러 한국노총 그렇게 열심히 하냐. 나중에 민주노총 산별 되면 다 올 건데 밖에서 하지’ 그런 얘기도 있었어요. 노동운동을 하면서 수월한 길도 있지만, 이런 일을 안 하고 노동운동을 할 수는 없잖아요. 현장에 직접 들어가서 바꿔내는 게 쉽진 않지만 해야 되는 일이잖아요.”

- 양산지역 활동가

 

비정규직 노조는 하나 같이 어렵다. 그곳에서 투쟁다운 투쟁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노조 깃발만 힘겹게 움켜쥐고 있는 윤순재에게 버티는 것 자체가 투쟁이다.

 

“노조 만든 지 4년 됐는데... 똑 같아요. 대신 아는 사람들은 많이 늘긴 했는데... 나이 사십이 가까워지니까 개인적인 처지에 대한 문제로 또 다른 벽이 부딪히는 거예요. 그러면 이걸 어떻게 할 거냐... 지금 할 수 있는 거 하면서 꾸준히 가는데...

우리가 전화국의 간접고용 하청구조이기 때문에... 전화국이 다 뭉치기 위해서는 업체별 작은 벽을 넘고, 이거 뒤에 KT가 있고, KT 뒤에 신자유주의 정책이 있는데... 작은 벽 넘는다고 그 다음에 큰 벽이 있고 이런 거 아니에요. 같이 한꺼번에 서있는 거예요.

그래서 4~5년 해서는 힘들다. 전화국에 있을 때까지 20년 인생을 걸고 승부를 걸든가... 이런 과정을 수십 번 거쳐야 가능성이 보이겠다... 계속 모여서 부딪혀 보고, 또 부딪혀 보고... 제일 중요한 건 그런 거 같아요. 현장에서 자기를 믿는 사람을 얼마나 확보하느냐... 회사랑 붙었을 때 내편이 돼 줄 수 있는 사람을 얼마나 만드느냐 하는 것이... 그거를 만드느냐 못 만드느냐 하는 것에 승부가 달려있다고 생각해요.

현장에서 정체가 완전히 드러났거든요. 그래서 행동을 말끔히 해야 현장에 믿음이 생기고, 회사하고도 쉽게 대응할 수 있고...

......

활동하는 사람들이 20대 때 가졌던 열정이 10년 가면 30대 중반이 되는데... 5년 10년 박았는데... 성과도 안 나고 지친다고요.

현장에서 내가 믿음을 저버리면 나와 함께 하는 동지들이 깨진다고요. 지금이 크냐 작으냐 하는 거는 진짜 작은 문제예요. 중요한 것은 내가 이 길을 계속 갈수 있느냐가 중요하죠. 현장에서 자기가 서야 그 현장이 설 거고... 그러면 후배들과 믿음과 신뢰가 가는 관계가 있는 거잖아요. 거기에 행복이 있는 거죠. 이 길을 계속 간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죠.”

- 서울통신산업비정규직노조 윤순재

 

공무원노조는 직장협의회를 시작으로 10년을 쉼 없이 달려왔지만 힘겹기만 하다. 그 나마의 조직력도 완전히 무너진 공무원노조 울산본부 여승선은 동지애로 그 힘겨움을 버티고 있다.

 

“얼마 전에 술을 진탕 먹은 적이 있어. 그런데 한 동지가 나한테 ‘내가 나태해져서 미안하다’고 그러더라고. ‘좀 더 열심히 하면 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내가 팍 땡길 수 있는 어떤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같이 이런 고민들 해보면 충분히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요.”

- 공무원노조 울산본부 여승선

 

진주햄에서 10년을 싸웠지만 현장은 아직도 암울하고, 이은아는 두 번째 해고를 당했다. 그는 지금 함께 투쟁하는 이들 속에서 다시 힘을 얻고 있다.

 

“저는 해고되고 나서 오히려 좀 살맛이 나거든요.

현장 조합원들 하고 더 함께 소통할 수 있는 통로가 차단되는 것은 많이 힘들어요. 이거는 노력부족이 아니고 해고자이기 때문에 더 이상 안 되는 게 있어요. 그런 거에 대해서는 항상 고민이고, 어떻게든 소통을 하기 위해서 다달이 소식지 만들어서 우편으로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렇게 하는 거 말고는 현장과 소통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런 게 많이 고민되기는 하지만...

한일제관 투쟁할 때 울해협(울산지역해고자협의회) 동지들 하고 같이 하면서 울산지역의 투쟁하는 동지들 많이 보고, 부양해복투(부산양산지역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하면서 부산지역의 많은 동지들 만나서 얘기도 하고... 그렇게 투쟁하는 동지들 보면서 저는 배우는 게 많아요. 그렇게 주변을 돌아보면서 앞으로 계속 달려가야겠다고 생각을 해요.”

- 진주햄 이은아

 

1000일이 넘는 농성과 안 해본 것 없이 다 해본 투쟁 속에도 기륭전자 문제는 전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고 있다. 김소연은 분노와 의리로 그 모진 세월을 버티고 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질문하는 건 ‘어떻게 그리 오랫동안 버틸 수 있냐?’ ‘생계도 어려운데 다른 데 가야되지 않냐?’ 그러는데... 솔직히 기륭 아니면 내가 갈 데 없겠어요?

그런데 문제는 가도 똑같고, 우리 투쟁으로 인해서 공단은 심각한 상황이 된 거예요. 이 문제는 누구든 제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고, 지나온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도 있고, 그동안 우리가 해왔던 것이 너무 억울해서 이거 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분노가 있는 거죠.

그리고 또 하나는 의리예요. 조합원들끼리의 의리와 더불어서 진짜 많은 동지들이 이 투쟁을 함께 했어요. 지금까지 들어온 투쟁기금 합치면 억 단위가 넘죠. 그 의리를 지켜야 된다는 게 있죠.”

- 기륭전자 김소연

 

앞만 보면서 열정적으로 달려왔던 이지영에게 30대 후반의 나이게 고비가 찾아왔다. 그 고비를 넘기게 해줬던 힘은 신념과 열정과 조직에 대한 애정이었다.

 

“2002년쯤에 너무 지친 거예요. 당시에는 노동운동도 재미가 없어지기 시작할 때였거든요. 운동의 객관적인 조건도 그렇고 내 상태도 그러니까 다 때려 치고 싶은 그런 상태였어요. ‘이걸 계속 한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나?’ 이런 생각도 들고 그렇긴 하는데 그때 잡아준 게 노뉴단이죠.

나를 움직이는 세 가지가 있다면 신념하고, 열정하고, 노뉴단이라는 조직에 대한 애정이에요. 신념과 열정이 흔들렸을 때 노뉴단이라는 조직이 나를 잡아줬거든요. 신념과 열정도 자기하기 나름이라고 봐요.”

- 노동자뉴스제작단 이지영

 

다문화가정 주부들을 대상으로 한글교실을 운영하고 있는 김영표는 ‘늪’이라는 표현을 썼다.

 

“늪은 한 번 발이 들어가면 더 깊이 들어가면 들어갔지 못 빼요. 처음에는 상담에서 시작했죠. 그러다보면 그들의 생활, 그들의 아픔을 알게 되고. 그러면 한 발 더 들어가요. 그러다보면 계속 빠져드는 거예요. 못 빠져나와요. 그들과 같이 갈 수 밖에 없어요.”

- 부안 이주여성 한글교실 김영표

 

20년 넘는 세월을 열정으로 달려온 박훈은 사라들과 함께 세월을 같이 가는 운동을 고민하고 있다.

 

“나는 좀 더 생활에 밀착했으면 하는 생각이 강해요. 생활에 밀착한다는 게 웃기는 이야기 중의 하난데... 아무 것도 할 일이 없거든요. 맨날 술이나 먹고... 그게 의미가 있다면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세월을 같이 갈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긴데... 세월을 같이 간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크고... 지금 굉장히 흔들리는 세월인데... 흔들리는 세월에 인생을 세워야 하는 순간에 와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 노동변호사 박훈

 

40대 활동가들에게 20대의 열정을 기대하는 것을 무리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송경동은 그런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지금까지 걸어왔던 그냥 그 길을 따라가겠다고 한다.

 

“이제 마흔 둘이죠. 그간 어찌됐든 문학예술운동, 노동운동, 지역운동, 언론·출판운동 등 조금씩 다 해왔던 거 같애요. 그런 걸 쭉 해왔는데 ‘이제 어떤 자리에서 어떤 사람들과 어떤 정도의 얘기를 할 것인가?’ 그것을 고민하고 있어요.

방향에서는 고민이 없어요. 걸어 왔던 길을 더 열심히 더 철저히 가고 싶은 마음뿐이니까요. ‘이제 죽을 때까지 이 길 가겠네’ 하는 생각은 해요. 그런 만큼 이제부터는 더 잘해야겠죠.

마음은 그런데, 내 구체적인 삶이 거기에 합당하게 따라줄 수 있겠나... 그런 부분에서는 나도 많이 속화된 부분도 있지 않나... 청년기처럼 용기가 없어진 것도 있지 않나... 웬만하면 대충 인정하고 싶고... 나도 대충 이 정도만 발 담그고 싶고... 내 자리도 잡고 싶고... 나도 이 사회에 살다보니까 어떻게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더 이상 속화되지만은 말자 이런 생각 정도를 하죠. 내 마음에 100% 순도의 뜨거운 열정이 없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요. 하지만 그게 없더라도 몸이라도 그 길을 따라가고 싶어요. 전 아직도 마음과 생각보다는 몸이 어디에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구닥다리인가 봐요.”

- 시인 송경동

 

부안 계화도 주민들은 10년 가까운 세월을 정부를 상대로 싸워왔다. 결국 그들은 새만금 방조제 공사를 막지 못했다. 그들에게 투쟁은 무엇일까?

 

“2001년 5월 24일 정부가 순차개발 이라고 하면서 공사개재를 해요. 그때부터 환경단체 이런 단체들이 힘이 빠진 거예요. 끝날 줄 알았는데, 정부는 공사개재를 해버렸고... 우리도 넉아웃 됐어요. 그때부터는 정말 지루한 싸움을... 그전에는 정말 생기 넘치는 싸움을 했는데, 그때부터는 진을 빼는 싸움을 하는 거예요.

‘어디 집회 한 번 같다 오자’ 그러면은요, 갔다 와서 3개월 동안은 완전히 초상집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가 갈 때는 사람들한테 설득시키고 이런 것이 정말 중요해서 사람들한테 필요하다고 해서 가잖아요. 사실 갔다 와봐야 바뀌는 게 아무 것도 없어요. ‘우리가 뭣 때문에 갔다 오냐’ 이런 것들 때문에 서로가 싸우고 그래요. 그런 것들이 거의 3개월 정도 가요. 3개월 정도 하나가 또 사람들 만나서 얘기하고 그래서 가고...

......

순차개발 하면서 공사재개가 되니까 청년들도 다 나가떨어지고... 그러면서 마을총회를 했어요. 마을총회를 하니까 ‘이제는 우리가 할 일 다 했다. 우리가 해서 관을 이겨 먹을 일도 아니고, 그동안 했던 역량을 통해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그때 나온 얘기는 선착장 얘기도 있었고, 대체어장 얘기도 있었고... ‘이런 것들을 주로 해가지고 반대싸움을 해야 된다’ 이렇게 마을총회에서는 했었고... 난 그게 마음에 안 들더라고요. 그래 갖고는 3개월 정도 침묵의 시간이 흘렀어요.

‘새만금을 지키는 부안사람들’ 사무실도 부안에서 계화도로 왔었어요. 그런데 ‘부안사람들’도 완전히 넉아웃 되가지고 셔터를 다 내려놨었어요. 그게 3개월간 셔터를 내려놓고 아무도 들어가지 않고 그렇게 있는데, 지나가던 여자분들이 그런 걸 보고 굉장히 마음이 안 좋았던 가 봐요. 나를 보고 ‘왜 사무실을 닫아놓느냐’고 답답하니까 다른 건 안 해도 좋으니까 사무실을 열어 놓으래요. 그래서 열어놨어요. 열어 놓으니까 발길들이 오가게 됐어요. 그때부터는 청년회나 이런 사람들이 아니고 여성분들이 오는 거예요. 싸움을 하면 남자들은 주둥이만 있고, 실제로 싸우는 건 여자들이 싸워요. 그때부터 지금까지는 여성중심의 싸움을 했어요. 신나는 싸움은 청년회 중심으로 했었고, 진을 빼는 싸움은 여성분들이 한 거예요.

......

2005년에는 숨을 못 쉬었어요. 그때는 우리들도 완전히 가라 앉아 있을 때였어요. 이미 ‘새만금은 끝났다’ 그러면서... 환경단체도 공사중단이나 이런 것보다는 막은 이후의 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어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숨이 막히는 거예요. TV만 틀면 연일 ‘2006년 4월 23일이면 막는다’ 그러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는 게 없는 거예요. 모든 힘이 다 떨어져 버려서...

그래갖고는 계속 끙끙 앓고 앓고 하다가 여성분들이 10월에 모여서 나온 얘기가 ‘우리 청와대에 1인 시위를 해보자’ 그런 거예요. 그래서 10월 말에 시작해서 12월 19일까진가 했어요. 여기서 거기 갈라면 5시에 일어나야 하고... 그때가 겨울이라서 춥기도 하고... 그걸 할 때는 경비나 이런 것들 본인 부담하면서 하기도 했거든요.

그것을 하면서 마지막 물막이 싸움의 시초가 거기서 만들어진 거였어요. 1인 시위를 하니까 청년회에서도 그걸 알게 됐죠. 그래서 모여 갖고 ‘우리도 이렇게 있어서는 안 되겠다’ 했어요. 우선은 재정지원을 해주자 해서 돈을 줬어요. 청년회에서도 자원을 받아서 1인 시위 할 수 있는 사람 했고... 그러면서 지역 안에 암울했던 생각들이 깨어났죠. 다 끝났다고 하는데 그걸 하니까...

......

그래도 뭔가 바뀌어야 해겠다 그래서... 그전까지는 우리가 의도적으로 뭔가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찾아오고 그랬는데, 막힌 후로부터는 그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나름으로 뭔가 해서 알려내고 사람들을 받아내야 하고... 그래서 체험프로그램이나 이런 걸 2007년에 했어요. 실제로 생계가 힘든 분들을 위해서 체험프로그램이 필요하겠다 싶어서... 그리고 ‘관은 크고 강하고 나는 너무나 약하다’는 이런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되겠더라고요. 자기 스스로는 정말 아무것도 안할라 그래요. 나는 오로지 돈 버는 일만 하려고 그러지... 지역을 가꾸어 내고 우리 스스로가 관에 의지하지 말고... 힘든 것들을 우리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돈이라도 내고 뭔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나올 수 있다. 그런 것들도 바꿔내야 할 것 같고 그래서 작년에 체험프로그램을 했어요.”

- 부안 계화도 주민 고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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