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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저에게도 꿈이 있습니다

 

저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합니다. 정식 화가로 불리지는 않지만, 주위에서 저를 아는 분들은 제가 그림에 꽤 재능이 있다고 칭찬해주십니다. 그런 게 좋아서 개인적으로 그린 그림들은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지요.

 

어렸을 때는 특별히 그림에 재능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국민학교 4학년쯤에 그림대회에 나가게 됐는데, 뭘 어떻게 그려야 할지 몰라서 옆에서 그리고 있는 친구의 그림을 따라서 그렸더니 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히히, 좀 웃기는 얘기죠? 상을 받고 나니까 저한테 그림에 대한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신 아버지가 다섯 권짜리 회화전집과 물감과 스케치북 같은 것들을 사주셨습니다. 당시 저희 집 형편에서는 그 정도도 큰 마음 먹고 하신 거였거든요.

익히 예상하시겠지만, 그런 그림 실력과 그 정도의 투자로 제 그림 실력이 늘지는 않았습니다. 저도 잠시 그림 그리는 것에 열중해봤지만, 곧 재미가 없어져버려서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로는 그림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었는데, 고등학교 2학년 때 미술시간에 대한 기억은 생생합니다.

당시 고등학교 선생들이 대부분 그렇기는 했지만, 미술선생이 유별나게 폭력적이었습니다. 준비물이 하나라도 빠지거나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 없는 매질이 이어집니다. 그래서 미술시간만 되면 모두가 수용소에 끌려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 즈음에 저희 집 분위기가 많이 안 좋았거든요. 아버지가 오랫동안 실직을 하셔서 엄청 힘들었던 시기였습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지옥 같았죠. 그런 상황에서 미술선생이 그림 그리기 숙제로 자기가 사는 집을 그려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림을 그리려고 마당에 나와서 우리 집을 바라보고 있는데, 도저히 뭘 그려야 할지 모르겠는 거예요. 가슴 속에는 온통 답답함과 무서움뿐인데, 보기만 해도 숨 막히는 우리 집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그래도 매 맞는 것이 더 무서웠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그림을 그려서 다음날 미술시간에 내놓았습니다. 미술선생이 몽둥이로 제 머리통을 치면서 했던 말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야, 내가 추상화를 그리는데, 니 그림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이게 니네 집이냐?”

매를 맡지는 않았지만, 차라리 매를 맡는 게 나았을 뻔 했습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그림과 관련해서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이 두 가지가 전부입니다. 그러고 보면, 저는 그림에 대한 선천적 능력도 없고, 미술 교육을 제대로 받은 것도 아닌 셈이지요.

 

그러다가 20대 후반쯤에 그림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것도 조금 웃기는 얘기지만, 유행을 탄 측면이 있습니다. 그때 회사생활도 적응되고, 경제적으로도 조금 여유도 있고, 돌봐야 하는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닌 자유로운 독신이었거든요. 제 주위 친구들이나 선배들도 보면 주식들도 많이 하고, 차를 사서 여행 다니는 사람도 많았고, 맛집 찾는 모임도 많았고, 패러글라이딩이나 스킨스쿠버 같은 고급 레저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하는 때였어요.

그런 유행 속에서 나도 뭔가 멋스러운 취미생활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회사동료의 소개로 미술학원을 다니게 됐습니다. 왜 미술학원을 선택했는지는 저도 잘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 동료가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유화를 가르친다는 그 학원을 소개해줬던 점도 있고, 남들이 유행처럼 하는 것들과 조금은 다른 것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고, 몸을 쓰는 것보다는 뭔가 생각도 하면서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고... 암튼 그런저런 이유들로 인해서 특별한 고민 없이 미술학원을 다녔습니다.

그 학원이 미대 가기 위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입시학원이 아니라 직장인과 주부들을 대상으로 하는 학원이라서 프로그램이 참 재미있었습니다. 가까운 야외로 나가서 풍경화도 그리고, 서로가 모델이 돼서 인물화도 그리고, 각자의 소중한 물건을 갖고 와서 정물화도 그리고, 좋은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듣고 나서 그 느낌을 그림으로 그리기도 하고... 그런 식으로 프로그램들이 재미있어서 열심히 학원을 다니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1년이 조금 안되게 학원을 다녔는데,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시간이 되면 가까운 야외로 나가거나 동네 주변에서 그림 그리고 하는 재미에 빠져서 살았습니다. 나중에 나이 들면 내가 돌아다니면서 그림 그림들을 모아 전시회 같은 걸 하면 멋있겠다는 생각도 가끔 하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세상사는 게 자기 뜻대로만 되지는 않잖아요. 점점 회사 일도 바빠지고, 나이 삼십을 넘기면서 이런 저런 고민과 걱정들도 늘어나면서 그림 그리는 일이 조금씩 시들해졌습니다. 결혼을 생각하면서 사귀던 사람하고 헤어지면서 많이 방황도 했고, 객기로 새로운 도전을 해본다는 마음에 옮긴 직장에서 적응을 못해서 1년 정도 허송세월도 보내고, 자격증 준비한다고 학원도 2~3군데 다니다가 그만두기도 하고...

그러다보니까 어느 순간 30대 중반이 돼 버린 거예요. 눈 앞에 나이 사십이 보인다고 생각하니까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별달리 이룬 것도 없고, 모아 놓은 것도 없는데, 더 이상 청춘이 아니라 중년이 되고 있는 내 자신을 보게 된 거죠.

정신 바짝 차리고 일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하는데, 그게 쉽나요. 나중에는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리고 옛날 회사 동료나 학교 친구들도 찾아다니면서 부탁을 해봤는데, 형편없는 자리만 겨우 몇 개 나오는 거예요. 정말 비참하데요.

그런 기간이 조금씩 길어지기 시작하니까 비참한 걸 넘어서 숨이 막혀오기 시작해요. 그래서 친구가 소개해 준 회사에 경력도 아니고 신입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로 들어갔죠. 자존심 다 버리고 들어간다고 생각했는데, 어정쩡한 위치에서 나이 어린 상사들 눈치 보면서 일하는 게 쉽지가 않더라고요. 6개월 다니다가 그만뒀어요. 장사를 같이 해보자고 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건 정말 자신이 없었어요. 돈 버리고 친구 버리는 지름길이 동업이라는 얘기를 워낙 많이 들어서... 중간 중간 노가다도 나가고 그랬는데, 사무실에서 앉아서 일만 해오던 내가 노가다를 꾸준히 하는 것도 어렵더라고요. 나중에는 공공근로도 나가서 할아버지들 하고 같이 일도 해보고, 아주머니들 하고 같이 도배 보조도 해보고 그랬어요. 그런 일 자체가 어려운 건 없었는데, 안정적인 일이 아니라는 게 제일 힘들었죠. 몇 달 하다 마니까.

그렇게 점점 나이는 들어 사십이 되어 가니까 미치겠는 거예요. 그때 아는 형이 자기 회사에 와서 일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이것저것 생각하고 자시고 할 처지가 아니잖아요. ‘고맙습니다’ 하고 열심히 다녔는데, 회사에는 금방 적응되고, 혼자 사는 삶이라서 생활도 쉽게 안정이 되더라고요. 외롭다는 것 빼고는 몇 년 동안 괜찮았어요.

휴~우~, 인생이 편한 일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전세 살던 집주인이 부도로 집을 날렸는데 전세금을 반 밖에 못 받는 거예요. 황당해서 미치겠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빚까지 남겨주셨더라고요. 장래 치르고, 빚 청산하고, 어머니 소일거리 마련한다고 이것저것 하다보니까 남아 있는 전세금도 다 없어져 버린 거예요. 그래도 혼자 사니까 버틸 수 있다는 생각에 월세로 옮겨서 버티는데, 회사 운영하던 형이 사고로 죽고 나서 회사는 얼마 후에 문 닫고, 어머니가 일 하다가 다쳐서 또 목돈 들어가고, 술 먹고 가다가 싸움 붙어서 합의금 들어가고... 이런 일이 연달아 일어나니까 정말 미치겠더라고요.

그때 마음에 두고 있던 사람이 있었거든요. 내가 너무 힘들어서 의지하고 싶은 마음에 고백을 했는데 거절당했어요. 그러고 나서 옛날 회사 사람들이랑 술 먹다가 성추행해서 고발당하고... 완전히 망가져갔던 거예요.

그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어머니 장례 치르고 나서 고향 집에 있으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그래서 고향에 내려왔어요. 더 망가지면 안 될 것 같아서...

 

내려와서 벌써 5년이네요. 그동안 그냥 혼자서 지냈습니다. 사람들 만나는 것도 힘들어서 일부러 만나지 않다보니까 이제는 거의 연락도 없어요. 3명 정도 가끔 연락하는 정도죠. 나 같은 놈 누가 기억이라도 하겠어요?

하는 일은 거의 없어요. 농사를 조금 짓는데, 이것도 정성을 들여서 하지는 않습니다. 무슨 의욕이 있어야 농사도 정성껏 하지요. 그래도 소일거리 삼아 할 일이 있다는 게 좋기는 하더라고요.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은 혼자서 tv 보면서 지냅니다. 그렇게 5년을 지내다보니까 버틴다는 게 뭔지를 알겠더라고요.

 

비울 수 없는 쓰리기통에 쓰레기를 계속 집어넣는 방법을 가르쳐 드릴까요?

처음에는 그냥 쓰레기를 마구 집어넣잖아요. 금방 쓰레기통이 차면 쓰레기통을 가볍게 칩니다. 그러면 공간이 생겨요. 그래도 쌓이는 쓰레기 때문에 곧 차오르면 손으로 눌러서 넣지요. 그러다가 또 차면 발로 눌러서 또 넣고, 그러다 또 차면 신발을 신고 꽉꽉 누르면 공간이 또 생기지요. 그렇게 몇 번을 하다가 또 쌓이는 쓰레기 때문에 더 이상 공간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지면 화가 나서 쓰레기통을 발로 뻥 차버립니다. 그러면 그동안 차곡차곡 쌓여왔던 쓰레기들이 주변에 쏟아지지요. 잠시 그렇게 쓰레기를 바라보고 있다가 화가 삭혀지면 할 수 없이 다시 쓰레기를 정리해서 담아야 합니다. 그런데 종류별로 크기별로 정리해서 다시 담으면 또 공간이 생겨요. 그때부터는 쓰레기를 종류별로 크기별로 분류해서 잘 포개면서 넣게 되죠. 그런데 얼마가지 않아서 또 쓰레기가 차거든요. 그러면 쓰레기통을 다시 비워서 쓰레기들을 새롭게 정리해서 넣습니다. 신기하게도 공간이 또 생겨요. 하하하.

답답함으로 꽉 차 버린 마음속에 더 이상 답답함이 들어갈 자리가 없을 것 같은데 들어갈 자리가 계속 생기더라고요.

 

이곳에 내려와서 1년 정도 지났을 쯤에 창고를 정리하다 보니까 옛날 그림도구들이 있더라고요.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그렸던 그림들도 몇 개 나오고요. 그것들을 보니까 기분이 묘 했어요. 길지 않은 삶이지만 그림 그리러 다니던 그때가 제일 행복했던 시간이었거든요. 눈물이 나와서 그냥 막 울어버렸습니다. 한 시간 정도 그렇게 울고 나니까 몸이 힘들어서 더 울지 못하겠더라고요. 답답한 게 조금 풀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나서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거의 집에 틀어박혀 있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집안에 있는 물건들을 하나씩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릴 적 추억이 담기 것에서부터 최근에 부모님이 사용하시던 물건까지 하나하나를 정성껏 그리면서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원 없이 울어봤던 때였어요.

그렇게 몇 달을 그림을 그리면서 울다보니까 제 자신이 너무 불쌍하고, 저한테 미안하더라고요. 그래서 거울을 보면서 제 모습을 그리기도 하고, 옛날 사진들을 보면서 어릴 적 제 모습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를 위로했죠. 이런저런 잘못도 많이 했지만 착하게 살아온 놈이라고...

그렇게 1년쯤 집안에서 그림을 그리다보니까 밖으로 나가고 싶어지더라고요. 그래서 동네 주변을 돌면서 마을의 구석구석을 그렸어요. 무너진 담장도 그리고, 사람이 살지 않아 허름해진 집도 그리고, 뒷산에 있는 묘지도 그리고, 무성하게 자란 잡초도 그리고... 제 상태가 그래서 그런지 그런 것들에만 눈이 가더라고요. 그렇지만 어둡고 슬프게만 그리지 않으려고, 주위에 꽃이나 하늘이나 도랑 같은 것을 같이 그려 넣기도 하고, 될 수 있으면 밝은 색으로 그리려고 했죠.

저를 그리는 것 빼고는 사람 그림은 그리지 않았는데, 가끔 옆집 할머니를 그려드렸어요. 늙고 가난한 할머니가 혼자서 외롭게 지내시는 모습이 안쓰러워서 그림을 그려서 드렸더니 그렇게 좋아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가끔 할머니 모습을 그려서 드리기도 합니다. 할머니 모습을 그릴 때는 가슴이 답답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편안해요. 그래서 할머니 그림을 제일 좋아하게 됐죠.

한 번은 아는 형이 많이 아파서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고생만 하다가 병든 몸으로 외롭게 누워있는 모습을 보니까 가슴이 답답해지는 거예요. 제가 도와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서 그림을 하나 갖다 드렸거든요. 나중에 보니까 그 그림을 천장에 붙여 놓았더라고요. 누워 있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거기 붙여 놔야 자주 볼 수 있다면서... 그때 제 그림이 사람들한테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죠.

그 후로도 혼자서 지내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외로움을 느낄 때 술을 먹는 대신 그림을 그리게 된 게 달라진 점이죠. 쫙 찬 쓰레기통에 또 하나의 쓰레기를 밀어 넣는 방법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러다 문득 ‘나만큼 외롭고 힘든 사람들에게 그림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왕이면 많은 사람들에게 줄 수 있게 책으로 만들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저도 이해가 잘 되지 않지만, 그런 생각이 머리 속에 들어오니까 해보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출판에 대해서 알아보게 됐어요.

출판 쪽으로는 아는 사람이 없어서 무식하게 밀어붙여 봤어요. 먼저 제 그림들을 그림파일로 만들어서 주제별로 정리하고, 조잡하지만 간단히 편집을 해서 책 모양 비슷하게 만들었어요. 그리고는 인터넷을 뒤져서 그림에 대한 책을 만드는 출판사들의 메일을 모았죠. 그중에서 어느 정도 규모가 있고, 무명화가의 그림도 출판할만한 곳에 메일을 보냈어요.

 

문의 드립니다.

저는 공식 등단이라는 이런 과정을 통해 화가라는 이름으로 활동해본 적도 없고

미술 관련한 단체나 사람들과 어울려 본 적도 없는

그저 그런 사람입니다만...

지난 몇 년간 그림이라는 것을 그려봤습니다.

별 볼일 없는 이런 사람이 그린 그림도 책으로 낼 수 있을까 해서 문의 드립니다.

한 번 보시고 답변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너무 잘난 척 보이지도 않고, 너무 자신감 없어 보이지도 않으려고 고민 고민 해서 그림 파일과 같이 보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밑져야 본전이다는 생각에 시도해본 거죠. 그런데 메일을 보내고 바로 다음날 답신이 왔어요. 원고를 받았는데, 미술관련 담당부서가 따로 있으니 그쪽으로 다시 보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긍정적인 내용은 아니었지만 씹지 않고 답변을 해주는 걸 보니 왠지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해당부서로 메일을 보내고 초조하게 기다렸어요.

그때 정말 많은 상상을 해봤습니다. 책이 나오면 누구누구에게 보낼까 하면서 리스트도 만들어보고, 책에 들어갈 약력은 어떻게 써야 하는지 고민도 하고, 이 책이 알려져서 인터뷰가 들어오면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생각도 해보고, 책이 잘 팔려서 이런저런 사람들이 연락을 해오면 어떻게 거절해야 하는지 하는 꿈같은 상황도 그려봤습니다. 히히, 우습죠? 제가 생각해도 우습기는 한데, 나도 다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상상을 한다는 자체가 좋았어요.

그렇게 보름 정도, 초조하면서도 약간은 들뜬 상태로 지냈지만, 출판사에서 답장은 오지 않았습니다. 승낙인지 거절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어서 다른 출판사로 다시 메일을 보냈습니다. 또 다시 이런 저런 상상을 하면서 보름을 보냈지만 그쪽에서도 답장이 없더군요. 세 번째로 다른 출판사에 메일을 보냈지만 역시 답변이 없었습니다. 이게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시작했죠. 나름대로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하는 곳들을 선택해서 메일을 보냈는데, 다섯 번째 만에 한 출판사에서 답변이 왔습니다.

 

소중한 원고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현재 저희 편집부에서는 투고 원고를 검토/진행하고 있지 않습니다.

매년 초 공지되는 한민족미술대전 수상작과 수상작가의 후속작을 중심으로 진행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기회가 되면 한민족미술대전을 통해 다시 뵙길 바랍니다. (매년 3월 말까지 접수 받아, 5월 말에 수상자를 발표합니다)

감사합니다.

 

조금 띵 했죠. 나 같은 놈이 넘볼 곳이 아니라는 얘기잖아요. 그런데 오히려 오기가 생겼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미술 관련한 출판사는 모두 문을 두드려본다는 생각에 1주일에 한 번씩 이런 저런 출판사에 메일을 보내기 시작했죠. 그렇게 석 달 동안 열군데 출판사의 문을 두드려 봤지만, 유명한 출판사들은 벽이 높다는 것만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작은 출판사들을 찾아보기 시작했죠. 큰 출판사들은 이름이나 인맥으로 관리되겠지만, 작은 출판사들은 그림 그 자체로 평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거죠. 제 그림을 제대로 살펴보기만 하면 가능성을 알아보는 인재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걸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작은 출판사 중에 미술에 대한 책을 내는 곳이 거의 없더라고요. 그 중에 미술에 대한 책을 낸 적이 있는 곳들을 골라 5군데 정도 메일을 보냈더니, 고미술을 전문으로 한다거나, 교양서만 출판할 뿐 미술 작품을 출판하지는 않는다고 하는 등의 이유로 거절당했죠.

그러다 보니까 제가 좀 우스워졌어요. 거창한 계획 없이 무작정 시도해본 일인데, 혼자서 꿈만 부풀리다가 현실의 벽을 느껴버린 꼴이 된 것이거든요. 책을 낸다는 게 미대 나와서 유명한 사람 밑에 들어가거나, 엄청난 경쟁을 이기고 미술대회에서 입상하거나, 빵빵한 조직에 가입한 사람들만 누리는 특권이더라고요.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좀 화가 나더라고요. 제 그림을 보면서 나름대로 좋아해주는 사람들도 있는데, 허접한 사람들은 책 하나 내는 걸 꿈꿀 수도 없다는 것 때문에... 그럴 때마다 인순이가 부른 ‘거위의 꿈’을 들으면서 화를 눌렀습니다.

 

난 난 꿈이 있었죠.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

내 가슴 깊숙이 보물과 같이 간직했던 꿈

 

혹 때론 누군가가 뜻 모를 비웃음

내 등 뒤에 흘릴 때도 난 참아야 했죠.

참을 수 있었죠. 그 날을 위해

 

늘 걱정하듯 말하죠. 헛된 꿈은 독이라고

세상은 끝이 정해진 책처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라고

 

그래요, 난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

저 차갑게 서 있는 운명이란 벽 앞에

당당히 마주칠 수 있어요.

 

언젠가 난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을 수 있어요.

이 무거운 세상도 나를 묶을 순 없죠.

내 삶의 끝에서 난 웃을 그날을 함께해요.

 

미술에 대한 출판사들을 다 찾아보았어요. 그리고 크든 작든 다 메일을 보냈죠. 역시나 대부분 답장이 없었고, 답장이 오더라도 검토해서 연락을 주겠다는 등의 형식적인 것뿐이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파일로 접수받지 않으니 원본 그림을 보내달라는 곳도 있더라고요.

 

그러면서 그림에 대한 책들도 많이 보게 됐는데, 고호에 대한 책들이 인상적이었어요. 워낙 유명한 사람이라서 이름도 알고 있고, 그가 그린 그림도 몇 개는 알고 있었는데, 막상 그가 살아온 과정이나 그림들을 보게 되니까 정말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울기도 했어요.

고호가 살아서 외로움과 가난 때문에 고통스러워할 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사람들이 그가 죽어서 그의 그림이 재평가 받기 시작하니까 영웅으로 대접해주었잖아요. 그게 무슨 소용이죠? 정작 고호는 고통스럽게 죽었는데... 그리고 고호의 그림들은 돈 많은 사람들이 다 가져가 버렸잖아요. 또 고호에 대한 책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고호를 칭찬하는 사람들은 고호처럼 외롭고 고통스럽게 그림을 그리고 있는 또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기라도 할까요? 그냥 고호의 이름만 팔아먹고 있는 거잖아요!

잠시 흥분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고호처럼 위대한 화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고호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화가 난다는 얘기예요. 한번쯤 저처럼 허접한 사람의 그림도 들여다 봐 주면 안 되나요?

 

6개월 넘게 현실의 벽을 느끼면서 출판사들을 찾아서 메일을 보내기를 반복하다가 어느 대학교수가 쓴 책을 보게 됐는데 눈이 확 뜨였어요. 그림은 특권층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하고, 그림을 그리는 것도 모든 사람들이 즐겁고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었죠. 제가 그동안 느꼈던 현실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는 얘기여서 너무 좋았거든요.

그래서 인터넷으로 그 교수에 대한 정보를 살펴보니까 시민운동도 하고 예술에 대한 책도 몇 권 냈더라고요. 그리고 그 책을 내놓은 출판사도 미술만이 아니라 여러 예술에 대한 책이나 사회문제들에 대한 책들도 많이 낸 출판사였어요. 처음에는 그 교수에게 연락을 해서 도와달라고 해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가, 그건 서로가 난처해질 것 같아서, 그 책을 낸 출판사로 메일을 보냈어요. 그동안 실망했던 출판사들이랑은 뭔가 다를 거라는 기대가 컸는데, 바로 다음날 ‘검토하는데 1주일 정도의 시간이 걸리니까 기다려 달라’는 답장이 왔습니다.

그런 답장을 받고나니까 더 들뜨게 되더라고요. ‘역시 진보적인 곳이라서 다르긴 다르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다시 책을 보낼 사람들 이름도 적어보고, 책에 들어갈 머리말도 적어보고 하면서 진짜로 만들어질 책을 마음속에서 준비했죠.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5일 만에 답장이 왔어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소중한 원고를 저희 출판사에 보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태어날 때부터 '화가'로 태어나는 사람이 하늘 아래 누가 있을까요.

특히나 요즘은 저마다 자신만의 재능이 특별화되고 있고 또 내공도 만만치 않은 터라, 그림의 스펙트럼이 보다 넓고 깊어진 듯합니다.

우선 선생님의 그림을 향한 노력과 열정에 깊은 응원과 감사를 전합니다.

꼼꼼하고 치밀한 묘사와 섬세한 표현이 많은 장점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선생님.. 죄송하게도 저희와는 성격이 맞지 않는 듯합니다.

저희 출판사는 아동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작품을 주로 출간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그림 또한 누구라도 감상할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성인 독자층을 타깃으로 했을 때 더 잘 맞아떨어지지 않을까 합니다.

따라서 선생님의 그림은 일반 성인층을 대상으로 한 출판사들에 더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죄송한 소식을 전해드려 고개 숙여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잔득 기대하고 있었는데, 결국 거절당하는 내용이라서 실망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처음으로 제 그림을 제대로 살펴봐주고 평가를 해줬다는 점을 생각하면서 제 자신을 위로했습니다. 쓰레기통에 다시 쓰레기 하나를 집어넣는 심정으로 ‘거위의 꿈’을 들으면서 술을 한 잔 했습니다.

 

그 후로는 그 교수의 다른 책들을 냈던 출판사들을 찾아서 메일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쪽의 진보적 출판사들은 최소한 제 그림을 살펴보기는 한다는 사실에 기대를 걸었죠. 예술에 대한 전문출판사가 아니더라도 열린 마음과 눈을 갖고 있을 거라는 기대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찾아보니까 ‘민중미술’ ‘대중참여예술’ ‘시민문화’ 같은 책들을 내는 출판사들이 많더라고요. ‘내 그림이 오히려 그런 쪽에 더 어울리지 않을까?’ ‘내가 유명해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을 위한 그림이라는 걸 이해할거야!’ ‘내 그림이 알려지면 이런 운동을 하는 사람들하고 같이 뭔가를 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그곳들에도 메일을 보냈습니다. 만만치 않은 현실을 느끼면서 실망을 하면서도 뭔가 새로운 기대를 다시 하게 되고 하는 과정이었죠. 그러면서 제 자신을 많이 다독거렸어요.

이런 출판사들은 미술전문 출판사들보다 답장은 잘 보내주더라고요. 어떤 곳은 ‘그림이 좋아서 고민을 많이 했는데, 미술 쪽은 경험이 없어서 출판하기 어렵다’고 미안함 마음이 느껴지는 답장을 보내오기도 하고, 어떤 곳은 ‘사회과학 전문 출판사인 관계로 미술 작품을 검토하고 편집할 식견을 가진 편집자가 없다’면서 돌려서 거절하기도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원고를 살펴봤지만 출판사 성격과 맞지 않는다’면서 딱 잘라 버리는 곳도 있고, 특별한 이유 설명 없이 거절하는 곳도 있었습니다. 그런 출판사만 20군데 넘게 메일을 보냈을 겁니다.

미술전문 출판사보다는 이런 진보적인 출판사들이 숫자도 훨씬 많아서 한 군데라도 손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했었는데... 교수가 거창하게 대중참여예술을 얘기하는 책은 낼 수 있지만, 저처럼 허접한 사람이 그린 그림은 책으로 만들 수 없다는 거잖아요. 결국 진보적인 출판사라고 해도 거창한 글이나 유명한 사람이 아니면 어렵다는 사실만 확인했죠.

 

잠시 기대 속에 부풀었던 꿈이 깨지니까 또 큰 벽이 앞에 있는 거예요. 시간이 지날수록 이 벽은 넘을 수가 없을 거라는 생각만 들게 되는 거죠. 내가 왜 책을 내겠다는 생각을 해서 이렇게 힘들어야 하나 싶기도 하고... 나중에는 인순이가 제 귀에 대고 ‘헛된 꿈은 독이야’라고 속삭이면서 비웃음을 짓는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이런저런 출판사들을 찾아서 메일을 보내는 일을 계속 했습니다. 오기도 생기고, 특별히 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 한 명쯤 제 손을 잡아줄 사람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고 싶기도 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직접 그림을 보내달라고 했던 출판사에도 직접 그린 그림 하나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거의 1년 동안 이렇게 기대하고 실망하고, 또 기대하고 실망하고 하면서 보냈던 거죠.

 

그러던 어느 날 직접 그림을 보냈던 출판사에서 우편물이 왔습니다. 거의 포기한 상태에서 오기로 출판사들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는데, 직접 등기우편이 오니까 다시 가슴이 설렜습니다. ‘너무 기대하지 말자’고 제 자신을 진정시켜봤지만, 한 번 뛰기 시작한 심장을 멈추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우편물을 열었더니 제가 보냈던 그림이랑 인쇄물 한 장이 들어있었습니다. 정말 손이 떨리더라고요.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청솔출판부입니다.

 

청솔을 아껴주시고 귀한 원고를 보내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먼저 답신이 무척 늦어진 점에 대해서 사과드립니다.

투고되는 원고의 양이 많아 부득이하게 시간이 경과된 점 널리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선생님의 그림을 저희 미술소위원회에서 검토하였습니다.

사람과 사물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간결하고 쉬운 표현법 등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구도나 색상, 묘사 등에서 미술적 치밀함이 더 보완되면 좋겠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공들여 그린 작품이지만, 아쉽게도 본사에서 출간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저희와는 인연이 없지만 다른 출판사에서 좋은 책으로 묶여 나오리라 기대합니다. 선생님의 소중한 작품을 출간하지 못하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며, 귀한 그림을 외람된 짧은 서신으로 돌려드리게 되어 대단히 송구합니다.

 

선생님의 건강과 건필을 기원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출판사에서 보내온 글을 편지봉투에 집어넣고는 돌려받은 그림을 들여다봤습니다. 지팡이를 집고 대문을 나서는 옆집 할머니가 저를 향해 살며시 미소를 지어보이는 그림이었습니다. 그림 속의 할머니 얼굴을 보면서 같이 미소를 지어보였는데, 그만 눈물이 흐르고 말았습니다.

휴~우~, 나이 오십이 다 되가는데 뭐 하는 짓인가 싶어요.

이제 그만 포기할까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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